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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덕스님 시봉일기 5권 - 진여불성(眞如佛性)의 공덕을 믿자. 4. 인생고를 벗어난 행복의 자리- 無住淸華|성륜사 조실, 조계종 원로| 광덕스님 시봉일기
진여불성(眞如佛性)의 공덕을 믿자
無住淸華|성륜사 조실, 조계종 원로
4. 인생고를 벗어난 행복의 자리
우리 불자님들, 「반야심경」잘 아시지 않습니까? 인생고를 어떻게 벗어나야 될 것인가? 불교를 한 마디로 말씀드리면 인생고를 떠나서 안온하고 행복스런 최고의 자리를 이루려고 하는 것이겠지요. 만약 이 말을 상식적인 분야라든가 우리가 알기 쉬운 일반적인 분야로 이해해서는 결코 인생고를 떠날 수 없습니다. 못 떠납니다.
「반야심경」 앞머리에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하여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인생고를 떠나기 위해서는 오온이 다 비어 있음을 비추어 봐야 인생고를 벗어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과연 오온이 어떠한 것인가? 우리 불자님들은 대체로 오온 정도는 다 아시지 않습니까?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즉 물질과 정신이 오온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느끼고, 분별하는 그런 차원에서의 물질과 정신이 색수상행식, 곧 오온이란 말이지요. 그 색수상행식인 오온이 다 비어 있음을 비추어 봐야만 인생고를 비로소 떠난다고 경에서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정신과 물질, 이것을 오온이라고 말하고 또 이것이 비었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잘 이해를 못합니다. 정신과 물질이 분명히 이대로 있는 것인데, 어떻게 해서 비어 있다는 말인가? 하고 의심을 냅니다.
5. 석공(析空)과 체공(體空)
여기서 우리 불자님들이 분명히 아셔야 될 것은, 모든 것을 다 분석해서 공으로 돌아가는 이른바 쪼갠다 분석한다는 석(析)자, 빌 공(空)자, 합하여 석공입니다. 쪼개거나 분석해 들어가보니 비로소 공이라는 말이지요 분석해 본 뒤 도달하는 석공과 모든 법 현상 그대로 본래 텅 비었다는 체공(體空)을 동시에 알아야 합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몸도 비어 있고 마음도 비어 있고 또는 산하대지 두두물물이 본래부터 다 비어, 이름 그대로 체공이라는 것이지요. 말 그대로 본래부터 아무런 이유와 조건 없이 비어 있는 것을 체공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똑같은 공(空)도 현대의 물리나 화학을 연구하는 모양으로 차근차근 쪼개고 분석해 가지고 마침내 다 공이라는 결론을 갖는 것, 이것을 석공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른바 학문적인 공입니다. 알음알이 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학문적인 방법으로 접근해서는 분석과정에서 다 해체되어 버립니다.
내 몸이 본래 공인데, 그것을 모르고 분석해 본 뒤에 비로소 공이 된다고 하면 분석하는 도중에 내 몸은 죽어 버리겠지요. 그러므로 이 석공은 인생고(人生苦)를 해탈하는 이른바 합리적인 진리의 참된 공은 못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체공은 우리가 납득하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바로 문제 해결의 근원적인 방법입니다. 꼭 체공의 바른 뜻을 여러분들은 깊이깊이 음미하고 잘 납득하셔야 합니다.
우리 중생이 오온을 볼 때는 모든 것이 명명백백하게 존재합니다. 그러나 맑은 법안(法眼)이나 혜안(慧眼)이나 불안(佛眼) 등, 청정한 안목에서 보았을 때는 우리 중생이 그토록 명명백백히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 그대로 바로 공이란 말입니다.
여러 불자님들, 유식학에 있는 일수사견(一水四見)이란 법문을 들어서 잘 아실 것입니다. 같은 물이라 해도 우리 인간이 생각할 때는 마시는 물이지만, 귀신이 물을 볼 때는 불로 본다는 것입니다. 즉 활활 타는 불로 본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천상[하늘나라] 사람이 볼 때는 어떻게 보는가.
혹시 여러분들 가운데서 제가 천상이나 귀신 말씀을 드리면 천상은 실지로 있는 것이 아닌데, 우리 중생이 좋은 일을 해서 천상으로 가라는 권선징악으로 말하는 방편이 아닌가?하고 의심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천상은 분명히 존재하는 세계입니다. 우리 인간이 허망하지만 존재하듯이 천상도 허망하여 생사가 있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세계란 말입니다.
그런데 천상의 인간은 우리 지상의 인간보다 훨씬 더 안목이 정화되어 있습니다. 즉 마음이 더 맑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천상 사람들이 물을 볼 때는 영롱한 유리로 본다는 것입니다. 영롱한 유리 보배로 본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가장 수승한 안목, 가장 청정한 안목, 모든 존재의 실상을 그대로 볼 수 있는 부처가 보면 어떻게 볼 것인가? 부처의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같은 물이지만, 그때는 물을 불성(佛性)으로 본다는 말입니다.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으로 본다는 말이지요.
광덕스님 시봉일기 5권- 임의 물결, 글-송암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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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대부분의 스님들은(제가 아는한) 결국 화두참선으로 귀결됩니다. 공도리를 알기 위해서는요.
관세음보살께서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함으로써(하실 때?) 오온개공임을 비추어 아셨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관건은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한다는 것이 무엇이냐? 가 되겠습니다.
아래 광덕 큰스님의 <반야심경 강의>에서 발췌한 내용을 옮겨봅니다.
....(중략)
그러므로 이와 같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한다는 것은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아니다.
생각을 일으켜서 얻는 것이 아니며
어떻게 계교를 부려서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얻는 것도 아니며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말끔하고 명랑한 본분지 그대로 있는 것이다.
일체 경계를 두지 않는 것이며,
일체 존재나 인식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본분실상을 잃은 것은 경계 등 망경(妄境)을 취한 때문이니,
망경을 취함이 없을 때 반야는 낭연히 드러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념이나 일호의 들거나 나거나 얻음이 없는 반야바라밀다는
필경 반야바라밀 자체도 있음이 없는 것이니,
여기에 진실 바라밀의 현장이 노정된다.
여기에서는 일체가 반야바라밀일 수밖에 없다.
모두가 자성의 본분활동이며 반야대행이다.
만약 반야바라밀다를 닦고 들어감에 일동(一動), 일정(一靜), 일념(一念)이라도 있다면
이는 사법(邪法)이다. 반야가 아니다.
일언이폐지(一言而蔽之)하면
본래 본심대로의 안립(安立)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것이며,
자성실상의 개현이 반야바라밀다를 운용하는 것이며,
청정본심을 현발(現發)하는 것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는 것이며,
일체 경계에 상이 없는 무진만행을 전개하는 것이 반야바라밀다를 궁진(窮盡)하는 것이다.
경에는 '깊은' 반야바라밀다라고 했다.
반야에 깊고 얕음이 있다는 말일까?
아니다.
심(深) 또는 심심(甚深)이라 하면 gambhra 인데
이 형용(形容)은 육바라밀(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중의 하나인 지혜 바라밀다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 모두를 포함하는 반야바라밀임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_()_
@법혜 큰스님 말씀대로 <반야바라밀은 앞의 다섯 바라밀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라는 게 주류 해석입니다. 물론 반야바라밀이 따로 있는 것처럼 해석하는 부류도 있다고 하네요.
그런데 이런 해석은 역시 세상이 <따로 국밥>이 아님을 뜻합니다.
즉, 반야가 보시, 정진, 인욕 이런 걸 떠나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란 거죠.
반야바라밀을 하려면 반야를 따로 찾아 반야만 부르짖을 게 아니라 보시 인욕 정신 속에서 바로 반야를 봐야한다, 이런 말씀이지요.
그런데 이런 걸 알아차리는 분들이 과연 몇 분이나 계실까요?
@법혜 큰스님의 반야심경 강의를 보면 큰스님은 따로 다시 반야행을 다섯가지(제 기억이 희미한데, 아마 맞을 겁니다. )로 말씀하시지요.
저는 이때 큰스님께서 마지막에 <이런 반야바라밀이 바로 보현행원이다!>라고 분명히 한 마디 언급해주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그러면 반야행이 바로 보현행임이 <증거>되었을텐데요...
감사합니다. _()()()_
일념도 없이 행하는 일이 반야바라밀다라는 말씀 공부합니다.
청하큰스님께서는 공임을 아는 것이라면 광덕큰스님께서는 그것을 일념도 없이 행하는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하루 아침에 큰 덩어리로 알아지는 것이 아닐 것이라 생각합니다. 명훈가피처럼 명훈이 되어 어느날 체로 알아서 직접 행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다시 봐도 큰스님께서는 <조견오온개공>에 역점을 두셨지 <행심반야바라밀다>는 언급이 없으시네요.
지금까지 반야심경의 정통적 해석은 심경의 핵심이 <조견오온개공>입니다.
<행심반야바라밀다>가 아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