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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서문학의 얼굴, 亭江 申正植 시인
-亭江과 野城 그리고 추억
야성 이도현
(국제펜한국본부 자문위원)
1.
나는 1973년 3월 1일자 충남교육청 교원인사발령에 따라 예산에서 대전광역시로 전입하였다. 그 후 1975년 <호서문학회>에 가입하고, 다음 해 1976년, <호서문학> 제5집부터 참여하여 대전문인들과 交遊하였으니 아득한 세월이었다.
당시 호서문학회는 상임간사 체제(김학응 시인)로 운영되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호서문학 5집에 수록된 동인으로는 박희선, 김대현, 송석홍, 이교탁, 구상회, 김영배, 조재훈, 신정식, 이덕영, 최송석, 김용재 시인이었고 시조시인으로는 유동삼, 허인무, 이금준, 이도현, 유준호 등이었다.
돌아보면 43년 전, 가뭇한 세월! 당시 함께 활동한 동인 절반 이상이 저 세상으로 가버렸으니 인생은 허무한 것인가? 작고 시인 중에서 신정식 시인만은 유독 머릿속에 남아 옛 추억을 떠올리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와 나는 동갑내기요, 한밭중학교 재직하면서 퇴근길엔 그의 정동, 감나무 안집 호서문화사에 들려 시를 이야기하고 때로는 막걸리를 마시면서 정담을 나누었으니 그럴 법도 하다.
亭江 申正植 시인(1938~1995)은 호서문학의 얼굴이었다. 성격이 소탈하면서도 아니꼬운 것은 참아내지 못하는 정의의 사나이었다. 그러면서 여러 사람 앞을 나서지 않는 낮은 자세로 세상을 살았다. 억지로 꾸미려 하지 않고 솔직담백하였다, 사람을 좋아하여 그의 곁엔 많은 사람들이 따랐다. 그가 경영하는 호서문화사에는 늘 사람들이 모여 人山人海를 이루었으니, 야석 박희선, 운장 김대현, 논강 김영배, 도예가 이종수, 구상회, 박재서 등은 단골손님이었다. 亭江 申正植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아낌을 받았다.
1980년 필자가 한밭중학교 재직당시 첫 시조집을 낼 때에 亭江은 작품 ‘난(蘭)’에 들어 있는 ‘선비의 머리카락’이란 시구가 돋보이니, 시집 題號로 하자고 제안해 왔다. 그래 그것이 나의 첫 시조집 제목으로 탄생하게 된다. 첫 작품집을 출판할 때의 감회야 어찌 말로 형언할 수 있었으랴?
천부를 인쇄하여 친지, 동료 등 유관기관에 배포하였더니 어느 일간신문 사설에서 “젊은 시인이 시집을 찍어 선비연한다”고 보도했다. 아마도 ‘선비’라는 단어가 신문사 쪽에선 거슬렸던 모양이다. 나는 지금까지 그 기억을 결코 지울 수가 없다.
그 후 2집은 서울 ‘시문학사’에서 출판하고 3집, 4집, 5집은 亭江에게 맡겨 ‘호서문학작품선’으로 출간하였으니 그 또한 우연일까? ‘호서문화사’에서 시조집을 발간하면서 亭江과 가까웠던 최종태 교수와 이종수 도예가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고, 두 분과 함께 최송석, 김용재, 유준호 시인 등은 일주일이 멀다하고 자주 만나 지금까지 <호서문학>에서 함께 활동하고 있으니 그 아니 영광인가?
그뿐인가 시조전문동인지 <가람문학>을 주관하면서 6집(1985년)부터 16집(1995년)까지 10년간을 ‘호서문화사’ 亭江에게 맡겼으니 그 또한 우연이 아닌 듯싶다.
2.
여기서 잠시 亭江 申正植의 略史를 대강 정리해 보자. 그는 1938년 대구에서 출생하였고, 1957년 청년시절, 19세에 대전에 정착하여 호서문학 회원으로 문단활동을 시작한다. 농경출판사에 잠시 머물다 보전출판사로 자리를 옮기면서 그 자리에서 편집국장을 거친 후 출판사 ‘호서문화사’를 자영하기에 이른다.
문단경력으로는 1973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하였고, 등단하기 전 1970년 6월에 시집 「강(江)」을 발간하였다, 그 후 1983년에는 제2집 「빛이 있으라 하니」를 발간한다. <호서문학> 회원으로 출발하여 회장직 4년을(1990년~1994년) 역임하였고, 1995년 타계할 때까지 숱한 애환의 역사를 호서와 함께 하였으니 <호서문학>과 일생을 함께 한 증인이 아닐까?
저처럼 부끄럼타는
그림자
흰 구름이
흐르는 강물이 드리운
자갈돌에
내리는 그리움
나의 마음
새로운 길에
까치가 운다.
-신정식의 「江」전문
1970년 6월 20일 농경출판사에서 간행한 신정식 시인의 첫시집 표제시 이다. 朴木月 시인은 시집 머리말에서
“조그만 마음으로 살아 왔기에
싱싱한 풀냄새
그의 詩句이다. 이 구절이 그의 전부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그야말로 조그만 마음으로 시골에서 살며 가난하고 겸허한 자만이 발견할 수 있는 생기 찬 자연을 맑은 심령으로 노래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에는 모든 인간적인 허식을 떨쳐 버리고 純心의 그 빛나는 正直性과 純粹性, 나아가서는 정신의 건강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중략- 참으로 언어에 대하여 준엄하도록 결백한 그의 시는 미숙한 것은 미숙한 대로, 성숙한 것은 성숙한 대로, 정결하고, 또한 알몸이 아닌 알맘에서 우러난 그의 작품은 어느 것이나 순수하다.”고 말하고 있다.
손목을 꼬옥 잡았다
누구드라
누구드라
손의 빛남
보니
흔드는건 나드라
몸을 흐드는
흔드는 그늘
이 장마철 비낀 구름
호박잎의 빛살, 아
바람에 엉키는
어깨
이슬
거미줄
이 만남, 글쎄요
이 손
먼발치서 보이는
그 누구드라 그 누구드라
구름
손목의 主人은.
-신정식의 「빛이 있으라 하니」전문
1083년 6월 15일 보전출판사에서 간행한 제2시집 標題詩이다.
也石 朴喜宣 시인은 시집 머리글에서
“신정식의 美感空間은 그의 交友관계와 그가 겪은 정신생활의 역정을 추리하지 않을 수 없다-중략- 崔種泰의 조각 작품에 떠오르는 마치 해와 달 같은 ‘얼굴’, 인류 보편의 전형의 ‘얼굴’을 위해 추구하고 있는 주제가 바로 신정식 시인의 <얼굴을 맞댄 세계>로서 換面되고 있음을 본다.
그리고 불의 뼈다귀를 찾기에 여념이 없어 보이는 도예가 李種秀의 ‘쓸쓸하고 더욱 쓸쓸한 마음, 가난한 자들의 24시,,,,,’ 아마도 이 시인은 그 두 친구의 정신 영역에 가까이 交接하였고, 白紙一枚와 같은 空潔의 美를 얻었던 것이 아닐까” 하고 평설한다.
또한 雲藏 金大炫 전 호서문학회장은 제2시집 解瀝에서
“申兄은 이미 50년대 후반기에 19세 애띤 나이로 호서문학회의 동인으로 참여한 꿈 많은 문학청년답게 정열에 넘치는 의리와 인생을 자처하고 있었다.
호서문학의 ‘얼굴’, 한밭의 ‘기침소리’, 충남에 숨은 문학의 ‘道士’ 쯤으로 아낌 받아오던 그 역시 이제는 지긋한 나이 충남 문협의 회장단 자리의 일원으로 오르게 된다.” 고 말한다.
아울러 金容材 전 회장은 시집 발문에서
“신정식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빛이 있으라 하니」는 잡다한 일상의 직접적인 체험을 통한 생활 의욕과 시의 기본을 철저히 파악함으로서 승화시킨 詩魂의 능동적 집약이라고 할 수 있다. -중략-
신정식 시인은 한 세월의 청춘을 불태우며 동, 서, 남해 파도를 헤치고 어부 생황을 하였다. 제주도 공장에선 손수레를 끌며 육체적 힘을 과시하기도 했다. 자가용이 있는 공장장쯤으로 마음먹을 수 있었다. 대전에선 조그마한 露店을 하나 가졌던 것이 백화점 왕이라는 애칭이 따라 다녔다. 안성의 어느 농장에선 지게를 걸머진 농부였었다. 농장의 부사장으로 별칭 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어느 주점, 어느 거리에서 싸움꾼들을 만나면 그는 윗저고리를 벗어던지고 싸움을 뜯어 말리는 정의의 사나이로 통했다. 그러면서 눈 익은 아이들은 만나면 호주머니를 털어 동전 몇 닢을 쥐어주는 아이들의 친근한 벗이었다.
또 인간관계의 의리는 구차한 설명이 필요 없다. 그래도 가까이서 보는 그는 고통의 同伴者였다. 그러나 온갖 고통을 현실적 체험으로 수용하면서 넉넉한 마음, 넉넉한 생활 자세를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오늘의 안정되어가는 삶의 핵심을 볼 수 있다는 기쁨으로 남는 것이다.
3.
이상과 같이 申正植 시인은 正直性과 純粹性을 겸전한 시인, 두 친구인 조각가 최종태와 도예가 이종수의 끈질긴 정신세계를 닮은 白紙와 같은 空潔의 美의 시인, 아니 호서문학의 ‘얼굴’로 대변되는 의리와 정열의 시인, 그리고 온갖 고통을 체험으로 수용하면서 넉넉한 마음, 넉넉한 생활자세로 일관한 그의 낮으면서 높은 삶과 작품세계를 그와 아주 가까웠던 선후배님들로 부터 살펴보았다.
亭江은 막걸리를 좋아하여 출판사 안에는 늘 술이 떨어질 때가 없었다. 술익는 마을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소제동 집을 나와, 정동 출판사까지 걸어와서 인접한 00식당에 도착, 막걸리 한 사발에 두부 한 조각으로 아침식사를 때우곤 하였다.
이렇듯 그의 생활은 검소하고, 정신은 강처럼 맑았던 亭江! 성품이 곧고 숨김이 없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主酒客飯으로 출판사는 온통 門前成市를 이루었다. 그가 경영하는 ‘호서문화사’도 이 흐름을 타고 잘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일 뿐 그는 말년에 술을 드는 횟수가 점점 늘어나면서 그 때문인지 아니면 短命해서인지 아까운 나이에 저 세상으로 훌쩍 가버렸으니 그 때 나이 57세였다. 亭江 申正植 시인은 이렇게 거침없이 살다가 할 일을 남겨둔 채 세상을 작별하고 말았다.
‘빛이 있으라’ 하여 이승에 잠시 머물다가 ‘호박잎의 빛살’ 한 점 남기고 훌쩍 구름 속으로 가버린 빛의 정체! 그 손목의 主人은 바로 申正植 자신이었다.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했던 그는 형식보다 實存으로 삶의 현장에서 뛰다가 빛의 後光을 남기고 떠나고야 말았다.
일찍이 대구에서 전입하여 지연, 학연도 없는 대전에서 자기 詩田을 일구고, 자기 고유의 목소리를 외치며 <호서문학>을 남겨 둔 채 일생을 마감한 시인 申正植! 그는 외로우면서 결코 외롭지 않은 한 세상을 살고 갔으니 얼마나 장한 세월인가?
이 짤막한 글로 20여년 동고동락한 고인과의 우정을 어찌 다 回憶할 수 있으랴?
집을 나서면서, 만나는 것은/ 마치 아이들/載龍이라 부르는
----재연, 재찬, 재란을 잊을 뻔
소망을 갖기 위하여
잊음을 갖기 위하여
비열하기 위하여
고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발붙임을 찾기 위하여
새파란 하늘을 보기위하여
먹구름을 보기 위하여
하루의 낮을 주기 위하여
밤을 주기 위하여
두 개의 눈을 주기 위하여
그리고, 아 저.
-신정식의 <序詩>일부
신정식은 ‘만남’을 위하여 하루하루를 소제동 집을 나와, 정동 감나무 안집 출판사에 출근하고, 사람을 만나고, 친구를 만나고, 웃음을 만나고, 빛살을 만나고, 그리고 시를 썼던 것이다.
‘언어를 예술로 다룬 시의 匠人, 亭江 申正植 兄!
여보게 亭江! 어서 일어나 막걸리 한 잔 드시게’
불러도 대답이 없다. 이 허무한 적막을 어이 하랴! 진정으로 고인의 명복을 빌어 드린다.
대전광역시 동구 상소동 시민휴식공원엔 그의 詩碑가 비를 맞고 서 있다.
* 이 글은 대전문학연구총서 10집에 수록한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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