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테헤란 아시아 선수권 부터 25점제 댈리포인트 시스템이 도입됐지만 그가 활약한 당시는 4세트까지는 15점제 사이드 아웃제도와 5세트 서브권과 관계없는 랠리포인트 시스템으로 진행되어 0대 14에서도 흐름을 타면 역전이 가능했다. 나카가이치가 흐름을 타거나 컨디션이 좋으면 그의 공격을 막는건 거의 불가능해 수비를 하는 한국팀은 그의 공격인줄 뻔히 알면서도 블로킹도 안되고 항상 당하기만해 중계방송 때마다 울화통이 터졌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일본팀의 공격은 항상 그에게 집중됐고 지금의 삼성화재 가빈의 공격 보다도 더 심했던 일본의 에이스였다. 1989년부터 2000년까지 국가대표 주공격수였던 나카가이치는, 현재 일본남자 국가대표 감독인 우에다를 비롯해, 오다케, 이즈미가와 아오야마, 사사키, 다케우치, 가와노, 가토등과 함께 일본 배구의 전성기를 누렸고, 당시 한국 대표팀은 90년대 후반 하종화 선수를 필두로, 마낙길, 신영철 세터, 박희상, 최천식, 이상열 등이 활약했다. 90년대 중후반에는 임도헌 공격수와 더불어 김세진, 신진식, 윤종일, 이성희 등이 가세 한일 배구의 명승부를 만들어 냈다.
나카가이치가 활약한 11년 동안 한·일전은 36번 벌어져 한국이 22승 14패로 우위를 점했으나 7번의 풀세트 접전이 말해주듯이 매 경기 접전을 펼쳐 배구팬들을 열광 시켰다. 특히 그의 수비를 전혀 하지 않으며 공격하는 모습은 참으로 얄미울 정도였다. 우리나라 배구팬은 그의 활약을 보며 너무나 공격을 잘해 밉기는 했으나 그의 호쾌한 스파이크는 항상 박수를 받기에 충분했다. 그는 우리에게는 미운정, 고운정 다든 선수가 아닌가 싶고 전성기때 그의 실력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선수였다. 90년대 초반 당시 국가대표 코치였던 신치용 감독은 뻔히 알면서도 막지 못했던 정말 배구를 잘했던 선수라고 기억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