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원 신부교수님께서는 올해 (사)나라얼연구소의 이사님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사)나라얼연구소는 우리 전통의 상장례 문화를 유네스코문화로 등재하시고자 연구활동을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는 곳인데요. 신부교수님께서는 지난 2014년 가을 (사)나라얼연구소에서 주최하는 국제학술대회에 발표자로 동참하시며 인연을 맺게 되셨습니다.
(사)나라얼연구소에서는 좋은 자료를 발굴하여 언론사에 제공, 유익한 기사가 보도될 수 있는 데도 많은 정성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최근에도 광복절을 기념하는 기사 한 건이 보도되었는데 생각할 꺼리를 많이 제공해준다 싶어 카페에서 소개합니다.
조원경(58) 나라얼연구소 이사장은 “잊어버려선 안 될 애국자를 잊어버리는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며 “그 후손을 찾아내 고단한 삶을 돌보는 것은 남은 자에게 주어진 최소한의 의무”라고 말했다.
- <중앙일보> 2015년 8월 15일 기사 중에서
[Saturday] “돈 한 푼 없어 … 1만원만 주시옵기를” 독립투사 후손의 곤궁한 삶 드러나
독립운동가 서왈보 아들이 신익희에게 쓴 편지
광복 70주년을 12일 앞둔 지난 3일 인터넷 고서 경매에 편지 한 통이 올라왔다. 1953년에 쓰여진 편지였다. 수신인은 신익희(申翼熙·1894~1956) 당시 국회의장이었고, 발신인은 봉투 뒷면에 ‘독립운동자 고 서왈보(徐曰甫)의 유자(遺子) 진동(振東)’이라고 붓으로 적혀 있었다. 발신지는 ‘부산 초읍동 603번지 신애원(信愛院)’이었다. 신애원은 51년 장애를 입은 전쟁 고아를 보호하는 시설로 개원했으며 현재도 장애인 복지시설로 운영되고 있다.
봉투 안에는 편지 두 장이 들어 있었다. 한 장은 국회의장 앞으로, 또 한 장은 국회의장 비서에게 보내는 내용이다. 서왈보가 대체 누구이길래 그의 아들이 국회의장 앞으로 편지를 쓴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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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왈보(1886~1926)는 해외 독립운동가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였다. 함경남도 원산 출신으로 평양 대성학교에서 수학하고 도산 안창호 등과 함께 시베리아로 건너가 사관학교를 설립, 젊은 독립투사를 양성했다. 3·1운동 뒤 망명한 애국지사들과 함께 남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 뒤 베이징 육군항공학교에 들어가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가 됐다. 불행히도 1926년 베이징을 방문한 이탈리아 비행사의 비행기를 시승하다 추락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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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왈보의 아들이 국회의장 앞으로 쓴 편지는 서툰 중국 문어체(백화문·白話文)다. 내용은 기구하다.
‘큰아버지 아룁니다…지난해 큰아버지가 부산에 오셔서 도와주셨으면 했던 것은 오로지 이 못난 조카의 취직 문제였습니다. 후회스럽습니다. 조카는 사는 것이 너무 어려워 스스로 일어서려고 1년 동안 마음을 다해 도장 새기는 기술을 익혔습니다. 스스로 살아가는 길을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돈 한 푼 없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저에게 1만원을 주시옵기를 피눈물로 간절히 바라옵니다. ’
장애인으로 시설에 몸담은 서진동은 자립해보려고 몸부림을 쳤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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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동의 이후 소식은 모른다. 국가보훈처는 여태 서왈보의 다른 후손 역시 찾지 못했다. 보훈처는 90년 서왈보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주기로 했지만 이런 이유로 유족에게 수여하지 못했다. 조원경(58) 나라얼연구소 이사장은 “잊어버려선 안 될 애국자를 잊어버리는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며 “그 후손을 찾아내 고단한 삶을 돌보는 것은 남은 자에게 주어진 최소한의 의무”라고 말했다.
대구=송의호 기자 yee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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