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야의 지구 독법 /허은규
열대야라는 단어를 들으면 서울이 커다란 세숫대야이고 그 속에 물이 출렁이듯 열기가 고여지는 상상을 한다. 켜져 있는 가로등, 거리 가득한 간판의 불빛들마저 죄다 열기구로 보이고, 지나가던 행인들이 땀을 훔치면서 “한국도 이젠 사계절이 아니라 여름, 겨울의 두 계절이야”라고 푸념을 쏟을 때 어김없이 폭염은 찾아왔다.
북한산에서 발원하여 청계천과 합류하는 정릉천의 물가엔 메리야스만 입은 채로 장판 위에 앉은 아저씨가 휘적휘적 부채를 부치고 있다. 그 옆에는 몸매가 푸근한 아주머니가 슬리퍼도 벗지 않은 채 누워서 들척이고 있다. 은박지 장판 위에 누운 모습이 꼭 임연수어 굽는 모습 같다.
한낮의 더위는 톰슨가젤처럼 도로 위를 파닥파닥 뛰어다녔고, 저녁에 열기는 습지의 악어처럼 바닥에 배를 붙이고 아스팔트 위를 굼실굼실 기는 중이다. 여름의 절정 속에 사람들은 밤낮없이 사르르 녹고 있다. 아이스크림은 흘러내리고 아스팔트의 콜타르는 찐득이고 길가의 입간판도 흐물거린다.
가마솥더위 가운데 도시의 시민들은 아무래도 국탕의 재료임에 틀림없다. 무쇠 솥에 저 은행나무 다섯 주를 우악스레 구겨 넣고 청계천 물을 콸콸 들이 붓는다. 거기에 한강 잉어 삼십 마리와 중랑천 누치 열 마리, 그리고 마침내 시민들을 한데 몰아넣고는 고루고루 섞는다. 이 특급 재료의 용봉탕. 펄펄 끓는 가마솥더위 속에 뒤엉켜 땀과 약성을 쏟으며 푹 삼기고 있다. 그래, 우리는 그렇게 함께 익어가고 있다.
낮 최고 기온이 30도 이상이면 열대지방의 날씨와 다름없다하여 ‘트로피컬 데이’라고 명명한다. 그런 날 중에서 특히 밤의 기온이 25도를 웃돌 때를 ‘열대야’ 혹은 ‘트로피컬 나이트’라고 부른다. 이는 하와이 와이키키 해변이 연상될 만큼 맛깔스런 단어이지만 실상은 연로한 노인이 쓰러지고, 가축과 야생 동물마저 탈진하여 죽는 치명적인 밤이다.
고온 다습한 북태평양 고기압이 확장되면 열대야의 밤샘이 시작된다. 한낮의 열기를 잡아 가두고 밤의 냉각 효과마저 무력화시키는 이 기단은 태평양이 부리는 군단이다. 동해로부터 들썩이며 상륙하는 열기의 병정들, 저 뜨거운 날개를 펄럭이며 쇄도하는 적도 태생의 독수리들이 도심을 점령하는 것이다.
여름의 촘촘한 거미줄에 걸린 시민은 무력하고 피곤하다. 잠들지 못하고 멍하니 쳐다보는 벽지 위에 갑자기 지구의 가장 더운 곳, 아프리카의 세렝게티가 아른거린다. 누런 가젤과 컹컹대는 하이에나, 기린과 얼룩말이 함께 뛰어다니는 사바나의 한낮은 도대체 얼마나 더울까. 아프리카 주민의 검은 얼굴과 그 얼굴에 들꾀는 파리 떼, 흰 뼈만 남은 아프리카 물소의 시체가 자꾸만 생각난다.
지구에서 적도선이 지나는 지점은 어김없이 열대 기후다. 적도선은 벌거벗은 포로의 등판을 사정없이 때리는 채찍처럼 지구 위로 뻗쳐있다. 그 짜릿한 고압의 전깃줄에 감긴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적도 태평양 군도의 주민들은 매일을 염염한 더위 속을 산다. 인류가 시작된 이래 그 땅에서 뜨거움이 식은 적은 없을 것이다.
열대 주민을 바라보는 소위 문명인들의 시각은 어떠했던가. 아프리카 주민들의 태평스러움을 목가적이라고 긍정하면서도, 내심 문명을 구축하지 못한 그들을 낮게 보는 색안경을 끼고 있었다. 실토하건대 인종 차별의 요소는 누구에게나 있었다. 음부만 겨우 가린 원주민들의 미개한 습속과 오랜 역사를 춤과 사냥, 부족 간의 전쟁으로 소일하던 그들을 향해 한심함과 더불어 우월감을 느꼈던 것이 사실이다. 심지어 토인(土人)이란 단어까지 나왔다.
그러나 만약 이 텁텁한 열대야가 한평생 지속되면, 현재의 문명인들도 속절없이 아프리카 부시맨처럼 훌훌 옷을 벗어 던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니 지금 같은 고도의 문명을 구출할 수 있었을까. 우리가 생각하는 ‘문화’란 것은 그 땅의 폭염 위에서는 ‘얼음’만큼이나 만들어지기 어려웠던 건지 모른다.
온대와 냉대에 드러누운 아메리카와 아시아, 유럽 대륙의 주민들은 천복을 받아 문명을 꽃피웠고 혜택을 누렸다. 반면에 지구의 가장 혹독한 지역을 분배받은 열대 주민들은 천수답에 물 떨어지듯 하늘의 가호를 비는 것 외엔 달리 도리가 없었다.
복은 혼자 누리기보다 나누어야 하고 비극은 조롱받을 게 아니라 구제 받아야 하는 것, 이제 문명과 야만의 정의는 바뀌어야 한다. 야만적인 건 인종이 아니라 이 자비심 없는 더위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 사는 지구 전무가 불모의 혹성마냥 가혹해질 지도 모르겠다. 온난화는 생태계를 황폐하게 만들고 열대야를 낳았다. 우림의 마구자비 벌목과 화석 연료의 과도한 사용으로 인해 점점 많은 이산화탄소와 메탄가스가 발생하고 지구는 비닐하우스가 되고 있다. 따지고 보면 오늘날의 열대야도 녹지를 없애고 자동차의 매연과 건물의 열기를 마구 배출한 도시인의 제 발등 찍기와 다름없다.
지구 전체가 먼 혹성의 표면처럼 사막이 될 수도 있다니.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옴짝달싹 못하고 평균 40도를 웃도는 열기 속에서 평생을 살라고 한다면 버틸 자신이 없다. 아니, 우리들 세대야 좋은 환경에서 휘뚜루마뚜루 살면 다행이라고 해도 장차 덤터기를 고스란히 뒤집어 쓸 후손들은 어쩔 것인가. 잔혹한 미래에 생뚱맞은 한기마저 느낀다.
열대야, 도무지 잠들지 못하는 밤, 혹서의 열풍에 뒤척이는 밤. 왜 여름밤이 이토록 더운 건지 이제야 알겠다. 열대야는 지구가 사람들을 일부러 깨워서 반성문을 쓰게 만든 밤이다. 햇빛의 온도가 사과를 숙성시키듯 더위가 나의 생각을 농익인다. 열기가 가르쳐준 지구 독법에 눈을 뜬 밤, 이 밤은 덥지만 아름다운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