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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일생
글 / 김덕길
어머니는 열일곱 살에 시집을 오셨습니다.
여자는 글을 알아서 무엇에 쓰느냐며 학교에 보내지 않아 한글을 깨치지 못했습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드라마는 모두 실제상황인 줄 착각 하셨고 만화가 나와도 그게 사람이려니 하고 생각했습니다. 드라마에서 해수욕을 하는 장면이 나오면 이 엄동설한에 별일 이라고 하셨고 누가 죽으면 ‘아이고 불쌍해서 어쩐다냐?’라고 울먹이셨습니다.
“어머니! 실제 죽은 것이 아니고 연기를 하는 거예요.”
어머니는 믿지 못합니다. 다른 날 다시 그 탤런트가 다른 드라마에서 나오면 어머니는 놀랍니다.
“아니 저 사람 그저께 죽었는데 살았어야. 세상에.......”
어머니는 28년 동안 팔남매를 낳으셨고 저를 마흔 다섯 살에 마지막으로 낳으셨습니다.
6남매를 낳고 어머니는 ‘이제 더는 아기를 낳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하셨습니다.
피임약이 뭔지 모르시는 어머니는 아기를 지우려고 언덕에서 구르기도 하셨고 ‘누가 뭐를 먹으면 아기가 생기지 않는다더라. 라는 말을 믿고 그 약을 먹었지만, 삼신할머니는 끝내 형을 점지해서 아기를 낳았고 다시 저를 낳았습니다.
7번째인 형은 어머니가 자기를 낳지 않으려고 했음을 알았는지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애간장을 태웁니다. 형과 나는 세 살 차이입니다. 나는 동네 효자로 소문이 날 때 형은 동네에서 제일 말을 듣지 않는 아들로 소문이 났습니다.
동네에 나가 쌈치기나 텔레비전을 보며 놀고 있으면 아버지는 작대기를 들고 항상 형을 찾아 나섭니다.
“야 이놈아! 밭에 나가 담배 따야 한당께 왜 시방 여기서 놀고 자빠졌냐. 빨리 밭에 안 갈래?”
“아이고 아버지 남들은 다 노는데 왜 나만 갖고 그런 다요. 미쳐불겄네.”
“뭐 이놈아.”
아버지는 작대기로 형의 엉덩이를 후려칩니다.
형이 도망칩니다. 반항이라는 것을 모르는 나는 자동으로 밭으로 갑니다.
“너 이놈. 덕길이 반이라도 좀 따라가 봐라. 너는 왜 허구한 날 그 모양이냐.”
어지간히도 부모의 속을 태우던 형이 변합니다.
내가 열여섯 살 때 아버지는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가장 서럽게 울었던 사람은 형이었습니다. 나는 너무 많은 고통을 몇 년씩 견디다 돌아가신 아버지여서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습니다.
형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일이 잘 풀리지 않았는데 학교 때 사랑했던 첫 사랑과 결혼까지 했습니다. 홀로 되신 어머니를 곁에서 지켜드려야 한다며 영원 면에 내려오셔서 두 아들을 낳고 키웁니다. 퍼주기 왕이었던 형은 시골에서 정육점을 하면서 인심을 얻습니다.
동네에서 막나니로만 알았던 동네 사람들이 형의 효심에 감동합니다. 친구들도 모두 형을 좋아했고 형은 친구라는 존재가 든든한 울타리 역할을 하게 됩니다.
내가 장성해서 돈을 벌어 잘 나갈 때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제주 여행을 다녀오면 형은 어머니를 모시고 중국 장가계 여행을 다녀옵니다.
서울에 살던 나는 틈만 나면 시골에 내려가 어머니를 모시고 전라도 인근에 구경을 하러 다녔고 일밖에 모르는 어머니는 그런 나를 좋아하셨습니다.
“덕길이 네가 최고다. 딴 아들은 내려와도 어디 구경한 번 가자고 하지 않는데 너는 좋은데 구경 많이 시켜주고 어이구 기특한 내 아들.”
어머니는 내가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인 것을 압니다.
어머니는 모든 아들딸들에게 골구로 사랑을 주십니다. 특히 아기가 없는 큰 아들을 더욱 사랑하셨습니다. 제일 큰 형은 부산에 살았는데 농사일이 바쁠때면 항상 내려와서 농사를 지어주고 내려갔습니다. 홀로 사시는 어머니에게 효도하는 방법은 이렇게 아들들마다 다릅니다.
큰 형은 시골에 일을 하러 다니느라고 돈을 벌지 못했다고 늘 말합니다. 일 년 내 지은 농사의 대부분 수입은 그래서 농사일을 가장 많이 도와준 큰 형에게로 갑니다.
나머지 아들들은 형이 농사를 도와주었으니 그게 당연한 것처럼 알고 삽니다.
얼마 되지 않는 아버지의 재산이 어머니와 큰 형 앞으로 이전이 돼도 우리는 그러려니 했습니다. 둘째 형이 많이 서운했을 겁니다.
한글을 모르는 어머니를 위해 나는 수확한 채소를 팔러 정읍 경매시장을 따라다녔고 틈만 나면 고등학교에 다닐 때도 어머니의 일손을 거들었습니다. 경매 시장에서도 나를 알아볼 정도였습니다.
누님 세 명은 이미 시집을 가셔서 나에게는 누님들이 어머니처럼 느껴졌고 내 바로 위의 누나가 나보다 일곱 살이 많은데 그 누나는 그래도 세대가 좀 비슷해서 많이 어울렸던 듯싶습니다. 어머니가 나를 낳고 고추를 따러 고추밭에 가실 때 나를 업어 키운 사람은 어머니가 아닌 바로 일곱 살 위인 누나이었으니까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시골에는 나와 어머니 그리고 누나 이렇게 셋이 살았고 형은 군대에 가고 없었습니다. 그때가 가장 힘들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즐겁기도 한 때였던 듯싶습니다.
내가 고등학교 때 나와 누나는 둘이서 벼를 베러 갑니다. 콤바인이 없을 때였습니다.
“누나 나랑 벼 베기 시합 할래요?”
“네가 나를 이길 것 같니?”
“어머 왜 그러셔요. 해보지도 않고. 빵 내기요. 자 시작.”
벼는 다섯줄을 한꺼번에 낫을 들고 베는데 정말 누나는 빠릅니다. 벼를 벨 때 최대한 포기의 아래쪽을 베어야만 벼 포기가 물을 받아 부드러워서 잘 베어지는데 그게 힘들지요.
나도 이에 질 세라 정신없이 벱니다. 결국은 거의 비슷하게 끝이 납니다.
달이 휘영청 밝을 무렵에서야 세 마지기의 논의 벼를 모두 베고 돌아옵니다.
달을 보며 터벅터벅 걸어서 시골집으로 돌아가는 나와 누나는 행복했습니다. 멀리서 음악소리가 울렸습니다. 조용필의 오빠생각이었지요.
-서울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나는 일을 할 때는 악착같이 합니다. 잠시 쉴 틈도 없이 일을 하니 동네 어른들도 일을 잘 한다고 소문이 파다 했습니다. 하루는 일이 너무 힘들어 누나가 어머니께 말합니다.
“어머니 아버지도 안 계신데 농삿일이 너무 힘들잖아요. 좀 팔고 편히 살면 안 돼요?”
“안 돼 어떻게 마련한 땅덩어리인데 절대 그럴 수 없다. 땅이란 것은 말여 한 번 팔아버리면 다시 사기 힘든 법이랑께.”
어머니는 아버지가 남기고 간 수천만 원의 빚을 모조리 갚으십니다. 먹을 것 안 먹고 입을 것 안 입고 모은 돈으로 말이지요.
그런 장면을 직접 보고 자라면서 나는 느낍니다.
‘나는 절대 가난하게 살지 않을 거야. 나는 할 수 있어.’
나는 이를 악물고 다짐을 합니다.
내가 어른이 되고 서울로 돈을 벌러 막 떠날 때 어머니는 나를 부르십니다.
“덕길아! 너는 위로 형이 많아서 네 앞으로 재산 한 푼 돌아가지 않을 거야. 그래서 내가 이 돈을 너를 줄 테니 이것으로 이 어미 마음을 알아다오.”
어머니는 쌀 항아리에 묻어둔 200만원을 나에게 건넸습니다.
코끝이 찡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만져보는 거금이었습니다. 나는 그 돈을 통장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군대를 다녀왔습니다.
어머니의 돈은 한 푼도 쓰지 않고 군대에서 탄 월급을 모아 운전면허 학원을 등록해서 면허를 땁니다. 상병 월급 5천원, 하사관 월급 32,000원을 할 때입니다. 군대에서 나오는 담배도 돈으로 받아서 모았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산업전선에 뛰어든 나의 사회생활은 실로 파란만장합니다.
모두 어머니의 근검절약 정신을 보고 느끼며 살았던 나였기에 내가 이나마 성공한 삶을 살고 있지 않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홀로 사시던 시골집이 누전으로 불이 나 모든 재산이 잿더미가 될 때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용인에서 살았습니다. 나는 잘 나가던 건전지 도매 사업을 그만두고 준보석 전문점을 차렸습니다. 준보석 전문점이 붐을 이룰 때여서 사업은 잘 되었는데 몇 년 지나자 금값이 치솟자 손님이 줄었습니다.
한창 인터넷이 붐을 이룰 때 나는 학창 시절에 놀지 못하고 일만 하던 때가 아쉬웠는지 몇 년 동안 인터넷 카페에서 친구들을 만나 원 없이 놀았습니다. 산행도 10여년을 다녔습니다.
인터넷 때문에 글도 다시 쓸 수 있었고 시인도 되고 소설가도 되었지만, 아내는 시인 소설가라는 명예보다 더 싫었던 것이 인터넷 모임에서 친구들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아내와 많이 싸웠는데 그때 어머니를 보고 참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고 고스란히 우리의 부부싸움을 보여준 것이 너무 송구스럽습니다. 어머니는 서운함 감정을 가지고 다시 부산 셋째딸 집이 가장 편하다고 내려가셨고 나는 그렇게 내려가신 어머니에게 너무 송구해서 어느 날, 인터넷 모든 모임을 끊고 다시 산업전선에 뛰어듭니다.
결국, 보석전문점을 그만두고 쌀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새벽에 전단지를 붙이러 다니고 아침 점심 저녁 식사 배달사업과 쌀 김치 사업을 같이 합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수입은 오르지 않았습니다.
결국 2년 만에 사업을 접습니다.
그리고 운명처럼 나에게 찾아온 직업이 바로 뻥튀기 사업입니다.
뻥튀기 장사는 어릴 때 아버지께서 튀밥을 튀겨주는 일을 하셨기에 아는 직종이지요.
학교공부만 끝나면 나는 아버지한테 가곤 했습니다. 튀밥기계를 돌려주러 가는 것입니다. 동네에선 튀밥장수 아들이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그 별명이 얼마나 싫었는지 모릅니다.
병이 들어서 아버지는 사업을 접었고 녹슨 기계는 마루 밑에서 수십 년을 틀어박혀있었습니다.
내가 그런 뻥튀기 사업을 할 줄은 꿈에도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뻥튀기 사업에 전념했고 사업 첫날부터 대박을 이어갑니다.
노점인생의 숱한 경험과 서러움은 고스란히 책을 통해 나왔는데 그 책이 바로 ‘노점일기’입니다.
나는 다시 어머니를 모시고 용인에서 살았습니다.
“어머니! 뻥튀기 사업을 하는데 집에 계시면 심심하니까 저를 따라 장터에 나와서 바람이라도 좀 쐬세요!
“그래볼까?”
어머니는 장터에 나와 보더니 사람들을 볼 수 있어서 너무 좋다고 환하게 웃으십니다.
내가 어릴 때 나는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뻥튀기를 튀겼는데 이제는 어머니께서 나를 따라다니며 접시 뻥튀기를 담아주십니다.
행복해 하시는 어머니를 보니 너무 좋아서 나는 과감히 어머니와 같이 찍은 뻥튀기 사진을 노점일기 책 표지 뒷면에 싣습니다.
“어머니! 어머니가 자랑스럽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표지에 실었습니다. 하하하.”
아마 이 때가 가장 행복했던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에게 찾아온 뇌졸중은 어머니를 다시는 노점 현장에 나오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되고 말았습니다. 차가운 엄동설한에 추운 장터에 나와서 일을 했던 것이 어머니에게 치명타가 되었던 것입니다. 어머니는 결국 집에서 몸을 돌보며 종일 이 아들이 일을 마치고 돌아올 날만 기다립니다. 구순을 바라보는 어머니가 말입니다.
다시 나는 오토바이 세계일주를 꿈꾸게 되었고 내가 없는 동안 어머니는 며느리와 둘이 사는 것보다 딸네 집에 가서 살겠다고 내려가셨습니다. 나는 세계일주를 위해 제주도에서 홀로 1년을 보내고 이듬해 사월 마침내 오토바이 세계일주를 떠났습니다.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를 어머니께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러 부산에 내려갔습니다. 벌써 일본 일주 한 달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입니다. 우리나라는 세월호 사건 때문에 온 나라가 초상집이 된 때였습니다.
“나라가 이지경인데 배를 타고 다시 나가겠다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되겠느냐?”
“어머니 죄송합니다. 제 평생 꿈입니다. 이미 시작했으니 끝장을 보고 돌아오겠습니다. 건강히 돌아올 때까지만 견디소서. 다시 제가 모시고 살겠습니다.”
2년을 기약하고 떠난 세계일주를 6개월 만에 마치고 돌아와서 어머니를 찾아뵈었습니다.
많이 수척해지시고 많이 늙으시고 많이 힘이 없어 보이시는 어머니가 눈앞에 계십니다.
그냥 바라보기만 했는데 억장이 무너집니다.
‘오래 사시지 못하시겠구나......’
몸을 타고 들어오는 어머니의 숨소리가 고요합니다. 어머니의 마지막이 정말 이제는 얼마 남지 않게 느껴졌습니다. 어머니의 손을 잡아도 손에 힘이 없습니다.
“어머니 저 왔습니다. 덕길이가 왔습니다.”
“그래. 왔구나.......”
“아이고 내 강아지 왔냐? 그래 아픈 곳은 없고? 어디 보자 내 아들......”
이렇게 맞아줄 줄 알았던 어머니였는데, 이렇게 환하게 부둥켜 안아줄 어머니 일 줄 알았는데…….
어머니는 끝내 삶의 끝에서 세상을 하직하는 사람처럼 힘없이 한마디를 하시곤 입을 다무십니다.
‘나만 세상 구경 원 없이 해 보겠다고 세계일주를 떠나서 미운 것일까? 아니면 그 조차 다
부질없음을 아시기에 저렇게 삶의 끈을 놓으려는 것일까......’
다시 내가 모셔온 들 달라질 게 없다고 매형은 그러지 말라고 하셔서 결국, 혼자 용인에 올라왔습니다. 나는 다시 뻥튀기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며칠 후, 매형과 통화를 했습니다.
“어머니가 심상치 않다. 설을 넘길지 모르겠어. 처남이 살아생전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려면 들렸다 가렴.”
나는 아내와 부리나케 달려갔습니다.
이제는 말씀을 아예 못 하십니다. 노환으로 병원에서도 손 쓸 방법이 없다고 하십니다.
어머니는 자리에서 조차 일어나시지 못합니다. 아내가 겨우 누운 어머니를 일으켜 세워 죽을 먹이는데 반은 흘리십니다. 그리고 다시 눕습니다.
‘한 달을 넘기기 힘드시겠구나......’
아내의 눈에 흐르는 눈물이 나의 심장을 파고듭니다. 살아생전 싸우는 모습을 어머니에게 보이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게 너무 죄송해서 아내도 흐르는 눈물을 참지 못합니다.
며칠 후, 한창 일을 하는데 전화가 왔습니다.
“처남! 어머니 돌아가셨다.”
기어이 올 것이 왔습니다.
나는 군대 간 아들에게 긴급히 연락해서 아내와 아들을 태우고 부산으로 달려갑니다.
환하게 웃고 계시는 영정사진을 빈소에 올립니다. 환한 미소를 머금고 계시는 어머니의 영정사진을 보자 만감이 교차합니다.
장장 91년의 긴긴 어머니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갑니다.
다른 아들딸보다 유난히 막둥이인 나와는 더 각별했고 그래도 어머니의 심중을 제대로 읽고 살았다고 감히 자부하면서 살았던 나였기에 그 슬픔은 더 배가 됩니다.
입관 식을 할 때 어머니의 이마를 만집니다. 너무 차가워서 깜짝 놀랐습니다. 손을 만집니다. 평생 일만 하던 어머니의 손입니다. 내가 손을 만지면 꼭 쥐어주던 어머니의 손인데 지금은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글을 쓰는 내내 눈물이 그치질 않습니다.
아내가 나의 글을 읽다가 같이 또, 웁니다.
이제 와서 울어 본들 다시 올 수 어머니인데 왜 그렇게 먹먹하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악착같이 살아본 들 갈 땐 빈손이지 않느냐고...... 삶과 죽음은 겨우 백지 한 장 차이라고.......내가 어머니에게 하고 싶은 말인지, 어머니께서 나에게 해줄 말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겨우 몸만 들어가는 어머니의 방에 저승에 갈 노잣돈을 놓아드립니다.
이제는 정말 가시는 구나.
다시는 볼 수 없는 저 먼 나라로
부르면 달려와 환하게 반겨줄 어머니였는데
이제는 누가 나를 반겨주나
아이고 내 강아지 하며 어깨를 토닥여 주던 어머니였는데.......
따라갈 수도 없고 다시 돌아오라고 붙잡을 수도 없는 저 먼먼 길
어머니!
부디 편히 가시옵소서!
저에게 각인 된 어머니의 사랑을 저는 잊지 못합니다.
저 세상에서는 부디 편안하고 아무런 고통도 걱정도 없는 세상이기를 소원합니다.
사랑합니다. 어머니…….
저녁에 돌아가셔서 조문은 이튿날 하루만 받기로 했습니다.
부산에서 치루는 장례식이라 먼 곳에서 오시는 분들에게 너무 미안했습니다.
부음을 알려야 도리인지 알리지 말아야 도리인지 알 수 없어서 망연자실 있다가 하루가 지나서야 겨우 지인들에게 소식을 전했습니다.
일 년 동안 한 번도 만나지 못하는 친구들도 있고 겨우 내 이름 석 자 아는 분들도 일부러 와서 조의를 표해 주니 감동입니다. 멀리서 내일처럼 달려와 준 많은 동창친구들과 클럽의 벗들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기타 다른 방법으로 위로를 해준 많은 지인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함을 전합니다.
덕분에 어머님 가시는 길이 외롭지는 않을 듯싶습니다.
장지는 고향인 정읍의 아버지 묘지와 나란히 모셨습니다.
석관이 좋다고 해서 석관으로 모십니다. 흙을 덮습니다. 무덤에 잔디를 심습니다. 삼우제까지 지내야 하나 모두 시간들이 촉박해서 각자 일터로 떠납니다.
오랜만에 보는 형제들인데 형제들 마저 이제는 너무 나이가 들어보여서 슬퍼집니다. 한때는 펄펄 날던 우리 형제들이었는데…….
집에 돌아와 이글을 씁니다.
글을 쓰는 내내 눈물이 앞을 가려 겨우 씁니다.
사랑하는 지인 여러분 고맙습니다. 여러분의 사랑 잊지 않겠습니다.
김덕길 올림.
첫댓글 제가슴에도
눈물이나네요
좋은곳에서 편히쉬실거예요!
울엄니
올해81세
4남1녀중 막내인 제가
잘해드려야겠네요.
아버님이 제가 태어나기10년전부터 김포공항근처 미군 공병부대인 76부대 세탁소다니셨고 제가 고등학교다닐때까지 계속 60년대~80년대 그야말로 신이주신 미군부대 다니셨으니
어언 30년!
그래도
비빌언덕이있다고
울 5남매는기본이고 아마 70여명의 일가친척들이 아버지다니던 미군부대취업시켜주고 먹여주고 재워주고 평균 식솔들이 율 엄니와아부지 빼고도 12명은 족히 되었고
특히 외가댁
사촌형들과 누이들이 대부분우리집을거쳐 시집장가 보냈으니 그래도 먹고살만하고 방7개딸린 울집에 고모라는 피 할수없는 핏줄
때문에 정해진 월급받는 울아버지 눈치보시며 가슴조이시고
절약에 절약하시고
조카들 키워주신 울 쌍둥이인 엄마 맴. . .
이제는
울집
다녀간 친척들이 용돈드리며
효도들 하시니 감사.
울엄마 언니인 쌍둥이모님도
건강하시니
역시 축복!
두분
오시고
제 딸들 엄마고향인
지리산청학동 인근을
4년전 가을 제차로 모시고 일주일간
평생드신것보다 열배는 넘을 대봉감 실컷드시고 라면박스로서너
박스까지 따서 올라 오신일이 있었어ㅠ
15년전
평생 병원에
한번도 안가시고
살아가기 정말
어려운 60년대 그래도 서울 창경원 김밥싸서 봄날 벚꽃놀이
가족들 초대하듯 자상하시고
늘 긍정적으로
생활하신 울아버지가
위암으로 수술과 3번의 방나선치료후 7개월만에
울 형제 4남1녀와
1.강원도 춘성군 오음리 이씨
2.북제주 한림 고씨
3.강화도 화도읍 흥외리 함씨
4.경남 하동 지리산자락 진주정씨
며느리 넷과
저와 6살 아래인 막내 외동딸의 신랑인 경남 함안에 황씨
글구
친손주 11명 보시고
멋지게 사시다가 72세로 서거!
생전 취미는 가족들과 인천소래 갯벌 망둥이 낚시?
울
아방 묘비 우측에 빈곳이 울 엄니
경주 이씨 복자 순자
쓰여질곳.
울 엄니. .
잘 읽었습니다. 울 아버지 64세 위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제가 16살 때죠.
비 내리는 토요일 오후.
부산 충무동에 조재호 님, 기계를 잘 받았다는 전화를 받고 170개가 넘는 메일을 정리하다가
이제야 김 작가님의 메일을 확인하다가 어머니 부음을 알게 되었군요,
좋은 곳에서 우리 막내 아드님을 응원하고 계시는
어머님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성공을 한다는 것
제각기 가치 기준이야 다르겠지만,
하고 싶은 일을 즐기며 자신의 "재능과 끼 "를 마음껏 발현해 내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성공이다, 라고 정의 합니다,
그런 멋진 인생을 살아내시는 작가님의 멋진 인생과 지리산 도사님의 삶에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조약돌- 이 순간 올림
고맙습니다 사장님
나날히 번창하시는모습 보기좋습니다 ㅎ
늘 좋은일만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