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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1호 : 좌수영대첩비(左水營大捷碑) 여수 1973.05.04 지정
충무공 이순신의 공훈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된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대첩비이다. 전라남도 해남의 명량대첩비(보물 제503호)와 함께 일제의 박해로 1942년 서울로 운반되어 행방을 알 수 없다가, 광복 이후 해남지역 유지들의 수소문으로 경복궁 근정전 앞뜰 땅 속에서 찾아내어 지금의 자리에 다시 세워졌다.
비(碑)는 한 돌로 이루어진 바닥돌 위에 거북받침돌을 두고, 비몸을 세운 후 구름과 용, 연꽃 등이 조각된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비문의 글은 당시 이름을 날렸던 이항복이 짓고, 글씨는 명필 김현성이 썼으며, 비몸 윗면의 ‘통제이공수군대첩비(統制李公水軍大捷碑)’라는 비 명칭은 김상용의 글씨이다.
조선 광해군 7년(1615)에 세워졌으며, 비의 왼쪽에는 숙종 24년(1698) 남구만이 지은 비의 건립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기록에는 이순신의 막료로 활약하였던 수군통제사 유형과 좌수영지역의 유지 및 후손들의 노력으로 건립하게 된 경위를 비롯하여, 이 때 타루비(보물 제1288호)도 대첩비 옆으로 옮겨 세우고, 비각을 세워 보존하였다는 비 건립 전후의 기록이 밝혀져 있다.
제572호 : 송광사고려문서(松廣寺高麗文書)
모두 고려시대의 유물로 절에 관한 중요자료이다.
지정된 유물을 보면 첫째,수선사의 창건연혁과 관련된 형지기 1점, 둘째, 수선사에 소속되어 있는 노비를 기록한 노비문서 1점, 그리고 셋째로 팔사파문자(八思巴文字)의 문서라고 전하는 외국문자로 된 문서 1점 등 총 3점이 있다. 특히 팔사파문자로 된 문서는 아직도 해독되지 못하여 내용을 파악할 수 없으나, 전체적으로 살펴 볼 때 고려시대의 유물인 것만은 확실하다.
고려시대에 묵으로 쓴 글씨가 남아있는 것은 매우 희귀한 예로, 오늘날까지 원래 모습대로 보존된 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들은 고려시대 문서의 양식과 필법 등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로 판단된다.
제572-1호 : 수선사형지기(修禪社形止記)
제572-2호 : 노비첩(奴婢帖)
제573호 : 시천견록및서천견록(詩淺見錄및書淺見錄) (재)아단문고
우리나라 최초의 유교경전 해설서이다. 고려말·조선초의 유학자 양촌 권근(1352∼1409)이 지은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가운데 하나로서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에 대한 해설을 하고 있다.
권근은 공민왕 17년(1368) 과거에 합격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조선을 개국하는데 공이 커 개국공신에 봉해진 인물이다.
이 책은 12장의 필사본으로 ‘시설(詩說)’이라는 작은 제목이 붙어 있으며, 『서천견록』25장과 함께 묶여 있다. 충청도 관찰영인 금영에서 세종 11년(1429)∼세종 12년(1430)에 발간한 것으로 추정되며, 인쇄는 그리 깨끗하지 못한 상태이다. 한국 유학사에 경전을 해석한 전문서로서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제574호 : 해서암행일기(海西暗行日記) 서울 박성철
이 책은 조선조 문신인 박만정(1648∼1717)이 숙종 22년(1696) 3월에 황해도 암행어사의 명을 받고 현지를 직접 돌아다니며 시찰한 65일간의 사실을 적은 기록이다. 박만정은 문과에 급제한 후 영광군수 등의 벼슬을 지낸 인물이다.
내용은 전문 61장 가운데 일기부분이 32장이고 임금에게 올리는 보고서인 서계단자가 19장, 박만정이 명을 따를 것에 대한 비변사의 의견을 기록한 것이 4장, 그 밖에 암행어사와 관계없는 신상에 관한 것을 기록한 부분이 6장으로 되어있다.
이것은 당시 국민생활의 빈곤, 관료들의 일선행정실태 등을 서술한 것으로 조선 후기 사회 및 행정사료로 귀중할 뿐만 아니라, 조선의 특수제도인 암행어사의 활동상 실태를 이해하는 데에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제575호 : 문경 대승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도 및 관련문서
(聞慶 大乘寺 木刻阿彌陀如來說法圖 및 關聯文書)
이것은 원래 부석사에 모셔져 있던 것을 대승사로 옮겨 놓은 것으로, 후불탱화를 나무로 깎아 돋을새김, 또는 뚫을새김으로 표현한 것이다. 탱화란 천이나 종이에 그림을 그려 족자나 액자의 형태로 만들어서 거는 불화의 일종으로, 대개 법당 본존불의 뒤에 후불탱화로 걸린다. 조선 후기에는 이런 목각탱이 꽤 유행하였는데, 이것은 그 가운데에서 가장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아미타후불탱화를 조각한 것으로 중앙에는 광배와 연꽃을 새긴 대좌를 새기고, 여기에 별도의 나무로 깎은 아미타불상을 안치하고 있다. 이 좌우로 5단에 걸쳐 협시상들을 안치하고 있다. 이것은 조선 후기 불교조각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또한 이 목각탱 이외에도 대승사로 옮기기 전에 부석사와의 분쟁관계를 적은 문서들이 남아 있다.
제575-1호 :「상주대승사외사사승도등장」
제575-2호 :「상주사불산대승사승도등장」
제575-3호 : 「도내상주사불산대승사제승등장」
제575-4호 : 「완의」
제576호 : 봉업사명 청동북(奉業寺銘 靑銅金鼓) 연세대학교박물관
반자란 절에서 사용하는 금속으로 만든 일종의 타악기이다. 금고 또는 금구라고도 하는데, 절에서 대중을 불러모으거나 급한 일을 알릴 때 사용한 도구이다. 이 반자는 지름 61㎝, 너비 12.9㎝로 비교적 큰 반자이고, 표면의 장식 문양도 특이하다.
3줄의 돌출선을 돌려 3개의 원으로 나누었다. 중심원에 9개의 둥글게 돌출된 연꽃 열매가 있고, 주변에 8장의 연꽃잎이 있다.
가운데 원에는 24장의 연꽃잎을 새겼고, 바깥쪽 원에는 네 곳에 구름 무늬가 있으며, 가장 자리에 꽃봉오리 무늬가 새겨져있다. 옆면에는 중간에 돌출선을 돌리고 그 선 위에 3개의 고리를 달아 매달 수 있게 하였고, 고려 고종 4년(1217)에 만들어진 반자임을 알 수 있게 하는 글씨가 있다.
제577호 : 정통5년명분청사기상감어문반(正統五年銘粉靑沙器象嵌魚文盤) 리움미술관
분청사기는 고려말 쇠퇴기에 접어든 청자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데, 조선 초에서 임진왜란 전까지 약 200년간 만들어진 자기류의 하나이다. 높이 9.4㎝, 입지름 35.8㎝, 밑지름 13㎝인 이 그릇의 가장자리 끝부분은 위쪽을 향하여 살짝 올라갔으며, 안쪽 바닥에는 이중으로 원을 돌렸는데, 그 안에 흰색의 꽃무늬를 상감기법으로 그려 넣었다.
3갈래의 가지가 바닥의 넓적한 부분을 자연스럽게 3부분으로 나누었고, 그 사이사이에 같은 방향으로 헤엄치는 물고기 한 마리씩을 상감하였다. 물고기의 윤곽과 비늘 등은 흰색으로 나타냈고, 눈 부분만 검게 나타냈다. 유약의 색깔은 청록색에 가깝다.
이 그릇은 죽은 사람의 생애를 기록해 무덤 옆에 파묻는 묘지(墓誌)를 겸한 분청사기이다. 그릇 가장자리에는 이 그릇의 제작연대가 세종 22년(1440)임을 알 수 있는 글이 있어 중요한 역사적 자료가 되고 있다.
제578호 : 흥국사대웅전후불탱(興國寺大雄殿後佛幀) 여수흥국사
석가가 영취산에서 여러 불·보살에게 설법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탱화로, 비단바탕에 채색하여 그렸으며 크기는 가로 4.27m, 세로 5.07m이다. 탱화는 천, 종이에 그린 그림을 족자나 액자의 형태로 만들어 거는 불교그림을 말한다.
이 탱화는 화면 중앙에 있는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앞쪽 양옆으로 여섯 명의 보살들이 배치되었고, 그 옆으로는 사천왕을 거느리고 있다. 석가여래상의 바로 옆과 뒤편으로는 10대 제자를 비롯하여 따르는 무리들이 조화롭게 배열되어 있다. 석가여래상은 왼쪽 어깨에 옷을 걸쳤고, 얼굴은 둥글고 풍만한 모습이다.
채색은 대체로 붉은색과 녹색으로 이루어졌는데, 머리광배의 녹색은 지나치게 광택이 있어 은은하고 밝은 맛이 줄어든다. 그러나 꽃무늬나 옷주름선 등에 금색을 사용하고 있어서 한결 고상하고 품위있는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숙종 19년(1693)에 왕의 만수무강과 나라의 평안을 기원하기 위해 천신(天信)과 의천(義天) 두 승려화가가 그린 이 탱화는 원만한 형태와 고상한 색채의 조화로 17세기 후반기의 걸작으로 높이 평가된다.
제579호 : 괴산외사리석조부도(槐山外沙里石造浮屠) 간송미술관
외사리 마을의 산기슭에 있었던 탑으로, 일제시대에 일본인에 의하여 해외로 반출될 뻔 하였던 것을 간송미술관에 옮겨 세워 놓았다. 한국전쟁 때 탑이 무너져 각 부분이 흩어졌으나, 1964년 다시 세워 원래의 모습을 되찾게 된 것으로, 기단(基壇)과 탑신(塔身)의 각 부분이 8각으로 이루어진 일반적인 모습이다.
기단은 아래받침돌이 상·하 2돌인데, 아래에는 안상(眼象)을 새기고, 위에는 연꽃무늬를 돌린 후 8각마다 꽃조각을 돌출시켰다. 가운데받침돌은 아래에 구름모양을 돋을새김하였고, 그 위는 각 면이 위는 좁고 아래는 넓은 배흘림을 하고 있어 특이하다. 탑신은 몸돌이 가운데받침처럼 배흘림을 하고 있고, 남북면에는 문짝모양의 조각이 있는데, 그 안에 자물쇠가 돋을새김되어 있다. 지붕돌은 처마가 높아졌고, 각 귀퉁이마다 지나치게 커보이는 꽃장식이 솟아있다. 꼭대기에는 중간에 두 줄의 선을 돌린 둥근돌 위에 이와 비슷한 모양의 장식이 두 개 더 얹혀져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제580호 : 전문경오층석탑(傳聞慶五層石塔) 간송미술관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시대의 탑이다. 원래는 경상북도 문경에 있었던 것이나,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다른 곳으로 옮겨 가려 하자, 고(故) 전형필(全鎣弼)선생이 이를 수습하여 지금의 자리에 세워놓은 것이다. 2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려 놓은 모습으로, 각 부분이 거의 완전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아래층 기단의 4면에는 간단한 무늬를 움푹 들어가게 새기고, 위층 기단에는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하나씩 새겼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씩 교대로 쌓았는데, 5층의 지붕돌만은 다른 곳에서 옮겨 온 듯 어색하다. 각 층의 몸돌마다 모서리에 기둥을 새겼으며, 1층의 남쪽 면에는 자물쇠 모양의 조각을 하였는데, 조각 자체가 작고 얕아서 문의 표현을 단순화시킨 듯 하다. 짧고 가파른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4층까지는 4단이고, 5층부터는 3단으로 줄어들었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네모난 노반(露盤)과 복발(覆鉢)이 하나의 돌에 새겨져 얹혀 있는데, 네 귀퉁이마다 꽃조각이 장식되어 있다.
아래층 기단의 뚜렷한 안상조각, 지붕돌 받침이 4단, 3단 등으로 일정치 않은 점 등이 고려시대의 석탑임을 짐작하게 하며 전체적으로 상하의 비례가 아름다워 안정감이 느껴진다. 석탑 바로 앞에는 배례석(拜禮石)이 놓여 있어 그 격식을 갖추고 있다.
제581호 : 월성골굴암마애여래좌상(月城骨窟庵磨崖如來坐像) 경주
기림사 골짜기에 위치한 골굴암의 높은 암벽에 있는 자연굴을 이용하여 만든 12개의 석굴 중 가장 윗부분에 있는 마애불이다. 조선시대 겸재(謙齋) 정선이 그린 ‘골굴석굴’에는 목조전실이 묘사되었으나 지금은 바위에 흔적만 남아있다.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높이 솟아있고, 윤곽이 뚜렷한 얼굴은 가늘어진 눈·작은 입·좁고 긴 코 등의 표현에서 이전 보다 형식화가 진전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입체감이 두드러진 얼굴에 비해 평면적인 신체는 어깨가 거의 수평을 이루면서 넓게 표현되었는데, 목과 가슴 윗부분은 손상되었다.
옷주름은 규칙적인 평행선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겨드랑이 사이에는 팔과 몸의 굴곡을 표시한 V자형 무늬가 있다. 암벽에 그대로 새긴 광배(光背)는 연꽃무늬가 새겨진 머리광배와 불상 둘레의 율동적인 불꽃무늬를 통해 흔적을 살필 수 있다.
평면적인 신체와 얇게 빚은 듯한 계단식의 옷주름, 겨드랑이 사이의 U자형 옷주름 등이 867년에 조성된 축서사 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995호)과 유사한 작품으로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제582호 : 선조2년간월인석보판목(宣祖二年刊月印釋譜板木) 갑사
이 판목은『월인석보』를 새겨 책으로 찍어내던 판각으로서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것 중 유일한 판목이다. 『월인석보』는『월인천강지곡』과『석보상절』을 합하여 세조 5년(1459)에 편찬한 불교대장경이다. 석보는 석가모니불의 연보 즉 그의 일대기라는 뜻이다. 『석보상절』은 조선 세종 28년(1446)에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수양대군(후의 세조)이 불교서적을 참고하여 지은 것이고, 『월인천강지곡』은 세종 29년(1447)에 세종이 『석보상절』을 읽고 각각 2구절에 따라 찬가를 지은 것이다.
『월인석보』는 본래 57매 233장으로 모두 24권이었으나 현재는 21권 46매만 남아있다. 이 판목은 선조 2년(1569) 충청도 한산에 사는 백개만(白介萬)이 시주하여 활자를 새기고, 충남 논산 불명산 쌍계사에 보관하였다. 현재 갑사에 소장되어 있는데 70여 년 전에 입수하였다고 한다. 계수나무에 돋을새김으로 새겼고, 판목의 오른쪽 아래에 시주자의 이름과 새긴 이의 이름이 있다. 내용표기에 있어서는 방점과 글자획이 닳아 없어져 변모된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불교대장경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15세기 당시의 글자와 말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국어변천을 알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제583호 : 전주객사(全州客舍)
객사는 고려·조선시대에 각 고을에 설치하였던 것으로 관사 또는 객관이라고도 한다. 객사는 고려 전기부터 있었으며 외국 사신이 방문했을 때 객사에 묵으면서 연회도 가졌다. 조선시대에는 객사에 위패를 모시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예를 올리기도 하였으며 사신의 숙소로도 이용하였다. 명나라와 통하는 지방에는 우리 사신을 비롯해 명나라에서 오는 사신도 묵었기 때문에 건물보수에도 큰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국가에 일이 생겼을 때에는 백성과 관아가 같이 의식을 행하였다.
전주객사는 전주서고를 지은 뒤 남은 재료로 조선 성종 2년(1471)에 서의헌을 고쳐 지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객사의 정문은 주관을 앞면으로 하여 내삼문·중삼문·외삼문이 있었으나 원래의 내삼문 안쪽으로 축소되었다.
신주를 모셔두는 방인 감실에는 궐(闕)자가 새겨진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국왕에 대하여 예를 행하기도 하였고(망궐례), 조정에서 사신이 오면 이곳에 묵으면서 임금의 명령을 전하기도 하였다. 전주객사는 중앙에 주관이 있고 좌우에 동·서 익헌, 맹청, 무신사 등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 주관과 서익헌, 수직사만 남아있다. 동익헌은 현재 초석만 남아 있으며, 서익헌과 규모가 같으나 도로확장으로 인해 1칸이 부족하다. 또한 주관 앞면에는 ‘풍패지관(豊沛之館)’이라는 액자가 걸려 있다. 이것은 전주객사를 일컫는 말로서, 전주가 조선왕조의 발원지라는 뜻을 담고 있다.
제584호 : 윤문효공신도비(尹文孝公神道碑) 구례
신도비란 죽은 사람의 생전의 행적을 기록하여 묘 앞에 세우는 비이다. 조선시대에는 정2품이상의 관직에 있는 사람 중 위업을 세웠거나 학문이 뛰어나 후세에 모범이 될 때에 신도비를 세워 기리도록 하였다 한다.
이 비는 조선시대의 문신 윤효손의 신도비이다. 윤효손(1431∼1503)은 단종 원년(1453)에 과거에 급제하여 황해도관찰사, 형조판서, 우참찬 등을 두루 거쳐 좌참찬에 이르렀다. 성종때에는『경국대전』과『오례의주』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연산군 9년(1503)에 세상을 떠났으며,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거북받침돌은 앞발의 형태가 특이한데, 보통 머리쪽을 향하고 있는 것에 비해 이 앞발은 뒤로 구부려 발톱을 아래의 연꽃받침에 붙이고 있다. 머릿돌에 새겨진 용의 조각은 사실성이 뛰어나며, 꼭대기에는 둥근 돌을 얹어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비문에는 윤효손의 평생업적과 자손들의 계보 및 그의 충효와 인품을 기리는 글들이 적혀 있다.
조선 중종 14년(1519)에 세워진 비이다. 비문은 신용개가 짓고, 신공제가 글씨를 썼는데, 글씨는 고려시대에 비해 필력이 떨어진다.
제585호 : 퇴우이선생진적(退尤二先生眞蹟)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의 서화가인 이황(1501∼1570), 송시열(1607∼1689), 정선(1676∼1759), 정선의 아들 정만수, 이병연(1671∼11751), 임헌회(1811∼1876), 김용진(1883∼1968) 등의 글과 그림을 한데 모아 연대순으로 묶어낸 서화첩이다.
모두 8엽으로 되어 있는데 내용의 순서를 보면, 제1엽은 퇴우이선생진적이라는 그림과 표지글이 있고, 그 뒷면과 제2엽 앞면에 정선의 계사정거도(溪舍靜居圖)가 그려져 있다. 제2엽 뒷면에서 제4엽 앞면에는 이황의『회암서절요서(晦菴書節要序)』가 쓰여있다. 제4엽 뒷면과 제5엽 앞면에는 송시열의 글이 있다. 제5엽 뒷면, 제6엽 앞뒷면에는 정선의 그림인 무봉산중(舞鳳山中), 풍계유택(楓溪遺宅), 인곡정사(仁谷精舍) 등이 그려져 있다. 제7엽 앞면에는 이병연의 칠언절구 시와 년기, 서명, 낙관 등이 있고 제8엽 앞면에는 임헌회의 글과 김용진의 글 등이 있다.
이 서화첩의 속종이는 닥나무 종이이며, 겉종이는 두터운 종이로 만들어 상태는 좋은 편이다. 모두 뛰어난 문장과 그림이어서 학자들의 인격과 서화가들의 예술세계를 엿볼 수 있다.
제586호 : 이언적수필고본일괄(李彦迪手筆稿本一括) 경주 옥산서원.
조선 중종 때의 유학자이며 정치가인 회재 이언적(1491∼1553)이 명종 2년(1547)에서 명종 8년(1553) 사이에 직접 쓴 저술이다.
이언적은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로 2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다. 김안로를 등용하는 것을 반대하다가 귀양을 가기도 했으며, 김안로 일파가 몰락한 뒤 다시 정치에 나섰고, 후에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서 그의 송덕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1547년 조작된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되어 강제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많은 책을 썼으나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조선시대 성리학을 세우는데 선구적 인물로,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원이다.
지정된 유물들은『속대학혹문』1책,『대학장구보유』1책,『봉선잡의』1책,『중용구경연의』9책,『진수팔규』1책 등 모두 13책이다. 특히『중용구경연의』는 정조가 친필로 쓴 ‘제선정회재속대학혹문권수’를 붙이고 있어 그 가치를 더욱 높게 하였다.
(제586-1호에서 제586-5호 까지 분류지정)
제587호 : 필암서원문서일괄(筆巖書院文書一括) 전남 장성
필암서원은 조선 선조 23년(1590)에 창건되고, 현종 3년(1662)에 왕에게서 사액을 받은 서원이다. 여기에는 김인후(1510∼1560)와 양자징(1523∼1594) 두 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김인후는 조선 중기의 유학자이자 문신으로, 1540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핑계삼아 나아가지 않고 고향인 장성으로 돌아갔다. 시와 문장에 뛰어나 10여권의 시문집을 남겼고, 그의 성리학 이론은 유학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곳에서 지정된 유물은 총 14책 64매로, 창건당시부터 보존되어 온 것이 아니라 인조 2년(1624)부터 1900년경까지의 자료들이다.
지정된 유물을 보면, 필암서원의 역대 원장들을 기록한『원장선생안』, 학생들의 수업을 담당한 교관, 강의에 참석한 인물의 명단 등을 기록한『보강안』, 강회 참가자의 명단인『문계안』, 필암서원 소속 유생들의 명단인『서재유안서』, 필암서원의 재산을 기록한『필암서원원적』, 장성부사가 필암서원에 내려준『장성부사하첩』등이다.
이것들은 필암서원의 운영과 구성을 살펴 볼 수 있으며, 또한 조선시대 지방교육제도와 사회경제사를 연구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제587-1호에서 제587-14호까지 구분지정중)
제588호 : 강민첨초상(姜民瞻 肖像) 국립중앙박물관
고려시대 장군인 강민첨을 그린 초상화로, 크기는 가로 61.3㎝, 세로 80㎝이다. 강민첨(?∼1021)은 고려시대 명장으로 목종(재위 997∼1009)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현종 3년(1012) 동여진이 침입하자 안찰사로서 군대를 이끌고 나가 격퇴하였고 현종 9년(1018) 거란이 침입하자 이를 막아내는데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과거에 급제한 후 쓰던 모자인 복두에 정장을 하고 홀(笏)을 들고 앉아서 왼쪽을 바라보고 있는 반신상이다. 의자 등받이에 있는 호랑이 가죽은 18세기 초상화의 특징을 보여준다. 이 그림은 고려시대에 그려진 것이 아니라 정조 12년(1788) 박춘빈이 원본을 그대로 옮겨 그린 그림이다. 비록 조선시대에 그려진 그림이지만 고려시대 초상화가 희귀한 상황에서 고려 공신상 형식과 표현형식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그림이다.
제589호 : 강현초상(姜鋧肖像)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중기 문신인 강현(1650∼1733) 선생의 초상화로, 오른쪽을 바라보며 의자에 앉아있는 가로 96㎝, 세로 165.8㎝ 크기의 전신초상화이다. 강현 선생은 문인 서화가인 강세황의 아버지로, 대제학, 예조판서 등 여러 벼슬을 한 인물이다.
이 초상화에서의 모습은 관리들이 쓰는 모자와 녹색 관복을 입고 있으며, 호랑이 가죽이 깔린 의자에 앉아 있다. 얼굴의 묘사는 눈, 코, 턱, 양볼 부분에 가는 선을 이용하여 음영을 넣었으며, 노인 특유의 붉은 기운이 잘 표현되었다. 옷주름은 음영이 들어있지 않은 선으로 몇 개의 주름만 나타내 인물의 기품을 보여주고 있다.
이 그림은 의자에 깔린 호랑이 가죽 등 18세기 초상화의 전형적인 형식이나 화법을 보여주고 있다.
제590호 : 강세황초상(姜世晃 肖像)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후기 대표적 문인 서화가인 강세황이 직접 자신을 그린 자화상과 이명기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강세황의 초상화 등 2폭의 영정이다. 자화상의 크기는 가로 51㎝ 세로 88.7㎝이고, 다른 초상화는 가로 94㎝ 세로 145.5㎝ 크기이며, 모두 비단에 채색하여 그렸다. 강세황(1713∼1791)은 시, 글씨뿐만 아니라 그림에도 뛰어나 그의 독자적인 화풍을 이룩하였다.
자화상은 검은색 관모에 진한 옥빛의 도포차림의 모습이고 이명기가 그린 초상화는 관복에 관모를 착용하였다. 두 그림 모두 똑같은 얼굴의 각도를 하고 시선이 오른쪽을 향하고 있으며, 의자에 앉은 전신의 모습을 그렸다. 얼굴을 표현함에 있어 주름은 색을 덧칠하여 윤곽을 나타냈으며, 오목한 부분은 그림자를 사용하여 입체감을 주었다.
자화상은 강세황의 71세 때의 모습을 그린 것이며, 다른 한점의 그림은 입고 있는 옷이 다르기는 하지만 그가 죽은 뒤 그의 자화상을 보고 영정그림에 뛰어났던 이명기가 그린 것이다. 초상화에서 손가락 마디의 생김새까지 표현한 것은 조선시대 전반기까지 거의 없었던 것으로, 회화사적으로 볼 때 의미있는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제590-1호 : 강세황자필본(姜世晃自筆本)
제590-2호 : 이명기필본(李命基筆本) : 위 사진
제591호 : 석씨원류응화사적책판(釋氏源流應化事蹟冊板) 불교중앙박물관
이것은 인조 9년(1631) 정두경이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가져온 책을 바탕으로 현종 14년(1673) 승려 자습이 양주 불암사에 목판본으로 발간한 책판이다. 이 책은 석가모니의 일대기와 석가모니 이후 서역 및 중국에서 불법이 전파된 사실을 400항에 걸쳐 기술한 것으로, 각 항의 4자 1구로 제목을 붙이고 먼저 사적을 그림으로 그리고 그 다음 면에 그 내용을 서술하였다.
글자의 새김은 매우 정교하고 그 기법이 우수하다. 책 첫머리에는 중국 명나라 헌종 22년(1486)에 헌종이 직접 쓴 서문이 있고, 다음에 당나라 왕발의 석가여래성도기(釋迦如來成道記)가 있다.
책 끝에는 화가와 인쇄조각자 18명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는데, 정확하게 누가 이 책을 썼는지는 알 수 없다. 현재 중국서 목록에도 나와 있지 않는 것으로 보아 없어져 전해지지 않는 글로 보인다.
제592호 : 허목수고본(許穆手稿本) 국립중앙박물관
이것은 조선 후기의 유학자이며 서법(書法), 특히 전서(篆書)로 이름이 높던 허목(許穆)(1595∼1682)의 수필고본(手筆稿本)들이다. 종목별로 다음에 서술한다.
① 동해비첩(東海碑帖) 1책(冊) 첩장(帖裝) 50㎝ ×32.7㎝필자(筆者)는「전위동방제일(篆爲東方弟一)」이라는 평을 받을만큼 전서명가(篆書名家)인데, 그 전(篆)을 대표하는 것이 곧 이 동해비(東海碑)이다. 동해비(東海碑)는「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로 현재 삼척군(三陟郡)에 있으며 그 비의 탁본(拓本)은 세간에 많이 유포되고 있다. 동해비(東海碑)의 추기(追記)에 의하면 「처음에 세운 비는 현재의 비보다 글씨가 더 컸었는데 풍랑에 침몰되었으므로 선생이 따로 써 둔 소자본(小字本)에 의하여 다시 모각(模刻)하였다.」한 것을 보면 필자는 이 비의 고본(稿本)을 몇 가지로 써 두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그 중의 하나일 것이다. (제592-1호)
② 금석운부(金石韻府) 2책(冊) 사본(寫本) 선장(線裝) 34.7㎝ ×22㎝고금석(古金石)에 나타난 전서(篆書)를 총망라한 전서자전(篆書字典)이다. 이 책은 석판(石版)으로 영인간행(影印刊行)된 적이 있었다. (제592-2호)
③ 고문운부(古文韻府) 9책(冊) 사본(寫本) 선장(線裝) 34.5㎝ ×22.7㎝고문헌(古文獻) 및 금석(金石)에 나타난 고전문(古篆文)을 운별(韻別)로 정리하여 먼저 해서(楷書)를 쓰고 다음에 각체(各體)의 고문(古文)과 전(篆)을 기입(記入)한 고문자전(古文字典)이다. 금석운부(金石韻府)는 금석자료(金石資料)에 국한되었으나 이 책은 고문헌까지 망라하였으므로 내용이 더욱 방대하다.(제592-3호)
제593호 : 이상좌불화첩(李上佐佛畵帖) 리움박물관
조선 전기 화가인 이상좌(1465∼?)가 그린 여러 가지 불상그림을 모은 가로 31.1㎝, 세로 50.7㎝의 그림책이다. 이상좌는 노비출신이었으나 그림을 잘 그려 그림을 담당한 관청인 도화서의 화원이 되었는데, 특히 인물화를 잘 그렸다.
부처의 설법을 듣고 성자가 된 나한을 그린 이 화첩의 그림들은 종이 바탕에 채색없이 묵선만으로 그린 것이다. 나한의 머리위에 번호가 있는 것으로 보아 16나한을 그린 듯하지만 현재 5점만이 남아있다. 이 그림들은 비록 밑그림으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었지만, 붓놀림이 활발하고 유려한 필치로 인물을 잘 표현하고 있다. 얼굴은 가는 선으로 섬세하게 표현하였고, 옷은 가는 선과 굵은 선을 적당히 사용하였다.
이 화첩은 조선 전기 뛰어난 화가 이상좌의 화풍을 볼 수 있는 것으로, 조선 전기 인물화에 사용된 화법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로서 그 가치가 크다.
제594호 : 최덕지초상및유지초본(崔德之肖像 및 油紙草本) 영암(진주최씨 문중)
제595호 : 초충도수병(草蟲圖繡屛) 동아대박물관
검은 비단에 풀과 나비, 잠자리같은 곤충을 수 놓아 만든 한 폭당 가로 40㎝, 세로 64㎝인 여덟 폭짜리 병풍이다.
여성의 정숙한 분위기를 이루는 이 자수병풍에는 민들레·패랭이꽃·맨드라미·벌·나비 등 무려 20여종의 풀과 벌레를 볼 수 있으며, 구도나 기법이 독특하다. 초충수병의 또 하나의 특징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사실적으로 세밀하게 묘사했다는 점이며, 한국의 전통적인 자수기법을 응용한 초충도수병의 수작이다.
18세기 이후에 만들어진 병풍으로 추측되며, 고상하고 우아하면서도 사실적이어서 궁중이나 양반댁에서 쓰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제597호 : 융기문토기(隆起紋土器) 동아대박물관
부산광역시 영도구 영신동 패총에서 출토된 신석기시대 초기의 토기로, 크기는 높이 12.4㎝, 지름 16.4㎝이다.
이 토기의 특징은 아가리 한 쪽에 짧은 주구가 부착되어, 내용물을 담아 따르도록 되어 있다는 점과 아가리 밑으로 융기된 장식무늬가 있다는 점이다. 장식무늬는 덧띠문(점토대)를 W자형으로 붙인 뒤, 이 덧띠문를 띠모양으로 눌러 눈금을 새겨 장식효과를 높이고 있다. 바탕흙은 점토질로 황갈색을 띠며, 아래쪽으로 내려올수록 검은색을 띤다.
이러한 토기는 신석기시대 전기에 제작되었는데, 같은 부산광역시 영도구 동삼동 패총에서도 융기문토기가 발견된 일이 있다.
제598호 : 마두식각배(馬頭飾角杯) 동아대박물관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무덤들 중 제7호 무덤에서 출토된 말머리 장식의 뿔잔(각배)이다. 각배란 본래 쇠뿔과 같은 동물의 뿔(각)로 만든 것을 말하지만, 넓게는 흙이나 금속 등으로 뿔잔의 형태를 본떠 만든 것도 포함시켜 말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신라·가야 지역의 무덤에서는 여러 형태의 뿔잔이 다수 출토되었는데, 이 뿔잔은 그 중에서도 뛰어난 걸작이다. 이 뿔잔은 큰 것이 높이 14.4㎝, 길이 17㎝, 작은 것은 높이 12.1㎝, 길이 17㎝로 크기는 서로 다르나, 전체적인 형태와 제작 수법은 거의 동일하다.
뿔잔의 밑부분 끝에 말머리를 빚어 붙이고, 그 뒤쪽으로 조그만 다리를 2개 붙여 넘어지지 않게 하고 있다. 말머리의 전체적인 형상은 간결한 솜씨로 다소 거친 맛을 주면서도, 귀·눈·코 등 말의 특징적인 표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뿔잔의 표면에는 조각칼 따위로 깍아 다듬은 자국이 남아있다.
제599호 : 쌍자승자총통(雙字勝字銃筒) 동아대박물관
조선 중기에 사용하던 개인용 소용화기(小用火器)의 일종으로, 총구에 화약과 실탄을 장전, 불씨를 점화하여 발사하는 유통식이다.
총신이 쌍으로 이루어져 한쪽 총신에서 3발을 동시에 장전, 발사할 수 있어 양쪽 6발을 목표에 집중 사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비, 눈, 바람이 있을 때는 거의 사용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총신이 짧아 원거리 사격에 적합하지 않다. 임진왜란 때 총신이 긴 반자동식 조총이 도입되면서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길이 52.2㎝, 구경 1.7㎝, 손잡이 6㎝인 이 총통의 총구쪽은 2개의 마디(죽절)가 있고, 손잡이 부분은 단순하게 처리하여 세련미를 자아낸다. 총신에는 글이 씌여 있는데, 선조 17년(1583)에 제작되었음과 사용법이 씌여 있다. 사용법에 의하면 탄환을 2개씩 장전할 수 있으므로 총 12발을 발사할 수 있는 희귀한 예이다.
제600호 : 광주약사암석조여래좌상(光州藥師庵石造如來坐像)
호남지방에서 보기 드문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으로 보존 상태까지 양호하다. 거친 화강암 석재를 다듬어서 만들었으며, 질병에 빠진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는 약사불을 형상화한 것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약간 숙이고 있는 얼굴은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모양이다. 체구는 전체적으로 당당하게 표현되었으나 어깨선이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어 약간 쳐져 보인다. 허리는 지나치게 가늘게 표현되어 상대적으로 가슴쪽의 양감이 풍부해 보인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입은 옷은 가슴 앞에서 한번 접었고 몸에 얇게 밀착되어 상체의 굴곡을 잘 드러내준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을 아래로 향하게 하고 왼손은 배 부분에 대고 있는 모습이다. 하체는 양 발을 무릎 위에 올리고 발바닥이 하늘을 향하게 하고 앉아 있는데, 무릎이 지나치게 넓어 보인다. 불상이 앉아있는 대좌(臺座)는 전형적인 8각의 연꽃무늬 대좌인데, 각각 한 개의 돌로 상·중·하대를 구성하고 있다. 유난히 넓은 무릎과 형식화된 표현, 대좌와 불상 높이 비례가 1:1인 점 등에서 석굴암 본존불의 특징을 이어받은 신라말의 불상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