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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아무래도 조용히 명상을 해야 할 듯했다.
무영은 거처를 의선각으로 옮겼다. 서하린과 모용혜도 거처를 봉황단으로 옮겼다. 이제부터 진짜 정협맹에서의 생활이 시작되는 것이다.
무영은 자신에게 배정된 방을 둘러보며 빙긋 웃었다. 꽤 마음에 드는 방이었다.
비록 침상 하나 간신히 들어갈 정도로 좁은 방이긴 했지만 나름대로 짐을 쌓아 놓을 공간도 있었다.
"짐 정리가 대충 끝나면 화각(華閣)으로 나오시오. 해야 할 일을 알려줄 테니."
무영은 뒤에서 들려오는 말에 뒤돌아 살짝 고개를 숙였다. 무영 뒤에 서 있더 사내는 약간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전각 밖으로 나가 버렸다.
무영은 그런 사내의 모습에 피식 웃고는 짐을 정리했다. 생각해 보면 이렇게 사람이 모인 단체에서 생활하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무영은 두근거리는 기대감을 안고 서둘러 전각 뒤로 향했다.
의선각에는 작은 전각들이 모여 있었다. 전각의 입구에는 현판이 붙어 있어 그곳의 역할을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무영은 화각(華閣)이란 현판이 붙은 전각으로 향했다. 화각은 약초를 다루는 곳이었다. 즉, 약초를 말려 보관하는 창고와 비슷한 장소였다.
무영은 가만히 화각에서 풍기는 약초향을 맡다가 안으로 들어섰다. 화각 안에는 다섯 사람이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약초를 말리기 위해 늘어놓는 사람도 있었고, 다듬는 사람도 있었다. 몇몇은 약초를 정성껏 빻는 중이었다.
화각 안은 정신이 없을 정도로 복잡했다. 전각을 거의 통쨰로 창고처럼 쓰는데, 여기저기 약초를 보관하는 함이 쌓여 있었다.
'휴우...... 이걸 관리하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겠군.'
무영이 그렇게 생각하며 서 있을 때, 조금 전 무영을 방으로 안내해 준 사내가 무영을 발견하고 손을 번쩍 들었다.
"빨리 왔군. 이리 오게."
사내의 부름에 무영은 그에게 다가갔다. 사내는 사람들에게 소개도 하지 않고 다짜고짜 일부터 시켰다.
"아는 것이 얼마 없다고 들었네. 그런 사람이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건 한정되어 있네. 자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마 약초를 빻거나 약을 달이는 일이 전부일 걸세."
그렇게 무영의 일이 정해졌다. 무영이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은 끈임없이 약초를 빻는 일이었다.
의선각은 정협맹이라는 무림 단체에 속한 곳이다. 당연히 그에 맞게 발전해 왔다.
정협맹은 무림인들이 모인 곳이고, 무림인들은 자주 싸우고 다치고 부상을 입는다.
외상을 입으면 금창약을 발라야 하고, 내상을 입은 경우에는 내상약을 먹고 운기조식을 해야 한다.
부상이 심한 경우는 의선각 내에 마련된 보심각(保心閣)에서 몸이 어느 정도 나아질 때까지 정양을 하며 치료 받는다.
보통 무림인의 경우 언제 어떻게 싸워 다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비상약을 항시 가지고 다녀야 한다. 금창약과 먹기 좋게 환으로 가공된 내상약을 언제나 상비한다.
의선각에서 주로 하는 일이 바로 그 약을 만드는 일이었다.
더구나 최근처럼 별다른 싸움이나 분쟁이 없는 경우에는 다쳐서 보심각에 머무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약 제조에 일이 편중되기 마련이다.
무영이 해야 할 약초 빻기는 약을 제조하는 과정에서 가장하기 싫고 귀찮고 힘든 일이었다.
내상약이나 금창약을 만들려면 약초를 아주 곱게 빻아야 하는데 그것이 그리 쉽지는 않았다.
게다가 약초 한두 뿌리를 빻는 것이 아니라 그 양이 무지막지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하루에 빻아야 할 약초는 매일 지정해 주겠네. 그 약초를 모두 빻고 남은 시간은 자유롭게 써도 좋네."
사내의 말에 무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그동안 약초를 얼마나 많이 빻아 왔는가. 그런 것쯤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자유시간까지 준다니 더할 나위 없다.
"미리 얘기를 들었을지 모르겠지만 한 달에 은자 네 냥을 지급하네."
그 말에 무영의 눈이 살짝 커졌다. 한 달에 은자 네 냥이라면 켤고 적은 돈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에 비해 단순한 일을 하면서 돈을 똑같이 받는 것이니 더 열심히 하게."
"예."
무영은 그렇게 대답하고 말린 약초가 쌓인 곳으로 향했다. 사내는 무영을 따라가 그곳에서 약초를 빻고 있던 사람들은 불렀다.
"앞으로 약초는 이 친구가 다 빻을 테니 자네들은 날 따라오게."
그 말에 약초 빻던 살마들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이곳에서 가장 힘든 일은 약초를 빻고 약을 달이는 일이었다. 그 일을 앞으로 안 해도 된다니 얼마나 기쁘겠는가.
사람들은 환한 얼굴로 무영을 쳐다봤다. 그들의 눈에는 약간이 안쓰러움과 고마움이 섞여 있었다.
"일단 오늘은 바닥에 쌓인 것만 빻으면 되네. 그럼 수고하게."
화각은 꽤 넓었는데 빻는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고 나니 대번에 썰렁해졌다.
무영은 주변을 둘러봤다. 약초를 말리는 사람과 다듬는 사람과 남았는데, 그나마도 일이 거의 끝나가는 모양이었다.
'얼마 안 있으면 이곳에 나 혼자 남겠군.'
그래도 상관없었다. 약초를 모두 빻으면 그때부터는 자유롭게 시간을 쓸 수 있다고 했으니, 게다가 돈까지 준다니 얼마나 고마운가.
"그러고 보니 약을 팔지 않고 돈을 벌어 보는 것도 처음이군."
무영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쌓인 약초의 양은 꽤 많았다. 아마 보통 사람이 한다면 혼자서 며칠은 밤을 새야 간신히 끝낼까 말까 할 정도였다.
빻아야 할 약초는 다섯 무더기로 나뉘어 있었고, 각각의 무더기 앞에는 커다란 함이 놓여 있었다. 각각 지정된 함에 약초 가루를 넣으면 되는 듯했다.
무영은 곧바로 일을 시작했다. 약초를 빻는 도구도 필요 없었다. 그저 손가락으로 비비면 끝이었다.
무영이 손을 한 번 비비면 빠직거리는 뇌기와 함께 약초 가루가 함으로 쏟아졌다.
그저 손가락으로 한 번 비볐을 뿐인데 사람이 절구로 있는 힘을 다해 오랫동안 빻는 것보다 훨씬 고운 가루가 되었다.
무영의 두 손이 정신없이 움직였다. 약초들이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쌓여갔다.
무영은 화각을 나와 의선각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앞으로 얼마나 이곳에 있을지 모르지만 꽤 오랫동안 지내야 할 곳이니 구석구석 살펴보고 싶었다.
화각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전각은 의각(醫閣)이었다. 의원들이 쓰는 곳이었다. 다치고 병든 사람을 치료하는 곳이기도 했다.
의각 옆에 보심각(保心閣)이 있었고, 의각과 보심각 뒤쪽으로 연심각(硏心閣)이라는 곳이 있었다.
"연심각? 뭐 하는 곳이지?"
무영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의선각 자체가 그리 넓지 않아 돌아보는 데 걸린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정협맹 내에 이런 의선각 같은 곳이 얼마나 더 있을지 알 수 없으니 그 규모의 대단함에 내심 놀랐다.
"저곳이 의선각이로군."
무영이 들어가 봤던 곳 중 하나다. 의선각 안에 있는 또 다른 의선각. 그곳에 의선각주 양선화의 거처와 집무실이 있었고, 양선화가 총해하는 의원과 약사 몇 명의 거처도 함께 있었다.
그리고 의선각에 소속된 무사들도 그곳에서 기거했다.
무영은 조금 더 의선각을 돌아봤다. 의선각에는 놀랍게도 작은 연무장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의선각에 속한 무사들이 무공을 수련하는 장소였다.
무영이 의선각을 한 번 살폈을 때, 누군가 무영에게 다가왔다.
"자네, 지금 여기서 뭘 하는 건가?"
무영은 고개를 돌려 화난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는 사내를 쳐다봤다. 무영에게 일과 숙소를 배정해 준 그 사람이었다. 그는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소리 높여 무영을 다그쳤다.
"설마 벌써 약초를 다 빻았을 리는 없고, 이곳의 일이 그렇게 우스워 보였단 말인가? 내가 그렇게 우스워 보였나? 정협맹은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네.
적어도 자네 같은 무지렁이가 마음대로 활개치고 돌아다닐 수 있는 곳은 아니라 말이야."
사내의 심한 말에도 무영은 그저 빙긋 웃었다.
"다 끝냈습니다. 그걸 다 하면 나머지 시간에는 뭘 하든 자유라고 하셨잖습니까."
무영의 말에 사내의 얼굴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너무나 뻔히 보이는 거짓말이라 생각해 더 화가 났다.
"지금 나와 장난을 하자는 건가?"
"제가 왜 장난을 합니까?"
무영이 그렇게 반문하자 사내가 화를 못 참고 홱 소리가 날 정도로 돌아섰다.
"따라오게! 내 직접 확인해 볼 테니!"
사내의 말에 무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의 뒤를 따랐다. 사내의 발걸음에도 화가 가득했다.
사내의 이름은 안중혁, 의선각의 총관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정확한 직책은 부각주였다.
비록 의술이나 약학에 대한 조예가 깊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무공을 익혔기에 의선각 내에서는 행세깨나 하는 사람이었다.
한중혁의 무공 수준은 의선각에 배속된 무사들과 비슷했다. 하지만 그 정도로도 충분히 대단했다.
정협맹 무사는 오대세가의 무사와 거의 비슷한 실력이다. 즉, 안중혁의 무위는 오대세가의 정예무사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런 사람이니 의선각 내에서 그를 건드릴 수 있는 자가 있을 리 없었다. 안중혁이 무서워하는 사람은 의선각주가 유일했다.
그 위에 있는 다른 사람은 마주칠 기회도 거의 없을뿐더러 마주친다 해도 대부분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이었으니까.
안중혁은 화각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화각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차피 창고처럼 쓰는 곳이다.
약초를 보관해야 하기 때문에 쾌적하긴 했지만 사람이 오래 있을 만한 곳은 못된다. 그래서 이곳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도 일이 끝나면 서둘러 밖으로 나간다.
안중혁은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그의 눈이 약초 빻는 곳에 놓인 절구들과 커다란 함으로 향했다. 근처에 약초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안중혁의 얼굴이 더욱 크게 일그러졌다.
"정말로 다 끝냈군. 즉, 대충 빻았다 이건가?"
이곳에서 빻은 약초는 금창약과 내상단을 만들기 위해 쓰인다. 곱게 빻으면 곱게 빻을수록 좋다는 뜻이다.
안중혁은 서둘러 함이 있는 곳으로 향햇다. 무영은 그 뒤를 조용히 따랐다.
함을 들여다본 안중혁의 안색이 변했다. 안중혁은 손을 넣어 함에 담긴 가루를 한 웅큼 쥐었다.
사르르.
가루가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것이 느껴졌다. 너무 부드럽고 고왔다. 안중혁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연달아 약초가 가루를 휘저었다.
혹시 함 깊은 곳에 있는 가루는 대충 빻은 것이 아닐까 해서였다.
"이럴 수가...... 정말 믿을 수가 없군."
안중혁은 나머지 함 네 개도 자세히 조사했다. 하지만 어느 것도 트집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아니, 트집이 문제가 아니라 칭찬을 해줘야 할 판이었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약초를 이렇게 곱게 빻은 적이 없었다.
"끄응......"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안중혁은 공연한 트집을 잡은 꼴이 되었다. 마땅히 사과를 해야 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의선각에서는 각주 외에 무서울 것이 없는 사람이 약초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약장수에게 고개를 숙인다는 건 상상도 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다 했군. 미리 말했던 대로 오늘은 자유롭게 보내게."
안중혁은 그 말만 남기고 휑하니 화각에서 나갔다. 무영은 약간 어이없는 눈으로 안중혁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화각에서 나갔다.
무영이 의선각에 들어온 지 사흘이 지났다. 무영의 하루 일과는 너무나 단순했다. 일단 아침 일찍 일어나 식사를 하고 나면 빻아야 할 약초를 전달받는다.
빻아야 할 약초의 종류는 매일 다르다. 어느 날은 수십 종류나 되는 약초를 빻아야 할 때도 있었다. 물론 전부 합한 양은 다 비슷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며칠 동안 밤을 새도 모자랄 일이었지만 무영은 그저 한두 시진 손가락을 비비는 것으로 모든 일을 끝냈다.
그 이후는 할 일이 없었다. 무영은 점심을 먹기 전까지 침상에 앉아 명상을 했고, 식사 후 봉황단에 찾아갔다.
봉황단에는 서하린과 모용혜가 있다. 두 여인은 언제나 무영을 반겼다. 하지만 그녀들 역시 그 안에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대부분은 무공 수련이었지만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일을 배워야 했다.
그렇게 며칠 더 지나갔다.
의선각주 양선화는 연심각 최상층에서 봉황단에 보내야 할 약을 점검하고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의선각에서는 정협맹의 무력단체에 약을 공급하게 되어 있었다.
정협맹에는 수많은 무사단이 존재하는데 한 달에 한 번씩 그들 중 하나는 전원 내상약 하나와 약간의 금창약을 받을 수 있었다.
사실 의선각의 임무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의선각에서 만드는 내상약과 금창약은 효과가 꽤 뛰어났다. 약왕문에서 흘러나온 비전을 섞어 만들었으니 당연했다.
사실 효과가 뛰어난 내상약이라는 것 자체가 보기 드물었다. 내상은 몸 내부의 기운이 뒤흔들려서 생기는 것이다.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인간 몸에 흐르는 기에 대해서 꿰뚫어야 한다. 그것을 고작 단환 하나로 조절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양선화는 나무로 만든 함에 가지런히 담겨 있는 내상약을 하나하나 들어 유심히 살폈다.
"이번 호심단은 상당히 뛰아나군요. 복용해 보지 않으면 확실히 알 수는 없겠지만 보기에도 대단해 보여요."
양선화의 말에 안중혁이 자부심 어린 눈으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벌써 호심단을 만들기 시작한 지도 삼 년이 넘지 않았습니까."
"하긴 그렇긴 하죠. 그나저나 약초의 배합을 다르게 한 건 아니겠죠?"
그 말에 안중혁이 세차게 손사래를 쳤다.
"그럴 리 있겠습니까. 이건 정협맹 무사들의 목숨이 걸린 일입니다. 절대 허투루 처리하지 않았으니 안심하십시오."
양선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호심단을 다시 함에 넣었다.
"이대로 봉황단에 보내도 되겠네요. 바로 처리하세요."
"알겠습니다."
안중혁은 공손히 허리 숙여 인사한 후, 함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호심단을 무사단에게 넘겨주는 일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이것만은 절대 다른 사람에게 넘길 수 없었다.
'게다가 이번 달은 봉황단이란 말이지.'
봉황단은 정협맹에서 유일하게 모든 단원이 여자인 곳이다. 정협맹에서 굳이 봉황단을 만든 이유는 남자들과 섞어 놓기 꺼려지는 여인들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오대세가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여인이 정협맹으로 오는 경우 절대 남자들과 섞을 수 없다. 자칫 불미스러운 일이라도 벌어지면 정말로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모가 상당한 여인들이 경우에도 본인이 특별히 원하는 곳이 없다면 봉황단으로 배속된다. 이것 역시 불미스러운 사고를 막기 위함이었다.
그 외에도 몇 가지 이유가 더 있지만 봉황단의 대부분은 위의 두 가지에 해당하는 여인들이었다.
즉, 봉황단은 아름답고 배경이 뛰어난 여인들이 모임이었다. 이 중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잡을 수 있다면 팔자 피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적어도 안중혁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한껏 들뜬 표정을 지은 채 봉황단으로 향했다.
안중혁이 사라지자 양선화는 흥미로운 얼굴로 조금 전 살폈던 호심단들을 떠올렸다.
"삼 년이나 지나서 익숙해졌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오늘 그녀가 확인한 호심단은 정말로 뛰어났다. 얼마나 대단했느냐 하면, 약왕문에서 만든 호심단에 근접할 정도였다.
의선각에서 만드는 호심단은 약왕문 비전의 호심단에서 주요 재료 몇 가지를 빼고 만든 것이었다. 빠진 주요 재료 중에는 귀한 약재도 있고, 흔한 약재도 있었다.
그 중 한두 가지만 추가해도 약효가 상당히 늘어날 것이다.
양선화는 약왕문에서도 재능을 꽤 인정받은 문도였다. 약왕문 비전의 심법을 익히면 약이나 약초에서 흘러나오는 기의 흐름을 읽어낼 수 있다.
그것은 약이 제대로 만들어졌는지 파악하는데 큰 위력을 발휘한다.
물론 이곳 의선각에서는 그런 실력을 완전히 감췄다. 알려져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대체 어덯게 알아낼 거지?"
의선각에서 호심단을 만들고 다양한 약을 연구한 곳은 연심각이다.
연심각의 운영은 전적으로 안중혁이 맡고 있다. 원칙대로 하자면 양선화가 그것을 맡아야 하지만 그녀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지금 이렇게 의선각에서 일을 하고 있는 것도 약왕문에서 내린 징계의 일종이었다. 굳이 의선각의 수준을 올려줄 필요가 없었다. 그것은 약왕문에서도 미리 지시를 받은 내용이었다.
그리고 가장 적절한 수준이 바로 지난달에 만든 호심단이었다.
"약재를 알아낼 것이 분명해. 아니지. 약재를 알아내는 것만으로 그렇게까지 효능을 높일 수는 없어. 이건 틀림없이 배합 비율까지 알아낼 거야."
양선화는 그것을 믿기 어려웠다. 하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안중혁이 무슨 수를 섰는지 모르지만 빠진 약재와 그 배합 비율을 거의 진짜 호심단에 근접할 정도로 알아낸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오늘 확인한 그런 호심단을 만들어낼 수 없을 테니까.
'설마 약왕문에서?'
약왕문에서 알려줬다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약왕문에서 굳이 그럴 이유가 없다. 호심단은 약왕문이 무림문파들에게 있는 생색 없는 생색 다 내며 파는 내상약이었다.
그런 내상약의 제조 비법을 유출시킬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양선화의 눈이 빛났다. 약왕문에서 일부러 유출시킨 게 아니라면 누군가 약왕문 몰래 유출시켰다는 뜻이다. 즉, 약왕문 내에 배신자가 있다는 뜻이었다.
양선화는 고개를 저었다. 약왕문은 문도 수가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문도들은 모두 끈끈한 정으로 엮여 있다. 함부로 배신하는 사람이 나을 리가 없었다.
만일 그 중 누군가가 배신을 했다면 정말로 가슴이 아플 것이다.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그건 절대 아니야. 하지만 정말로 이상하네."
양선화는 고민에 빠졌다. 그만큼 오늘 그녀가 확인한 호심단은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양선화가 아무리 고민을 해도 호심단의 효능이 갑자기 늘어난 것이 모두 무영이라는 신입 약사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는 없었다.
양선화에게 충격을 안겨준 장본인인 무영은 오늘도 약초 더미 앞에 앉아 그것을 곱게 빻고 있었다.
최근 며칠 동안 무영은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약초만 빻았다. 덕분에 약초를 모두 빻은 다음에도 한참 동안이나 약초 빻기에 대한 생각이 뇌리에 맴돌았다.
신선단은 세 가지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며, 그 과정들은 모두 특별하다.
첫 번째 과정인 채집은 약초에 많은 기운이 내포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하기 위해 중요한 것이 바로 정성이었다.
온 정성을 다해 약초를 뽑으면 땅속에 있는 기운과 하늘에 흩어져 있는 기운이 약초로 빨려들어 온다.
그래서 훨씬 많은 기운을 내포하게 되는 것이다. 무영의 스승은 이걸 정성으로 기운을 뽑아내는 거라고 종종 언급했다.
두 번째 과정은 그렇게 많은 기운이 담긴 약초를 정제하는 일이다. 약초를 말리고 가루로 만드는 과정에서 약초에 담긴 기운을 깨끗하게 만든다.
약초에 포함된 불순한 기운을 없애서 맑은 기운을 담은 재료를 만드는 과정이다.
세 번째 과정은 그렇게 만들어진 재료로 약을 만드는 것이다.
사실 엄밀히 말하며 첫 번째와 두 번째 과정을 겪고 나면 약효가 거의 완성된다. 그렇다고 세 번째 과정을 빼놓을 수는 없다. 이 과정이 빠지면 약간의 부작용이 생기기 때문이다.
세 번째 과정은 두 가지로 구성되는데, 하나는 재료에 담긴 기운을 중첩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약에 담긴 기운을 부드럽게 순화시키는 것이다.
서가장이나 유가장에서 무영이 사용한 신선단과 신선고가 무사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준 이유가 바로 기운을 순환시키지 못해서였다.
순환되지 않은 기운은 거칠게 몸을 유린하고, 상처나 병을 고치긴 하지만 그와 함께 고통을 안겨준다.
비록 고통스럽긴 하지만 약효는 뛰어나다. 그래서 짧은 시간에 만든 약이었지만 큰 효과를 본 것이다.
신선단은 연단 기간이 길면 길수록 효과가 좋아진다.
기운을 중첩시키기 때문이다. 무영이 서하린에게 준 신선단이나 예전 소소의 병을 고치기 위해 쓴 신선단은 이런 중척의 과정을 상당히 많이 거친 약이었다.
무영은 이 모든 과정을 차례차례 행한다. 지금처럼 한 가지만 계속해서 며칠씩이나 반복한 적은 없었다.
게다가 세 번째 과정인 연단도 아니고 두 번째인 정제였다. 두 번째 과정은 세 과정 중 필요한 시간이 가장 적었다. 더구나 그것은 무영이 원래 가지고 있는 능력이었다.
그런 일을 며칠째 계속하고 있으니 한편으로는 지루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과연 제대로 정제를 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빠지직.
무영의 손에서 뇌기가 튀었고, 약초가 가루로 변해 아래로 쏟아졌다. 그저 한순간이었다. 무영은 이것을 스승님께 배운 이후로 언제나 이렇게 했다. 아무런 고민도 하지 않고.
'이게 과연 옳은 방법일까?'
무영은 지금까지 자신에게 부족한 게 있다면 마지막 연단의 과정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막 들었다.
빠지직!
무영은 마지막 남은 약초를 그렇게 가루로 만든 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오늘은 조용히 명상을 해야 할 듯했다.
봉황단은 스물두 명으로 이루어진 무산단이었다. 모두 여자로 구성되어 있기에 실제로는 정협맹에서도 크게 뭔가를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대우는 다른 무사단과 똑같이 해야 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오늘 있을 호심단의 지금이었다.
봉환단주 악미령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눈앞에 앉아 있는 안중혁을 쳐다봤다. 안중혁은 약간 느물거리는 웃음을 머금고 있어 계속 악미령의 심기를 자극했다.
"이것이 호심단입니다."
안중혁은 커다란 함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는 호심단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악미령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녀가 봉황단주가 되어 처음 지급받는 호심단이었다.
봉황단의 역사는 짧았다. 그리고 단원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나마 최근 정협맹이 크게 확장을 하면서 조금 인원이 늘어났지 그 전에는 열 명을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전임 봉황단주는 정협맹에서 나가 본가로 돌아갔고, 악미령이 그 뒤를 이은 것이다.
"수고하셨어요."
악미령은 함의 뚜껑을 닫고 고개를 들어 안중혁을 쳐다봤다.
"볼일이 남으셨나요?"
악미령의 말에 안중혁이 약간 당황했다. 호심단을 전달하면 약간의 수고비를 챙겨 주는 것이 관례였다. 한데 악미령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게다가 안중혁은 수고비 외에 약간의 흑심도 품고 왔으니 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전임 단주는 언제나 봉황단 사람들과 안중혁이 함께하는 간단한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아, 그, 그건 아니지만......"
"그럼 전 바빠서 이만."
악미령은 함을 들고 방에서 나갔다. 안중혁은 당황하며 그녀의 뒷모습을 멍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녀가 사라지자 안중혁의 얼굴이 있는 대로 일그러졌다.
"끄응...... 이건 좀 건 곤란한데."
안중혁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일단 의선각으로 돌아가야 했다. 더 이상 이곳에서 할 일이 없었으니까.
물론 오늘 받은 모욕의 대가는 반드시 치르게 할 것이다. 의선각은 평소에는 있으나마나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없으면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이 많다.
안중혁은 봉황단주에게 어떻게 복수를 할지 고민하여 의선각으로 향했다.
악미령은 자신의 집무실로 와서 함을 다시 열었다. 일단 이것을 당원들에게 분배해야 했다.
"그런데 수가 좀 많네?"
함에 들어 있는 호심단의 개수는 오십 개에 달했다. 사실 원칙대로라면 봉황단에 지급되는 호심단은 스물두 개라야 한다. 하지만 안중혁의 재량에 따라 오십 개까지는 충분히 공급이 가능했다.
안중혁은 오늘 어차피 괜찮은 대접을 받을 거라 예상하고 알아서 호심단을 넉넉하게 챙겼다.
"두 개씩 돌리고도 여섯 개가 남네."
악미령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결정을 내렸다. 단원들에게 하나씩 지급하고 나머지는 몽땅 자신이 차지하기로. 호심단 같은 내상약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 테니까.
안중혁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이럴 줄 알았다면 호심단을 그렇게 많이 준비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려 오십 개나 갖다 바쳤는데 아무런 대가도 받지 못한 것이 못내 억울했다.
"으드득. 두고 보자."
안중혁은 이리저리 머리를 굴렸다. 봉황단을 곤란에 빠뜨리는 것 정도는 간단한 일이었다.
"문제는 시기를 잘 맞춰야 한다는 거지. 각주님이 계시면 곤란해. 그럼 사흘 후 쯤이 괜찮겠군."
양선화는 이틀 후에 개인적인 볼일을 위한 출타가 예정되어 있었다. 적어도 닷새는 걸릴 일이라 하니 그때 일을 벌이면 충분했다.
"좋아, 두고 보자고."
서하린과 모용혜는 봉황단에 빠르게 적응했다. 인원도 그리 많지 않은데다가 다들 두 사람을 따뜻하게 대해줘서 순식간에 친해질 수 있었다.
게다가 봉황단은 무공수련과 정협맹의 기본적인 업무에 대한 교육을 제외하면 따로 해야 할 일이 전혀 없었다.
보통의 무사단은 정협맹 내의 순찰부터 시작해 무한 전체의 안전까지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상당히 일이 많은 편이었다.하지만 봉황단은 그 모든 것이 면제였다.
서하린과 모용혜는 자신들에게 주어진 시간 중 절반은 무공수련에 나머지 절반은 무영과 함게하는 데 투자했다.
하지만 최근 두 여인은 무영을 만나지 못해 대부분의 시간을 무공을 수련하며 보냈다.
"오늘로 벌써 사흘째네."
서하린이 푸념하듯 중얼거리자 모용혜가 옆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러게. 그래도 앞으로 나흘만 있으면 오신다고 햇으니까."
무영은 얼마 전 얻은 새로운 깨달음의 실마리를 놓치고 싫지 않아 의선각에 틀어박혀 수련을 하겠다고 두 여인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무려 이레 동안이나 그렇게 하겠다고 했으니 모용혜와 서하린이 한숨을 내쉬는 것도 당연했다.
물론 그 칠 일이라는 것도 얼굴을 한 번 비치겠다는 뜻이고 그때까지 제대로 풀리지 않으면 얼마나 더 늘어나게 될지 무영도 장담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그나저나 아직 점심을 먹으려면 멀었나......."
모용혜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하늘을 쳐다봤다. 아직 해가 중천에 오려면 한참이나 더 있어야 할 듯했다.
"그런데 속이 좀 안 좋네."
서하린의 말에 모용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도?"
서하린의 눈도 동그래졌다.
"그럼 너도?"
두 여인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심상치 않은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녀들이 있는 곳은 봉황단의 연무장이었다. 오전에는 반드시 수련을 해야 하기 때문에 모든 봉황단원들이 모여 있었다.
단주인 악미령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데 모든 봉황단원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점점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녀들 역시 마찬가지의 상황인 듯했다.
그나마 서하린이나 모용혜는 나은 편이었다. 아무래도 내력이 강한 사람은 좀 덜한 모양이었다.
웬만한 배앓이라면 측간에 다녀오면 해결될 테지만 지금 그녀들을 덮친 배앓이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명치와 배꼽 사이를 칼로 찌르는 듯한 고통이었다.
"이렇게 단체로 배앓이를 할 수 있나?"
"설마 오늘 아침이 잘못된 건 아니겠지?"
모용혜와 서하린은 서로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것이 가장 가능성이 높았다. 배에 오는 통증이 조금씩 강해지고 있었다.
"아흑......"
"하아악......."
연무장 여기저기에 여인들이 주정낮으며 야릇한 신음을 흘렸다. 그녀들은 이미 참기 어려울 정도로 배가 아픈 것이다.
악미령 또한 다르지 않았다. 실제로 악미령의 내력은 모용혜나 서하린보다 못했다. 당연히 증상도 그녀들보다 심각했다.
"흐윽, 의, 의선각으로! 어서 의선각으로 이동해!"
악미령의 외침에 봉황단 전체가 조심스럽게 이동을 시작했다.
"헛!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악미령은 놀란 눈으로 호들갑을 떠는 안중혁을 바라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통증이 점점 심해져서 이제는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보, 봉황단 전체가 아픕니다. 어, 어서 치료를......!"
악미령은 간신히 그렇데 말했다. 안중혁은 여전히 호들갑을 떨며 봉황단을 의선각 안으로 들였다.
"자, 어, 어서 저쪽 보심각으로 가시지요!"
보심각은 환자가 머무는 곳이었다. 긴 치유기간이 필요할 듯한 환자라면 보심각으로 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악미령은 고통으로 정신이 흐릿한 와중에도 어렴풋이 그것을 기억해냈다.
'설마 심상치 않은 병인가......'
내심 걱정이 됐지만 지금은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봉황단 전체가 보심각으로 들어갔다.
안중혁의 눈이 봉황단을 이끌고 천천히 움직이는 악미령을 향했다. 그의 얼굴에 비웃음이 얼핏 스치고 지나갔다.
봉황단은 보심각에서 가장 큰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수십 개의 침상이 두 줄로 나란히 놓여 있었는데, 봉황단이 모두 침상에 눕자 절반이 차 버렸다.
"흐으윽......"
"하아악......"
방 안이 온통 신음소리로 가득 찼다. 안중혁은 그 모습을 의미심장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단 의원을 데리고 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안중혁은 그렇게 말하고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 봉황단은 안중혁이 사라지자 이제나 저제나 의원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모용혜와 서하린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증상이 비교적 가벼웠다. 덕분에 다른 사람들처럼 침상을 뒹굴며 신음을 흘릴 필요가 없었다.
"아무래도 좀 이상하지?"
서하린의 말에 모용혜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해. 갑자기 봉황단 전체가 이 지경이 되다니. 마치 단체로 독에 당하기라도 한 것 같잖아."
모용혜의 말에 서하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모용혜는 서하린의 얼굴을 보며 상황에 맞지 않았지만 그 귀여움에 속으로 감탄했다.
"설마......!"
"가능성이야 있지. 하지만 대체 누가 감히 정협맹에 들어와 독을 풀 수 있지?"
"정협맹에 위해를 가할 자들이라면...... 흑사맹?"
현재 흑사맹과 정협맹의 관계는 살얼음판이었다. 조금만 충격이 가해져도 전쟁이 벌어질 판이었다.
흑사맹이 낙양 유가장을 괴멸시키는 과정에서 오대세가의 자제들과 현재 정협맹에 속한 몇몇 무가의 자제들이 봉변을 당했기 때문에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정협맹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 게다가 왜 하필이면 봉황단이지? 솔직히 말해서 맹에서 가장 쓸모없는 집단이잖아."
모용혜의 말은 신랄했다. 그리고 서하린은 그 신랄한 말에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녀 역시 인정하는 바였다.
"어쨌든 의원이 오면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겠지."
두 여인은 봉황단 사람들과 함께 의원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반 시진이 지났다.
봉황단이 누워 있는 방에는 신음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녀들의 복통이 더 심해졌기 때문이다. 그즈음 모용혜와 서하린도 조금씩 통증이 심해지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참을만했다.
"괴로워."
서하린의 말에 모용혜도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왜 의원이 안 오는 거지?"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지났을 때, 한 사람이 방으로 들어섰다.
"헉! 이, 이렇게나 많은 환자를 나 혼자서 어떻게.......!"
모용혜가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 젊은 의원이었는데,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뭐 하고 있는 거예요? 어서 진맥을 시작하세요!"
모용혜가 보다 못해 소리치자 의워이 황급히 움직였다. 의원은 방 안을 한 번 쭉 훑어본 후 서하린을 향해 걸어갔다.
"우, 우선 소저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의원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서하린의 미모가 너무 뛰어나 지신도 모르게 서하린에게 온 것이다.
서하린은 그 말에 아미를 살짝 찌푸렸다.
"저보다 더 급한 사람들이 보이지 않으세요? 일단 저분부터 시작하는게 어때요? 전 아직은 참을 만하거든요."
서하린의 말에 의원이 크게 당황해 허둥거렸다.
"아, 그, 그렇군요. 예, 아, 알겠습니다."
의원은 서하린의 손가락이 가라키는 곳에 있는 여인을 향해 서둘러 움직였다. 그리고 그녀의 손목을 잡고 진맥을 시작했다.
모용혜와 서하린은 그 모습에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하아, 아무래도 힘들 것 같지?"
"의선각에 원래 이렇게 의원이 없어? 의선각주가 약왕문 출신이라고 하지 않았나?"
서하린이 투덜거릴 때, 막 방으로 들어온 사람이 또 있었다. 안중혁이었다.
안중혁은 빙긋 웃으며 서하린의 말을 들었다는 듯 대답했다.
"각주님께서는 출타하셨습니다. 아마 며칠 후에야 돌아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의선각의 의원들은 대부분 바빠서 시간을 낼 수 없답니다."
안중혁은 그렇게 말하며 서하린을 똑바로 쳐다봤다. 정말로 놀라운 미모였다.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만일 자신이 호심단을 가져갔을 때, 서하린이 봉황단주와 함께 있었다면 이런 일을 벌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저도 그리 능숙하지는 않지만 약간의 의술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소저를 진맥해 드려도 될까요?"
안중혁의 얼굴이 떠오른 느끼한 미소에 서하린은 인상을 찌푸렸다.
"급한 분들 먼저 하시죠. 전 아직 괜찮거든요."
서하린의 말에 안중혁이 고개를 저었다.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고통이 덜하다고 몸이 덜 병들었다고 생각하시면 오산입니다. 오히려 병은 더 클 수도 있으니까요."
안중혁은 다짜고짜 서하린에게 다가가 손목을 잡으려 했다. 서하린은 안중혁의 행동에 눈을 살짝 치켜뜨며 손을 슬쩍 피했다.
"이게 무슨 짓이요?"
"아, 그저 호의입니다. 소저처럼 아름다운 분이 병으로 고통 받는 것을 원치 않아서요."
안중혁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서하린의 표정을 보니 그냥 밀어붙인다고 될 일도 아닌 듯해서 일단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럼 잠시 후에 다시 오겠습니다."
안중혁은 그 말을 남기고 땀을 뻘뻘 흘리며 진맥을 하고 있는 젊은 의워에게 다가갔다.
"어떤가?"
"그게...... 잘 모르겠습니다. 증상이...... 일반적인 배앓이와는 많이 다른 듯합니다."
의원의 말에 안중혁이 나직이 혀를 찼다.
"쯧쯧, 그런가? 어디 내가 한 번 보지."
안중혁은 그렇게 말하며 의원 근처에 있는 한 사람에게 다가갔다. 처음 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찾은 사람인 봉황단주 악미령이었다.
"단주님, 괜찮으십니까?"
악미령은 안중혁의 말에 희미해지는 정신을 다잡았다.
"아, 부, 부각주님이시군요."
"손을 내밀이 보십시오."
악미령이 손을 내밀자 안중혁이 손목을 잡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누가 봐도 숙련된 의원이 진맥하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잠시 진맥을 하던 안중혁이 눈을 번쩍 뜨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별것 아닙니다. 그저 장이 조금 놀란 모양입니다. 약을 먹고 하루쯤 푹 주무시면 나을 겁니다."
안중혁의 말에 악미령이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다행이군요. 감사드려요."
"의당 해야 할 일입니다. 한데, 약을 만드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립니다. 그동안은 좀 참고 계셔야겠습니다."
"그, 그야 당연히......"
악미령은 그렇게 대단하다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의 눈에 안중혁의 얼굴이 보였다. 미미한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는데, 왠지 그것이 비웃음처럼 느껴졌다.
'그럴리가. 안 부각주는 의원인데.'
의원이 환자를 보고 비웃을 리가 없었다. 악미령은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배를 쥐어짜는 듯한 통증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안중혁은 몇몇 사람들의 손목을 잡고 진맥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비슷한 증상인 듯하군요. 약을 지어 오겠습니다."
안중혁은 그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서하린은 결국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아무래도 찾아봐야겠어."
모용혜도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나머지 봉황단은 지금 정신도 제대로 못 차리고 있었다.
"하아, 정말 심각하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오라버니라도 만나면 좋겠는데."
서하린의 말에 모용혜가 고개를 저었다.
"공자님은 지금 중요한 시기인 것 같아. 그러니 공자님 모르게 처리하는 게 나을 거야."
서하린은 속으로 한숨지었다. 모용혜의 말이 옳다. 만일 정말로 중요한 순간을 자신 때문에 놓치게 된다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이다.
두 여인은 방에서 나갔다. 복도를 따라 보심각을 나오자 여기저기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 안중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걱정할 것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모용혜와 서하린은 서로를 한 번 쳐다본 후 은밀하게 몸을 움직여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안중혁과 대화하고 있는 사람은 아까 함께 진맥을 하던 젊은 의원이었다.
"하지만......"
"책임은 내가 진다. 넌 그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저들이 의술에 대해 뭘 알겠느냐? 그리고 약을 만드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냐?"
의원은 체념한 듯 고개를 숙였다.
"다들 고통이 심하신 것 같던데......"
"걱정하지 마라. 죽지는 않아. 시간이 지나면 내공이 약간 손실될 수도 있지만 그건 내 알바 아니고."
그 말에 의원이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한, 한데도 고작 두 명 분의 약밖에 안 만드셨단 말씀이십니까?"
"허어, 이렇게 답답할 데가, 약을 만드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느냐."
"하지만 다른 의원과 약사들을 동원하면......"
안중혁의 눈이 스산해졌다.
"정녕 일을 그르칠 셈이냐? 이대로 가면 저들이 우리 의선각을 얼마나 우습게 여기겠느냐.
이번에도 내가 얼마나 무시를 당했는지 아느냐? 부각주인 나를 그리 대할진대, 일개 의원인 너는 얼마나 무시하겠느냐. 저들이 눈에 너나 나는 그저 버러지일 뿐이다."
안중혁의 말에 의원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후우, 내가 너무 흥분했구나. 잘 들어라. 이건 기회다.
우리 의선각을 저들의 뇌리에 똑똑히 새길 수 있는 기회란 말이다. 앞으로 더 이상 저들은 우리 의원들을 무시하지 못할 게다."
의원은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물론 안중혁의 말을 거역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다만 약간 안타까울 뿐이었다. 무인들이 의원들을 약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후우....... 알겠습니다."'
안중혁은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의원은 돌아서서 보심각을 향했다.
서하린과 모용혜는 그 말을 모두 엿듣고는 놀란 얼굴을 했다.
"아무래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은데?"
"하지만 우리가 뭘 어떻게 하지? 힘으로 핍박해서 약을 받아내는 건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약을 제대로 만들지도 확신할 수 없고."
두 여인은 서로 바라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역시 공자님밖에......"
"역시 오라버니밖에......"
동시에 나온 말에 두 여인이 어색하게 웃었다. 결국 무영을 불러야 할 듯했다.
두 여인은 은밀히 의선각을 뒤지고 다녔다.
이곳에서 와 본적이 없으니 무영이 어디서 일을 하는지, 또 어디에 묵는지 전혀 몰랐다. 당연히 찾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오라버니가 지금 뭘 하고 계신 거지?"
"글쎄......."
두 여인이 무영을 찾은 것은 의선각에서도 상당히 후미진 곳이었다. 사람이 전혀 다니지 않을뿐더러 전각과 전각 틈에 있었기 때문에 잘 보이지도 않았다.
무영은 그곳에서 커다란 바위를 끌어안고 있었다.
두 여인은 약간 불안한 얼굴로 무영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오, 오라버니?"
"고, 공자님......"
무영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얼굴에 어색한 미소를 짓고서.
"여긴 또 웬일이야?"
어색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던 무영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무영에게서 풍기는 분위기가 갑자기 변하자 두 여인은 당황하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왜, 왜 그러세요?"
서하린이 묻자 무영은 무서운 얼굴로 손짓했다.
"둘 다 이리와 봐."
무영의 말에 서하린과 모용혜는 주춤주춤 걸어갔다. 그리고 마침 그때 복통이 심해졌다.
"윽!"
"흐윽!"
두 여인이 동시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물론 주저앉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프긴 했지만 아직은 견딜 만했다.
"역시."
무영은 그렇게 말하며 품에서 신선단 두 개를 꺼냈다.
모용혜와 서하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영의 손에 놓인 신선단을 바라봤다.
"하나씩 먹어."
무영의 말에 두 여인은 각각 신선단을 집어 입에 넣었다. 향긋한 향이 입안에 퍼지며 신선단이 스르륵 녹아 목을 넘어갔다.
목에서부터 시작한 청령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져나가자 두 여인의 표정이 황홀하게 변했다.
무영은 두 여인을 향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참을 필요 없어."
무영의 말에 두 여인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챘다. 순식간에 얼굴이 새빨개진 두 여인은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경공을 펼치며 사라졌다.
잠시 후, 여전히 붉은 기가 맴도는 얼굴로 돌아온 두 여인이 무영에게 곱게 눈을 흘겼다.
"너무해요, 오라버니. 미리 말씀해 주시지."
"그러게요. 정말 깜짝 놀랐잖아요."
두 여인의 말에도 무영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뭐가?"
무영의 대꾸에 서하린과 모용혜는 얼굴이 더 빨개졌다.
"아이, 정말......"
"몰라요."
무영은 두 여인의 귀여운 모습에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악미령은 식음땀이 흐르는 이마를 소매를 훔쳐냈다. 약을 먹고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완전하지 않았다. 아직도 복통이 만만치 않았다. 다만 지금은 참을 수 있을 정도였다.
"대체 얼마나 더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거지?"
악미령은 눈살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지금 방에서 멀쩡한 사람은 딱 두 명이었다. 그나마도 완벽하게 멀쩡한 건 아니었다. 상태를 보아하니 언제 다시 재발할지 몰라 불안하기 그지었었다.
"고작 두 명 분이라니, 지금 날 놀리는 건 아니겠지?"
악미령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시 한 번 단원들을 둘러봤다.
"응?"
두 명이 모자랐다. 봉황단은 자신을 포함해서 스물두 명이다. 한데 지금 방에는 스무 명밖에 없었다. 악미령은 대체 누가 빠졌는지 확인해 봤다.
"모용혜와 서하린이군."
악미령의 아미가 살짝 휘었다. 모용혜도, 서하린도 그녀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서하린의 경우, 지나치게 아름다운 외모 때문에 질투가 나기도 했고 보통 그렇게 미모가 뛰어난 사람의 경우 노력을 잘하지 않는다는 선입견도 가지고 있었다.
모용혜의 경우는 오대세가에서 온 사람이라는 반감과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일지 모른다는 자격지심 때문에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중요한 시기에......"
악미령은 그렇게 중얼거리다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조금 전 약을 먹지 않았다면 제대로 움직일 수조차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지금 눈에 보이는 다른 단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 방안은 신음소리로 가득했다.
그런데 모용혜와 서하린은 대체 어떻게 움직일 수 있단 말인가.
"설마 아프지 않은 건가?"
악미령의 뇌리에 의심 한 조각이 틀어박혔을 때, 서하린과 모용혜가 방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무영이 천천히 그녀들을 따라 들어왔다.
악미령은 두 여인을 보자마자 약간 큰 소리로 말했다.
"대체 어디 갔다 오는 거지? 지금 이 상황이 보이지 않아?"
악미령의 말에 모용혜가 나섰다.
"상황을 아니까 나갔죠. 모든 사태를 해결할 방도를 찾아왔어요."
모용혜의 말에 악미령이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이내 모용혜와 서하린 뒤에 서 있는 무영을 쳐다봤다.
'저자는 누구지? 의원인가?'
악미령이 그럻게 생각하고 있을 때, 방으로 또 다른 사람이 들어왔다. 안중혁과 젊은 의원이었다.
안중혁은 문 옆에 서 있는 무영을 비롯한 서하린, 모용혜를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안중혁의 정신이 온통 악미령에게 향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디, 몸은 좀 어떻습니까?"
안중혁의 느물느물한 말에 악미령이 아미를 살짝 찌푸렸다.
"덕분에 조금 나아졌어요. 약은 가져오셨나요?"
안중혁은 빙긋 웃으며 손에 든 약을 보여줫다. 손다닥에 작은 단환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악미령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또 두 개뿐이로군요."
"만들기가 쉽지 않은 거라서 말입니다."
악미령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원하는 게 뭐죠?"
악미령의 말에 안중혁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 수가 없군요. 제가 원하는 거야 이곳 의선각에 오시는 모든 분들의 건강이지요."
"후우, 그렇군요. 알겠어요. 나중에 다시 얘기하도록 하죠. 그러니 이제 슬슬 약을 좀 더 가져다주시겠어요?"
안중혁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돌아선 안중혁의 눈에 무영이 보였다. 그리고 무영 옆에 서 있는 서하린과 모용혜의 모습도 보였다.
순간 안중혁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서하린과 모용혜가 각각 무영의 팔을 한 쪽씩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네는 왜 여기 있는 건가? 약초는 다 빻았나?"
무영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초 빻기가 끝났다는 것은 안중혁도 알고 있다. 굳이 이렇게 말을 꺼내는 이유는 무영을 조금 더 무시해주기 위해서였다.
"약초 빻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대체 여긴 왜 온 건가? 할 일이 없으면 다른 바쁜 사람들의 잔심부름이라도 해주게."
안중혁의 말에 모용혜와 서하린의 표정이 변했다. 두 여인은 무영이 받은 모욕을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안중혁은 그녀들의 표정이 변한 이유가 무영에 대해서 제대로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왜 우리 오라버니를 무시하는 거죠? 오라버니께서는 이분들을 고쳐주기 위해 오셨어요."
서하린이 너서서 말하자 안중혁이 잠시 의외라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얼굴에 비웃음을 가득 채웠다.
"호오, 그것 참 대단하군요. 대체 무슨 방법으로 치료하겠다는건지 몰라도 제가 허락할 수 없습니다. 아무런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함부로 환자를 맡길 수는 없으니까요."
안중혁은 그렇게 말하며 은근한 눈으로 서하린을 바라봤다.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보면 볼수록 그 미모에 빠져들었다. 맹세코 이런 여인은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다.
서하린 역시 안중혁의 눈빛이 뭘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남자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으니까.
서하린이 불쾌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도 오라버니 덕분에 깨끗이 나았는 걸요."
안중혁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이건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믿을 수 없었다.
무영이 무슨 수로 병을 고친단 말인가. 지금 봉황단이 앓는 이유는 사실 병 때문이 아니라 독 때문이었다.그것도 아주 은밀하고 지독한 독이었다.
"그 말씀에 책임을 지실 수 있습니까?"
안중혁은 서하린이 말을 지어냈다고 여겼다. 그래서 조금 더 강력하게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물론이에요."
"그럼 만일 이자가 못 고치면 어쩌시겠습니까?"
"뭐든 들어드리죠."
서하린의 말에 안중혁의 눈이 음흉한 빛을 흘렸다.
"좋습니다. 그 말씀 절대 번복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번복 안 해요."
서하린의 자신만만한 말에 안중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중혁이 고개를 갸웃거릴 때, 서하린이 말을 이었다.
"그럼 당신이 지면 뭘 해주실 건가요?"
안중혁은 그제야 속으로 음흉하게 웃었다. 자신에게 부담을 줘서 내기를 포기하게 할 심산이라 여겼다. 안중혁은 서하린을 본 순간부터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힘들었다.
"저도 뭐든 들어드리지요. 이참에 부각주 자리를 내드릴까요? 물론 각주님의 허락이 있어야겠지만 말입니다. 하하하하."
안중혁이 크게 웃자 서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 말씀 잊지 마세요."
안중혁은 웃음을 멈추고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안중혁의 눈이 슬쩍 모용혜에게로 향했다. 모용혜의 얼굴에는 분명한 비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안중혁은 갑자기 살짝 불안해졌다. 하지만 이내 내친걸음이었다. 다시 되돌릴 수 없는 내기가 시작되어 버렸다.
'내가 질 리 없는 싸움이지.'
안중혁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봉황단이 복용한 독은 자신이 아니면 절대 해독이 불가능하다. 그것은 안중혁이 홀로 만들어낸 독이었기 때문이다.
"자, 오라버니. 부탁드려요."
서하린이 무영을 바라보며 말하자 무영은 나직이 한숨을 내시며 고개를 저었다.
"후우, 그래. 시작하지."
무영이 막 근처에 있는 봉황단원에게 다가가려 했을 때, 악미령이 외쳤다.
"잠깐!"
무영은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모두의 시선이 악미령에게로 향했다.
"제가 허락할 수 없어요. 검증되지도 않은 사람을 어떻게 믿고 치료를 맡긴다는 거죠?"
악미령의 말에 이번에는 모용혜가 나섰다.
"저도 부탁드리겠어요. 믿어주세요. 공자님은 분명히 모두를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모용혜의 말에 악미령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모용혜까지 나서서 더 허락하기 싫어졌다.
"됐어요. 필요 없으니 돌아가세요. 치료는 안 부각주님께 맡기겠어요."
악미령의 말에 안중혁이 만면에 미소를 띠며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단주님의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하겠습니다."
안중혁은 그렇게 말한 후, 몽롱한 눈으로 서하린을 바라봤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사실상 내기는 제가 이긴 갓 같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완전히 억지였지만 서하린을 얻고 싶은 마음이 그만큼 간절했다. 서하린과 모용혜는 어이가 없다는 듯 멍한 표정으로 안중혁을 쳐다봤다.
"시작도 하지 않은 내기에 이겼다고요?"
"인정하지 않으시면 저도 더 이상 봉황단을 치료하지 않겠습니다."
안중혁의 말에 악미령이 끼어들었다.
"제가 보증해 드리죠."
"무슨 권리로요?"
모용혜가 나서자 악미령이 코웃음을 쳤다.
"물론 봉황단주로서죠."
서하린은 기가 막혔다. 치료를 받을 생각도 없으면서 무슨 내기가 성립되었단 말인가.
"아직 완벽히 해독하지 않았다는 건 알고 계십니까?"
무영이었다. 그 말에 악미령과 안중혁의 얼굴이 동시에 굳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해독이라니?"
"모르셨습니까? 이곳에 있는 분들은 모두 중독되었습니다."
무영은 그렇게 말하며 안중혁을 슬쩍 쳐다봤다. 무영과 눈이 마주친 안중혁이 흠칫 놀랐다.
"그리고 아직 단주님도 완벽하게 해독되지 않았습니다. 머지않아 증상이 재발할 겁니다."
무영의 말에 악미령이 화난 얼굴로 안중혁을 노려봤다.
"말도 안 됩니다! 설마 저자의 말을 믿으시는 겁니까? 그저 약초를 빻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못하는 자입니다.
약초도 구분하지 못하면서 뒤줄을 잡고 의선각에 들어온 자란 말입니다! 고작 그런 자의 말을 믿으시는 것입니까?"
악미령은 안중혁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확인은 해야 했다.
"물론 부각주님을 믿어요. 그런데 아직 복통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는데 괜찮은 거죠?"
악미령의 말에 안중혁의 얼굴이 미미하게 떨렸다. 안중혁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서둘러 대답했다.
"괘, 괜찮습니다. 원래 여독이 풀리는 과정이......"
악미령이 눈을 크게 뜨며 말을 잘랐다.
"여독이라고요? 그럼 정말로 중독되었단 말인가요?"
안중혁이 그제야 아차하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걱정하실까 염려되어 미리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아주 가벼운 독입니다. 별것 아니니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안중혁이 자신 있게 말했지만 악미령은 이미 그 말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악미령은 무영을 바라봤다.
"정말로 해독이 가능한가요?"
악미령의 말에 무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안중혁이 소리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네놈이 이 독을 어떻게 해독한단 말이냐! 아무것도 모르는 놈이!"
무영은 다짜고짜 걸어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신음하고 있는 봉황단원의 입에 신선단 하나를 밀어 넣었다. 누가 말리고 어쩌고 할 새도 없었다.
안중혁과 악미령이 놀란 눈으로 입을 벌렸다. 아무런 말도 못했다. 하지만 이내 그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신선단을 먹은 여인이 갑자기 몸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 여인은 너무나 개운한 표정을 지었다.
"하아, 사, 살았......"
부욱.
살았다고 말하려면 여인의 얼굴이 갑자기 새빨개졌다. 여인을 중심으로 냄새가 퍼져나갔다. 사람들의 얼굴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너무나 지독한 냄새였다.
여인은 너무나 부끄러워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부끄러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독을 배출한 거니까요."
무영의 말에 여인의 얼굴이 더 빨개졌다. 마치 자신이 독무를 살포했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더욱 부끄러웠다.
무영이 고개를 들어 악미령을 쳐다봤다. 악미령은 여전히 놀란 눈으로 무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씀드렸다시피 아직도 완전히 해독되지 않으셨습니까."
무영이 말에 악미령이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밀었다. 눈앞에서 효과를 확인했으니 신선단을 먹지 않을 수 없었다.
안중혁이 발악적으로 외쳤다.
"내 해독약은 완벽하다! 대체 네놈이 뭔데......"
안중혁은 이번에도 말을 잇지 못했다. 어느새 무영이 다가와 그를 살짝 밀어냈기 때문이다. 안중혁의 눈이 놀라 동그래졌을 때, 악미령의 손에는 신선단이 놓여 있었다.
악미령은 잠시 신선단을 노려보다가 그것을 입에 넣었다.
사르르.
악미령의 눈이 커다래졌다. 이건 정말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신선단은 그대로 녹아 뱃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순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시원한 청량감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하아......"
악미령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내쉬었다. 너무나 황홀했다. 그리고 그 황홀감이 채 가시기도 전에 엉덩이에서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뿌웅!
악미령 주위로 순식간에 지독한 냄새가 퍼져 나갔다.
"으윽......."
안중혁은 코를 막고 뒤로 물러났다. 악미령 근처에 있다가 봉변을 당한 것이다.
안중혁은 뒤로 한 발 물러서다가 비틀거렸다. 갑자기 머리가 어질어질해지더니 슬슬 배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안중혁의 눈이 커졌다. 이것은 중독 증상이었다.
"헉! 이, 이게......!"
그제야 무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독을 배출한 것이라는 말이. 안중혁은 급히 자신이 만들어온 약을 먹었다. 하지만 복통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제야 무영이 했던 말이 또 떠올랐다. 완벽하게 해독되지 않았다는 말이.
안중혁이 당황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악미령은 새빨개진 얼굴을 옆으로 돌려 무영의 시선을 피했다.
"단원들에게 약을 나눠 주세요."
너무나 부끄러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무영은 그 말을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무영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단주님도 도와주십시오."
무영은 그렇게 말하며 단주의 손에 작은 주머니 하나를 쥐어 주었다. 그 안에는 신선단 몇 개가 들어 있었다.
악미령은 한숨과 함께 근처에 있는 단원들의 입에 신선단에 넣어주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은 쉽게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순식간에 방 안이 뿡뿡대는 소리와 지독한 냄새로 가득 찼다.
"커어억!"
가장 괴로운 것은 안중혁이었다. 어느새 젊은 의원은 밖으로 도망가고 없었다. 안중혁 혼자방귀를 통해 배출된 독을 들이마시고 비틀대고 있었다.
악미령은 하나둘 일어서는 단원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무영을 바라봤다.
무영은 안중혁에게 다가가 신선단을 건네주고 있었다. 악미령은 그런 무영의 모습을 보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무영과 눈이 마주쳤다. 악미령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경의를 담아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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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봅니다..~~
즐감
감사...
감사^^
고맙게 잘보고 있어요~~~
즐감
재미있네요.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