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직업이라면 노동(육체적, 정신적 노동을 망라함)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물질적인 보상을 받는 행위를 일컫는 말이라고들 하는데...근디 영어권에 속한 사람들을 검색하다 보면 특이하게도 직업란에 'diarist'란 게 나온다. diarist라니... novelist, scientist, dentist와 같은 단어들이 멋진 직업을 말한다고 할 때 그럼 diaryist는 뭐라 불러야 될까? 브리태니커 사전에 이 단어를 검색해 보면, 아주 간단하게 '일기 쓰는 사람(A person who writes a diary)'이라고 나와있으니 더욱 헷갈린다. 일기는 누구나 쓰는 행위이자 특별한 기능이나 사전 교육이 필요한 것도 아닌데 거 무슨 거창한 직업이나 되는 양 diarist란 이름을 갖다 붙이는지...하튼 본 글에선 diarist를 일기작가로 부르기로 한다(이 말은 우리나라에서 발간된 영한사전에 실려 있다).
diaritst란 단어를 구글에서 검색해 보면 해당 분야에 속하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또 거기에 나오는 인물들이 남긴 일기들이 훗날 어떤 역사적, 문학적 가치를 발휘하는지 구체적으로 적은 항목들이 꽤나 많았음에 이 방면에 문외한인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 주었다.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어느 개인이 써서 남긴 일기의 내용으로 시간을 거슬러 옛날의 생활 모습과 당시 사람들의 의식 등을 확인할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따라 개인의 일기는 1차적 사료(primary source)로서 엄청난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기의 가치가 널리 인정받기 이전에는 주로 과거의 사람들이 주고 받았던 서찰을 분석하여 당시의 시대상이나 사람들의 생각들을 유추하였다. 역사해석에서도 과거 수천년간 왕조나 위인 등 이른바 잘 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대상으로 하였으나, 20세기 들어 브로델(Fernand Braudel)을 중심으로 한 아날학파(Annales School)는 거창한 규모의 역사책보다는 민중의 활동에 의한 결과물, 예컨대 서찰, 일기, 회계장부, 심지어는 낙서까지도 분석의 대상으로 삼아 역사를 해석해 왔다. 이렇게 볼 때 일기작가(diarist)를 섣불리 얕봐선 안 된다는 건 분명한 듯하고, 해서리 나 역시 앞으로는 일기를 열심히 쓰는 사람들을 존경하기로 한다. 아래에서는 몇 사람의 유명한 일기작가의 업적을 요약해 보기로 한다.
1. Samuel Pepys(1663~1703)
세뮤얼 페피즈는 영국의 해군 행정관으로 일하다 나중에 하원의원으로 정치활동까지 하게 되었다. 찰스 2세 치하의 왕정복고 시대에 해군 행정관이란 직업 을 가진 덕분에 10년간 쓴 그의 일기에는 당시에 일어났던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사료로서의 가치가 크다고 한다.
10년간에 걸친 그의 일기에 기록된 큰 사건들이란, 흑사병으로 런던 인구의 1/4이 사망한 런던 대역병(1665~1666), 5일간의 화재로 런던 거주민 주거지의 90%가 소실된 런던 대화재(1666), 그리고 주변국들의 참전으로 12,000명 이상의 군인이 전사한 제2차 독일 전쟁(1665~1667)을 말한다. 특히 페피즈가 해군 행정관으로 재직했기 때문에 제2차 독일 전쟁의 전황에 대해서는 자신이 본 것에 더하여 각종 전시 문서들을 검토한 내용이 그의 일기에 기술되어 있다고 한다.
2. Violet Bonham Carter(1887~1969)
바이올렛 본햄 카터의 일기는 본래 자신이 문학과 예술에 재능이 있었던 데다 부친이 영국의 내각 총리를 역임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을 진두지휘하는 모습을 직접 보면서 쓴 일기이기 때문에 세인들의 관심을 끄는 내용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그녀는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내각 총리 처칠(Winston L.S. Churchill)과 매우 두터운 친분관계를 유지하였으며, 정치계에도 진출하여 거물 정치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일기에는 이러한 그녀의 다채로운 활동이 담겨있으니 사람들의 흥미와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자료였음은 분명하다 할 것이다.
3. Anne Frank(1929~1945)
안네 프랑크는 독일의 유대인 가족 출신으로 유대인 학살을 피해 은신처에 약 3년간 숨어있으면서 일기를 썼는데, 그녀의 일기는 가상의 친구 키티에게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누군가의 밀고로 가족은 모두 독일군에 의해 포로 수용소에 갖히고 그녀는 거기서 티푸스에 감염되어 사망했는데, 그때가 독일이 항복하기 한 달전이었다지 아마...그녀의 일기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아버지에 의해 세계 60여 개국의 나라에서 출판되어 약 3,200만권이 팔려나갔다고 한다.
4. Anaïs Nin(1903~1977)
아나이스 닌을 검색해 보면 일기작가, 소설가, 수필가 등 평범한 직업 외에 에로틱 작가라는 말이 나온다. 그녀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라면 그것은 성의 해방에 터한 신성모독이 될 것이다. 그러고 봉게 위의 사진도 꽤나 에로틱해 보이긴 하네.
그녀의 본명은 지금까지 내가 본 이름 중에서 가장 긴 이름인데, 굳이 여기 모두 적을 필요는 없어서리 글자 수를 헤아려 보니까 무려 47자였다. 놀라지 마시길...닌은 11세 때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해서 평생을 계속했는데 모두 150권 분량의 일기였다고 한다. 닌의 일기 속에는 일찍 가정을 버린 아버지와의 재회를 통한 육체적 관계를 비롯하여 대표적인 에로틱 소설『북회귀선(Tropic of Cancer)』을 쓴 밀러(Henry Miller), 그리고 그의 부인과의 자유로운 성 관계 장면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이야기들이 나온다고 한다.
또한 그녀의 소설『헨리와 준(Henry & June)』역시 그녀와 밀러, 그리고 밀러의 처 준(June)의 관계를 묘사하고 있는데, 특히 작가와 준의 동성애 장면도 노골적으로 묘사했다고 하는데...이 소설과 같은 제목으로 1990년 출시된 영화는 워낙 그 내용이 파격적이고 적나라해서리 미국영화등급심의 사상 최초로 NC-17(17세 이하 관람 불가) 등급 판정을 받았다는구만글쎄.
참고로 구글에서 유명한 '일기작가(diarist)' 목록을 찾아보면,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망라한 수 백 명의 이름들이 주르륵 쏟아져 나오는데...일본인들의 이름이 수십 명이 나오는데 반해 우리 민족에 속한 인물은 이순신, 최부, 이규원의 꼴랑 세 명 밖에 나오지 않는다. 게다가 난 최부나 이규원이 누구인지조차 모르니 내가 무식한 건가 모르겠구만그랴.
또 일기작가에 관한 재미있는 사실을 찾아보면, 가장 긴 기간 동안 일기를 쓴 사람은 10여 년 전에 세상을 뜬 클로드 프레데릭스(Claude Fredericks)라는 인물로 그는 80년 동안 일기를 썼고, 그의 일기장에 나온 단어 수가 무려 3,000만 개(추정치라고 함)나 된다고 하니 믿거나 말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