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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4. 묵상글 ( 성 십자가 현양 축일. - 현양하면서 살지는 않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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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4. 성 십자가 현양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현양하면서 살지는 않는
“모세가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주님의 거룩한 십자가는 현양하면서 살지는 않는.
이것이 오늘 이 축일을 지내며 묵상하고 제가 여러분과 나누려는 주제입니다.
이런 묵상을 하게 된 것은 어제의 일이 영향을 주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요즘 저는 한 달에 한 번씩 한 교구 신부님과 프란치스칸 영성을 공부하는데
어제는 프란치스코에 대한 그 신부님의 감탄에 저도 같이 감탄을 연발하면서
뭔가 허무함이랄까 공허함이랄까 하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그렇게 대단한데 나는 뭘 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지요.
그러고 보니 저는 이렇게 저를 위안하며 살아왔습니다.
나는 프란치스코를 사랑한다.
나는 프란치스코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나는 비록 앞줄에서 프란치스코를 따르진 못할지라도 따르고 있다.
사실 이렇게라도 프란치스코를 따른다면 이것만으로도 훌륭합니다.
적어도 악마를 따르지 않고 프란치스코를 따르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 생각은 참 묘하다고 할까 교묘하다고 할까.
저의 겸손이기도 하지만 합리화이기도 하니 말입니다.
어떤 때는 겸손으로 기울다가 어떤 때는 합리화로 기운다는 말이고,
그래서 이런 것이 인간이지, 하다가도 이래선 안 되지, 하곤 합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주님을 따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십자가를 높이 찬양하면서도 잘 따르지 않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길은 주님만 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따라가긴 하지만 따랄 갈 수 있는 만큼만 간다.
이런 식입니다.
그렇지만 어쨌거나 이 축일을 지내는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주님의 거룩한 십자가를 현양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주님의 거룩한 십자가는 승리의 십자가임을 현양합니다.
그것은 죽음을 이기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승리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없으시다면 그것이 패배이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 헛수고라고 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신 명백한 승리입니다.
어떻게 죽음으로 죽음을 이깁니까?
제 생각에 치달으면 이깁니다.
죽음 끝까지 가면 이깁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이깁니다.
둘째로 주님의 거룩한 십자가는 사랑의 십자가임을 현양합니다.
십자가의 그 큰 고통을 능력으로 견딜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그 큰 고통은 사랑으로만 견딜 수 있습니다.
사실 십자가의 그 큰 고통을 견딜 수 있는 능력이 곧 사랑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그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사랑이라야 참사랑이고,
참사랑이라야 고통 가운데서도 사랑할 수 있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묵상하고 거룩한 십자가를 현양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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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4.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아는 지인들과 함께 어느 카페에서 차를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낯선 자매님 한 분이 지인 중의 한 분을 보고는 반갑게 인사를 하십니다. 지인은 갑작스러운 인사에 깜짝 놀란 뒤에, 잠시 밖으로 나가서 대화를 나누시더군요. 약간의 시간이 지난 뒤에 돌아오셨는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희 본당 신자인데요. 되게 잘 살아요. 그런데 요즘 냉담 중이세요.”
혼란이 왔습니다. ‘냉담 중인데 왜 잘 산다고 말할 수 있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잘 산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 지인의 기준은 부자인 것 같습니다. 실제로 그 자매님은 큰 부자인가 봅니다. 건물도 몇 채 가지고 있고, 지금 하는 사업도 잘 되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자면 잘 사는 것일까요?
현재 냉담 중이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할 수 없는 형편도 아닌 것 같습니다. 남편과의 관계가 아주 안 좋아서 이혼을 이야기하고 있고, 자녀들도 각종 문제를 일으켜서 복잡한 상황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세상 안에서 부자라면서 이렇게 말하지요.
“되게 잘 살아요.”
돈, 명예, 권력이 잘 사는 기준이 되는 세상입니다. 돈, 명예, 권력이 세상의 꼭대기에 높이 세워져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것들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기준들을 아무리 높여도 주님의 뜻에 맞게 사랑의 삶을 사는 사람만이 들어 올려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먼저 십자가에 못 박혀 들어 올려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들어 올려지신 것은 우리처럼 자기를 드러내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보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맞춰서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받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잘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기준을 가지고 들어 올리려는 삶만 산다면 결코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주님의 기준, 즉 사랑의 기준으로 들어 올리려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 희생, 봉사, 나눔 등으로만 진정으로 주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모습을 가지고서 잘 산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 있는 모든 이가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요?
“저 사람, 되게 잘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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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우리는 이 땅에서 위대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큰 사랑으로 작은 일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성녀 데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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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4.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오늘은 수녀님들(올리베따노회)의 날입니다. 수녀님들께 있어서 ‘십자가’는 ‘스위스 캄 성 십자가 수녀원’으로부터 물려받은 영성적 모태입니다.
특별히, 오늘은 ‘십자가’에서 세 가지 의미를 되새겨보고자 합니다.
<첫째>,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우선 ‘죄인임을 공적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죄인이 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먼저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할 때라야 진정한 의미에서 십자가는 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인임을 인정하기보다 의인임을 증명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니 십자가를 지는 일은 억울하고 원망스런 일이 되고 맙니다. 부당한 처사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을 때는 오히려 십자가를 피하고 도피하고 있는 것이라 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먼저 깨달아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용서해야 할 존재’이기에 앞서, ‘용서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닫는 일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비록 죄가 없다할지라도, 죄인이라서가 아니라 ‘죄 없음에도 죄를 뒤집어쓸 줄을 아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해받지 못하고 오히려 오해받고, 곡해 받고, 누명쓰는 일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바로 그러한 그를 ‘용서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를 ‘위하여’ 자신이 뒤집어써 주는 일입니다. 그것은 그가 구원되기를 ‘위하여 자신을 건네 주는 일’입니다.
<둘째>, ‘십자가’는 ‘죽는 곳’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의 장소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남을 죽이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죽음 당하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남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지는 일이요, 남보다 자신을 앞세우는 일이 아니라 물러나는 일입니다. 승리하는 일이 아니라 패배당하는 일이요, 중심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변두리로 밀려나는 일이요,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무력하게 당하는 일입니다.
더 나아가는, 틀려서가 아니라 옳으면서도 지는 일이요, 힘 있으면서도 눌리는 일입니다.
<셋째>, ‘십자가’는 ‘타인을 위하여 자신을 건네주는 곳’입니다. 그것을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그가 잘 되기를 바라며 하는 일이요, 그가 구원되기를 희망하여 자신을 건네주는 일이요, 사랑으로 하는 일입니다.
결국, ‘십자가’는 그분을 향하여 자신을 바치는 봉헌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승리요, 구원이 됩니다. 곧 십자가는 죽음이지만, 동시에 죽음을 죽이고 진정으로 참 생명으로 살아납니다.
<덧붙임>, 여기에 한 가지 의미를 제 자신이 덧붙여 본다면, ‘십자가’는 ‘벌어지는 일을 수락하는 일’이라고 여겨봅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는 우리의 삶은 그 어떤 일들이 끊임없이 벌어집니다. 내가 만들지 않아도, 아니, 만들지 않은 일들이 마구 벌어져 다그쳐옵니다. 오히려 만들고 조작하고 계획했던 일들은 무색하리만큼 우리를 비켜갑니다. 그리고 불가항력적으로 벌어지는 일들이 우리를 휩싸고 돕니다. 이제 그것들을 ‘사랑으로’ 마주하고 끌어안고 응답하는 일이 제게는 ‘십자가’입니다.
[베네딕도 규칙서] 58장 7절에 나오는 ‘성소식별’의 기준에 대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무력함이지만, 구원을 이루는 전능함이 됩니다. 낮아짐으로써 진정 높아지고, 패배이지만 사랑의 승리가 됩니다. 지면서도 쳐부수고, 승리의 깃발이 되고, 영광의 월계관이 됩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로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그야말로, 십자가는 하느님 사랑의 표상이요, 완전한 승리의 표상이요, 현양이며 영광이 되었습니다. 동시에 우리 삶의 의미가 되고, 우리 삶을 전환시키는 혁명이 됩니다.
이 ‘십자가’가 바로 ‘우리의 자랑’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베푸신 ‘하느님 사랑’이 바로 우리의 자랑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고백합니다.
“나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갈라 6,14)
오늘, ‘십자가’를 드높여 이 고귀한 ‘그리스도의 구원’과 ‘하느님의 사랑’을 찬미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요한 3,13)
주님!
당신은 패배하셨지만 악을 이기고 승리하셨습니다.
죽으셨지만 죽음을 넘어 다시 살아나셨고,
추락하셨지만 드높이 들어 올려 지셨습니다.
당신과 함께 내려갈 줄을 알게 하소서!
하여, 당신과 함께 올라가게 하소서!
하여, 제 안에 숨겨져 있는 당신의 생명이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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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4.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십자가에서 사랑을 보십시오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민수 21,8-9). 쳐다본 사람과 ‘봐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보지 않은 사람과의 운명은 분명히 다릅니다. 믿음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말씀대로 행함으로써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생명을 얻는 방법을 알려 주었으면 단순히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16,24).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10,38).고 하셨습니다. 사실 “십자가를 질질 끌고 가는 것보다 차라리 짊어지는 것이 가볍습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그러니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십시오. 그리고 믿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구리 뱀을 쳐다본 사람들이 살았듯이 영원한 생명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십자가가 아니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십자가라고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곳곳에서 십자가를 볼 수 있고 또 몸에도 지니고 다닙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에 담긴 주님의 사랑을 일깨우고 십자가를 지겠다는 고백을 못 한다면 그 십자가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십자가가 점점 더 화려해지고 상품화되는 현실에서 나를 정화하고 성숙시키는 은총의 십자가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십자가의 승리를 이루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영광에 앞서 반드시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십자가는 내 눈과 가슴에만 있을 뿐만 아니라 내 안에서 생생하게 생활하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만일 생활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자가 된다면 그분은 분명히 나를 부활시켜줄 것입니다”(성녀 벨라뎃다). 힘겹고 고달픈 십자가의 길이지만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를 미리 깨닫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사랑을 봐야 합니다.
많은 경우 ‘왜 나만 십자가를 져야 하느냐? 고 하소연합니다. 왜 나는 이런 무거운 십자가를 감당해야 하느냐고 투덜댑니다. 그러나 그 투덜거림 속에서 십자가는 더 무거워 집니다. “십자가의 길에서는 언제나 첫발이 중요합니다. 십자가를 무서워하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더 큰 십자가가 됩니다. 첫 발을 예수님께 맡기십시오”(성 요한 비안네).
사람마다 져야 하는 십자가는 다르지만, 모두가 자기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가난이 십자가일 수도 있지만 오히려 큰 부가 십자가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자녀, 남편, 아내, 동료가, 공동체의 일원, 장상이 장애물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격, 언어의 습관, 주변의 환경이 십자가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는 그 십자가를 통해서 나를 다듬고, 겸손하게 하고, 기도하게 하고, 마침내 내가 취할 길을 발견하게 하고, 가야 할 길에 용기를 얻게 해주십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피할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질 수 있는 은총을 구해야 합니다. 십자가 안에서 사랑을 보십시오. 십자가를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함으로써 십자가를 극복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가 어디서 오는지 아예 생각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하느님으로부터 옵니다. 십자가는 언제나 하느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당신에게 증거하는 방법으로 주시는 것입니다”(성 요한 비안네). 십자가는 우리 모두의 교과서입니다. 십자가는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구원의 도구임이 틀림없습니다. 십자가 현양 축일에 사랑의 십자가를 제대로 바라보길 바랍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큰 기쁨과 희망을 안겨줍니다. 특별히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에는 우리를 무조건 살리고 싶어 하는 하느님의 구원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의 구리뱀을 바라보기만 하면 무조건 살았듯이 우리도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기만 하면 무조건 살 수 있게 해주고 싶어 하시는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에 감사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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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4.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샤워기의 밸브가 헛돌았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밸브에 틈이 벌어졌습니다. 틈이 벌어졌으니 조이는 힘이 약해졌고, 그래서 헛돌았습니다. 더 벌어지기 전에 새로운 밸브를 구매해서 교체했습니다. 새롭게 밸브를 교체하니 잘 열리고 잠겼습니다. 요즘은 자동차도 자동차의 상태를 화면으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엔진오일의 교체 시기도 알려주고, 타이어 압력 상태도 알려주고, 자동차의 건강 상태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교구에서 1년에 한 번은 ‘건강검진’을 하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위내시경과 장내시경도 하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성모병원에서 건강검진을 했는데, 미국에 와서는 기회가 없었습니다. 내년에 한국 가면 건강검진을 한번 받아보려고 합니다. 건강검진의 목적은 혹시 모를 몸의 이상을 점검하는 겁니다. 이상이 있다면 더 나빠지기 전에 조처하는 겁니다. 이상이 없다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음 일 년을 기다리는 겁니다. 신앙인은 ‘양심 성찰’을 통하여 신앙을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는 정해진 시간에 하는지, 선행은 하고 있는지, 영적 독서는 하고 있는지, 말씀은 가까이하고 있는지, 미사 참례는 잘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늘은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이 축일은 40일 전에 있었던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과 함께 묵상하면 도움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타볼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와 예언을 대표하는 엘리야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계명을 완성하는 분이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거룩하게 빛났고, 예수님의 옷도 하얗게 빛났습니다. 하늘에서 '이는 내 마음에 드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주님 여기에 천막 3개를 만들겠습니다. 하나는 주님, 다른 두 개는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 만들겠습니다.' 베드로는 거룩한 변모의 의미가 영광과 기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율법학자와 대사제들에게 끌려가서 고난을 받아야 한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한다.' 그러자 베드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는 십자가 없는 영광을 원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그렇습니다. 거룩한 변모는, 하느님의 영광은 사람의 일을 통해서는 성취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를 때 은총으로 주어지는 겁니다. 하느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기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면서 십자가는 구원과 부활의 표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지만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제는 미사의 정점인 성찬의 전례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신앙의 신비여!” 교우들은 사제의 선포에 이렇게 응답합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으심을 전하며 부활을 굳게 믿나이다.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 영원히 경배 받으소서.” 십자가의 길 기도에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예수 그리스도님,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그렇습니다. 우리 신앙의 정점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 없는 구원은 씨 뿌리지 않고 열매 맺으려는 욕심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사막의 신기루일 뿐입니다.
십자가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십자가의 수직면은 하느님과 사람의 일치를 의미합니다. 십자가의 수평면은 사람과 사람의 일치를 의미합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은 바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게 하는, 사람과 일치를 이루게 하는 ‘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십자가 현양축일을 지내면서 나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갈 수 있도록 용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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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4.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은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십자가 현양의 의미는 오늘 복음 말미에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주님을 통해 세상이 구원받게 하시려고 십자가는 들어 높여졌습니다.
구원이란 무엇일까요? 저는 구원을 하느님과 우리가 함께 사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실 태초에 사람은 하느님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죄 때문에 더 이상 하느님과 함께 살지 못하고 에덴동산이라고 불렸던 하늘나라에서 쫓겨났습니다.
이런 태초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자신을 희생하신 분이 바로 우리 주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아담의 불순종을 지우기 위해 순명의 길을 가셨습니다. 교만만의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 겸손의 빛을 입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역사입니다.
우리 주 주님께서 이 세상이 오셔서 걸으신 길이 바로 구원의 길이었습니다.
십자가가 들어 높여지는 이유는 이렇게 세상의 구원을 위해,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걸어가신 주님의 발자취를 우리도 따르기 위해서입니다. 그 십자가를 우리가 바라보는 이유는 그분의 죽음으로 다시 열린 하늘나라에 우리가 동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의 길 외에는 다른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십자가상의 주님만이 우리 구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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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비록 누구도 과거로 돌아가 새 출발을 할 수는 없지만, 누구나 지금 시작해 새로운 앤딩을 만들 수 있다.”
-칼바드-
이 얼마나 희망적인 말인가요?
이 짧은 문장에 참으로 많은 희망과 용서가 들어있다고 생각합니다.
과거가 더 이상 그대를 괴롭히지 않기를 바랍니다.
만약 괴롭힌다면 지나버린 그 시간을 이제 끊어버리세요.
그리고 새로운 날을 향해 걸어가십시오.
과거에 매여 앞으로의 날들을 망치지 마세요.
그대는 지금부터 해피엔딩으로 걸어갈 수 있습니다.
오늘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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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4.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성 십자가
“회개와 구원, 희망과 승리의 표징”
“하느님의 업적을 잊지 마라.”(시편78,7ㄴ)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을 선물하신 하느님의 업적을 결코 잊지 말라는 화답송 후렴 말씀입니다. 오늘은 순교자 성월 9월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성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8월 6일 주님 변모 축일후 40일만에 맞이하는 성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영원히 바라볼 유일한 대상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성 십자가뿐이겠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지요?
지금도 잊지 못하는 추억이 있습니다. 피정집 제의방에서 미사전례 입당전 절을 하려는 데 십자가가 없어 당황했던 추억입니다. 도대체 주님의 십자가가 없다면 어디에 절할 수 있겠는지요? 우주 인류 역사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주님의 십자가가 없다면 우주와 인류는 어둠의 블랙홀 심연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온 우주와 인류의 빛이자 중심이요 의미가 되는 주님의 성 십자가입니다. 오늘 본기도 역시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의 은혜를 요약합니다.
“하느님, 외아드님의 십자가로 인류를 구원하셨으니, 저희가 지상에서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깨닫고, 천상에서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하소서.”
아니 이미 성 십자가의 은총으로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구원의 은혜를 누리며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텅빈 허무를 사랑의 충만으로 바꾸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성 십자가의 은총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결정적 표현이, 회개와 구원, 희망과 승리의 표징이 되는 성 십자가입니다. 바로 오늘 요한 복음의 예수님의 고백은 당신의 성 십자가를 통해 그대로 실현됨을 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온 세상이 아드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받게 되었으니,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표지가 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성 십자가의 은총만이 우리를 무지와 허무의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합니다. 우리가 바치는 가장 짧고 중요한 기도 역시 십자성호를 그으며 바치는 성호경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참 자랑스런 기도는 없을 것입니다. 얼마나 많이 바쳐온 참 좋은 기도, 성호경인지요! 알게 모르게 십자가의 주님과의 일치를 날로 깊이해 주는, 그리하여 각자 고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순교적 삶을 살게 해주는 주님의 십자가의 은총입니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의 역사도 참 깊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은 4세기경 예루살렘에서 시작됩니다. 335년 9월13일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예수님의 무덤 위에 기념성당을 봉헌하고, 그 다음날인 9월14일 그의 모친 헬레나 성녀가 발견한 것으로 전해지는 성 십자가를 성당 안에 걸어 현양하여 신자들로 하여금 경배하도록 함으로 시작된 축일입니다.
후에 페르시아의 침입으로 성 십자가는 약탈당합니다만, 628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 헤라클리우수가 이를 다시 찾아와 본래의 자리에 안치한 것을 기념하는 의미도 추가됩니다. 교황 세르지우스 1세(687-701)에 이르러 이 축일은 전체 교회가 기념하는 축일로 자리잡게 됩니다. 성주간 성 금요일 수난 예식중 십자가 경배시 노래했던 내용들은 얼마나 은혜로웠던지요!
“보라, 십자나무 여기 세상 구원이 달렸네, 모두 와서 경배하세.”
“주의 십자가를 경배하오며 주의 거룩하신 부활을 찬양하나이다. 십자나무를 통하여 온 세상에 기쁨이 왔나이다.”
“성실하다 십자나무 가장 귀한 나무로다, 아무 숲도 이런 잎과 이런 꽃을 못내리라.”
이 모두를 요약한, 십자나무 생명나무의 은혜를 노래한 오늘 감사송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십자나무에서 인류구원을 이룩하시어, 죽음이 시작된 거기에서 생명이 솟아나고, 나무에서 패배한 인간을 나무에서 승리하게 하셨나이다.”
주님의 성 십자가는 영적승리의 표징도 됩니다. 잃었던 에덴동산을 찾아주신 파스카의 예수님은 당신 십자가의 생명나무에서 생명나무 열매인 성체를 모심으로 우리 모두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셨으니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이 참 고맙습니다. 축일의 유래는 제1독서 민수기에서 보다시피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유랑시 모세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 갑니다. 바로 구리뱀이 상징하는 바 주님의 성 십자가입니다. 불평으로 불뱀에 물려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신한 모세의 간청에 하느님의 응답입니다.
“너는 불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뱀에 물려 죽어가던 사람들은 모세가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은 구리뱀을 쳐다보면 살아납니다. 모세는 예수님의 예표가 되고 구리뱀은 성 십자가의 예표가 됩니다. 말 그대로 회개와 구원, 희망과 승리의 표징을 상징하는 주님의 성 십자가이며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친히 확인하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주님은 이 거룩한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미사 은총으로 우리 모두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누리며 살게 하십니다. 우리가 영원히 믿고 바라볼 사랑의 대상은 회개와 구원, 희망과 승리의 표징인 파스카 예수님의 성 십자가뿐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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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4.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이루어야 할 꿈>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요한 3,14)
살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다가
살리려
십자가를
짊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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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4. 성 십자가 현양 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요한 3,14)
영원한 생명을 되찾다
사람의 영혼과 육체를 한꺼번에 파멸에 이르게 하는 죄들이 뱀들로 표현되는 것은 적절합니다. 이는 뱀이 사납고 독성이 있으며 교묘히 죽음을 일으키기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의 첫 조상들이 뱀 때문에 죄를 짓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죽지 않는 존재였는데, 죄를 지음으로써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구리 뱀으로 알려지신 것은 적절합니다. 그분은 죄 많은 육의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구리 뱀이 사나운 뱀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해로운 독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고, 오히려 들어 올려짐으로써 살아 있는 뱀들에게 물린 이들을 치료해 주었듯이, 인류의 구원자께서도 죄 많은 육을 지니신 것이 아니라 죄 많은 육의 모습을 취하셨습니다. [이 모습으로] 십자가 죽음을 당하심으로써 당신을 믿은 이들을 모든 죄뿐 아니라 죽음에서도 해방시키려는 뜻이었습니다.
표징으로 들어 올려진 구리 뱀을 쳐다본 이들이, 뱀들에게 물려 당한 일시적 죽음과 상처에서 치료되었듯이, 주님 수난의 신비를 바라보는 이들도 믿고 고백하고 주님의 수난을 본받음으로써, 자신들이 마음과 몸으로 죄를 지어 자초한 모든 죽음에서 영원히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존자 베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10 하느님은 기뻐하고, 고난을 겪고, 복을 주고, 위로하신다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 뛰어라(이사 49,13).
나는 세상의 빛입니다(요한 8,12)
엑카르트가 말하는 원리를 예수가 말한 것에 적용해 보라.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예수는 “나는 ~이다”라고 선언함으로써 자신이 “있는 그대로의 순수한 존재”와 관계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엑카르트는 “나는 ~이다”라고 하는 신적인 단언 속에서 그 이상의 것, 곧 말로 표현되지 않은 것, “나는 ~이다”라는 단언에 의해 거부되고 있는 무언가를 본다. 하느님은 모든 부정을 거부한다.
“나는 있는 자다”라는 진술에서 “이다”의 반복은 하느님에게서 모든 부정을 몰아내는 순수 긍정입니다. 또한 그것은 일종의 복귀, 하느님의 존재가 자신에게로 되돌아가서,자신 안에 머무르는 것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것은 일종의 끓어오름이거나 자기를 낳는 것입니다. 그것은 안에서 타오름,자기 속으로 녹아듦, 자기 속으로 끓어오름, 자기를 온통 투과하는 빛 속의 빛, 모든 방면에서 철저히 자기에게로 향하는 빛입니다.(239)
✝️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한국 고대사에 나타난 하느님 신앙과 풍류도
종교학자면서 동시에 기독교 신학자인 유동식은 한국의 마음 바탕인 한(韓)을 아래와 같이 파악하고 있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자타가 ‘한’ 이라 불러왔고, 우리가 믿는 절대자는 ‘한님' 곧 하느님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종교사를 특징짓게 한 것은 ‘한’의 마음이었다. 한국의 종교사 속에 드러난 ‘한’ 마음의 특성을 들어본다. 첫째는 모든 것을 한 속에 수렴하는 큰 마음이었다. ‘한’은 본디 하나인 동시에 전체를 나타내는 개념이다. . . . . . . 둘째는 종합지양(綜合止揚)하는 창조적 마음이다. 이것은 단순히 다(多)를 하나로 종합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를 지양하여 그 근본을 잡게 하는 마음이다.. . . . . .셋째는 현실에의 책임 있는 참여의 마음이다. ‘한’ 마음에 있어서는 하늘이 곧 사람인 것이다. .. . . . . .넷째는 풍류의 마음이다."
뒤에 좀더 언급하겠지만 유동식은 ‘한’ 마음의 네 번째 특징으로서 풍류의 마음을 들었는데, 이 특성은 한민족의 신바람, 예술적 능력 , 종교적 신명성, 열정적 역동성, 자연과 조화 속에서 초월적 자유를 누리는 마음이다. 지난 2002년 월드컵 축구 대회가 열릴 때 세계를 놀라게 하고 한민족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한 ‘역동적 응원 열기'는 바로 그 풍류도가 스포츠를 통해 분출된 것이다. 그것은 창조적 에너지로서 분출되기도 하지만, 종교적 차원에서는 깊은 사색을 회피하는 즉흥적 열광주의와 광신주의로 치닫게 할 위험도 있다
유동식에 의하면, 풍류도란 고대 시대에만 한민족이 지녔던 특정 종교에 대한 명칭이 아니다. 이 풍류도는 종교적으로는 ‘하느님' 신앙으로 표현되지만 외래 종교를 받아들이는 한민족의 종교 심성의 모태적 토양 원리 , 곧 영성과 관련된다.(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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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4.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며,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3,16.17)
오늘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오늘은 세상과 인간을 죄악으로부터 구원하시고 해방하신 그리스도께서 매달려 돌아가신 십자가를 우러러 경축하는 날입니다. 십자가 현양 축일은 335년 9월 13일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예수님의 무덤 위에 성당을 지어 봉헌하고, 다음날인 14일에 그의 모친 헬레나 성녀가 발견한 것으로 전해지는 성 십자가를 무덤 성당 안에 걸어 현양顯揚(=높이 드러내다. 나타내어 드높인다는 의미)하여 신자들로 하여금 경배하도록 한 데서 오늘 축일이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배경은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요3,1-21) 중에서 발췌된 내용으로,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3,3)라는 말씀에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3,9)하는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구약의 민수기의 구리 뱀의 비유를 인용하셨습니다. 오늘 미사의 독서 민수기 21, 4-9절은 오늘 복음을 위한 밑그림입니다. 불 뱀에 물린 사람들 가운데 구리 뱀을 쳐다본 사람들은 살아났습니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21.9)라는 말씀처럼 믿음으로 바라본 사람은 살아났지만, 여전히 불신앙으로 바라보지 아니한 사람은 살아나지 못했다는 것을 암시한 것입니다. 사실 이집트를 탈출한 백성이 거의 200만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 많은 사람이 높은 기둥에 달아놓은 구리 뱀을 잘 보지 못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물리적으로 잘 보이지는 않았더라도, 믿음으로 보려고 애쓴 사람들은 불 뱀에 물려 죽어가는 고통에서 해방되었고 살아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민수기의 구리 뱀사건입니다.
모세가 만들어 기둥에 높이 달린 구리 뱀은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의 예표입니다. 그러나 불 뱀에게 물린 사람들을 실제로 치유한 것은 뱀이 아니라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능력입니다. 바로 그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이제 십자가에 높이 달려 있습니다. 십자가 자체가 세상에 구원과 생명을 주기보다는 십자가에 높이 달려 못 박혀 돌아가신 사람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세상의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며,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3,16.17) 이 말씀은 모든 복음서와 성서 말씀의 요약이며,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서간에서 이 점을 더욱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1요한 4,9-16참조) 세상의 구원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이루어졌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신 까닭이란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시기 때문이며, 당신 자신이 창조한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느님은 외아들을 보내주시고, 외아들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아니 되는 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자기 외아들까지 보내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아버지의 구원 섭리와 계획(=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결국에는 외아들이신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그 사랑이 얼마나 높고 깊으며 길고 넓은지를 드러나셨습니다. 저희 수도회 창립자이신 십자가의 성 바오로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느님 사랑의 가장 위대하고 가장 기묘한 사업』이라고 표현하였으며, 『십자가에서 사랑을 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불 뱀에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민21,8)하고 약속하셨고 약속에 성실하신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이와 같이 믿음은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는 데 있습니다. 사랑과 구원의 표지인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주님을 바라보는 자는 살게 되고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습니다. 상처는 상처로 낫는다는 말처럼 우리의 상처를 낫게 하려고 주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십자가에 높이 달려 죽으심으로서 우리를 죽음의 상처에서 낫게 하여 주셨기에 우리는 십자가를 믿음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어디에나 높이 걸려 있는 십자가는 장식물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믿음과 사랑으로 바라보십시오! 바라보시데, 다시 태어나려면 겉으로 드러난 십자가 표상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을 충분히 깨닫고 그것에 자신의 전부를 내어 맡기고 의탁한다는 마음으로 바라보십시오. 그렇게 마음으로 바라볼 때 그 십자가가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그분의 사랑으로 변화시키는 회심과 치유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과 사랑의 바라봄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내면의 본래적인 자아가 그 사랑이신 그분과 만나고, 그분과 만남이 우리를 새롭게 태어나게 할 것입니다.
끝으로 오늘 축일을 지내는 모든 분에게 십자가의 사랑을 믿음과 사랑으로 바라보시길 권하면서, 이 바라봄의 의미를 꿰뚫은 시몬느 베이유의 「신을 기다리며」의 한 부분을 선물로 보냅니다. 『오늘날 오해받는 크리스챤 사상의 중요한 진리 가운데 하나는 구원이 “바라봄”에 있다는 사실이다. 구약에서 높이 매달린 구리 뱀을 바라보는 이가 구원을 받듯, 완벽히 순수한 이 예수를 그렇게 바라보는 시선은 이미 엄청난 효과를 지니고 있다. 높이 달린 그 거룩한 것 앞에 우리의 무능과 악이 드러나고, 영혼의 교만이 드러나며, 불꽃이 일어 이 모든 것을 태워버린다. 바라보는 이는 이렇게 하여 보는 상대(=십자가상의 예수)와 비슷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말씀을 듣는 이는 말씀하시는 분을 닮는다. 영혼의 선익을 산출하는 것은 능동적인 의지가 아니라, 바라봄, 말씀을 들음, 그 수동적인 순명, 기다림, 집중, 침묵, 고통과 기쁨을 관통하는 부동성.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모습은 모든 순명 행위의 모델이다.』
저희 수도회 행사 마무리에 항상 부르는 「십자가 찬미」를 기도 대신으로 보냅니다. 『십자가상에 한사람있네 왜 죽으셨는지 말해다오 인간의 죄로 수난하셨네 우리위해 숨거두셨네 십자가상에 한사람있네 홀로매달려 계시면서 나에게 가르쳐주세요 그의 죽음을 왜 몰랐는지 그날을 몰랐던 사람있고 무심한 사람도 있었다네 집단으로 생애를 바침으로 그일을 세상에 알리려네 손에손에 십자가들고 곳곳에 님사랑 전하려네 십자가상에 한사람있네 온세계 알기를 바라노라.』
% 60년 전 오늘, 1964년 9월 14일 예수고난회 미국 시카고 십자가 관구 소속 마 레이몬드 신부님께서 한국에 도착하신 날입니다. 곧 예수고난회 한국 진출 6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다시금 저희 수도회를 위해 기도 부탁드리며, 돌아가신 두 분 신부님들, 마 레이몬드 신부님(1964년 한국 오심, 2008년 12월 귀천)과 박 도세 유스티노 신부님(1965년 한국 오심, 2008년 10월 귀천), 그리고 건강 때문에 미국 관구로 귀원한 손 어진 신부님(1969년 한국 오심, 24년 1월 귀국)과 베트남에서 수련장으로 활동하고 계신 노 인조 수사님(1974년 한국 오심, 현재 베트남 생활)도 기억하고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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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4. 성 십자가 현양 축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십자가의 길은 영원한 생명의 길 /
박윤식 [big-llight] 2024-09-13 ㅣNo.175934
그리스도인을 드러내는 가장 확실한 상징은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죽음의 장소이기도 하지만 또한 새로운 생명이 탄생한 자리이기에. 따라서 우리는 이 십자가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구원이 주어졌음을 장엄하게 고백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 안에 영원한 우리 생명이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게다.
그러기에 오늘 이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은 인류의 죄를 속죄하시려고 예수님이 손수 지신 그 무거운 십자가를 경배하는 날이다. 사실 이 기원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 성녀의 노력으로 찾게 되었단다. 황제는 이를 기념하고자 335년 무렵 예루살렘의 예수님 무덤 곁에 성전을 지어 봉헌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9월 14일로, 이 축일이 고정되었단다.
성당 어디에나 큰 십자가는 있다. 물론 작은 십자가는 집집마다 걸어둘 게다. 목걸이와 반지에도 십자가를 새긴다. 그러나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면 그것은 정작 장식에 지나지 않는다. 십자가는 고통, 시련, 억울함이며 마침내 구원이다. 예수님께서 받아들이셨기에 우리 역시 그렇게 하고자 십자가를 모시는 거다. 그래서 이 십자가를 이해 못하면 ‘불평불만’만 하게 되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의회의원인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이는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 십자가로 구원을 암시하셨다. 십자가의 길은 믿는 이를 영원한 생명인 구원으로 이끌어 하느님 영광을 드러내자는 거다. 예수님도 그 길을 걸으셨다. 그 끝인 죽음이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보였지만, 하느님께서는 모든 걸 바치신 예수님께 부활로 응답하셨다. 예수님의 인간적인 패배는 곧 하느님의 승리였다. 십자가 길은 손해 보는 게 아닌 구원으로 이끄니까. 하느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모든 건 끝내는 그분께로 돌아간다.
사실 외아들을 죄 많은 우리에게 보내신 건, 그분께서는 세상이 심판이 아닌 오로지 아드님을 통해 구원받게 하시려는 그분 사랑 표현이었다. 어쩌면 인간의 죄와 불순종으로 생긴 십자가의 예수님 상처가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을 드러내고, 인간을 새롭게 창조하는 근원이다. 내 앞에 십자가가 없다면 우리는 하느님 창조 사업에 참여하는 이가 아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지고 새로운 하느님 자녀를 탄생시키는 역할에 참여할 때에야, 진정한 십자가 현양이 이루어질게다.
오늘도 교회가 탄생하기 위해서도 어쩌면 피 흘림이 필요하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십자가 죽음이 요구되었기에. 그분께서는 옆구리를 창으로 찔려 피와 물을 쏟으셨다. 이 십자가의 어리석음이 하느님의 지혜가 되고 그 고통은 하느님 영광과 기쁨으로 드러난다. 믿는 우리들은 십자가를 곳곳에 걸어 놓고 있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지내는 오늘도 십자 성호를 긋거나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거기에 담긴 영원한 생명인 구원의 길을 함께 묵상해보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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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4.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바오로 사도는 자신에게 “직무가 맡겨진 것”(1코린 9,17)이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고, 삯을 요구할 수도 없으며, 그것이 어찌할 수 없는 의무라고 말합니다.
직무가 맡겨졌다는 것이 무엇이기에 그렇게 말하는지 궁금하여 찾아보았습니다.
‘직무’로 옮긴 단어는 『공동 번역 성서』에서도 ‘직무’로 되어 있고, 『200주년 신약 성서』에서는 ‘직책’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 말 단어는 ‘오이코노미아’입니다.
서양의 여러 언어에서 ‘경제’(economy)라는 단어의 근원이 되고, 신학에서는 자주 ‘경륜’으로 옮겨지기도 하지요.
어원상으로는 집안을, 또는 집안의 일들을 관리하는 것을 뜻하고, 다른 사람의 재산을 맡아 돌보는 일을 일컬어 자주 쓰이며 루카 복음서 16장 2-4절에서는 집사의 임무를 가리킵니다.
하느님께 적용되었을 때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온 세상을 다스리시고 안배하시는 것을 뜻합니다.
이 경우에 주로 ‘경륜’이라고 옮기고, 특히 그리스도의 육화를 통하여 이루어진 하느님의 계획을 일컬어 많이 씁니다.
바오로 사도가 복음 선포를 자신의 ‘직무’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그것이 집주인이신 하느님께서 그에게 몫으로 지우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바오로 사도가 자신의 뜻대로, 스스로 무슨 업적을 이루려고 하는 일이 아닙니다.
집주인 아래 있는 집사로서, 주인의 계획에 따라 자신에게 정하여진 몫을 하는 것입니다.
대가 없이 복음을 전하고, 모든 사람의 종이 되고, 목표를 향하여 열심히 달리며 자신을 단련한다 하여도 자랑할 것은 없습니다.
그저 하느님의 구원 계획 안에서 자신의 몫을 조용히 채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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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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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4. 성 십자가 현양 축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불 뱀에 물린 사람이 구리 뱀을 보면
죽지 않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이 들어 올려지는 것은
그를 바라보면서 그를 믿는 사람이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즉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그를 믿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그리스도의 육화에서 시작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세상에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한 것
즉 구원을 주시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의 육화에서부터 십자가 죽음
더 나아가 아버지 오른 편으로 들어올려지는
승천에 이르기까지
예수의 온 생애는
세상에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한
하느님의 사랑 표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기에
하느님께서 먼저 그것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주시는 것은
'누구나'라는 표현으로
조건 없이, 그것을 원하는 모든 사람이
그것을 얻을 수 있게 해 주십니다.
단 하나의 조건이 있다면
사람의 아들, 즉 하느님의 외아들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앞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당신의 말씀을 증언이라고 표현하십니다.
그러시면서 니코데모가
그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받아들이다'는 표현은
이어지는 구절에서 '믿는다'는 표현과
같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받아들인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더 나아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구원을 주시려는 하느님과
그것을 받으려는 인간이 만나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여기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가 나약한 존재임을
우리의 힘만으로는 구원에 도달할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과 연결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예수님의 나약한 죽음을 바라보면서
우리 자신의 나약함도 바라봅니다.
그 나약함은
스스로 극복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그 나약함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 안에 받아들입니다.
그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우리의 약함 안에서 꽃피는 하느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는 오늘이 되기를 기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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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4.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십자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이마에 깊이 새겨져 있는 트레이드 마크입니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에 십자가라는 화두로 묵상을 해봅니다.
우리 모두 십자가 없는 평안하고 안락한 삶을 꿈꾸지만, 우리네 인간 현실 안에서는 불가능합니다.
너나할 것 없이 각자 등에는 저마다의 십자가 하나씩 짊어지고 때로 헐떡이며, 때로 용기를 내며,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십자가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십자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이마에 깊이 아로새겨져 있는 트레이드 마크입니다.
우리네 삶에서 기쁨과 슬픔, 고통과 행복은 언제나 동전의 양면 같습니다.
돌아보니 행복과 불행이 끝도 없이 교차해온 나날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도 영광과 승리로 가득했던 출애굽은 찰나의 순간이었습니다.
즉시 그들에게 다가온 것은 척박한 사막과 기약 없는 대규모 공동체 생활, 배고픔과 갈증이었습니다.
“당신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것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민수 21,5)
보십시오. 우리네 지상 인생 여정은 그 누구든 어쩔 수 없습니다.
결핍과 고통 투성이입니다.
근원적 갈증과 배고픔의 연속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너그러운 마음이요, 고개를 들어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관대함입니다.
가끔 기가 막힌 이웃을 만납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꼬인 인생이 다 있는지?
저런 상태로 어떻게 살아가는지?
아무리 둘러봐도 사방이 높은 벽으로 가로막힌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분들 앞에 뭐라 위로의 말을 드리기도 쉽지 않습니다.
기도 열심히 하면, 주님께 매달리면서 신앙생활 열심히 하면 뭔가 상황이 달라질 줄 알았는데,
아무리 발버둥 쳐 봐도 삶은 여전히 거기서 거긴 분들 앞에 그저 송구스럽기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잘 되기만을 바라시는 분이요 우리를 축복하는 하느님이라 믿었는데,
삶 자체가 고통의 연속이요, 십자가 투성이인 우리네 삶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제게는 하나의 큰 숙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답을 가르쳐 주시더군요. 우리 그리스도교는 근본적으로 만사형통, 승승장구,
지속적인 현세 축복을 외치는 종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당신의 지상에서의 삶 전체를 통해 잘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의 신앙과 추종의 대상인 예수님부터 고난의 인간, 배척당하는 인간, 십자가 죽음을 넘어서야 하는 인간으로서의 운명을 타고 나셨음을 스스로 밝히셨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신 우리 그리스도교인들의 운명 역시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분처럼 이 세상에서 고난을 겪고, 때로 배척을 받고, 때로 죽음과도 같은 현실을 감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부활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교는 고통과 십자가 없는 부활을 절대로 외쳐서는 안 됩니다.
희생과 시련은 거부하고 달콤함과 안락함만을 보장하는 교회여서도 안 됩니다.
우리에게 매일 다가오는 고통과 십자가를 소중히 여기며 고통과 십자가에 담긴 가치와 의미를
지속적으로 찾아 나가는 것이 정말 중요한 과제입니다.
이왕이면 져야 할 십자가라면 기꺼이, 관대하게 지고 갈 때 생기는 한 가지 특별한 현상이 있습니다.
십자가가 가볍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언젠가 그 십자가가 십자가가 아니라 기쁨이요 은총이요 축복으로 변화되는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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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4.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지신 십자가를 묵상하며 경배하는 날이다. 이 축일의 기원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전승에 의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 성녀의 노력으로 발견되었다. 황제는 이를 기념하여 335년 무렵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의 무덤 옆에 성전을 지어 봉헌하였다. 그 뒤로 십자가를 경배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9월 14일에 지내는 것은 이날 십자가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것 때문에 하느님과 모세에게 반항한다. 하느님은 불 뱀으로 그들을 벌하시고, 백성들이 회개하자 모세에게 구리 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 놓고 그것을 쳐다본 사람은 죽지 않게 하신다. 구리 뱀의 모습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었다. 민수 21,4-9의 구리 뱀은 사람들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돌리게 하는 표지였다. 이것이 후에는 우상이 되어 히즈키야 때 다 없애 버렸다. 복음의 “들린다.”라는 말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뜻이며(요한 8,28; 12,32), 하늘의 영광으로 올려졌다는 뜻(사도 2,33; 5,31; 필립 2,9)으로 이중적인 영광의 의미이다. 우리에게도 이 십자가가 없으면 아무런 면류관이 없다. 예수께서는 이 십자가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계획을 이루셨고, 이 십자가를 바라보고 우리 모든 인간이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셨다. 십자가를 통한 세상의 구원업적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의 업적이다. 이 사랑의 업적은 인간이 그 아들을 믿고 따름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우리 자신이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을 믿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고 예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음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으면서 그분의 말씀을 믿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이루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다. 그분만이 하느님 아버지께 이르는 길이다. 이제 그분을 믿는 자만이 구원을 얻는다. 예수님과 그분의 가르침을 우리의 생명, 영혼, 운명 전체를 맡기고 그 가르침을 따라 실천하게 되면 구원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분은 구원을 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시다. 우리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한다면, 그분 안에 가지고 오신 구원의 은총까지도 거절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구원을 거절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거절하는 것이고 그것은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결과, 멸망을 초래하고 말 것이다. 이것은 매 순간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범하였다가도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회개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과 같이 이제 우리도 언제나 나약한 의지 때문에 하느님에게서 멀어질 수 있으나, 항상 높이 들리신, 즉 십자가와 영광으로 들려지신 주님께로 되돌아가는, 회개하는 삶이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가 지고 가는 우리의 십자가를 통하여 진정 부활을 체험하며 나 자신이 새로이 태어나는 기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당신의 십자가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셨듯이 우리는 이제 우리 자신이라는 이 십자가를 통하여 나 자신의 완성 즉 구원과 그리스도를 닮도록 하여야 한다. 그분을 닮는 것이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을 닮음을 이루는 일일 것이다. 이러한 삶을 우리도 늘 살면서 십자가의 신비를 더 깊이 체험하며 구원의 은총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용감히 전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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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4.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십자가의 거울 효과
오늘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묵상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에 대한 상징적 비유가 오늘 독서에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모세를 따르다가 불평합니다. 하느님은 그들을 뱀을 보내어 물어
죽이게 하셨습니다.
뱀이 곧 불평임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뱀에 물려 살려달라고 청하자, 하느님은 모세에게 장대에 구리뱀을 매달도록 하시고 그것을 보는 이마다 치유가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뱀에 물린 이들을 위해 매단 짐승은 뱀이었습니다.
만약 다른 동물이 매달렸다면 어땠을까요?
전갈을 매달았으면 어떨까요? 양이나 소를 매달면 어떨까요? 그것이 분명 죗값임을 알 것입니다.
그러나 죄의 원인은 보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죽이려 하지 않고 자기가 지은 죄만을 씻으려 할 것입니다.
죄의 원인이 씻겨지지 않는 것입니다.
뱀이 죽지 않으면 죄를 지어도 죄인 줄도 모릅니다.
뱀이 모든 죄를 정당화하기 때문입니다.
뱀이 눈을 가리기 때문입니다.
죄는 죄를 짓게 만드는 자기가 뱀임을 볼 때 비로소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누구도 뱀이 되기를 원치는 않기 때문입니다.
오래전 어느 신문에서 전과자들의 간담회를 연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절도 전과자들은 자신의 경험담들을 털어놓았습니다.
이때 멈칫하게 하거나 절도를 포기하고 나오게 된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한 명의 전과자가 말했습니다.
“주인이 코를 골고 자면 도둑질하기에 아주 편합니다.
코 고는 소리에 맞추어 한 발짝씩 떼어 놓으면 행진곡에 맞추어 입장하듯이 들킬 염려가 없습니다.
그런데 집이 너무 고요하면 그냥 포기하고 나오고 싶습니다.”
그런데 다른 전과자가 말했습니다.
“난 도둑질하러 들어갔을 때, 그 집 현관에 놓여있는 신발들이 가지런하면 긴장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만일 흐트러져 있으면 내 집같이 마음 놓고 들어갑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거든요.”
어떤 전과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도둑질하다가 뛰쳐나온 적이 있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불쑥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깜짝 놀라 칼을 빼 들었죠. 근데 그 괴한도 칼을 들었습니다. 그제야 알았습니다.
그 괴한이 저라는 것을. 그날은 도둑질 할 수 없었습니다.”
죄를 짓는 사람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거울’입니다.
카지노에는 거울이 없다고 합니다.
자기가 죄에 빠져있을 때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도 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러고 있는 자기 자신을 본다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자아가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자기 본 모습이 드러나게 만드는 거울입니다.
영화 ‘블랙스완’에서 순결했던 주인공은 ‘창녀’라고 써진 거울을 제대로 보지 못해 그 글자를 지웁니다.
하지만 무대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악해지기로 했을 때는 거울을 당당히 바라봅니다.
자기의 모습이 뱀이어도 상관없다고 할 때 죄는 멈추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 거울을 비추어주심으로 자아의 참모습을 보여주시며 기회를 주십니다.
저희 어머니도 고아로 남의 집에서 일만 죽도록 하고 매도 죽도록 맞으며 자라서 다 죽이고
자신도 죽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느님께 불평하는 게 당연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때 바다로 걸어오시는 예수님께서 나병환자촌으로 가시는 것을 보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깨달으셨습니다.
“나병 환자도 사는데 너는 왜 못 사냐?”
예수님은 당신이 안 해줘서가 아니라 자아가 불평 자체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게 어머니는 다시 살 힘을 얻으셨습니다. 모든 죄의 원인이 나에게 있음을 보지 못하면
죄는 영원히 계속됩니다.
십자가를 보며 우리는 어떤 기도를 드립니까?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입니다.”
십자가는 내가 지은 죄들을 보속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속하는 것입니다.
내 죗값은 두 배나 네 배로 갚아주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죗값이 아니라 ‘나’를 보속하셨습니다.
나가 곧 죄이고 나가 죽기 전까지는 죄는 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를 없애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며 내가 죽는다면 비로소 자동적으로 죄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왜 그리스도가 뱀의 모습으로 우리 자아의 거울이 되어주셔야 했을까요?
다른 사람이면 안 됐을까요?
안 됩니다. 뱀만 죽이면 어떤 모습인지 알아야만 자아가 죽기 때문입니다.
박보영 목사가 초기에 사목할 때 길거리에서 방황하던 가출 청소년들을 데려다 키웠습니다.
그들은 불량배들이었고 전과자들이었습니다. 처음엔 박 목사를 칼로 찌르려고 했는데 “조금 있다 찌르고 내 말 좀 들어봐라!”라며 복음을 전해 거둬들인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먹을 것이 너무 없어, 라면 하나를 끓여 7~8명이 나누어 먹어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배고픔을 못 이겨 도둑질하였습니다.
이것을 알게 된 이유는 그들이 도둑질하고 온 돈을 십일조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인에게 발각이 되었을 때는 목사님이 직접 가서 아이들이 감옥에 가지 않도록 싹싹 빌었습니다.
어떤 때는 술에 취한 주인에게 매 맞은 적도 있었습니다.
아이들을 이용해 돈을 버는 목사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때뿐이었고 배고프면 또 도둑질하러 갔습니다.
그날도 주인에게 발길질을 당하고 나오는데 아이들은 심각하지 않은 듯 자기들끼리 웃고
농담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안 되겠다 싶어 박 목사는 교회에서 한 아이를 세워놓고 쇠파이프 막대기로 힘껏 때렸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막대기를 들려주며 “너희들이 나를 10대씩 때려라.
대신 9대 때렸다가 마지막 1대라도 살살 때리면 다시 때리게 할 테니 힘껏 때려라.” 라고 말했습니다.
두 아이에게 20대를 맞았는데 박 목사는 너무 아파서 마음속으로 주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너무 아파요. 더 못 맞겠어요.”
박 목사는 세 번째 아이가 죄송하다며 때린 매에 허리 밑 꼬리뼈를 맞고 쓰러져 정신을 잃고 소리를 지르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리고 매를 맞았고 그렇게 80대를 맞았습니다.
박 목사는 그 일로 거의 한 달 동안을 누워서 지내야만 했습니다.
지금도 그 후유증으로 허리가 안 좋아 항상 뜨거운 팩을 붙이고 다녀야 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변화되지 않던 아이들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더는 도둑질하지 않았습니다.
박 목사가 아이들에게 “왜 나를 때리고 나서 너희들이 변화되었느냐?”라고 물으니, “세상이 다 가짜인 줄 알았는데 매를 맞고 뒹구는 목사님 모습을 보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깨달았을까요? 자기들 때문에 허리가 부러진 한 목사를 본 것입니다.
자기가 맞아야 할 또 다른 자기 자신을 목사님에게서 본 것입니다.
박 목사를 통해 자기 자아만 본 것이 아니라 그 목사가 자신들과 하나가 되며 자신들도 그 목사만큼이나 대단한 존재였음을 본 것입니다.
만약 박 목사가 그들의 죄 때문에 그들이 사랑하는 강아지를 죽이라고 하였다고 합시다.
그러면 죄는 볼 수 있지만, 죄가 가리고 있는 그들의 본 모습은 볼 수 없습니다.
그냥 강아지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죽인다면 어떨까요?
‘내가 그리스도인데 지금 뱀과 뭐 하고 있는 거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누군가를 죄에서 해방해 주기 위해서는 그 거울 뒷면에 “넌 본래 그렇게 살 존재가 아니었어!”라는 말도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거울을 보며 본래의 내 모습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원리입니다.
십자가는 단순히 내 죄를 대신해서 보속하신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 봐야 또 죄를 짓습니다.
존엄한 존재였다가 처참하게 깨진 나 자신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그 뱀이 나의 하느님과 같은 존귀한 모습을 잃어버리게 만든 장본인입니다.
이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려야 했던 이유입니다.
나는 본래 하느님의 자녀였는데 내 안의 뱀이 나를 비참한 존재로 만들어버렸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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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4.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십자가 앞에서 첫 번째로 할 일은 ‘회개’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3-17).”
1) 믿음 없는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고통과 죽음만 보지만, 신앙인들은 십자가에서 부활, 생명, 구원을 봅니다.
믿는 우리에게 십자가는 ‘구원의 상징’이고,
‘하느님 사랑의 상징’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믿는 믿음에서 시작된 종교입니다.
부활신앙이 그리스도교의 기본 신앙이고, 신앙의 핵심이고, 신앙의 목적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어떤 장애인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쳐 준 다음에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여러분 모두와 온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곧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바로 그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여러분 앞에 온전한 몸으로 서게 되었습니다.
이 예수님께서는 ‘너희 집 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0-12).”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신 예수님’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의 사건이고, 십자가는 부활로 가는 중간 경유지일 뿐입니다.
마지막 목적지는 부활입니다.
부활이 없으면 십자가도 없습니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은 십자가라는 물건을 경배하는 날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경배하고 찬양하고 감사드리는 날입니다.>
2) 하느님의 구원 방식에 대해서, 또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방법에 대해서, “왜 ‘십자가를 통해서’인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자녀들이 피와 살을 나누었듯이, 예수님께서도 그들과 함께 피와 살을 나누어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키시고,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이들을
풀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히브 2,14-15.17-18).”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로마 5,8-10).”
<십자가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입니다.
또 십자가는 우리를 죽음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그 ‘죽음’이라는 것을 정복하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으로 죽음을 물리치셨다.” 라고 흔히 표현하는데, 실제로는 ‘부활로 죽음을’ 물리치셨습니다.>
3)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요한 10,14-15.18ㄱㄴ).”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은 힘이 없어서 당하신 일이 아니라, 사랑하는 양들을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신 일입니다.
<빼앗긴 일이 아니라, 내준 일입니다.>
이 말씀은,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라는 말씀에 바로 연결됩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사랑”입니다.
4)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사랑을 믿는다면, 이제 우리가 할 일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바로 ‘회개’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죄인들이여,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이여, 마음을 정결하게 하십시오.
탄식하고 슬퍼하며 우십시오.
여러분의 웃음을 슬픔으로 바꾸고 기쁨을
근심으로 바꾸십시오.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러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야고 4,10).”
진심으로 회개하는 것이 곧 진정한 ‘십자가 현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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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4. 성 십자가 현양 축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오늘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속죄하시려고 몸소 지신 십자가를 묵상하고 경배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경배해야 할 대상은 나무로 만든 물질적 십자가가 아닙니다. 십자가 자체는 죄인을 사형시키는 도구에 불과할 뿐 그 자체로는 우리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십자가에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달리셨기에, 십자가에 달린 채 우리가 당신을 바라볼 수 있도록 높이 들어 올려지셨기에, 십자가가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보통 ‘십자가’라고 하면 예수님께서 걸으신 ‘십자가의 길’과 연관하여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고통과 시련을 떠올립니다. 물론 십자가를 이처럼 고통이나 시련과 연결지어 생각하는 건 잘못은 아닙니다. 하지만 십자가라는 표징에서 그저 고통과 시련 밖에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건 큰 문제가 됩니다. 십자가 안에서 구원과 생명에 대한 희망을 발견할 수 있어야, 십자가를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깨달을 수 있어야, 비로소 십자가는 나를 하느님 나라로 건너가게 도와주는 다리가 되어주는 겁니다. 그런 점을 오늘 제1독서인 민수기에서 찾아볼 수 있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합니다. 자기들을 이집트에서 구해주신 그분의 은혜는 금새 잊어버리고 지금 당장 배고프고 목마르다고 금새 죽기라도 할 것처럼 난리법석을 떠는 것이지요. 하느님은 그런 그들에게 맹독을 지닌 ‘불뱀’들을 보내셨고 그 뱀에 불려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게 됩니다. 그러자 비로소 하느님의 보살핌과 도움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자기들의 비천한 처지를 깨달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께 살려달라고 매달립니다. 이에 하느님은 모세에게 구리로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불뱀에 물린 이들이 그 뱀을 쳐다보자 죽을 위기를 넘기고 목숨을 건지게 됩니다.
그럼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숨을 건진 건 그 구리뱀 덕분일까요? 아닙니다. 그 구리뱀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불뱀을 상징합니다. 또한 ‘뱀’이라는 표징은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죄를 짓게 만드는 원인, 즉 인간의 교만과 편견, 조급함과 두려움 등을 상징합니다. 그러니 ‘구리뱀’은 어느 모로 봐도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요.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것을 만들라고 하셨기에, 불뱀에 물렸을 때 그것을 쳐다보면 살리라고 약속하셨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것이 생명과 구원을 상징하는 표상이 됩니다. 단, 두려움과 걱정을 극복하고 하느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굳은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전제가 붙지요.
예수님은 당신이 그 구리뱀의 역할을 하겠다고 하십니다.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힌 채 높이 들어올려지면, 사람들이 당신을 바라봄으로써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고 하십니다. 단, 이 때도 믿음의 눈으로 그분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전제가 붙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게 아니라 아들을 통해 구원하시기 위해서라는 믿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신다는 믿음입니다. 그런 굳은 믿음을 지니고 있어야만,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고통과 시련이라는 십자가를 마주하게 될 때에 더러운 영이 그랬던 것처럼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그러시냐’고 불평 불만을 쏟아내지도, ‘저희를 멸망시키려고 그러시느냐’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왜곡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자비를 되새기고 힘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십자가를 통해 절망에서 희망으로 건너갈 수 있어야 십자가가 우리 구원의 표징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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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4.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들어 올려져야 ”
고대 그리스의 신화의 인물인 아스클레피우스(희랍 Asklēpios Ἀσκληπιός ,
라틴 Asclepius)는 아폴로와 코로니스 사이의 아들인데, 의료와 치유의 신이었습니다.
세계보건기구 휘장에도 뱀이 감고 있는 지팡이가 있습니다.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에는
뱀이 감겨져 있는데, 현대 의료의 상징으로 새 날개 밑에 쌍 뱀이 지팡이를 감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세계의사 협회나 심지어는 한국의사협회의 상징도 아스크레피오스의 지팡이에 쌍뱀이
감고 있는 모습입니다. 아울러 유전자정보의 집합인 게놈(Genom)은 뱀 두마리가 서로
몸을 꼬아서 올라간 쌍두사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희랍시대 훨씬 전인
수메르 제국의 인장에도 이 쌍 뱀이 등장합니다.
공교롭게도 구약에서도 아스클레피우스의 지팡이를 감고 있는 뱀처럼 민수기에서도
장대에 매달린 구리 뱀이 등장하고 이것이 죽음으로 백성을 살립니다.
민수기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광야에 물이 없다는 이유로 하느님의 일에 불평을 하다가
하느님께서 보내신 불 뱀에 물려 죽을 지경이 됩니다.
사람들은 모세에게 몰려와서 하소연합니다. 그래서 모세가 백성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장대를 높이 세우시고 구리로 불 뱀을 만들어 걸어 놓게 합니다.
그렇게 하여 불 뱀에게 물린 사람들은 높게 세운 장대에 밤을 걸어 놓고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고 뱀에 물린 사람들은 그 뱀을 멀리서 바라만 보아도 치유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제일 혐오하는 우상인 구리 뱀을 만들라고 하신 하느님의 명령은
이해하기가 어렵고 후대 왕정시대에 와서는 이것 때문에 고심하는 모습도 보이기도 하지만
히즈키야 왕(기원전 745-717년)은 그의 종교 개혁으로 뱀을 부서뜨립니다.
“그는 산당들을 없애고 기념 기둥들을 부수었으며, 아세라 목상들을 잘라 버렸다.
그리고 모세가 만든 구리 뱀을 조각내었다. 느후스탄이라고 불리던 그 구리 뱀에게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때까지도 향을 피웠기 때문이다.“(2열왕 18,4)
예수님께서는 장차 당신 자신이 매달리실 십자가를 광야에서의 구리뱀으로 들어
설명하십니다. 사람들은 주님께서 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에 그 때에는 아무도 이해할 수
가 없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요한 3,13-14)
이스라엘 사람들은 물이 없다고 하느님께 불평하다가 뱀에게 물려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바로 높이 올려진 뱀의 모형을 보고 다시 살아납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아버지께 순명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높이 매달리시고 죄로
죽는 이들이 주님을 바라보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15절)
고대 그리스의 신화의 인물인 아스클레피우스(Asclepius)의 지팡이에 매달린 뱀들이
의료와 치유의 상징이듯 주님께서는 민수기의 구리뱀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죽음에서 치유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십자가에 바치신 그 희생제물로 우리가 구원됩니다.
우리가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것은 아무리 이해될 불평이라도 죽음과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불평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 해도 그것은 나를 망가트리고 또 그것을 듣는 이웃도 망할 뿐
아니라 분열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전염병도 엄히 다스렸지만
공동체가 무너질 수 있는 불평도 불 뱀을 보내실 정도로 엄하게 다스리셨습니다.
불평보다는 칭찬과 긍정적인 말 한마디가 사람을 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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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4. 성 십자가 현양 축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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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4.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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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4.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위기를 소망으로 바꾸는 믿음의 삶
<2024.9.14> 아침을 여는 묵상 (왕하 6:24~7:2절)
❝위기를 소망으로 바꾸는 믿음의 삶❞
❚ 어떠한 상황과 환경에 처할지라도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약속을 절대적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 위기 앞에서 어떠한 태도를 보여야 합니까?
➲ 위기 앞에서 원망하지 말고 자신의 상황을 살펴야 합니다(24~30절).
아람 군대에 의해 포위를 당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절망적인 상황을 맞이 합니다. 성 내외의 교통이 두절이 되어 물자의 반입이 어렵게 될었을 뿐만 아니라, 기근으로 인해 성안에서도 먹을 식량이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먹을 양식이 없게 되자 평소에 먹지 않는 나귀 머리가 은 팔십 세겔(일반 노동자의 약 1년치의 품삯에 해당 되는 값)에 거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귀는 레위기에 의하면 부정한 동물이기에 절대로 식용으로 사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비둘기 똥 사분의 일 갑에 은 다섯 세겔에 거래되었습니다. 땔감이었는지 음식이었는지 단정 짓기 어려운데, 요세푸스는 이와 같이 성이 포위되고 기근이 극에 달했을 때, 동물이나 사람의 배설물까지 먹었다고 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해가 됩니다. 왕이 성벽 위를 걸을 때, 여인이 왕을 향하여 도와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왕의 대답은 "...타작 마당으로 말미암아 하겠느냐 포도주 틀로 말미암아 하겠느냐.."(27절)라는 대답뿐입니다. 이는 왕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답답한 상황에 대한 탄식입니다(26~27절). 극심한 굶주림을 못 이겨 어머니가 아들을 삶아 먹는 참담한 일도 일어납니다(28~29절). "왕이... 자기 옷을 찢으니라... 그의 속살에 굵은 베를 입었더라"(30절).. '굵은 베'는 회개, 슬픔을 표시할 때 입는 거친 옷입니다. 왕이 공식적인 왕복 속에 굵은 베옷을 걸쳐 입었다는 것은 사마리아 성에 닥친 재앙으로 인해 회개하는 행동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회개하여 겸손해진 행위라고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견디기 힘든 처참한 현실에 빠진 이스라엘 왕은 자신들을 도우시지 않는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재앙의 원인인 자신의 불신앙을 돌아보지 않고 모든 탓을 하나님께만 돌립니다. 우리 역시도 자신에게 상황이 유리할 때는 가만히 있다가 불리한 상황을 만날 때면 책임을 돌릴 사람과 구실을 찾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순탄할 때에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다가도 위기를 만나면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다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는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아울러 하나님께 은혜만을 요구하면서 자신은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지 또한 스스로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신뢰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고 우리 자신의 신앙을 먼저 돌아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위기 앞에서 먼저 내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고 동시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므로 위기를 소망으로 바꾸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위기 앞에서 교만하지 말고 겸손한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31~33절).
"왕이 이르되 사밧의 아들 엘리사의 머리가 오늘 그 몸에 붙어 있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실지로다 하니라"(31절)... 재앙의 원인인 자신의 불신앙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탓으로 돌립니다. 하나님에 대한 원망은 마침내 적개심으로 변하고 왕은 엘리사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 씌웁니다. 위기의 상황에서 백성의 지도자인 장로들이 왕을 찾아가지 않고 엘리사에게 왔다는 것은 왕보다 엘리사에게 희망을 걸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왕은 엘리사를 죽이려고 사자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이러한 사실을 알고 “사자가 오거든 문을 닫고 문 안에 들이지 말라”(32절)라고 지시합니다. 그러자 왕이 보낸 사자는 이 모든 재앙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며 더 이상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지 않겠다고 하는 왕의 말을 전합니다(33절).
하나님께 더 이상의 희망을 걸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만큼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에게 닥친 환난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기에 피할 길과 구원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도망가는 비겁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더 깊이 들어가는 당당한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인생의 위기를 통해 들어난 우리 자신들의 부족한 믿음을 발견하고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안전한 포구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있는 믿음으로 절망적 상황과 환경을 이기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인생에서 만나는 위기 앞에서 교만하지 말고 더욱 겸손한 태도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므로 위기를 소망으로 바꾸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위기 앞에서 불신하지 말고 온전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7:1~2절).
엘리사는 모든 물가가 정상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이는 곧 아람 군대가 물러가 사마리아 성에 평화가 찾아 올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내일 이맘때에..."(7:1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하나님을 향한 확신이 있는 믿음을 갖게 되는 이때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때입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2절).. 왕의 장관은 자신의 상식과 경험의 수준에서 엘리사가 예언한 일이 일어날 수 없다고 강하게 부정합니다. 이에 엘리사는 이 예언이 성취되는 것을 그가 직접 보기는 하겠지만 그 양식을 먹지는 못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는 보이는 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자신의 생각대로 내일을 계획하며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려운 상황 속에서 우리의 불신앙이 확연히 드러나기도 하고,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던 믿음이 빛을 발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난 속에서 이를 악무는 인내심을 발휘하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 우리는 환난 가운데서도, 환난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환난으로 인해서 기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상황에 굴하지 말고 말씀을 붙들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므로 위기를 소망으로 바꾸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인생의 위기 앞에서 자신의 잘못은 뒤로한 채 하나님을 탓하는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자신을 먼저 돌아보는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위기 앞에서 눈에 보이는 현실로 인해 절망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약속을 굳게 믿는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삼하 6:24~7:2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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