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
- 가즈
두 개의 달이 헤어지는 밤.
어제까지만 해도 둘을 보며 시인들은 노래를 했고 장인들은 악기의 현을 정비했다. 아스라이 흐릿한 한 귀퉁이가 서로 맞닿아 있던 그 달들을, 천인이 노래했고 만인이 칭송했다. 그것은 아무리 옛날 책이라도 '불완전하고 완전한 만남'이라며 한없이 축복받던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제 어제의 만남은 이미 잊어가고 있는 듯, 둘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만큼 느린 속도로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이제는 모든 사람들이 그 둘을 만월이라 부를테지만, 그 누구도 그것이 완전해 보인다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달빛은 공허했다. 어제와 똑같이 푸르렀고, 어제와 똑같이 청량했지만, 역시 만월의 빛은 어딘가 비어보일 수 밖에 없었다. 서쪽 끝부터 동쪽 끝까지는 빼곡하게 푸르고 북쪽과 남쪽에는 자애로운 산맥이 있는 이 초원조차도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달빛에 젖은 풀잎이 바람에 이리저리 나부꼈다. 낮 내내 부지런히 떨어진 이파리가 그들의 것이었던 나무 아래에서 방황했다.
그리고 바람과 함께 움직이고 있는 인영이 있었다. 달빛인 머리칼이 지나치게 이 황량한 밤과 잘 어울렸다. 마음 먹고 산 유리 세공컵에 물을 가득 붓고 푸른 잉크를 한방울 정도 떨어뜨린 듯한 색이었다. 그 인영은 두 만월 중 작은 달을 따라 동쪽에서 서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바람과 마찰하는 초원의 소리를 내며 내닫고 있었다. 그의 주위에서 나는 사사사 소리는 바람이 일으키는 것이 아니었다.
튼튼해 보이지는 않는 신발이 끝없이 서로를 앞질렀다. 가벼워 보이는 옷이 무겁게 흩날렸다. 밤이슬 탓에 차가워진 공기가 그의 목을 학대했다. 그 공기 탓은 아니지만, 어쨌든간 이마와 머리칼이 젖어 있었다. 팔이 지치지도 않고 허공을 내저었다. 그는 누군가에게 쫓기기라도 하는 듯 초원을 달리고 있었다. 만약 날개를 가진 종족이 그를 보고 있었더라면 왜 아직도 날개를 펼치지 않나 궁금해 할 터였다.
심지 굳은 나무뿌리가 그에게 휴식을 권했다. 그 권유에 주인 대신 동의한 신발이 그대로 주인을 몇번인가 구르게 만들었다. 지금까지보다도 더 요란한 소리를 내며 그는 허리까지 자란 풀 속을 뒹굴었다. 하지만 그 소리는 이내 멎었고, 그의 거친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바람소리만이 초원을 맴돌았다. 그는 풀숲 속에서 엎드려 그저 숨을 고르고 있었다.
아니, 그는 뭔가를 중얼거렸다.
"...서쪽 숲으로..."
그 중얼거림은 그가 목이 아플 것 같은 호흡을 하며 숨을 고르는 도중에도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것 자체가 호흡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가 그 중얼거림을 시작한 것은 두개의 달이 만나는 밤이 있던 날 - 즉 그가 초원을 구르던 날부터 치자면 전날의 이른 아침이었다.
"...서쪽 숲으로..."
그것은 그가 눈을 떴을 때 문득 떠오른 문구였다.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왜 서쪽 숲으로 가야 하는지도 그는 알지 못했다. 그는 눈을 떴던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를 덮고 있던 얇은 모포를 한쪽으로 걷어놓고 침상에서 내려왔다. 맨발로 바닥을 밟는 감촉은, 아무리 그 바닥이 나무바닥이라도 허리를 타고 냉기가 돌 정도로 찼다. 그래도 아침답게 약간 작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의 창문을 통해서는 햇살이 들어왔다. 그는 그 반짝거리는 것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으음. 서쪽 숲으로 가야 하는겁니까?"
그가 뒤돌아봤다. 그러자 문 안으로 막 들어선 여자가 보였다.
"그래서 이렇게 일찍 일어난 거군요."
여자가 웃었다. 그 웃음은 흰 머리칼과 썩 잘 어울렸다. 그는 그제서야 자기가 그 문구를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성함은 어떻게 되십니까?"
"...카리..스."
여자의 물음에 그가 답했다. 그리고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카리스. 맞습니다. 카리스."
"흐음."
여자는 흥미롭다는 듯이 그의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 또 웃으며 말했다.
"예, 카리스. 좋습니다. 기분은 좀 어때요?"
"..그냥 좀 멍한."
그러면서 그는 좀 웃어보려고 했지만, 그것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표정은 이리저리 어그러져서 결국은 쓴웃음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여자는 그것에 그다지 신경쓰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예, 아마 그럴 겁니다. 아무래도 태어난지도 얼마 안되었으니까요. 나가서 좀 걸으면 나아질텐데, 같이 좀 걸을까요?"
카리스는 끄덕였다. 둘은 아치형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집 밖은 바로 숲이었다. 하지만 울창하다거나 풍성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이 '거대했다'. 둘의 키보다, 아니 둘의 키를 합친 것보다 수백, 수천배의 끈으로 둘러야 둘러질만한 나무들의 숲이었기 때문이다. 나무뿌리 근처에는 다들 작은 문이 나 있었다. 둘이 나온 것과 마찬가지로 아치형의 문이었다.
"아. 맞다. 전 이온이라고 해요. 수호자입니다. 그러고보니 내 소개도 안하고 막 끌고 나와 버렸네. 아. 수호자라는 건 이렇게 새로 태어나신 분들 안내해 드리고, 이 마을을 지키는 사람들을 말하는 거예요. 지금부터 우리는... 흐음. 어디로 가 볼까나아... 아직 출발하기엔 이른데 말이죠."
이온이 정말로 생각하고 있는듯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 카리스는 고개를 위로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사실상, 그 위쪽에는 하늘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모두 이파리들에 가려져,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이 저곳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만 암시해줄 뿐이었다.
숲은 거대했고, 짙었다. 그리고 진했다. 낙엽이 모이고 썩어 생긴 부엽토와 그 위에 새로 쌓인 잎들이 모두 흐늘흐늘하게 젖어 있었다. 푹신한 이불을 한 겹 깔아 놓은 것 같은 땅이었다. 나무들은 각자의 아래에 작은 웅덩이를 하나씩 만들어 놓고 있었고, 이파리들은 끊임없이 그 곳에 작은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리고 그 웅덩이 탓인지, 조금은 짙은 안개가 흙 위를 덮고 있었다. 카리스는 여전히 맨발이었지만 어쩐지 실내의 바닥보다는 그 흙 위가 더 따스했다. 습한 흙기운은 숲에 차 있는 공기보다 더 포근한 느낌이 났다.
"여어. 뭐하는 거야?"
동그라미 하나가 점점 커져 웅덩이의 끝까지 닿는 장면을 보고 있던 카리스는, 낯선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푸른머리 소년이 있었다.
"아아. 료."
"이쪽이 그 신생아야? 흐음."
이온이 반가운 목소리로 료라고 부른 그 소년은 카리스를 아래 위로 훑어 보았다. 그것은 꽤 노골적이었는데, 이온이 그것에 대해 뭐라고 해주기 전에 소년은 입을 열었다.
"머리카락 참 심란하네. 뭐, 이온보다는 - 아아 아무튼간에. 왜 벌써 깼어? 어제 밤에야 태어났잖아. 그래서 해가 중앙나무에 걸릴 때까지는 잘 줄 알았는데. 아직 새벽 기운이 가시지도 않는 때에 일어났네?"
"응. 부지런하지. 서쪽 숲으로 가야 한다던데?"
"서쪽 숲이라... 그거 참 되게 애매하군. 서쪽이라고 하면 온통 숲 천지잖아. 초원 하나만 건너면 죄다 숲이지."
"뭐, 그렇긴 하겠지만."
이온은 피식 웃었다.
"그래서, 지금부터 어디에 갈 생각인데?"
"일단은 중앙에 가 봐야지. 그리고 곧 보내야 하는 거고. 뭐, 시간이 좀 있긴 해."
"...흐음. 오전에 깨어난 사람들은 역시 바쁘군 그래. 저녁에 태어난 애들은 그래도 하룻밤 자고 가는데."
"응. 절대명령도 굉장히 명료해서, 더 체류할 이유도 없어."
카리스는 자기를 두고 앞에서 지나가는 말들이 무슨 말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한 번 물어 보면 끝이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둘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 떠날 때 꼭 수통은 챙겨 주라느니, 모자도 하나쯤은 있어야 할 거라느니 하는 말을 남기고, 료는 이온과 카리스에게 인사를 하고 떠났다. 카리스와 이온이 나온 나무가 아닌 다른 나무의 문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둘 또한 그 자리를 떠나 어딘가로 향했다.
자박거리는 낙엽길을 좀 오랫동안 걷는다 싶었을 때 이온이 먼저 말을 꺼냈다.
"저희들 말하는 거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죠?"
멍하게 낙엽의 색을 관찰하고 있던 카리스는, 이온의 말을 듣고 난 후 조금 후에서야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뭔가 굉장히 잘못한 것을 들킨 어린아이같은 표정으로.
"그럴 거예요. 아무래도. 으음."
이온은 발걸음을 멈췄다.
"서쪽 숲으로 가신다고 했죠?"
카리스는 조금 앞서 가다가 곧 이온을 따라 발을 멈췄고, 질문에 대해 끄덕여서 대답했다. 그러자 이온이 말을 이었다.
"으음.. 그리고 이름은 카리스라고 하셨죠."
"예. 카리스."
"그 밖에 또 뭐 기억나는 거 없어요?"
"..."
카리스는 눈을 내리 깔았다. 그리고 시선을 약간 왼쪽으로 비꼈다. 오른손을 가져다가 입가에 대고, 오른쪽 팔꿈치를 왼손으로 받쳤다. 그러고서 조금 있은 뒤, 카리스는 이온과 눈을 맞추고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으음. 그럼 - 제가 이야기를 조금은 해 드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네요."
이온은 마침 옆에 있던 - 어쩌면 그것 때문에 발걸음을 멈춘 것일지도 모르지만 - 커다란 나무의자를 손으로 가리키며 생긋 웃었다. 그것은 밖에 있었던 것이지만, 거대한 나무 아래에 있었던 덕에 앉을 수 없을 정도로 젖어 있지는 않았다. 카리스가 먼저 앉았고, 뒤이어 이온이 앉았다.
"어디서부터 할까나아... 뭐부터 듣고 싶어요?"
"...으음 -"
카리스가 잠긴 목을 풀었다. 그리고 곧 말을 이었다.
"우선, 제가 - 신생아- 라는 것은.."
"아. 예. 그것부터. 예. 신생아입니다. 태어난지 열시간 - 아니, 그건 아니겠군요. 아무튼간에 태어난지 하루는 안 지났지요. 깨어나신 그 나무의 지하에서 태어나셨어요. 그걸 제가 발견해서 위로 데리고 올라온 거였고요."
"...아아."
"우리들은 - 으음. 뭐라고 할까나. 아무튼 우리들은 말이죠, 그 나무 지하에서 태어난대요. 왜 그런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아무도 기록을 남기지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아무도 기억하고 있지도 않았으니까. 나무 아래의 뿌리혹 같은... 아니 그건 좀 심하니까 고치라고 해 둘까요. 그런 데에서 태어나요. 그리고 태어나자마자 정상생활이 가능해요. 우리들에게는 언어나 걷는 방법 같은 것이 거의 본능 처럼 되어 있으니까요. ...아니아니. 이건 또 아니겠네요. 아무튼, 그래요. 지금도 걷는 데에는 아무 지장 없죠?"
"예. 아. 그리고 그 - 절대 명령...은."
"그러니까 그것도 공식어는 아닌데 - 제가 만들어 붙인 이름이에요. 태어나자마자 머릿속을 탁 스치고 지나가는 게 바로 그거죠. 어디로 가야겠다, 누구를 만나야겠다 - 하는 생각이 갑자기 떠오르는 것. 실제로 이 마을은 태어나는 곳이지 자라는 곳은 아니거든요. 다들 그 절대명령을 듣고 떠나버리니까.."
이온은 갑자기 말을 많이 한 탓인지, 조금은 피곤하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또 뭔가 없나요?"
"별로.."
"흐음. 그럴리가 없을텐데에."
카리스는 어깨를 약간 으쓱거리며 한쪽 입 끝을 올렸다.
"아. 아까 료가 한 말에 대해서 말씀드릴까요. 머리카락이 심란하다는. 그게, 우리들이 처음 태어났을 때는 머리카락이 거의 검은색이라는데요..."
"...처음. 이요?"
"아. 예. 처음이요. 그게..."
이온은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그게... 좀 긴데. 으으. 그러니까, 우리들은 한번 태어나서 죽는 게 아니래요. 저도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가봐요."
"...예?"
"맨 처음 태어난 아기들은 모두 검은머리. 그리고 그 고치에서 계속 누군가가 태어난대요. 그런데 그 머리색이, 점점 옅어진다나봐요. 검은색에서 검푸른 색, 푸른색, 옅은 파랑, 그리고 하늘색 - 마지막에는 하얀색까지. 그리고 그 하얀머리를 하고 죽은 자는 -"
카리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고, 이온은 살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다시는 다시 태어나지 못한대요. - 아. 말이 좀 우습지만 아무튼 그렇다네요."
"..."
"그리고 그 - 다시 태어나는 것도 확실하지는 않은가봐요. 저도 들은 것 뿐이니까. 기록도 없는 주제에 구전되다보니까, 확실히... 으음. 와전되었을 수도 있고요. 그냥 그 고치를 공유하고 있는 것 뿐일지도 모르죠. 바로 전 사람에게서 그 절대명령이라는 걸 받아서, 죽어서 이루지 못한 한을 풀러 간다고 하긴 하는데, 잘 모르겠어요. 아, 그리고 마지막에 받는 절대 명령은, 전 생애 - 라고하면 좀 이상하지만요, 음. 어쨌든 그 사람의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것이 된다고 하더라고요. 뭐, 이건 소문이라서 정확하다고는 말씀 못드리겠네요. 맨 마지막 절대명령이 제일 명확하긴 하지만, 아무도 그게 제일 중요한 일인지 아닌지 판단을 내릴 수가 없거든요"
"...아. 그러면..."
카리스는 뭔가를 물어보려는 듯 말을 꺼냈지만, 곧 말을 끊었다. 이온은 그걸 듣기라도 한 듯 대답했다.
"예. 저는 이제 다시는 태어나지 못할 것 같네요. 그리고 저에게 제일 소중한 건 이 수호자 노릇이고요."
씨익 웃으며 이온은 또 덧붙였다.
"료는 참 좋을 것 같죠오. 누구들이랑은 달리."
카리스는 아까 만난 푸른 머리 소년의 이름이 료였다는 것을 떠올렸다. 밝은 쪽보다는 어두운 쪽에 가까웠던 그 머리색을 생각해 내고, 카리스는 웃는 게 아닌 것 같은 웃음을 지었다.
"이제는 중앙 쪽으로 갈 거예요. 거기에서 아마 몇가지 좀 좋은 걸 줄 거예요. 옷이라든가 뭐... 칼이라든가."
카리스는 끄덕였다. 그리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둘은 일어났다. 그리고 '중앙'이라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은 이곳의 나무들 중 가장 크고 깊은 곳이라고 이온은 말했다.
"아, 그런데... 이온."
"예?"
"그럼 이온 같은 수호자들은 어떻게 하는 거예요? 첫번째 절대명령이 뭐였길래..."
"아아."
이온은 생긋 웃었다. 그리고 스스럼 없이 대답했다.
"태어나자마자 죽어버리는 약한 아이들이 있어요. 그런 아이들은 다음에 태어날 때 절대명령 같은 것이고 뭐고 없잖아요. 그렇게 의지를 갖지 못하는 사람들이 모여 수호자를 맡고 있습니다."
"...아아?"
카리스는 물어서는 안될 것을 물어본 느낌에 흠칫했지만, 이온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계속 대답했다.
"그래도 별로, 맨 처음에 죽어버린 제가 한심하지는 않아요. 이렇게 카리스 같은 분들을 도울 수 있으니까요."
이온의 상냥한 표정에도, 이어지는 친절한 설명에도, 카리스는 말 한마디 덧붙이지 못했다. 그것은 둘이 그야말로 거대한 그 '중앙나무'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바로 그 중앙나무를 생각나게 하는 나무 앞에서 카리스는 멈춰섰다. 만 하루를 달려 초원을 가로지르는 동안 처음으로 본 거대한 나무였다.
"...서쪽 숲..."
이쪽은 서쪽이고, 이곳은 숲이니, 서쪽 숲이 아닐까 - 하는 생각을 하며 카리스는 나무를 지나쳤다. 그 나무 뒤로는 더 많은 나무가 우거져 있었다. 그가 떠나온 곳과는 달리, 이곳의 나무는 좀 더 가늘고 잎이 많이 달려 있었다. 그래서 숲은 울창해 보였고 풍성해 보였다. 아니, 빽빽해 보인다는 쪽이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해는 이미 많이 기울어 있었다. 그에게 닿는 햇살이 그다지 많지는 않았지만, 마을에서 받아 온 망토가 거추장스럽다고 느낄 정도는 되었다. 카리스는 옷을 벗어 팔에 걸쳤다. 그리고 약간 거추장스럽게 긴 머리를 끈으로나마 질끈 묶었다. 머리카락에 가려졌다 다시 드러난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이 보였다.
드디어 해가 정점을 통과했을 때 즈음 해서야 그는 호수를 발견하고 얼굴을 씻을 수 있었다. 물을 움키고 얼굴에 대기를 여러차례 - 몇번을 그러고 나서야 그는 굽힌 몸을 바로 폈다.
호수의 물은 찼다. 그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호수 주변에는 고운 풀이 자라고 있었고, 그가 앉아서 쉬는 것에도 전혀 지장이 없었다. 그는 지친 몸을 쉬며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뱉고를 반복했다. 하늘이 맑았다. 숲이 울창했다. 찬 물이 있었다. 모든 것이 어쩐지 고맙게만 느껴졌다.
그런 그의 눈에 작은 석판이 눈에 띈 것은, 그가 작고 빨간 새를 눈으로 좇을 때였다. 그 석판은 이끼로 덮여 있었지만, 확실히 누군가가 돌에 직접 문양과 글씨를 새겨 정성스레 세워 둔 석판이었다. 빨간 새는 그 석판을 지나 여기저기를 헤매고 돌아다녔다. 그가 그 새를 눈으로 좇는 것만으로도 그 주위에 널려 있는 다른 석판들을 충분히 찾아낼 수 있었다.
그는 일어섰다. 가빴던 숨은 이미 멎어 있었다. 자박자박 소리도 나지 않는 젖은 잔디를 밟으며, 그가 석판으로 다가갔다. 석판은 모두 아홉개 쯤 되는 것 같았다. 풀숲 어딘가에, 나무 뒤 어딘가에, 또는 두꺼운 이끼 밑에 또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일단 아홉개였다.
그가 맨 처음 발견한 석판은 이끼로 빼곡하게 덮여 있었다. 그는 손을 들어 그 이끼를 걷어냈다. 꽤 단단했지만 이내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그는, 그의 '본능'으로 그 글자를 읽을 수 있었다.
[카리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새파랗게 날이 선 검이 그의 목으로 날아들었다.
챙 - 하는 파열음이 났다. 카리스는 어느샌가 마을에서 받아온 단검을 들고 석판에서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석판 위에는 어느샌가 다가온 인영이 하나 있었다. 인영의 오른손에 들린 검이 새파랗게 떨었다.
카리스가 이런 것도 본능인가 - 라고 중얼거릴 새도 없이 또다시 공격이 날아들었다. 이번엔 목이 아니라 머리를 노리는 기세였다. 또다시 파열음이 숲에 울려 퍼졌다. 붉은 새들이 푸르륵 날아갔다. 몇번이고 그런 푸른 파열음이 계속되었고, 카리스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죄송합니다! 누구신지 모르겠어요! 제가 죽을 죄를 지었다면 죽어 드릴 수도 있지만 - ! 제가 혹시 여기서 당신에게 -"
그 외침은 허리를 노리는 검격을 막느라 곧 멎어 버렸다. 그래서 카리스는 '저 무덤에 써 있는 이름이 바로 제 것인데요' 라고 하고 싶던 것을 참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왜 그런지 인영의 공격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카리스는 방어태세로 인영에게 계속 단검을 겨누고 있었지만, 어느새인가 인영은 저쪽에서 검을 옆으로 드리우고 얌전히 서 있었다.
"..."
정적이 흘렀다. 몇몇 새들은 용감하게 나뭇가지를 골라 앉을 수도 있게 그 정적이 계속될 동안, 카리스는 그 인영의 모습을 꼼꼼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땀인지 비인지에 젖어 있는 그의 머리칼은 아무렇게나 헝클어져 흰 얼굴에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며칠동안 고된 일을 하느라 안잤다고 해도 믿을 만큼 창백한 얼굴이었다. 당연하게도 깎지도 않은 수염이 지저분하게 자라 있었다. 굳게 닫혀 있는 입술이나 카리스를 곧 죽이기라도 할 듯 노려보고 있는 눈은 그 분위기에 지나치게 잘 어울렸다. 왼쪽 어깨에 얼기설기 얽혀 있는 피 묻은 붕대가 그것을 증폭시켰다.
"아니. 그런 죄는 짓지 않았다."
정적을 깨는 그의 화평한 목소리에 카리스는 도리어 놀라 방어태세를 더 굳게 해 버렸다. 그리고 조금 지나서야 그 말을 해석해 냈고, 그제서야 어색하게 웃으며 단검을 가방에 다시 넣어 놓았다. 저런 말보다는 '널 죽여버리겠다' 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릴만한 낮고 울림이 많은 목소리였다. 그는 그의 긴 검을 꽤 공들여 만든 것 같은 검집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나는 웨턴 아칼리. 웻이라고 불러."
"아, 예! 저는 -"
"카리스."
웻은 그렇게 말하며 턱으로 카리스가 이끼를 걷었던 석판을 턱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잘 알고 있어."
카리스는 눈을 크게 뜨며 웻을 쳐다보았다. 웻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카리스는 웻이 자기를 알고 있어도 결코 좋은 관계는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카리스가 보기에, 그건 친구의 표정이 아니었다.
웻이 이쪽으로 한발자국을 내딛자, 카리스는 흠칫 뒤로 물러섰다. 그걸 보고 웻은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듯이 카리스를 한번 쳐다보고 계속 카리스 쪽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카리스 발 아래에 무릎을 꿇었다.
...아니, 석판 앞에.
웻은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 가슴 앞에 갖다대었다. 그것은 마치 - 아니 확실히 - 기도를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카리스는 당황했다. 이 인간은 도대체 나를 완전 무시 하는 건가 - 하는 생각을 하며, 카리스도 얼떨결에 그와 똑같은 자세로 어느샌가 기도를 하고 있었다.
웻은 경건하고 성스럽고 진지하고 - 그리고 지저분한 모습으로 조용히 눈을 감고 기도했다.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카리스에게도, 이제는 거의 다 내려 앉은 새들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하지만 그 소리는 분명 대충 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단어 하나하나를 고르고 있는 듯, 웻의 미간에는 심각하게 주름이 가 있었다. 눈은 힘을 주어 감고 있는지 이따금씩 파르륵 떨렸다.
어쩌면 그 모습은 경건하고 성스럽기보다는 차라리 절박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무언가를 빌고 있는 듯 보이기도 했다. 카리스는 지나치게 기도가 오래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자 눈을 떴다. 그리고 웻의 옆모습을 흘깃 쳐다보았다. 카리스는 심연같은 검은 눈도 저렇게 감고 나니 꽤 평범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기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석판 앞에서 이 남자가 도대체 뭔 짓을 하는 건지를 고민할 무렵, 웻이 눈을 떴다. 그리고 일어났다. 카리스도 따라서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또다시 정적 - 카리스가 이온이 열심히 말을 할 때 그렇게 조용하게 있는 게 아니었다고 후회를 할 무렵, 웻이 말했다.
"...얼마나 기억하지?"
"예, 예?"
"..."
"아... 아주 - 아주 조금이요. 그냥 서쪽 숲으로 가야 한다는 것밖에는 기억이..."
"그렇군."
웻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그래도 용케 서쪽 숲이라는 건 기억을 했군. 장하네."
"아... 예."
"이건 네 무덤이다."
웻은 길다란 검집으로 석판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심드렁한 말투였다. 석판에는 다시 보아도 확실히 [카리스]라고 적혀 있었다. 카리스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퉁명스레 대답했다.
"그런 것 같군요. 이름이..."
"그래. 그리고 얼굴도 완전 똑같으니까. 그 카리스가 맞군."
그리고 웻은 또 피식 웃었다. 카리스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다시 태어나는 자들은 고치를 공유하는 것 외에도 얼굴도 공유 - 라고 하기엔 좀 뭐하지만 - 한다고 했다. 실제로 꽤 오래 살아있던 '중앙'의 장로급 되는 간부는 카리스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카리스로군."
"예- 예. 카리스..입니다."
흰색 수염을 꽤나 길게 기르고 있는 '장로'가 카리스에게 묻자, 카리스는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이온도 흰색 머리였지만 이 장로의 머리색이 그보다 더 희다는 느낌이 들었다. 카리스는 중앙나무에 이온과 같이 도착해, 위원회 비슷한 기관에 가서 간다는 신고를 하던 참이었다. 카리스가 채 말을 떼기도 전에 장로는 그의 이름을 말했고, 카리스는 더듬거리며 긍정했다.
"오랜만이오. 이번에도 절대명령은 서쪽 숲으로 가는 것인가?"
"...아, 예. 그래서 서쪽 초원을 지나 숲으로 가려고..."
"음. 알겠소, 카리스. 왼쪽 문으로 이온과 같이 나가면 그 쪽에서 이것저것 챙겨 줄 거요. 특히 단검은 잊지 말고 가져가시오."
장로는 인자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 전에, 몇가지 해둘 말이 있는데."
순식간에 그 웃음이 잦아들었다. 장로가 표정을 굳힌 탓이다. 카리스를 이끌고 문으로 나가려고 했던 이온은, 잡았던 카리스의 왼쪽팔에서 자신의 손을 떼었다. 그리고 멋적게 웃었는데, 그것도 곧 사그라들었다.
"이온에게 얼마나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내가 하는 말보다는 못할테니 몇마디 더 해두겠소."
카리스는 이온을 쳐다봤다. 이온은 다시 멋적게 웃었다.
"우리가 고치에서 태어난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예. 이온에게서 들었습니다."
"그 고치에서 우리가 무한생성되는 것은 아니오. 그러니까, 전의 생이 죽으면 곧바로 다시 자라지. 그러니까 말하자면 - 생과 죽음이 그야말로 맞물려 있다고나 할까. 그래서 우리는 고치가 자라기 시작하면 애도를 표하오. 그것은 곧 그 고치의 주인이 죽었다는 것이니까."
"..."
역시 이온에게서는 듣지 못한 설명이었다. 이온은 조금은 미안한지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그런 이온을 흘끔 쳐다본 카리스는 다시 장로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리고 그 절대명령이라는 것도, 그렇게 고치가 자라면서 전생의 존재에게서 이어받지. 죽어서 한을 푼다고나 할까 - 그런 거요. 그리고 그것을 용이하게 위해서든 어째서든, 어쨌든간에 그렇게 다시 태어나면서 우리들은 점점 더 강해지지."
장로는 턱으로 잠시 이온을 가리키고 말을 이었다.
"이온 같은 경우에는 맨 처음의 아이가 지나치게 약해서, 고치 옆에서 죽어버린 경우지. 자신의 시체 옆에서 다시 태어난 아이는 꽤 있고, 이온도 그런 경우였다오. 지금은 뭐. 쓸만하게 강하지만."
"예. 쓸만하게 강해져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온은 얼굴을 붉히며 셀쭉 웃었다. 그 표정을 본 카리스가 따라 웃을 수 있을 정도로, 비뚤어지지 않은 웃음이었다.
"그런데, 카리스는 - 그러니까 자네는, 내가 기억하기로는 최근 6개월간 한달을 주기로 계속 태어났지."
"- 예?"
"고치가 자라기 시작하면서부터 한달이 지나야 우리들은 태어나오. 그러니까 자네는 - 태어나자마자 죽기를 계속 반복했던 거지. 게다가 절대명령은 계속 서쪽 숲으로 간다는 거였소. 그렇다면 - 그 숲에 가지 말아야 되는 게 아닐까."
장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카리스를 쳐다보았다.
"...개인적으로는 말리고 싶소. 중간의 그 '초원'에서 죽었을 가능성도 있긴 하지만.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지난번보다 더 강해진 지금의 자네라면 충분히 서쪽 숲이라는 곳에 갈 수 있긴 하겠지만 말이오."
카리스는 장로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 근심에 가득찬 표정을 알지 못했다. 한동안 셋, 그리고 장로 외의 간부들은 조용히 있었다. 카리스가 말을 꺼내면서 그 정적은 깨졌다.
"그래도 - 가보고 싶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가 -"
'궁금합니다'와 '알고 싶습니다' 사이에서 카리스가 고민하는 동안, 장로는 약한 한숨을 토해내며 말했다.
"그러다면, 자네가 원하는 대로."
그리고 카리스는 단검, 가방, 망토와 믿음직스러운 신발을 받고 마을을 떠났다.
"저 - 죄송하지만, 무슨 일로 제가 죽었는지 좀 알 수 있을까요."
카리스는 얼굴을 붉히면서까지 웻에게 물었다. 아무 표정 없이 그를 바라보던 웻은, 왼쪽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대답했다.
"칼싸움 중에 칼 맞아서. 지금이랑은 정말 비교가 미안할 정도로 약해 빠진 놈이었으니."
"..."
"'너희들'은 흰 머리가 될수록 강해진다더니, 그 말이 맞긴 맞네. 그래도 지금은 현상금 50골드짜리 산적에게 칼맞아 죽진 않겠군. 아니아니 - 다섯명이니까 - 음. 250골드라고 쳐도 좀 심하잖아? 넌 한명밖에는 상대하고 있지 않았다고. 겨우 50골드 짜리에게 넘어가는 꼴이란."
"그 - "
카리스는 50골드라는 것이 얼마나 싼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확실히 조롱받을만큼은 된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아무튼 왔으니 됐다."
웻은 또 피식 웃었다. 카리스는 그런 웻의 왼쪽팔을 흘끔 보았다. 아직 채 아물지 않은 상처가 붕대 너머로 있을 거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때 그 전투에서, 자신은 죽고 웻은 다쳤을 거라고 - 카리스는 생각했다.
"가자."
"어디를요?"
"글쎄. 어디일까. 맞춰봐."
"...그. 그런 - "
웻이 또 웃는 것을 보며, 카리스는 이 인간이 원래는 굉장히 가벼운 인간인데 이렇게 초췌해서 진지해 보이는 것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시덥잖은 농담 같았다.
"수도로 가기로 했잖나."
웻은 이제는 처음으로 눈까지 웃고 있었다.
"수도로 가서, 일단 이 산적들 넘겨야지. 뭐, 다 해골이 되었을테니 그럴 수도 없으려나. 그리고 작은 가게를 하는 거다. 좀 살벌한 것들을 파는."
그는 자신의 검을 들며 말을 이었다.
"이런 것."
그의 검은 그가 무기상을 하고 싶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매우 잘 손질되어 있었다. 직접 새겨 넣은 듯한 검집 무늬는 약간 조잡했지만, 그래도 그런대로 봐줄만은 했다.
"아... 그러기로..."
"약속했었어."
"으음 - "
"기억은 안나겠지. 안다. 그런건."
무기상을 할 생각에 히죽이던 웻의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그리고 발치에 있던 자루 하나를 집어 카리스에게 던졌다. 경쾌하지만은 않은 금속의 파찰음이 울렸다. 웻은 '밑천.'이라고 짧게 설명했다.
"저어- 그런데."
카리스는 조심조심 뭔가를 물었다.
"여기서 얼마나 기다리신 거예요? 저희들이 아무리 빨리 태어나도 한 한달정도는 있어야..."
"지난 번 달이 만나는 때부터."
"아. 그럼 정확히 한달.."
"그래."
카리스는 고개를 숙이며 작게나마 '죄송해요' 라고 말했다.
"그래. 그러니까 죽음으로 사죄해라."
"예, 예?"
"...아냐. 농담."
카리스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놀라자 웻은 쿡쿡댔다.
"자. 그럼 가 볼까."
"아, 예. 그런데 - 현상범들은 다들 어디 있죠?"
"일단 다 썩어 버려서 말이야. 뼈를 추려서 저쪽에 골라 놨어. 특징 있는 악세사리 같은 것들도 같이. 음. 저건 내가 지고 가지."
웻은 작은 바위 뒤에 있던, 카리스에게 넘겨준 것보다 더 큰 자루 하나를 들쳐메었다. 뼈가 부딪히는 소리인 듯, 달각달각하는 소리가 울렸다.
"자, 가자."
"..."
"뭐해? 빨리 가자니까."
웻은 재촉했다. 그러면서 자루를 고쳐맸다. 자루가 움직일 때마다 달각달각 소리가 났다. 조금은 불편한 듯, 웻은 자루를 고쳐 메고는 칼도 한번 더 제대로 매었다. 하지만 그런 몸동작과는 달리, 수도로 향해 당장이라도 가게를 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지 얼굴은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나는 원래는 이런 성격이에요' 라고 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럴 동안 카리스는 가만히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무덤.
"...뭐해?"
웻이 물었지만, 카리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바닥을 내려다 보았다. 그곳엔 이끼로 빼곡히 덮여 있는 석판 하나가 있었다.
"아까부터 궁금했던 건데요."
"응?"
"왜.. 석판은 아홉개죠?"
카리스는 허리를 숙여 석판의 이끼에 손을 댔다.
"아까 그 산적이라는 건 다섯명이라고 - "
이끼가 반쯤 걷혔을 때 - 카리스의 눈 앞에서 검이 공기를 갈랐다. 낮의 태양이 검에 반사되어 카리스의 눈을 찔렀다. 그덕에 카리스는 뒤로 넘어졌고, 빛에 당한 눈을 겨우 추스렸을 때, 그 눈은 카리스 목에 겨눠져 있는 검을 비추었다. 그리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는, 게다가 눈을 경악스럽게도 크게 뜨고 있는 웻을 비추었다. 또 안타깝게도 이끼가 모두 걷힌 석판까지도 비췄다.
석판에 새겨져 있는 글자가 지나치게 또렷하게 읽혔다.
[카리스 4]
그 순간 카리스는 심장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카리스나 웻이나 둘 다 서로를 경악에 찬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던 카리스의 심장소리가, 웻의 숨소리가 조금은 잦아들었을 무렵, 웻이 입을 열었다. 그 입은 유쾌하게 웃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재미있다는 듯이 웃고 있긴 했다.
"...가르쳐줄까?'
웻의 눈이 살짝 웃었다. 하지만 그 표정 역시 경쾌하지도, 유쾌하지도 않았다. 난폭한 손님을 다룰 때 식당 지배인이 지을 것 같은 웃는 표정이었다.
"아니, 가르쳐주지 않는 편이 나으려나."
"가 -"
카리스가 입을 열었다가 이내 닫았다. 목소리가 꼴사납게 떨리고 있었다.
"가르쳐 - 주세요."
맨 끝 음절을 발음하는 소리가 지나치게 울먹였다. 공포에 질려 울어버리고 싶을 때 나올 듯한 떨림이었다. 카리스도 자기가 그런 소리를 내 버렸다는 걸 깨달았는지, 오른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간단해."
웻은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맨 처음에 네가 죽은건 그 꼴같지도 않은 50골드 짜리 산적에게 죽은 게 맞아. 내가 널 줏어다가 마을에 팔아먹으려고 가던 도중 만난 거였지. 너희들은 꽤 비싼 값에 팔아먹을 수 있다는 거 알고 있어? 죽여도 죽여도 다시 돌아오잖아. 무슨 귀신 같이. 그래서 신기하기도 하고, 부잣집 심장 약한 떨거지들 놀라게 해서 집을 먹기도 하고 - 그렇게 이래저래 비싼 몸이거든, 너희들은. 그런데 고작 50골드짜리 산적에게 당해서, 넌 여기서 빠져 죽었지."
웻은 왼손으로 호수를 가리켰다.
"그래서 일단은 여기서 기다렸어. 뭐, 어떻게 됐든간에 여기 있으면 올테니까. 그래서 기다렸더니만 - 아 글쎄, 보자마자 칼 하나 들고 덤비더라고? 아 정말 같잖아서 - 그래서 단숨에 베어줬지. 그러고 나니까 다음에 올 새끼들 부터는 무덤 같은 거 보여주면 정말 재미있어질 것 같더라고. 그래서 만든 게 이 석판. 두번째 것 까지는 아래에 아무것도 없어. 시체는 다 호수 밑바닥 어딘가에 있겠지. 세번째에는 네가 확실하게 들어있지만."
카리스가 응시하고 있던 석판에는 [ 카리스 4 ] 라는 숫자가 지나치게 또렷하게 박혀 있었다. 그것을 눈치챈 웻은 그 아래에는 이제 네가 들어갈 거라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아. 그리고 네 단검들도 기다렸어. 이게 꽤 잘 만들어진 거라서 말이지. 나중에 한밑천 되겠던걸?"
웻은 입꼬리를 말았다. 저것이 웃는 표정이라고 하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카리스는 그렇게 판단하고 싶지 않았다. 사냥감을 앞에 놓고 기분 좋은 표정을 짓고 있는 고양이 정도라면 모를까.
"아아. 말해버렸다. 이젠 어쩌지?"
웻은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죽여버릴까 - "
카리스의 몸이 흠칫 경직됐다. 그리고 한층 더 낮아졌다. 슬금 슬금 뒤로 물러나는가 싶더니, 어느샌가 카리스는 일어서서 달리고 있었다. 단검도, 가방도 없는 몸이라서 그런지 초원을 가로지를 때보다 더 날렵했다. 아니 - 그건 죽지 않기 위해 달리고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카리스가 아무리 빨라도 검을 든 웻만큼은 빠르지 못했다. 곧 웻에게 잡혔고, 카리스는 멈춰서야만 했다. 그것도 언젠가 초원에서 그랬던 것처럼 대단하게 굴러 가면서.
카리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웻을 향해 살려달라는 눈빛으로 소리없이 애원했을 뿐. 지저분하게 흘러내린 땀이며 눈물이 꽤나 매끈했던 얼굴에 얼룩을 만들고 있었다. 시선은 웻을 향해 있었지만 초점은 없었다. 웻은 피식 웃었다. 눈이 가늘게 뜨는가 싶더니만, 칼을 당장이라도 내리칠 기세로 높이 올렸다.
"...이상 - 해요."
카리스는 덜덜 떨면서 말했다. 그는 칼날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입술이 비정상적으로 움직였다. 머리가 짜증날 정도로 잘 돌아가고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말을 하지 않고 저 칼날을 받아 죽는다면 굉장히 억울하다는 듯이 카리스는 주절주절 말했다.
"왜 - 왜 - 그럼 기다린 거죠. 아까 한달 - 동안 기다린다고 했던 건 거짓말 일 것 아니예요 - 나같으면 이 시간에 마을에 가서 저 단검으로 지금쯤 장사를 시작 - "
"...시끄러워. 그건 내 맘이야. 네놈을 아예 끝까지 죽여놓고 싶은 생각이 있었던 것도 있고."
"그런 - 그건 - 시간낭비가 - 그리고 - 그 - 상처는 - 아마도 제가 -"
카리스는 논리를 잃어버린 듯, 떨리는 목소리와 칼만을 쳐다보고 있는 커다란 눈을 하고는 계속 떠들어댔다. 웻은 그 모습을 쳐다보았다. 그 역시도 조금은 떨고 있었다. 칼을 든 손이 공중에서 지나치게 긴 시간을 머물렀다. 입술이 질끈 깨물렸다. 추하게 울고 있는 카리스를 담은 눈이 가늘게 떠졌고, 한쪽 입꼬리가 쓰게 올라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의 검은 카리스를 날렵하게 갈랐다.
두 손 가득 물을 움켜쥐고, 그는 그 물을 이내 얼굴에 문질렀다. 호수가 찰방거렸다. 푸핫 소리가 났고, 곧 이어서는 기분 좋은 웃음 소리가 났다. 흰색 - 아니 은색이라도 해도 좋을만한 머리카락이 기분 좋게 젖어 있었다.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물을 뿌린 그는 얼굴 가득 웃음을 듬뿍 바르고 그 자리에 당장 주저 앉았다. 땅이 젖어 있었지만, 그의 옷 역시 젖어 있었기에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고 곧 나무 아래에 나타난 누군가를 보고 외쳤다.
"웻!!"
앉아있던 그는 곧 일어났다. 그리고 나무 아래의 인영에게 달려갔다. 가벼운 옷자락과 허리춤에 맨 단검이 팔랑팔랑 경쾌하게 그를 따라갔다. 웻이라고 불린 사람은 약간 겸언쩍은듯한 미소를 띄며 흰머리 남자를 바라보았다.
"빨리 짐 챙겨요! 지금부터 수도로 가야 하잖아요?"
그가 유쾌하게 외쳤다. 웻은 한쪽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카리스?"
"예! 저 돌아왔어요! 으으 - 많이 기다렸죠? 아니, 한 한달쯤 기다렸으려나? 아아 정말 미안해요! 그때 저는 정말 지나치게 약해서어어~ 아 맞다. 다른 사람들은 다들 어디 갔어요? "
"..."
"웻? 으음? 어디 아파요? 아아 정말 내가 너무 기다리게 했나?"
"...떠났어. 다들 먼저 떠났어. 지나치게 오래 기다리긴 곤란하다고 하면서."
"예에- 그렇군요! 그러면 지금 출발하면, 다들 만날 수 있는 거죠? 캬하아- 수도다! 무기점이다!!"
카리스는 춤이라도 추는 듯이 웻의 주위를 깡총깡총 뛰어 다녔다.
"...뭐야."
웻은 피식 웃으며 말을 꺼냈다.
"다 기억하는거야?"
"그러-엄요오!"
카리스는 자랑스럽다는 듯이 외쳤다.
"...그럼 읊어봐 좀."
"옙! 저는 그러니까 - 저 호수에서 꼴사납게 빠져서 죽었습니다아! 물놀이하다가."
장난스레 웃고서,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웻이 그랬죠. 일행들하고 다들 여기서 쉬고 있을테니깐 어서 다시 태어나서 오라고. 웻은 이상~하게도 우리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니깐요? 아 물론, 제가 빠져서 허우적 거릴 때 구해주지도 않고 그것부터 외친 웻이 좀 원망스럽긴 했어요. 근데 뭐, 제가 그렇게 약하니 여행은 정말 계속할 수 없었을 때였으니까요. 차라리 다시 태어나는 게 나을 정도면 말 다했죠 뭐? 뭐 아무튼 그래서. 다시 태어나서 왔습니다아!"
하늘을 향해 주먹 쥔 손을 높이 쳐들고 - 그러니까 아주 의기양양한 포즈를 하고 카리스가 말을 맺었다. 웻은 박수라도 쳐주려던 생각이었는지, 손을 가슴높이까지 마주보고 들었다가 이내 내려 놓았다. 그는 박수를 치는 대신 생긋 웃었다.
"...맞았어."
그리고 그 다음 순간엔 표정이 탁 풀려 버렸다. 아니, 굳어 버렸다고 해도 좋을 듯 했다. 그런 표정을 한 웻은 말을 이었다.
"......응. 맞았어. 그게 정답이지. 그게..."
"예-엡! 그러면 가자구요!"
카리스는 찰랑찰랑 고개를 돌리며 짐을 둘러보았다. 자루는 모두 두 개. 작은 쪽을 둘러메며, 그는 웻에게 손짓을 했다. 어떻게 봐도 어서 오라는 표시다. 웻은 힘없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떴다. 큰 자루를 들쳐메고, 그는 카리스를 앞질러 갔다. 오른손은 장검을, 왼손은 자루를 무리 없이 들고 가고 있었다.
웻이 물었다.
"어이, 카리스. 너도 그 소문 알고 있냐?"
"예? 무슨 소문이요?"
작은 자루가 더 무겁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카리스는 조금씩 표정이 찌그러지고 있었다.
"흰머리의 너희들은, 그 전 생애가 어찌 되었건간에, 일생을 통틀어서 가장 중요한 기억만 가지고, 가장 중요한 절대명령만 가지고 태어난다는 소문."
"아... 그거!"
카리스는 밝은 표정이 되어 대답했다.
"뭐, 일단은 사실이라고 하는데 - 확실하지는 않다면서요? 내가 뭔 말을 하고 있는지 참. 아무튼, 흰머리들의 기억이 파랑머리들보다 확실하긴 하죠. 웻 이름도 기억했잖아요 전. 음 - 그런데 도대체 그런건 어디서 알아내는 거예요?"
"아니 그냥. 여기저기서."
"웻은 아무튼간에 쓸데없는 건 엄청나게 알고 있다니까. 그래, 그거 진짜래요?"
"...글쎄. 진짜 같긴 해."
'너를 봐선 말이지 - '라고 말을 이으려다가, 웻은 말을 멈췄다. 그리고 그 말을 하는 대신 자루를 고쳐 메었다. 숲에 간간히 나타나던, 긴 뿔을 가진 말을 잡아 얻은 뼈가 자루 속에서 부딪혔다.
"고마워."
"예에?"
"나를 이렇게 기억해줘서, 고마워."
생긋 웃는 웻을 보고, 카리스는 못볼 걸 본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웻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웃어댔다. 카리스도 결국은 웃기 시작할 무렵, 두 사람은 황혼이 지는 저녁을 걷고 있었다. 하늘 저편부터 주홍빛이 서서히 물들고 있었다. 잎에 적당히 여과되어 그들에게 닿는 빛은 더없이 따스하고 자애로웠다.
"그런데 말이지."
웻이 탁한 목소리나마 말을 꺼내자, 카리스는 그쪽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웻은 그가 걷는 쪽을 응시하며 말을 이을 뿐이었다.
"난, 내가 무섭다."
"에엑?"
카리스가 표정을 있는대로 찡그렸지만, 웻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 그저 말을 이을 뿐.
"몰라. 무서워. 지금까지 기다리면서 정말 많은 일이 있어서 말이지."
"헤에 - 웻, 그동안 되게 많이 음침해졌네요? 전엔 안 이랬는데?"
"...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
"흐음... 뭐, 좋은 사람."
그 대답을 듣고 웻은 쓴 풀을 씹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카리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떠들어댔다.
"뭐, 상관 없어요. 아무튼 지금이 중요한 거니까. 흰머리에게 내려진 절대명령이란 정말 절대적인 거라고요. 제가 지금까지 태어나고 태어나면서 고른 유일한 하나일 테니까. 뭐, 반드시 제가 이리로 이런 식으로 와야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오게 된 거겠죠."
"...속 편한 소리만 하는군."
"예 - 뭐. 기억이라는 게 정말 장난 같은 거긴 하지만, 그래도 뭐... 음. 에잇 몰라요. 빨리 걷기나 해요. 이러다가 여기서 해 져 버리면 재미 없다구요.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웻은 그제서야 숨통이 트였다. 두개의 달이 만나는 밤이었다. 둘은 씩씩한 발걸음으로 수도로 향했다.
첫번째 카리스는 지나치게 약했다.
두번째, 세번째 카리스는 기억력이 형편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무덤을 보고 기다리고 있던 그의 동료를 공격했다.
그래서 그의 동료는 어쩔 수 없이 사나운 그들을 베어야 했다.
네번째 카리스는 지나치게 영리했다.
모든 것을 묻어 버리고 여행을 시작하기에는 지나치게 약했다.
마지막 카리스는 가장 중요했던 기억으로 그의 동료를 꼽았다.
그제서야 둘은 여행을 이어갈 수 있었다.
무지무지 길고 긴 글이 되어 버렸네요.
단편이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길이나 느낌이나.
며칠동안 붙잡고 있었는지 모르겠네요.
그리고 잡을 때마다 이리저리 방향이 휙휙 달라졌고요.
지금 방향도 그다지 좋아 보이진 않고...
떠벌떠벌 설명만 많아서, 다 읽으신 분이 얼마나 계실지 의문입니다.
게다가 막판엔 주둥아리로 모든 사건처리... 아아아 (풀썩)
- 넓은 황야(초원)을 가로지르는 주요인물의 모습
[시간 : 밤, 날씨 : 맑음, 만월]
- 이(異)종족 마을
[인간의 마을과 확실히 구분되는 특징적인 모습이 나타나야 함]
- 아침의 숲(전날 비가 내렸음)
- 숲 가운데 있는 무덤에서 기도를 하는 주요인물(들)의 모습
[시간 : 낮, 날씨 : 맑음]
네가지를 어떻게 다 넣긴 했는데
두번째 사항은 잘 들어간건지 아닌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상,
아(ㄹ)칼리(성) 이온 (음) 료 4(포) 카리스 웻 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알칼리성 이온음료 포카리스웨트입니다.
하얀색으로 갈증/한을 푼다는 점,
파란색 이미지가 있다는 점을 생각해서
등장인물들 이름을 저렇게 지어봤습니다.
재미있을지는 잘 모르겠군요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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