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휴일이라 원없이 잠을 자려고 하는데 나를 깨우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인가 싶어 자꾸만 감기는 눈을 비비며 일어나 앉았다. 아내는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빨리 시골에 내려가 장인어른, 장모님을 모셔오라는 것이었다. 평소에 안하던 짓을 하는 아내의 눈초리가 이상해 재차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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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가에 가서 차로 싣고온 느릅나무껍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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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유진택 | "시골에는 뭐하러." "느릅나무 껍질하고 우리 싸 줄 물건이 있나봐."
나는 느릅나무 껍질이란 말에 눈을 크게 떴다. 다른 물건들은 평소에 처가에서 많이 가져온 탓에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느릅나무 껍질이 귀에 거슬렸다.
"느릅나무 껍질이 뭔데." "전번에 내가 위염 때문에 병원에 다녀온 적이 있었잖아." "근데 두 분이 그걸 어떻게 알았어." "내가 전화했어." "그새 그걸 못 참고 전화를 빠르르 하면 어떻게 해, 장모님이 뇌출혈로 퇴원한 지가 얼마됐다고, 충격 받는 말은 절대 하지 말라고 했잖아. 당신도 문제야. 당신이 진작 진단을 받고 약을 먹었어도 이런 일은 없잖아."
나는 모든 것이 싫었다. 그 새를 못 참아 단숨에 전화를 한 것도 문제지만 몇 달 전부터 귀가 따갑게 부탁을 한 내 말에 콧방귀만 뀐 아내가 너무 못마땅했다.
"병원가봐. 그냥 놔두면 더 크게 도져."
잠자리에 눕기만 하면 내 앞에 등을 갖다대는 아내 때문에 한결같이 내뱉던 말이었다. 아내는 잘 체했다. 낮에 밥을 맛있게 먹고 나면 저녁에 속이 거북하다며 등을 내밀었다. 그러면 나는 등을 잘 토닥거려 주었다. 허리께부터 목덜미까지 몇 번 오르내리며 솜방망이처럼 등을 두드려주면 아내는 속이 시원하다며 트림을 하곤 했다. 매일 밤마다 똑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팔자에도 없는 안마사 노릇을 하려니 괜히 부아가 치밀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소리를 버럭 질렀다.
"제발 병원 좀 다녀오라고."
그런데 어느 날부터 조용했다. 밤마다 등을 내미는 아내의 요구도 없었다. 난 이제 아내의 속이 괜찮은 걸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아내는 나도 모르게 병원에 들러 진단을 받았다는 얘기를 꺼냈다. 그동안 자주 속이 체했던 것이 위에 염증이 생겨 그렇다는 것이다. 이런 얘기를 불과 아내한테 어제 저녁에 전해 들었는데 그것이 순식간에 장인어른, 장모님 귀에 까지 들어갔으니 대전에서 시골까지 연결된 전화망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에 뒤질세라 눈 깜짝할 사이에 시골에서 싣고 온 물건들을 거실에 내려놓는 자가용의 위력도 만만치 않았다. 거실에 싸놓은 물건들은 거의 농산물이었다. 시장에서 바로 구입해 먹을 수 있는 양파, 감자, 김치 등이 한 봉지씩 보기 좋게 묶여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눈길을 끈 것은 느릅나무 껍질이었다. 까만 비닐봉지가 터지도록 가득 들어있는 느릅나무 껍질들, 울퉁불퉁한 껍질들이 꼬들꼬들하게 말라붙어 향긋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위염에는 느릅나무 껍질이 직방이여."
장인어른이 내뱉는 말에는 힘이 있었다. 거짓말처럼 잘 듣는 효능 때문에 장인어른이 오래 전에 산 속에 들어가 느릅나무에 칼집을 내고 두텁게 달라붙은 껍질을 벗겨낸 것이 틀림없었다. 두 분이 아침부터 한바탕 난리를 피우며 빨리 시골로 내려와 싣고 가라고 한 것이 바로 이 느릅나무 껍질이었다.
"주저자에 무이 가드 부고 꺼지 하 우크 너크 파파 끄이며 부그 무이 우여 나오느데 그거 하우에 서너자 마시어."
안 그래도 시골에서 물건들을 차에 실으면서 장인어른이 느릅나무 껍질 끓이는 법을 잘 설명해 주셨는데 그것도 모르고 장모님이 다시 서툰 발음을 곁들인 것이었다. 뇌출혈로 퇴원한지 두 달밖에 되 지 않는 장모님은 아직도 성치 않는 발음으로 끓이는 방법을 설명해 주셨다.
자꾸만 잇몸 새로 빠져나가는 바람처럼 자음은 다 달아나고 모음은 쭉쭉 미끄러지는 발음으로 힘들게 말씀하시는 장모님을 보자니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장모님이 말씀하신 내용을 알기 쉽게 말하면 물을 가득 채운 주전자 속에 느릅나무 껍질 한 주먹을 집어넣고 팔팔 끓이면 붉은 물이 우러나오는데 그것을 하루에 서 너 잔씩 마시라는 거였다.
장모님의 눈시울 뜨거운 얘기를 옆에서 들으면서도 난 정말로 이 느릅나무 껍질이 위염에 효과가 있는지 의심이 들었다. 두 분이 시골에서 떠도는 헛소문을 전해들은 것은 아닌지 괜히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인터넷 검색창의 문을 두드려 보았다. 그런데 거기에는 놀랍게도 동의보감에 기록된 내용을 상세하게 덧붙여 놓았다.
느릅나무는 성질이 평하고 맛이 달고 독이 없으며 부드러워 대소변을 잘 통하게 하고 장 위의 사열을 없애 장염에 효과적이며, 부은 것을 가라앉히고 불면증을 낮게한다. 또한 위궤양, 위염, 위하수 등 각종 위장 질환에 잘 듣는다.
장인어른, 장모님의 말은 딱 들어맞았다. 하기야 헛소문만 믿고 그럴 분들이 아니었다. 느릅나무 껍질 물을 마시고 효험을 본 분들한테 확인까지 했을 것이었다. 평소에는 잘 모르다가 이런 위급한 상황이 터지면 바로 드러나는 것이 자식에 대한 부모의 지극한 사랑이다. 전에도 몇 번 비슷한 일이 있을 정도로 자식에 대한 사랑은 남들보다 더 유별난 것 같았다. 그래서 자식한테 내리사랑이라고 한 말이 이래서 나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