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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 선별적ㆍ시혜적 복지를 넘어 사회경제 대안으로
- Simple and Powerful, 지금 당장 가능한 사회경제적 조치 -
권문석 | bi@basicincome.kr
기본소득?!
기본소득(Basic Income)은 말 그대로 모든 사람의 소득을 조건 없이 충분히 보장하는 것이다. 시작은 그랬다. 소득보장이라는 단순한 발상이 점차 발전했고, 많은 사람이 골격을 잘 세우고 살을 붙여갔다. 그 결과, 명쾌한 언어로 ‘기본소득’이라는 개념을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기본소득 국제학술대회 조직위는 “기본소득은 어떠한 자산 심사나 노동 요구도 없이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개별적으로 지급하는 조건 없는 소득이다. 기본소득은 생활을 충분히 보장하는 수준으로 매월 지급하며 교육, 의료, 주거, 보육, 노후 등의 기본복지와 함께 한다.”라고 설명했다.
기본소득 국제학술대회가 지난 1월 27~29일에 걸쳐 진행됐다. 대회를 위해 5명의 국외 기본소득 운동가들이 방한했다. 현대적 기본소득 이론의 기초를 닦고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IEN: Basic Income Earth Network | http://basicincome.org) 국제위원회 의장과 벨기에 루뱅 가톨릭대학 교수를 겸하는 판 빠레이스(Philippe Van Parijs), 브라질 시민기본소득법 제정의 주역이며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공동 명예의장인 상파울루주 노동자당 상원 의원 에두아르도 수플리시(Eduardo Matarazzo Suplicy), 독일의 급진적 기본소득 논의를 주도하는 좌파당(Die Linke) 기본소득 연방연구회 연구위원인 로날드 블라슈케(Ronald Blaschke), 오는 3월 27일 공식 출범하는 기본소득일본네트워크 코디네이터이자 교토 도시샤대 교수인 야마모리 도루(山森亮) 등이 대회에서 기본소득에 대해 발표했다. 국내에서는 9명의 기본소득 운동가들이 발표했다. 기본소득네트워크(한국, http://cafe.daum.net/basicincome) 대표를 맡는 한신대 경제학과 강남훈 교수, 급진적 기본소득 논의를 주도하는 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연구소 곽노완 교수, 강남훈ㆍ곽노완 교수와 함께 한국형 기본소득 모델을 만든 민주노총 이수봉 전 대변인(현 사무부총장), 기본소득을 강령으로 채택한 사회당 최광은 대표, 민주주의와 기본소득을 자유와 평등이라는 보편적 가치로 재구성한 사회대안포럼 금민 운영위원장 등이 발표했다. 또한, 대회 국내외 발표자를 비롯해 600여 명의 시민이 기본소득 서울 선언(http://basicincome.kr)을 채택했다.
대회의 가장 큰 성과는 기본소득에 대한 명확한 개념 정리라고 할 수 있다. 무상의료, 무상교육(무상급식 포함), 무상보육, 주거공공성과 같은 기존의 복지적 개념 역시 기본소득에 포함된다는 공감대를 만들었다.
기본소득과 무상급식
단순한 발상에서 시작한 기본소득은 여러 계기를 걸쳐 점차 발전하게 되었다. 일단 원초적인 질문이 나왔다. 왜 일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돈을 주나? 이 질문에 대한 기본소득 지지자들의 대답은 단순하다. 이 세상에 일하지 않는 사람은 없으며, 단지 임금노동과 자본의 관계를 맺느냐 안 맺느냐의 차이일 뿐이며, 자본주의 및 신자유주의 시대의 착취와 수탈에 보상이다. 이런 이야기는 점차 확산할 수밖에 없는데, 모든 논증으로 이어졌다. 확언컨대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모든 사람은 ‘무상급식’을 찬성한다. 무상급식에 대해 “왜 있는 집 아이들까지 밥을 주느냐.”라며 반대했던 한나라당 정치인들의 발언에 대해 무상급식 지지자들은 “모든 아이가 눈칫밥 먹지 말아야 한다.”라며 반박했다. 무상급식 옹호 논리는 기본소득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가난하다는 것을, 일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자신은 철저히 나라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과정을 왜 거쳐야 한단 말인가.
시행 10년째를 맞이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생활이 어려운 자의 최저생활 보장과 자활을 위해” 시행되었다. 충분히 예상된 결과였지만,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헤아릴 수 없는 광범위한 사각지대만 남긴 채 파행을 거듭하고 있다. 자기 가치의 수만 배가 넘는 거품을 키워온 자본이 붕괴하면서 나타난 경제위기는 서민경제를 휩쓸었고,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경제위기 여파로 빈곤층이 급증했지만,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혜택(?)을 받는 국민의 비율이나 숫자는 여전하다. 이명박 정부가 서민경제나 복지를 경시하는 것도 원인이지만, 제도 자체가 사각지대를 만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009년 3월, 기획재정부가 공식적으로 밝힌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사각지대는 무려 410만 명이다. 정부 통계가 이 정도면 실제 사각지대는 1,000만 명에 육박한다는 것이 사회복지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선별적 복지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
기초법과 같은 선별적 복지는 일정한 조건에 맞을 때에 지급되는 복지이기에 심사라는 방식으로 대상자에게 증명 책임을 요구한다. 개인은 수급을 받기 위해 사회가 요구하는 조건을 받아들이고, 자격 심사를 위해 사적인 정보를 공개하고 또 증명해야 한다. 현금 급여는 시혜가 아니라 분명히 대상자의 권리임에도 심사 과정은 정작 대상자에게는 징벌적으로 다가온다. 정보 공개와 증명 등의 과정은 대상자의 다른 기본권을 침해할 수도 있다. 복지福祉라는 말이 삶의 질 향상을 의미함을 상기할 때, 이 사실은 큰 결점일 수밖에 없다.
선별적 복지가 가진 또 하나의 문제는 반드시 사각지대를 발생시킨다는 점이다. 낭비적인 비용과 심각할 정도의 인권침해 없이는 모든 사람에게 개인 사정에 맞는 복지를 제공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점은 명분에 대한 모순으로 작용한다. 즉 복지의 제공에 있어 심사와 선별을 정당화하는 유일한 명분은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의’ 복지를 제공하는 데에 있다. 따라서 선별적 복지가 정당화될 수 있는 요건은 ‘결과적 보편성’이며, 이 요건을 만족하기 위해서는 사각지대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선별적 복지는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보완을 거듭하며 또한 양적으로 증가한다. 그리고 이 증가가 끝났을 때는, 인구와 복지제도의 종류 사이에 별다른 수적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 또 엄격하게 강화된 심사와 관리는 개인에 대한 통제로 작용하며, 복지재정의 상당 부분이 통제 및 관리 제도의 유지에 쓰일 것이다. 선별적 복지가 ‘정말로’ 결과적 보편성을 실현하게 된다면 그것은 오직 철저한 통제 체제 위에서만 가능하다.
보편주의에서 벗어난 복지관은 복지를 사회구성원에 대한 통제의 수단으로 작용하게 할 위험을 내재하고 있다. 선별적 복지의 이런 점과 비교할 때 기본소득의 ‘심사도 요구도 없다.’라는 점은 개별적인 사회구성원의 기본권을 옹호하며 정치ㆍ도덕적 우위를 가진다.
복지의 새로운 패러다임, 실질적 민주주의로 이어져
한국의 사회복지제도는 크게 2가지로 나뉜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근로장려세제(EITC: Earned Income Tax Credit)와 같은 공공부조 계통이 있고 건강보험, 국민연금, 고용보험과 같은 사회보험 계통이 있다. 공공부조 계통은 심사를 통해 (부족한) 소득을 보전해주는 것이며, 사회보험 계통은 개인 또는 가정이 기여한 부분(보험금 납부)에 비례해 현물이나 현금으로 보상해주는 방식이다.
기존의 사회복지제도는 여러 면에서 난관에 부딪혀 있다. 기여에 기반을 둔 사회보험제도는 국가ㆍ정책적 무관심과 국민의 소득 감소로 사각지대가 날로 커지고 있다. 어느덧 전체 노동자의 절반을 훌쩍 넘어선 비정규직 불안정노동자는 사용자의 기여 회피와 노동자의 임금 감소 우려로 4대 보험 가입률이 극히 낮다. 국민연금 역시 마찬가지다. 그나마 기능을 한다는 건강보험 역시 당연지정제 폐지, 의료민영화 시도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 사회보험은 소득비례방식이며 남성ㆍ가부장ㆍ정규직 중심의 제도다. 임금노동을 할 수 없거나,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사회 구성원은 배제된다. 흔히 공공부조라고 하는 사회복지제도는 이런 사회보험을 보완하는 역할이며, 신자유주의 수탈 경제 시대에 접어들면서는 빈곤 비즈니스라는 말로 불리기 시작했다. 공공부조는 전체 국가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낮을 수밖에 없다. 사회보험과 공공부조는 공히 임금노동만을 중심으로 설계돼 있다. 사회복지의 양 축인 사회보험과 공공부조는 이처럼 본래 한계가 많은 제도이며, 시대가 변하면서 현실과 맞지 않은 부분이 갈수록 늘어나게 되었다.
기본소득은 심사도 없고 기여 여부와도 상관없다. 기존의 복지가 자기 자신의 능력이 부족해서 (고맙게도) 국가의 은혜를 받는 것처럼 여겨지도록 설계된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회 구성원이 기본소득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의 기본권은 주권 행사를 가능하게 만드는 사회경제적 조건이 충족돼야 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국민주권 실현은 선거권과 피선거권만 주어진다고 되는 게 아니다. 모든 국민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충분한 기본소득을 얻고 의료, 교육, 주거, 보육, 노후 등의 기본복지가 보장될 때만 진정한 국민주권이 실현된다. 이와 같은 사회적 권리들이 평등한 선거권과 마찬가지로 모든 국민에게 당연한 권리로 줄 때만, 국민은 주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있는 조건을 얻으며, 비로소 진정한 주권자가 될 수 있다. 국민 모두의 보편적 복지를 통하여 경제사회 영역에서 다수 대중이 배제되지 않을 때만 국민주권 원칙이 비로소 현실의 원칙일 수 있다.
기본소득과 같은 보편적 복지는 현대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정치적 국민주권은 평등의 원리에 기초한다. 부자이건 가난한 사람이건 누구나 평등한 선거권을 가진다. 기본소득도 평등의 원리에 기초한다. 기본소득은 재산 정도나 노동 여부 등 어떤 특수한 경제적 조건과 상관없이 오직 사회 구성원이라는 평등한 자격에만 근거를 두고 동일한 액수로 지급된다. 기본소득과 같은 보편적 복지에서, 복지 원리와 민주주의ㆍ국민주권 원리의 상동성(相同性)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임금노동 관념과 신자유주의 수탈경제를 넘어서
기본소득은 노동 능력에 따른 분배라는 소유중심적 사고를 깨고, 노동과 소득의 연계를 부분적으로 완화한다. 여기에서 자기 자신의 노동과 소득의 연계를 왜곡하는 것은 착취와 수탈이지, 기본소득은 아니라는 관점은 매우 중요하다. 금융ㆍ지대적 수탈에 대해 조세적 역(逆)수탈로 기본소득 재원을 마련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시정 효과는 더욱 확실해질 것이다.
수탈과 착취는 우리 사회에서 광범위하게 벌어진다. 세종시 수정안은 국민 혈세로 조성된 공유지를 재벌들에게 공짜로 넘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수탈은 물ㆍ전기ㆍ가스ㆍ방송ㆍ철도ㆍ도로 등의 사유화와 같이 눈에 보이는 것에서부터, 집세와 대출금 이자를 내는 것과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를 포괄한다.
그래서 기본소득 재원 마련을 위해 제안된 토지세와 증권양도소득세는 신자유주의 수탈 경제에 대한 역(逆)수탈 과정이다. 2006년 당시 전국의 땅값 총액은 5,200조 원(경실련 통계 기준)이며 동시기 GDP의 5배가 넘는 막대한 금액이다. 보유세 개념으로 토지세를 통합ㆍ신설하고 세율을 점차 높인다면, 부동산 투기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익 자체가 사라질 것이며, 이는 기본소득 재원이 된다. 공유화된 토지는 개인들이 적절한 사용료를 정기적으로 지불하고 임대하면 된다. 증권은 2007년 말부터 1년간 총 2,022조 원이 거래되었고, 파생상품은 5경 4천조 원에 달했다. 모든 증권 및 파생상품 거래에서 발생하는 순차익에 대해 30% 정도만 과세해도 막대한 재원이 조성된다. 이런 식의 투기 불로소득 중과세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대한 대안이기도 하다. 이는 신자유주의 극복의 과정인데, 진보적인 재정 전략일 뿐만 아니라 금융 규제적 효과를 가진다.
기본소득의 무한 가능성
기본소득은 단순한 소득보장 논의가 아니다. 기존의 복지, 노동 관념에 대한 도전에서 출발한 기본소득 논의는 신자유주의 수탈 경제, 민주주의, 생태, 이주, 여성 등 우리 사회의 모든 의제를 아우르기 시작했다. 기본소득은 판 빠레이스의 말처럼 Simple and Powerful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