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빈은 2019년 5월부터 2020년 2월까지 9개월 동안 아동청소년을 포함한 여성 피해자들을 협박해 성 착취 영상물을 제작하고 이를 박사방이란 이름붙인 텔레그램 대화방을 통해 유포한 인물이다. 놀랍게도 평범한 여성들의 모임 ‘리셋(ReSET)’이 그의 범죄를 추적하고 밝혀냈다. 그녀들은 일상을 털어 텔레그램 채널을 돌며 성착취·불법촬영 영상이 공유되는 증거를 남기고 유포자를 신고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지난해 4월 조주빈이 기소되었고 11월 1심에서 징역 40년을 선고받았다. 조두순이 12년 형을 받았는데 40년형은 이례적으로 강력한 처벌이라는 평가도 있었으나 애초 검찰이 구형한 것은 무기징역이었다. ‘리셋’은 오히려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
‘리셋’은 입법부와 사법부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근본적인 제도 개선이 이루어져야 미성년자이거나 반성의 기미가 보인다는 이유로 성범죄를 감형해주는 가해자 중심적 판결을 막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지난해 초에 국회 국민동의청원에 디지털 성범죄의 엄격한 양형기준 설정 등을 요구하는 청원을 올려 10만명의 동의를 얻었다. 그 결과가 국민청원 1호 법안이라고 알려진 '텔레그램 n번방 방지법'이다. 그러나 ‘n번방 방지법’이란 말이 무색하게 처벌은 딥페이크 범죄로 한정됐다. 40년형이 강력했다 치자. 그래서 디지털 성범죄가 청산되었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인터넷을 조금만 검색해보라. 지금도 어디선가 불법적인 동영상이 촬영되고 유포되고 있는 현실을 확인할 수 있다. 조주빈이 끝이 아니다. 한 사람의 처벌을 전시하는 것만으로는 이 현실을 타개할 수 없는 것이다. .
지나간 조주빈 사건을 지금 왜 다시 이야기하냐고? 사실 아무것도 지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
24일 부산대에서 조국 전 장관의 딸 조민씨의 의전원 입학취소 예정 처분을 발표했다. ‘동양대 표창장과 입학서류에 있는 경력이 중요 합격요인은 아닌 것으로 판단’(공정위)되었으나 대학본부는 ‘입학취소 여부를 판단할 때 지원자의 서류가 합격에 미친 영향력 여부는 고려사항이 아니’라고 했다. 입학취소의 근거는 2015학년도 의전원 신입생 입시요강 지원자 유의사항에 ‘제출 서류 사항이 사실과 다른 경우 불합격 처리하게 되어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또 여기서 절벽 같은 문해력의 벽을 느낀다. 대체 입시요강 지원자 유의사항에 있는 저 한 줄이 무엇을 위해 들어갔는지 생각 좀 하고 말했으면 좋겠다. 지원자들에게 저렇게 이르는 이유는 사실과 다른 서류를 들이밀어 그걸로 점수 따 합격할까봐 경고하는 거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조민의 그 서류는 합격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며? 이거 뭔 뫼비우스의 띠인지 모르겠다. .
저 유의사항이, 말 그대로 합격에 영향을 주었든안주었든 무조건 사실과 다른 경우 다 불합격시킨다는 뜻이라면 지금 모든 입학생들 서류를 전수조사해야 되는 것 아니겠는가. 문장을 글자 그대로만 해석하면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진다. ‘할머니뼈다귀탕’이 할머니를 살해해서 끓인 탕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때문에 문장의 해석은 그 문장이 왜 들어갔는지 문맥을 살펴보고 그 원래의 취지를 살려 해석하는 것이 옳다. 그렇게 보면, 합격 여부에 반영될까봐 경고한 문장에 의거하여, 합격 여부에 반영되지도 않은 서류를 냈다고 소급하여 합격 취소를 하는 웃기는 짬뽕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부산대는 문과도 없나?) .
지금 우리 사회에는 안락한 지배계층의 자리를 대물림하는 계급 피라밋 상층을 향한 분노와 증오가 있다. 이것을 분명히 직시해야 한다. 분노와 증오는 늘 표적을 찾는다. 나는 표창장이 위조되었는지 어쩐지 모른다. 그러나 당시의 입시 풍토에서 그럴만한 학부모들끼리 서로 품앗이하여 스펙을 만들어주는 일은 흔하디 흔한 일이라고 들었다. 아마도 조민 털 듯이 다 털어 전수조사하면 모르긴 모르되 그 결과가 가히 장관일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런데 조민만 턴 거다. 그래서 표적이 되었다. 조민은 그저 과대대표되고 있는 것이다. .
조민을 처단하는 것이 과연 공정한 일인가? .
조주빈을 40년형 처했다고 디지털 성범죄 양형기준을 높이는 법 따위는 관심갖지 않는 것이 공정한가? 그후에는 더러더러 봐가며 미성년자라서, 반성의 기미가 보여서, 조주빈이 아니라서 그저 가볍게 몇 년형 때리는 것이 공정한가? 조민을 합격취소시켜 고졸의 무직으로 만들면 공정한가? 대입제도가 어떻게 바뀌든 저 상류계층에서는 어떻게든 자식들에게 유리한 길을 찾아낸다는데, 정시 비율 늘어나면 상류층 자제분들 합격률이 더 높아진다는데, 그것이 공정한가? 그때 과대대표될 또다른 표적을 찾을 것인가? .
‘리셋’이 옳다. 결국은 제도를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누구를 처단하기 전에 왜 대학입시 자체의 문제를 생각해보지 않는가? 왜 학벌이 인생을 지배하는 시스템 자체를 바꾸라고 소리치지 않는가? 왜 서울대학을 없애라고 발버둥치지 않는가? 공정함에 그리 목마르다면, 누구를 교수대에 매달 것인지 찾기보다 제도의 무엇이 문제인지 찾아봐야 한다. 그것만이 세상을 바꾼다. 그래서 아직 아무것도 지나가지 않은 것이다. 문제는 여전히 우리 발 밑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