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들을 오른쪽으로 끝까지 돌리세요. 이제 뒤로 빼요. 슬슬 풀어주면서.. 스탑, 거기서 멈춰요. 됐어요. 그만 가세요."
주차 시키는 걸 돕는 참이었다.
가만히 보아하니 옆 차를 긁을 지경인지라 안 되겠다 싶어서 두어마디 해준 것이다.
추운 날이었다.
아이 반 엄마들이 아파트 초입에 있는 상가에서 만나자 해서 달려 나간 것이 12시였다. 모두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여인네들이었고 조금 부담감 느껴 망설이기는 했지만 한 해를 마무리 짓는 의미에서, 어떻게 지나갔는지 알고 싶기도 했다.
차를 타니 새 차에 씌워놓는 비닐이 그대로 있다.
아하, 새 차구나. 새 차 사서 자랑하고 싶은 거로구나.
스치는 생각이 언뜻 그렇다. 차 좋다고 한마디씩 하니 차 주인은 대단히 기분이 좋은 듯 보인다. 새 차이야기가 나오니 옆에 앉은 P 엄마가 자기네는 이번에 렉스톤을 뽑았다고 한다. 작년에 눈이 엄청 많이 와서 고생했다면서 에쿠우스는 그냥 두고 새로 렉스톤을 뽑았단다. 나는 렉스톤이 어떻게 생긴 차인지도 모른다. 대강 짚차로구나 하고 짐작할 뿐이다. XG가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다른 이가 말을 받는다. H 엄마다. 얼떨결에 학부모회에 참석하게 된 것도 H 엄마덕분이다. 아는 이라고 하나도 없던 차에 초등학교시절에 같은 반이던 H 엄마가 학부모회라고 해봤자 하는 일도 없다면 강력 권유하는 바람에 엉겁결에 이름이 목록에 올라버렸던 것이다.
어딜 갈까 하더니 모두들 한마디씩 꺼낸다.
이야기를 듣자 하니 안 간 곳이 없는 듯 근처 식당을 줄줄 꿰고 있다. 어디는 옥돌방이고 어디는 음식이 뭐가 좋고 연달아 나오는데 나야 꿀 먹은 벙어리다. 노상 집안에서만 맴도는데 아는 데가 있어야지.
그렇게 하는 이야기를 잠자코 듣다 보니 목적지에 다 왔는데 주차시키지 못해 쩔쩔매는 걸 보면서도 아무도 나서지 않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훈수를 하게 되어버렸다.
솔직히 나는 이런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다. 학교에서 몇 번 만난 이들이기는 해도 그다지 할 말도 없거니와 워낙 말주변도 없기에 대체 무슨 소리를 해야 좋을지 모른다. 나간 곳에서는 두 명이 차를 타고 기다리고 있었고 조금 더 있으려니 1명이 더 와 운전자를 포함해 5명이 되었다. 1명이 더 와야 할 참인데 20여분이 넘었으니 그냥 가자고 말이 나왔고 그래서 오리 고기 전문점이라는 레스토랑에 온 참이었다.
식당으로 들어섰다.
건물이 두 채 나란히 서 있는데 한쪽은 닫아 둔 듯 썰렁해 보인다. 한창 때는 저기도 열어둔다고 한다. 여름에는 건물주위로 심어놓은 온갖 들꽃이 활짝 피어 근사하단다. 그래서 오는 연인들이 많단다.
들어서니 커다란 난로가 눈에 뜨인다. 벌겋게 장작이 타는 난로를 들어서는 입구에 설치해놓고 주위에 의자를 놓아 앉을 수 있게 해놓았다. 연인들이라면 저기 앉을 수도 있겠지. 바닥에는 마루를 깔았는데 위 천정은 아름드리 굵은 통나무를 질러 놓았다. 한쪽 옆에는 마이크와 스피커가 보인다. 예전에는 라이브도 했었는데.. C 엄마가 하는 말이다.
바로 그 마이크 앞에 앉았다. 일행이 많은 지라 남은 자리가 거기밖에 없다. 점심시간인데도 빈자리가 거의 없을 정도다. 하성, **향기다. 꽤 알려진 장소인가보다.
자리에 앉자마자 지배인인 듯싶은 아저씨가 다가온다. 무엇을 먹을까 하다가 이집의 명물이라는 바베큐 오리구이를 시킨다.
“우리 별장도 통나무로 지었는데 꽤 괜찮아. 통나무가 몸에 좋다잖아.”
통나무를 바라보면서 P 엄마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신랑이 북한강변 경치 좋은 곳을 골라지었단다. 나이 오십 가까울 듯한 사람이 신랑이라니...
불편해진다. 이런 이야기가 어디까지 나올까.
이야기를 돌려볼까 하고 G 엄마에게 물었다.
“왜 이사 가셨어요?”
G 엄마가 나를 바라보는 눈길이 어쩐지 이상하다.
다른 이가 한심하다는 듯 대답한다.
“전에 살던 곳은 55평이고 거긴 66평이잖아.”
그렇구나. 그렇구나. 몇 동 몇 동은 65평이고 몇 동 몇 동은 55평이구나. 모두가 아는 사실을 나만 몰랐었다.
그런데 66평이라니..
지금 사는 서민 평형으로도 크다고 생각하는 참인데,
아이들 각자 방 있고 부부 쓸 방 있고 거실 있고 그럼 된 거라고 생각하는 참인데 55평이 적다니..
가장 나이가 적은 G 엄마가 대답한다.
“이 집은 내 집이잖아요. 아빠 집은 인천에 있어요. 아빠 하는 짓이 마음에 안 들면 내가 그래요. 방 빼! ”
여인들이 깔깔대고 웃는다. 집이 두 채라는 은근슬쩍 자랑일 텐데 그 속내가 훤히 들여다보여 마뜩찮다. 거기에다가 아빠라니.. 남편도 애기 아빠도 아닌 아빠라..심사가 뒤틀린다. 나 혼자만 유별난가.
음식이 나왔다. 커다란 그릇에 담겨 지글거리고 있는 붉은 살코기가 맛있어 보인다. 5인분이라는데 산더미처럼 많아 보인다.
‘고기 보니 술 생각이 나네. 난 술 없으면 고기가 안 넘어가.’
그렇게 해서 술을 시켰다.
'맥주는 배만 부르고 취하지도 않아.'
그래서 소주를 시켰다. 소주는 별로라고 해서 백세주를 또 시킨다. 그것도 한 병으로는 부족하대서 두병 시킨다. 맥주가 1 병, 백세주가 2병, 소주가 1병이다.
먹고 마시면서 학교 이야기가 나왔다. 주로 담임선생님 이야기다. 남자 선생님이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아서 엄마들 마음에 안 든단다. 그거야 나도 마찬가지다. 학기 초 아이가 환경 미화한다고 남았을 적에 담임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서운했던 것이다. 아이가 늦어서 교실로 찾아갔더니 아이들만 남아 있던 것이다. 그다지 늦은 시간도 아니었는데 선생님은 집에 먼저 가셨단다. 학습지 교사가 오니 집에 가봐야 한다고 하면서...
그러더니 전화가 왔었다. “너희들도 그만 두고 어서 가라.”고.
아이들은 어떻게든 일을 끝내고 싶어 하는데 선생님은 집에서 전화하다니.
아이는 그 때 밤 새워 그림을 그렸다. 게시판에 붙일 그림이라고 했다. 하고 싶어 하는 거니까 그냥 두었지만 선생님 전화하는 소리를 듣고서는 못내 언짢았다.
그때 그렇게 아이들이 남아 그림 그리고 이것저것 만들어 교실을 꾸밀 때 G 엄마는 펄펄 뛰었었다. 많이 늦어질 것 같아 집에 전화하라고 아이들에게 전화기를 빌려주었는데 마지막으로 전화를 하는 G 가 무척 난처해하고 있었다. 엄마가 얼마나 소리를 지르는지 다 들렸다. “반장도 안하는데 네가 왜해!” 요지는 그랬다. G는 부반장이었고 반장은 이미 가버리고 없었기에 하는 소리였다. 그럼 우리아이는 무언가. 우리 아이는 반장도 부반장도 무슨 부장도 아니다.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닌 평범하기 짝이 없는 아이다.
그 때가 생각난 듯 G 엄마가 이야기한다.
“글쎄, 그때 내가 그랬어요. 친구들 일하는데 너만 먼저 와서 되니..”
우아하고 고상한 음성이고 고운 모습이다. 나와는 전혀 다르다. 그렇지만 그때 옆에서 소리 지르던 것을 다 들었던 나로서는 그녀의 이야기가 민망하기 그지없다.
정학 당했다는 아이 이야기가 나온다. 한해가 지나면서 따돌림 당하는 아이도 심심찮게 있었고 그래서 그 엄마가 학교로 찾아왔다는 이야기며, 그 다음에 따돌림 당한 아이는 온 식구가 학교로 찾아와 벌컥 뒤집어 놓는 바람에 따돌림을 주도한 아이들이 정학 당했다는 이야기다.
중학교 1학년인데 정학이라니..
이제 피어나는 아이들인데 정학을 시키다니. 아무리 ‘왕따‘시켰다지만 심하지 않나 싶어 들어보니 따돌림 당한 아이가 전교 1등이란다. 그래서 교장선생님이 신경 썼을 거라는 이야기였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심했다.
선생님들의 생각이 왜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조금 지나면 가라앉을 문제를 가지고 왜 겨우 1학년 아이들을 정학시키는가. 그 부모도 못마땅하지만 자기반 아이가 정학 당하는데 보고만 있었다는 담임선생님의 행위는 더욱 언짢다.
왜 한걸음 나서지 못하는가. 왜 방패가 되어 적극적으로 아이를 보호하지 못하는가. 내용을 들어보니 따돌림 당한 아이의 행동에는 문제는 있다. 이런 생각에는 다들 동의하는 듯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 항의문을 올리자고 한다. 책임지고 올리겠다고 하는데 행동할지 안할지 두고 봐야 알겠지.
그렇게 시작된 여인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다. 남편 이야기, 아이들 과외 이야기, 그리고 피부마사지에서 운동, 성형수술, 거기에 애완동물 이야기. 새끼 한 마리에 수 십 만원 한다는 그런 동물들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쏟아져 나온다.
나는 불편하다. 아이들 학교 이야기 듣자고 온 것이지 그런 자랑 듣고 싶어서 온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들끼리는 익숙한 세계라 노상 하는 이야기일 테지만 나와는 거리가 멀다. 멀어도 한참 멀다.
줄곧 후회하면서 앉아 있는 내게 왜 먹지 않느냐고 물어온다. 잔뜩 먹어 배가 부른 참이다. 여인네들은 잔을 돌려가면서 맛있게 마신다. 내게도 권하지만 체질 탓에 술은 어림도 없다. 소주든 맥주든 알코올이 들어가면 정신없이 헤매는 내게 동생들은 천연 기념물이라는 별명까지 붙여주었던 것이다. 난들 그러고 싶은가.
그러고 보니 나만 끼어들지 못하는 이방인이다. 분명 같은 세대 아줌마요, 같은 나이의 아이를 두었으며 같은 동네 살고 있건만 생각이 이리도 다른가. 활달하게 거침없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저들과 나는 영원히 융합하지 못할 듯싶다. 기껏해야 책 들여다보고 집안에서 뱅뱅 맴돌 뿐, 작디작은 내 세계를 소중히 싸안고 어떻게 살아야 사는 것일까 고민할 뿐, 저들처럼 영악하게 시간 아껴가면서 자기 몸 아껴가면서 시원시원하게 살아가지 못한다. 저들처럼 모든 것이 이미 결정 되어 버린 양 고민 하나 없이 생을 달려가지 못한다. 모든 것이 돈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믿는 저들, 돈이 있어야 아이들에게도 자신에게도 행복하다고 거침없이 말하는 저들과 나는 다르다. 아이들 시험문제도 하나하나 줄줄이 꿰며, 친우관계도 노는 것도 모든 것을 정해주고 끼어드는 저 어머니들은 분명 나와 다르다. 인생을 자신이 정해주는 듯 밀어대는 저들과 나는 정말 다르다.
저녁 해주기 귀찮아서 피자 배달시켜 먹이는 저들과 조미료 싫어 라면마저 못 먹게 하고 간식 만들어 먹이는 나는 얼마나 다른가. 소리 지르고 간섭하면서 혹은 당당하게 아이를 윽박지르지도 못하는 나는 그들에 비해 얼마나 어리석은가. 저들이 그처럼 쉽사리 이야기하는 해외여행이나 스키여행은 커녕 아이가 가고 싶어 안달하는 뮤지컬에도 데려가지 못하는 나는 무어란 말인가. 이 시대, 이 시대에는 아마 저들이 옳을 것이다. 돈이 있어야 교육시키고 돈이 있어야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다고 하는 저들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많은 이야기 중에 자신의 이야기는 한마디라도 있었던가.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이야기, 행여 다른 이한테 뒤질 새라 내놓는 그런 이야기 중에 자신이 갖고 있는 세계는 하나라도 새어나오던가. 아이, 그리고 남편...단 한마디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아니 않는다. 그들의 세계는 그것이 전부인가.
일어서면서 다시는 오지 않으리라 속으로 다짐한다. 이들은 나와는 다르다. 나는 영원히 주변인, 시대에 부응하면서 살아가지 못하는 주변인으로 남을 뿐이다.
겉으로는 같은 사람이지만 엄청 종이 다른 사람들이 많대요. 요즘 말로 '코드'가 다르다고 하지요. 팅클님과 같이 섬세하고 고상하고 사려깊은 분들도 엄청 많아요. 바로 저 같은 사람이죠^^^^^후후후. 그리고 부탁, 글을 올릴때 조금 큰 사이즈의 글로 올려주세요. 속 깊은 글 잘 읽었읍니다.
첫댓글 모두가 그렇죠. 다들 이방인으로, 별종으로 생각하면서 사는 거 아닌감요. 그렇게 주위를 맴돌다 가는 거 아닌가요.
아? 그런가요? 다들 자신이 이방인이라고 생각하면서 사는가요? 그럼 민들레님도 이방인?
하하. 글을 읽어보면 팅클님은 절대로 뒹굴뒹굴할 사람이 아닌 걸요?^^ 민들레님 말씀처럼 우리 모두가 이방인이긴 하지요. 그러나 내 사는 동안 내 안의 주인은 '나'인 걸요. 팅클님, 아리아리!
겉으로는 같은 사람이지만 엄청 종이 다른 사람들이 많대요. 요즘 말로 '코드'가 다르다고 하지요. 팅클님과 같이 섬세하고 고상하고 사려깊은 분들도 엄청 많아요. 바로 저 같은 사람이죠^^^^^후후후. 그리고 부탁, 글을 올릴때 조금 큰 사이즈의 글로 올려주세요. 속 깊은 글 잘 읽었읍니다.
그래요...이런분이 계시네요!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는 것보다 팅클님처럼 이방인 아닌 이방인으로 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