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비방하고 모함하는
율법학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3,28-29)
신성모독죄와 성령모독죄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신성모독이란 하느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으로서
죄악을 하느님 탓으로 돌리거나
온갖 선(善)을 그분께 되돌리지 않는 일반적인 죄를 말합니다.
세례를 받고 살면서 다른 이들에게 말과 생각과 행동으로
죄악을 저지르고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잘못을 일컫습니다.
이런 죄는 용서받을 것이라 하십니다.
한편 성령모독죄는 성령께서 하시는 일들을 부인하고 거부하는 죄입니다.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이 성령께서 하신 일임을 알고도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합니다(3,22).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맹목적인 완고함을 용서받지 못할 죄라고 하신 것입니다.
결정적으로 하느님을 거부한 까닭이지요.
성령을 거역하는 용서받지 못할 죄는 하느님의 진리와
성령께서 하신 일을 끝까지 완고하게 거부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께서는 죄인을 변화시키는 힘이십니다.
어쩌면 죄를 뉘우치는 회개를 가능하게 하는 것도 성령의 힘일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비록 죄를 지었더라도 곧바로 뉘우치고 겸손하게 회개한다면
이는 성령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자신의 죄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며
희망을 포기하는 사람입니다.
성령의 힘을 믿지 않고 스스로 자신은 버림받았다고 자포자기하는 사람을
성령께서도 도울 수 없으므로 그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곧 죄의 구원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이야말로
성령의 도우심을 거역한 사람으로서 성령을 모독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모독한 사람도 용서하시는 자비 그 자체이신 분이십니다.
그분에겐 용서하시지 못할 죄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 편에서 그분의 자비를 의심한다면
이것이야말로 가장 용서받지 못할 죄가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거부하는 순간이 바로 성령을 모독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영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글쎄 ‘레니’라는 세 살배기 아이가 자기 앞에서 갑자기 쓰러진 아빠를 살린 것입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말도 잘 하지 못하는 아이가 어떻게 아버지를 살릴 수 있었을까요?
이 아빠가 갑자기 쓰러진 이유는 저혈당 쇼크로 인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 순간 아이는 냉장고로 가서 그 안에 있었던 요구르트를 꺼내서 아버지 입에 부었습니다.
이요구르트가 빠르게 당을 올려서 저혈당으로 쓰러진 아빠를 살린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 아이는 왜 아빠에게 요구르트를 주었을까요?
응급처치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이 아이에게 물으니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쓰러진 아빠에게 내가 가장 아끼는 것을 주고 싶었어요.”
사랑은 이렇게 사람을 살릴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미움이 가득한 곳은 어떨까요?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사람을 죽이는데 방향을 맞추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이 가득한 곳은 칭찬과 일치가 자리 잡고,
미움이 가득한 곳은 원망과 분열이 자리 잡게 됩니다.
그렇다면 내 자신이 있는 곳은 과연 어떤 곳인지를 살펴보십시오.
사랑입니까? 아니면 미움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