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1월12일 방송
어머니의 솥단지
새로 산 밥솥에서 "취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취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하는 소리가 나고,잠시 후 피~이 하는 김빠지는 소리와 함께 맛있는 밥 냄새가 시장끼를 불러 군침을 돌게 한다.
밥 냄새를 따라가면 어린시절 검은 무쇠솥에 장작불로 밥을 짓던 어머니가 떠오른다.
솥 뚜껑은 반질반질하고 깨끗해 보이지만 얼마나 오래 썻는지 무쇠솥 바닥에 구멍이 나서 물이 새는 바람에 좁쌀에 섞어 넣었던 팥과 감자를 퍼내시고는 부뚜막에 앉아서 한숨을 쉬면서 원망 어린 눈으로 밥솥을 바라보시다가, 어디서 배우셨는지 헝겊에 콩가루 반죽을 말아서 뚫어진 구멍을 메우고 밥을 짓곤 하셨
지요.
어떤 때는 막아놓은 헝겊이 쪼그라들어 물이 새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고두밥을 먹어야 했다.
솥이 낡은 것은 탓하지 않고 고두밥을 지었다고 할머니께서는 "이것도 밥이라고 지어놨나," 하시면서 늘 어머니를 마뜩잖아하셨다.
한참 뛰어놀아야 하는 어린 시절 먹을 것이 없어 늘 배가 고프던 나에게는 팥과 좁쌀이 섞인 꼬들꼬들한 고두밥이라도 고봉밥으로 배불리 먹어봤으면 했다.
그때부터 고두밥의 씹히는 촉감과 고소한 맛이 내 머릿속에 각인되어 지금도 나는 꼬들꼬들한 밥을 좋아한다.
한 해에 몇 번씩은 솥 때우는 땜쟁이 아저씨가 솥~때우소! 냄비 때우소~!
하고 소리치고 돌아다니시면 그제야 구멍 난 솥을 때울 수 있었다.
구멍난 솥 단지는 우리 집뿐만 아니었다.
솥 때우는 아저씨가 우리집 처마밑에 난전을 펴고 앉아 화덕에 숯을 담고 그 속에 조그맣고 길쭉한 종지같은 도가니 속에 쇳조각을 넣고 풍구를 돌려서 바람을 넣어주면 검은 숯은 금세 벌겋게 잉걸불로 달아오르고 도가니 속에 쇠가 녹아서 쇳물이 된다.
아이들이 신기한 듯 구경이라도 할라치면 영락없이 아저씨는 위험하다고 "멀리가서 놀아라,"고 손사레를 치셨다.
구멍 난 솥의 밑부분에 망치로 구멍을 더 크게 내고는 아래쪽에 헝겊에 무엇인가를 붙여서 대고 위에서 쇳물을 붓고 살살 문질러주면 찌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피어오르고. 구멍 났던 솥단지가 신기하게 은색으로 때워진다.
전을 펴고 솥을 때우기 시작하면 소문에 소문이 꼬리를 물고 이웃동네까지 퍼져나가서 한자리에서 2~3일을 때우기도 했다.
솥을 때우고는 돈이 없어 거의가 곡식을 퍼다 주기가 일쑤였다.
그 시절에는 쇠붙이가 무척 귀하여 조그맣고 구부러진 못이라도 그냥 버리는 법이 없었다.
장마철에 큰 물이 강을 휩쓸고 지나가고 나면 누구네집 할것 없이 바지게나 주루막을 등에 지고 강가에 나가 어느 공사장에서 떠내려 왔는지 모를 못이 잔뜩 박힌 거푸집 쪼가리들과 각목을 가져다가 장도리로 못을 빼고 바르게 펴서 못통에 담아놓고 소중하게 썼다.
기찻길로 다니다가 기차에서 떨어져 나온 쇳조각이나 철로에서 빠져나온 쇠붙이는 기찻길에서 일하는 선로수 몰래 주워다가 땅에 묻거나 감추어 두었다가 대장간에서 낫이나 호미 괭이 등 연장으로 벼러서 썻다.
쇠가 귀하던 시절, 엿장수 아저씨한테 주워놨던 고철들을 주면 고철의 무게 많큼이나 엿을 줬다.
엿 먹은 날은 영락없이 아버지께 혼줄나는 날이었다.
어떤 산골짜기에서는 6.25 사변때 군인들이 쓰던 철모가 발견되면 그걸 주워다가 화장실의 똥바가지로 이용했고 수류탄 같은 폭발물도 쇠를 분해해서 엿 사먹으려고 하다가 폭발사고로 다치거나 사망하는 사건도 빈번히 일어났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듯 한 영어가 잔뜩쓰인 빈 깡통은 점방집 돈통으로 쓰기도 했고 구걸하는 각설이들의 유일한 밥그릇이기도 했다.
부러진 바늘조차 함부로 버리지 않던 귀하디 귀한 것이 쇳조각이었다.
그 귀하고 귀하던 쇠가 지금은 어떠한가,
공사장 여기저기 벌겋게 녹슨 철근들이 나뒹굴고 빔이나 강관 등 쇠붙이가 사방으로 널부러져 있지 않는가,
우리는 지금 쇠의 풍요시대에 살고 있다.
갓 퍼온 김이 모락모락 나는 보슬보슬한 밥주발에서 어머니의 냄새가 난다
구멍 난 솥단지에서 맺혔다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오늘은 애잔한 어머니가 보고 싶어 갈쌍이는 내 눈물을 아내는 눈치채지 못하고 "여보 더우면 보일러를 꺼면 되지." 하고는 땀을 닦고 식사하라고 수건을 건네준다.
경북 영주시 단산면 단곡로 15번길 195-5
안영식 HP:010-3733-5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