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를 펼치면 참으로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는 욥이란 인물을 만나게 된다. 그는 인간들이 부러워하고 소망하는 거의 모든 것들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처럼 보인다. 동방 최고의 갑부였고, 화목하게 지내는 열 남매를 거느린 가장이었다. 그리고 신앙심이 두터워 늘 하나님께 제사 드리며 경건한 삶을 살았다. 하나님도 욥을 보면서,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하셨다.
그런데 이런 욥에게 어느날 갑자기 엄청난 시련이 닥쳐온다. 아니 시련 정도가 아니라 파탄이라고 해야 할 만큼 끔찍한 일들이 일어났다. 그 많은 재산 다 없어지고, 그것도 모자라 열 남매가 한꺼번에 모두 죽는 그런 기막힌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욥에게 닥친 불행을 보면서 ‘왜 신앙생활 잘하고 경건하게 살아가는 욥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궁금해 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이런 일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사단이 대화하는 가운데 누구의 주장이 옳은가를 확인하는 차원에서 벌어졌다는 사실이다.
성경의 모든 내용들이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고 상식으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인 것은 익히 알고 있지만, 그런 전제하에서도 욥기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다. 도대체 인간이 뭐기에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한 인생을 마구 다루시는가 하는 분노를 금할 수 없다.
하나님 앞에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 우리는 인간이기에 모든 것을 인간 중심으로 생각해서 이 땅에 인간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다고 믿어왔는데, 창조주 하나님은 인간을 그렇게 여기지 않으시는 것 같다.
1장 말씀을 읽으면서 느껴지는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하나님은 인간을 마치 자신의 장난감 정도로 다루신다는 생각이다. 하늘에서 하나님과 사단이 입씨름하면서 거론된 자가 땅에 사는 욥인데, 그 입씨름에서 누가 옳은가 확인하는 차원에서 욥은 이용되고 있으니, 마치 고래 싸움에 새우 등터지는 겪이라고나 할까.
그렇다면 한 인간을 이렇게 극심한 난관으로 몰아세우게 된 하나님과 사단의 주장은 어떤 것이었나 하는 점을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은 욥이란 인물을 평가하면서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8절)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평가에 대해 사단은 반기를 들고 나섰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9절) 란 것이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욥이 참으로 순전하고 정직하게 하나님을 섬긴다고 칭찬하셨고, 사단은 그가 순전하고 정직한 자여서 하나님을 공경한 것이 아니라,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복되게 하셨기에 그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우겼다.
그렇게 서로의 주장이 맞서게 되니 하나님은 욥의 가진 재산을 빼앗아보라고 허락하셨고 그래서 사단은 욥이 가진 소유물을 빼앗게 된 것이다.
욥기는 42장이라는 많은 분량으로 구성되어 있기에 1장에서 성급한 결론을 내릴 수는 없지만 이번 장에서 생각해야 할 부분만큼은 충분히 생각해야 할 것이다.
우선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은 어떤 위치인가 하는 점이다. 우리는 본문에서 인간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태도에 대해 심히 섭섭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아무리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우리는 그의 피조물이라고 하나 어떻게 하나님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멀쩡한 한 가정을 그렇게 파탄 낼 수 있냐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이 땅에서의 일들이 저 높은 하늘에서 하나님에 의해 결정된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땅의 일은 인간들이 하기 나름이라고 여겼는데 전혀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위에서 결정내린 사항이 이 땅에서 펼쳐진다는 사실이 적이 놀라울 뿐이다.
사실 이 대목에서 모든 의문은 다 풀린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불만을 드러내도 어쩔수 없다. 그분은 자기 뜻대로 세상 만물을 다스리고 주관하신다. 자신의 계획하신 바에 의해 모든 인간은 살아간다. 이 너무도 분명하고 확실한 사실을 오늘 본문을 통해 깨닫게 된다.
욥이 모든 사람이 다 부러워할 만한 그런 환경에서 살게 된 것도 욥 개인의 행위와 무관했듯이, 그가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다 잃고 참당한 환경에 처한 것도 그의 행위와 무관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난 자가 왜 그렇게 태어나게 된 것인지 궁금해 하며 던진 질문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요9:2]
이 질문은 던지면서 그들이 예상할 수 있었던 해답은, 부모 아니면 본인의 죄 때문일 거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전혀 뜻밖이었다. 그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요9:3)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바로 이것이다. 이 땅에서 펼쳐지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다는 사실.
욥기 2:1-13절
1장에서 벌어진 하나님과 사단의 내기는 사단의 완패로 끝나고 말았다. 사단의 주장은 ‘욥이 가진 모든 소유물을 치면 그는 하나님을 욕할 것’(1:11)이란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욥의 소유물을 빼앗도록 사단에게 허락했고, 사단은 그의 소유물을 빼앗았다. 그러나 모든 소유를 다 잃었지만 사단의 말처럼 욥은 하나님을 욕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1:21)라는 고백을 했다.
이제 2장에서는 사단이 최종적으로 하나님과 진리 대결에 나섰다. ‘아무리 욥이 대단한 신앙의 소유자라 해도 자기 생명보다 더 신앙을 소중히 여기지는 않을 것’이란 것이었다. 그래서 벌어진 사태가 욥의 몸이 만신창이가 되는 것이었다.
이 부분에서 사단의 생각에 큰 오점이 있음이 발견된다. 1장에서도 “소유물을 치소서”라는 말이 있었는데, 2장 역시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4절)는 말을 했다. 이 말은 신앙과 인간의 소유물이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긴 것이다. 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조차 인간 개인이 가진 소유물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 대한 해답은 지극히 간단하다. 신앙은 인간 개인이 자기 원대로 소유할 수 있는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관하고 계시는 것이란 점이다. 만약 신앙이 개인의 의지와 결단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이라면 사단의 주장이 옳다. 즉 자기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것을 소유하는 것이 인간인데 생명이 위태롭게 되면 그 생명 지키기 위해 자잘한 소유물들을 포기할 것이란 주장 말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기에 욥은 사단의 생각처럼 하나님을 욕하는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아내의 말에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10절)라는 말을 했다.
욥의 아내는 신앙이 자신의 생명을 더 풍성하게 하기 위한 소유물로 여겼음이 분명하다. 그랬기에 더 이상 욥의 생명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 신앙을 버리라고 말했던 것이다.
욥의 처는 모든 인간들의 생각을 대변하고 있다. ‘하나님은 당연히 내 삶에 보탬이 되어야 하고, 내가 원하는 복을 제공해야 한다. 만약 이런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런 하나님을 섬길 이유도 없고, 그런 신은 믿어야 할 하등의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참 신앙은 인간이 소유하고 말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믿음을 주셨기에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환경의 변화에 따라 취사선택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로마서 8장 35절 말씀을 보면,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은 주님이 성도를 사랑하고, 그 사랑을 입은 성도가 주를 사랑하는 마음은 세상의 그 어떤 세력으로도 끊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인간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관 하에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만약 욥의 하나님 경외하는 마음이 욥 개인의 소유물이었다면 그는 그의 처가 말하는 것처럼 자신을 환란에 빠Em리고 질병으로 고통을 주는 그런 신을 저주하고 떠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욥 마음대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마음을 철회한다거나 그를 저주하고 욕할 자유도 없는 것이다.
또 욥의 아내가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내 육체가 건강을 유지한다는 것이 내가 누릴 당연한 권리’라고 여긴다. 그러나 이런 사고방식 자체가 창조주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다. 건강을 주신 분도 질병을 주신 분도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창조주시다. 인간은 그분이 만드신 피조물이다. 창조주께서 자기 뜻에 따라 피조물을 지으셨다. 그러기에 피조물은 그저 창조주를 찬양하며 감사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 말은 욥의 처지가 예전과 비교할 때 너무도 비참하고 남들이 볼 때 차마 눈뜨고 못 볼 상황이 되었다 해서 그것에 대해 불평할 수 없다는 말이다.
우리는 그저 모든 상황에서 그분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건만 그런 생각을 갖지 못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은 죄인의 악함이다. 우리에게는 감사의 조건이 따로 있고 원망할 조건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에 경배와 찬양을 드릴 뿐이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3:17-18).
욥기 3:1-26절
하나님을 경외하고, 지상의 모든 이들로부터 존경받고 부러움을 살만큼 넉넉하고 행복하고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며 살고 있던 욥이 어느 날 갑자기 우환이 닥쳐와서, 그 많던 재산이 하루아침에 다 소멸되고, 또 열 자녀가 한꺼번에 몽땅 죽는 비참한 사태가 벌어진다. 그것도 부족했는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자신의 몸이 심한 악질이 생겨 문둥병 환자처럼 되고 말았다. 육신을 가진 인간으로서는 더 이상 고통스러울 수 없을 정도의 최악의 사태를 만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엄청난 일을 당하면서도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런데 3장에 오면, 더 이상 참고 견딜 수 없었던지 욥의 입에서 자신의 출생을 저주하는 말이 터져 나오기 시작하고(1절), 자신을 낳은 어머니를 원망하기 시작한다(11-12절). 이것은 결국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원망으로 귀결된다.
우리의 바람은, 하나님의 칭찬을 들은 욥이 끝까지 하나님을 찬양하고 원망하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이 있다. 그러나 욥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사실 인간이 이런 환경 속에서 어찌 불평이 나오지 않을 수 있으랴!
그렇다면 ‘욥의 불평과 원망이 정당한 것인가?’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는데, 이 부분을 말하기 전에, ‘과연 우리는 욥과 같은 고통을 경험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의 태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 할 자격이 있는가?’ 하는 점이 먼저 거론될 수 있을 것이다.
상식적으로는 욥을 비난하려고 하면 최소한 욥과 같은 어려움을 겪고도 하나님께 원망하지 않았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당연히 욥을 욕하며 그의 신앙이 엉터리라고 단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전혀 욥의 아픔을 감지할 수 없고, 그가 겪은 엄청난 시련의 근처에도 가 보지 못한 입장에서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런 태도는 성경을 대하는 성도의 자세는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관점을 말씀하고 있고, 하나님이 표준이 되어 세상 모두를 그리고 그 속에 있는 사람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을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도라면 욥과 같은 고통을 경험했기에 그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욥의 고통 이전에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해야 하고 거기서부터 모든 논의의 출발점을 삼아야 한다.
사실 본문은 ‘욥이 원망을 했느냐, 안 했느냐? 원망이 합당한가, 부당한가?’ 하는 그런 측면을 말씀하는 구절은 아니다. 우리는 욥과 똑같은 육체를 가진 인간이기에 그런 것에 관심을 둘 수밖에 없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 중심적인 사고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과연 본문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우리는 1장에서부터 참으로 생소하고 낯선 사건을 목격하게 되었다. 지상에서 욥이라는 한 인물이 겪는 극심한 아픔이 하늘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보편적인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고 전능하셔서 연약하고 부족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을 보살피시고 도우셔서 우리의 경배를 받으시는 그런 하나님이었다.
그런데 욥에게 갑작스런 고통을 안기시고, 그것도 욥이 하나님께 큰 죄악을 범했다거나, 혹은 이웃에서 고통을 주었다거나 하는 특별한 일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단순히 하나님과 사단의 의견 충돌로 하나님이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 그런 일을 하셨다는 사실 앞에 참으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욥은 하나님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뽑힌 인물인데, 그 일 때문에 그는 졸지에 가족과 재산을 몽땅 다 잃고, 제 몸도 만신창이가 된 것이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보면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참으로 난감하다. 만약 내가 욥의 입장에 있다면 어떠했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내 현재의 삶이 100% 만족하다고는 못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신앙하고,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직장이 있고, 건강한 몸을 가지며 살아가고 있는데, 이 모든 것을 일시에 다 잃게 된다면 어떨까?
이런 의문에 대해 본문은 우리의 잘못된 관심과 관점을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의 주관자시고,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운행하시는데,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네가 무슨 권한으로 그분이 하시는 일에 이러쿵저러쿵하느냐는 것이다. 즉, 왜 모든 사고를 너 중심적으로 하고 있느냐는 말이다. 네 고통, 네 아픔, 네 체면, 네 억울함, 너의 궁금증 등등.
물론 인간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충분히 불평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뭘 잘못 했기에 모든 것을 순식간에 다 빼앗아 가시냐고 따질 수 있다. 그러나 창조주의 입장에서 보면 하등의 문제될 것이 없다. 그분이 모든 것을 만드셨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운행하신다. 그래서 이런 환경도 만들었다가 저런 환경으로 변경시키기도 하신다. 창조주에게 왜 그런 권한이 없겠는가?
성도는 모든 것의 주인 되시는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자이다. 여기에는 내 개인의 입장을 논할 여지가 없다. 그것이 오늘 본문을 보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대목이다.
욥기 4:1-21절
욥을 위로하기 위에 찾아온 친구 엘리바스의 주장이 본문의 내용이다.
불행을 당한 친구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 왔으나 감히 입을 열 엄두도 못 낼 만큼 친구가 당한 상황은 참담한 것이어서 한동안은 그냥 통곡하며 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친구 욥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생각을 주섬주섬 얘기를 하는데 듣고 보니 더 이상은 침묵할 수 없어서 무겁게 입을 연다.
‘너는 원래 많은 사람들에게 교훈으로 가르쳤고, 실의에 빠진 자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던 자가 아니냐? 그런 네가 어려움을 겪는다고 실의에 빠지면 되겠냐?’ ‘죄 없이 벌 받는 자가 없고, 정직한 자가 망한 적이 있느냐? 너의 자랑은 네 행위의 완전함에 있지 아니하냐?’ 는 등 지극히 상식적이고 당연한 얘기들로 욥이 빨리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회개하기를 촉구했다.
그리고 엘리바스의 자신의 주장이 단순한 자기 개인의 견해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밤중에 하나님이 이상으로 자기에게 일러주셨다며 자신이 이상으로 깨달은 바를 이야기 했다. “인생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성결하겠느냐 하나님은 그 종이라도 오히려 믿지 아니하시며 그 사자라도 미련하다 하시나니 하물며 흙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에게라도 눌려 죽을 자이겠느냐”(17-19절).
그러니까 친구 엘리비스의 주장은 한 마디로 ‘네가 뭔가 잘못한 것이 있어서 벌을 받아 이렇게 된 것이니, 빨리 그 원인을 찾아서 회개하면 다시 예전의 환경으로 돌아갈 것이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사고는 인간의 보편적인 생각이다. 하나님을 믿든 안 믿든 상관없이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이들이 가지는 평범한 생각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바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왜곡하게 만들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 불만을 일으키는 요소로 등장한다.
욥이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잘 참는 듯하다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불평을 터트리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역시 ‘잘못한 것이 있으면 벌을 받는다.’ 는 보편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의 경우를 놓고 보면, 본인은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이런 어려움을 주셨는가?’ 하는 의문을 품게 되었고,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을 하게 되는 것이다.
참으로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을 본다. 모순투성이요, 이유 없는 자기중심적 사고이다. 만약 ‘죄를 범했기에 벌을 받는다.’는 논리가 성립되려면, 역으로 ‘선을 행했기에 복을 받는다.’는 것이 성립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욥이 하나님의 은혜로 많은 것들을 소유하며, 이웃으로부터도 사랑받으며 살았는데 그 때에는 그가 많은 선행을 했기에 그런 삶을 향유할 수 있었단 말인가?
우리의 생각 중에 가장 모순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건강한 몸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당연하고, 몸이 병들고 아프다면 이것은 뭔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기에 내 몸이 건강할 때는 아무런 문제 제기도 없다가 몸에 이상이 생기면 그 때는 뭔가 문제 제기를 한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렇게 되었을까?’ 하고. 만약 이런 생각이 합당하려면 건강할 때, ‘내가 뭘 잘했기에 이렇게 건강한 몸을 주셨을까?’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그 어떤 이들도 자신의 몸이 건강할 때 이런 생각을 하는 이들이 없다.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몸이 건강한 것도 주님이 주신 것이요, 몸이 그렇지 못한 것도 주께서 주신 것이다. 그러기에 병든 몸 때문에 주님을 원망할 일은 없어야 한다. 이것을 원망하는 자는 건강할 때엔 왜 건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았는가?
모든 일이 잘 되고, 몸도 건강하고 이런 것을 당연시 여기는 자들이 이와 반대의 경우를 당할 때 불평하고 원망하게 된다. 주께서 주신 은혜와 사랑 때문에 자신이 건강을 유지하고 있고 평안한 생활을 즐길 수 있음을 진실로 감사하는 자는, 반대로 몸이 병들고 평안이 없는 삶이 닥친다 해도 원망하지 않는다. 욥기 초기 고백처럼 주신 자도 여호와, 취하신 자도 여호와인데 뭐가 문제인가?
하나님은 욥기를 통해서 사단의 하수인이 된 인간들의 생각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가를 말씀하신다. 그래서 맨 먼저 사단의 생각이 잘못 되었음을 지적하셨고, 그 이후 욥의 친구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욥의 생각이 허망한 것임을 일러주신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 앞에 모든 피조물은 그저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이 합당하다. 이해할 수 없어도 불평할 수 없는 존재들이 인간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국 자신의 지혜를 욥기를 통해 보여주시면서 진정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를 밝히신다.
욥기 5:1-27절
인간은 막연하지만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기대하며 산다. 그러기에 고통에 처한 자들을 위로하는 표현도 역시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던져주는 것으로 이뤄진다. 그러나 이런 말이 진정한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엘리바스가 욥에게 하는 말도 두 가지 내용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첫째는 ‘회개하라.’는 것(1-16절)이고, 둘째는 ‘하나님이 다시 너를 축복하실 것이다.’ 라는 것(17-27절)이다. 그러나 이런 말은 전혀 복음이 아니며 진리도 아니다.
엘리바스가 말하는 이런 내용은 십자가를 알지 못하는 자들도 능히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며, 이방신을 경배하는 자도 얼마든지 사고할 수 있는 평범한 인간 이성에서 도출된 것에 불과하다.
만약 이런 것이 복음이라면 굳이 예수 믿을 이유도 없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복음이라고 외칠 이유도 사라져버릴 것이다. 그래서 그런 복잡하고 믿기 힘든 것을 진리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인간 이성이 충분히 납득할 수 있고, 서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생각들을 주고받으며 편히 세상살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인간들이 상상하거나 전혀 생각할 수 없는 하나님만의 아이디어에서 나왔고, 그러기에 인간들에게는 너무도 생소하고 낯설게 느껴지며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내용들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음을 들으면 거부하고 외면하는 반응을 보이게 된다.
그런데 엘리바스가 어려움에 처한 친구 욥을 위로하는 내용은 전혀 생소하거나 받아드릴 수 없는 그런 내용이 아니다. 누구나 납득할 수 있고 듣기 좋은 장밋빛 희망을 전했다. “네가 네 장막의 평안함을 알고 네 우리를 살펴도 잃은 것이 없을 것이며 네 자손이 많아지며 네 후예가 땅에 풀 같을 줄을 네가 알 것이라 네가 장수하다가 무덤에 이르리니 곡식 단이 그 기한에 운반되어 올리움 같으리라”(24-26절).
이런 헛된 위로를 남발하면서도 엘리바스는 자기 말에 대한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의 이상으로 보았다(4:13)고 하고, 깊이 연구한 것(5:27)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 역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의 자기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참 진리를 깨달은 자는 자기 생각을 긍정하기 위해 변명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진리 그 자체를 전할 뿐이며, 인간들을 납득시키기 위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은 사람의 지혜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하심으로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고. 이것이 무슨 뜻인가? 복음은 아무나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란 말이다. 즉 십자가가 어리석게 들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 얻을 자에게는 그것이 믿어지고 깨달아진다. 물론 이것이 인간의 지혜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전도자의 태도는 엘리바스처럼 자신의 외침이 진리라고 굳이 변명하거나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한 작업에 나서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다. 굳이 진리를 아름답게 포장해서 진리 됨을 나타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진리는 그 자체가 진리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겉으로 잘 꾸미고 아름답게 장식해야만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진리를 진리로 알아보지 못하도록 하시면서 진리를 자기 백성에게 전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기 백성 구출 작업이다. 이렇게 되어야만 진리를 발견하고 생명을 얻은 자들이 자기 열심이나 지혜를 자랑하지 않고 주님의 은혜만을 찬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듣기 좋은 말은 사단이 속삭이는 거짓 복음이며, 헛된 위로에 지나지 않는다. 참 생명의 말씀은 귀에 거슬리고 우리 이성으로 납득할 수 없게 가다온다. 오직 주의 영이 임하셔서 믿음으로 깨닫게 된다.
재산 잃고, 건강 잃고, 친구 잃고, 희망마저 잃어버린 욥에게 친구 엘리바스가 말하는 내용이 참 복음이 될 수 있을까? 다시 재산을 모을 것이고, 건강도 회복할 것이고, 친구도 돌아올 것이며 새로운 희망이 찾아올 것이란 말이 진정 복음이 될 수 있느냐는 말이다.
고통스럽고 외롭고 쓸쓸한 환경이 평안과 즐거움과 행복한 환경으로 바뀐다고 해서 이것을 복되다고 말하는 것은 복음을 아는 자의 태도가 아니다. 참 복음을 깨달은 자는 주님의 주 되심으로 지금도 자기 뜻대로 모든 것을 성취하심에 찬양하며 감사하는 자이다. 내가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그분의 은혜를 알고 감사하는 자리가 복된 은혜의 자리이다.
욥기 6:1-30절
엘리바스의 주장에 대한 욥의 변론이 펼쳐지고 있는데, 그 내용을 간추려 보면, 첫째는 자신이 당하는 고통의 무게에 대해 서술하고 있고, 둘째는 죽음을 갈구하는 마음을 피력했다. 그리고 셋째는 신실치 못한 친구들에 대해 원망하면서, 무턱대고 비난하고 욕할 것이 아니라 내가 잘못한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지적해 달라고 안타깝게 호소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게 닥쳐오는 고통을 해소하면서 살아간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는 일 또한 자기 고통 해소 차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아담 후손들의 한계이다. 어떤 인간도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나님께 나아가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지 않는다. 모두가 자기 필요와 자기만족을 위해 산다.
욥이 위대한 신앙인인 것 같으나 그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이 당하는 고통 앞에 어쩔 줄 몰라 하고, 자신을 비난하고 욕하는 친구들에게 화내며 자신을 변명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을 원망하며 더 이상 고통이 지속되지 않기를 갈구하고 있다.
그러니 인간의 신앙이란 것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 창조된 피조물임을 안다. 그러나 정작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 누구도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없고, 피조물의 위치에서 창조주를 영화롭게 하기 위한 생을 보내는 이가 없다.
그래서 믿음이란 것이 우리의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뜻에 따라 나눠주시는 선물이란 사실을 자기 모습을 들여다보면서 새삼 느끼게 된다. ‘믿음 없는 나’, ‘내 만족과 내 욕망과 내 기쁨을 위해 발버둥치며 살아가는 나’ 이것이 우리 인간들의 실상이다.
이런 인간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너무도 당연하고 그 누구도 하나님의 징계 앞에 한 마디 변명도 용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만약 이런 자들에게 주님의 용서가 베풀어지고, 그 은혜를 알게 되고 믿게 된다면 이것은 주님의 일방적인 사랑에 의한 것이다.
욥이 대단한 인물이 아니라, 그 또한 평범한 죄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시기에 그를 붙들고 계시고 그의 허물과 죄를 정죄하고 참소하는 자들의 방패가 되시어서 그 누구도 그를 향해 비난하지 못하도록 막으신다.
그러나 욥은 이런 하나님의 깊고 높은 사랑을 아직은 알지 못한 상태에서 자기 고통만을 호소하고 있다.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고, 그보다 더 시급한 문제는 빨리 고통이 멈추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죽기를 바란다는 말을 여러 사람이 하는데 여기에도 두 종류가 있다.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을 너무도 사모하는 나머지 빨리 육을 벗고 싶은 생각에서 그런 말을 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욥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고통이 너무 견디기 힘들기에 그 고통이 멈추기를 원해서 죽기를 원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자들은 크게 착각하고 있는 자들이다. 죽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란 사실이 큰 착각이기 때문이다. 죽음 이후에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는데.
욥은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그 다스림 속에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을 인간과 대화하고 의견을 조율해서 어떤 일을 결정하시는 그런 분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자신처럼 성실하게 살아가고 부지런히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당연히 평안과 즐거움과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여겼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자에게 난데없는 고난이 닥쳐왔고, 그 고난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또 자신이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그 이유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 되니 고통은 더 배가된 것이다. 육신의 고통과 함께 심적인 고통이 동반된 것이다.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지 아니하였음이니라”(10절)는 말이나 “나의 허물된 것을 깨닫게 하라”(24절)는 외침은 바로 이런 관점에서 나온 발언이다. 예전에 남들에게 칭찬 듣고, 평안하고 화목하게 살았을 때와 현재의 내 심성이 조금도 바뀐 것이 없는데 어찌하여 내 환경이 이렇게 곤두박질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는 말이다.
이런 생각이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한 생각이다. 하나님은 긍휼을 줄자에게 긍휼을 베풀고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분이다. 바꿔 말하면 기쁨을 줄자에게는 기쁨을 주고, 슬픔을 줄자에게는 슬픔을 주시는 그런 자유를 지닌 하나님이다. 내가 슬픔을 당한다고 해서 ‘왜 내게 슬픔을 주십니까?’ 하고 항변할 수 없는 처지가 우리 처지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창조주이기에 자기 영광을 위해 자기 뜻대로 하실 수 있는 분이란 말이다.
욥기 7:1-21절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아픔을 인하여 말하며 내 영혼의 괴로움을 인하여 원망하리이다”(11절)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 욥은 지금 자신이 당하는 억울함과 끝없는 고통과 괴로움으로 당연히 하나님께 따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이런 인간의 태도가 합당치 않음을 알게 된다. 아니 모든 상황에서 감사하고 경배하며 찬양 드리는 것이 합당하다. 요셉이 그러했고(창 39장), 사도 바울 또한 그러했다(빌 4장). 다윗은 시편 136편에서 모든 것을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
그럼 무엇 때문에 성도가 하나님께 원망이 아닌 감사와 경배만이 합당한 것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자.
어느 누구도 고통을 기뻐하며 즐길 수는 없는 일이다. 육을 가진 인간이기에 아픔이 올 때는 온 몸으로 아파할 수밖에 없고, 근심과 걱정이 닥쳐올 때 염려치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아픔과 염려가 성도가 얻은 영생을 가로막을 수 없기에 여전히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화평을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주님이 십자가에서 그 몸이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었다. 그러기에 주님이 십자가 지신 것이 사실이듯, 우리가 죄 사함 받은 것 또한 숨길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이런 엄연한 현실 앞에 무엇이 우리를 가로막을 수 있단 말인가? 원수가 나를 핍박한다고 해서 주님 십자가 지신 일이 무효화 되겠는가? 아니면, 내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어마어마한 큰 죄악을 범한다고 해서 그 행위가 주님이 십자가를 통해 사죄하신 그 능력을 약화시킬 수 있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따라서 성도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은 오직 감사와 경배와 찬양만이 합당한 것이다.
그리고 죄인이 고난당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현상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그래서 죄인이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몸이 병들어 아프고, 또 이마에 땀이 흘러야 먹을 수 있는 등등의 일을 이상히 여길 것이 일이 아니다. 이런 우리들이 평안을 기대하고 행복을 꿈꾸는 그 자체가 욕망이다.
이처럼 인간의 본래 모습이 죄로 말미암아 죽어 마땅한 자이기에 어떤 형편이 닥쳐와도 불평할 수 없는 자이다. 이것을 모르는 것이 문제요, 그러기에 원망과 불평이 하나님께 돌아간다. 그러기에 원래의 내 모습을 제대로 깨닫는 자는 하나님을 원망할 수 없다. 아니 그 하나님을 감사하고 찬양한다.
내게 좋은 조건을 허락하셔서 그 은혜만을 감사한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는 자가 아니다. 조건의 호, 불호를 떠나 그분의 살아계심 그 자체를 감사하는 것이 성도의 태도이다.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분, 성도는 용서 받는 자로 하나님 앞에 세워져 있다. 이 관계보다 더 크고 분명한 관계는 없다. 그러기에 성도는 날마다 제 허물을 보면서 주님의 용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가를 감탄하게 되고, 심령으로부터 감사가 터져 나온다. 이렇게 되지 않고 더 나은 나를 만들기 위해 절제하고 힘써서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께 자랑하려 한다면 그는 용서 받은 자의 자세가 아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2:1)는 말씀을 기억하는가? 이것이 원래 우리의 모습이다. 이 본래의 내 모습을 잊으면 아니 된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욥1:21)는 말씀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처럼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요, 빈손으로 와서 아무 것도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자들이다.
그러나 현재의 나를 생각해 보자. 얼마나 많은 것을 받았는가? 물질적인 것도 엄청나게 받아 누리고 있고, 이보다 더 큰 것을 받았는데 그것은 바로 생명을 새롭게 받은 것이다. 죽었던 우리가 주님의 대속하심으로 말미암아 주님과 더불어 영생하는 새 생명을 얻은 것이다.
이런 우리가 육신의 고통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겠는가?
욥기 8:1-22절
욥을 위로하기 위에 찾아온 친구 중 하나인 빌닷의 주장이 나오는데, 이 주장 역시 예전 엘리바스의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다. 즉 ‘무엇인가 잘못 한 사실이 있기에 벌을 받는 것이니 그 문제를 해결하면 과거보다 더 큰 은총을 누릴 것’이란 내용이다.
출발부터가 문제다. 지금 욥이 당하는 일을 징벌이나 징계로 여긴다는 것 자체가 착각이다. 욥은 지금 온 몸이 만신창이 되고, 자녀들이 다 죽고, 가산을 몽땅 잃었지만 이것이 결코 하나님께 잘못한 일이 있어 벌 받는 차원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인간의 자기중심적 발상이다. 어떤 일이 잘 풀리고 원하는 대로 진행되면 그것은 신의 은총으로 여기고, 반대로 욥처럼 환경이 어려워지고, 원치 않는 일이 발생하게 되면 그것은 신의 저주, 혹은 징벌로 여긴다.
심판주 되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리시는 형벌은 지옥으로 보내시는 것이다. 반대의 경우는 천국인데 영생을 얻은 자는 이 땅에서 어떤 일을 당해도 그것을 불행한 일로 간주할 필요가 없다. 그런 저런 모든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자기영광을 찾으시고, 궁극에 가서는 그와 더불어 영생하시기 때문이다.
이 땅의 삶은 잠시 거쳐 가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이 과정이 어떠하든 그것을 놓고 복이니 저주니 하는 평가자체가 심히 어리석은 죄악된 발상이다. 건강하고 서로 화목하게 지내던 자녀들이 한 날 한 시에 다 죽은 일을 가지고 ‘그들이 하나님께 죄를 범했기에 그런 일을 당했다’는 빌닷의 주장은 보편적으로 죄인들이 지니고 있는 생각을 대변해 주고 있다.
이런 사고는 돌이켜 말하면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 바른 삶을 살면 더 좋은 일이 발생할 것이란 생각으로 귀결된다. 그런 사고에서 나온 말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구절이다.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 오늘 보다 더 나은 내일을 기대하며 꿈꾸는 것이 인간이다. 이들이 기대한 것처럼 일이 이루어지면 이것은 복이고, 반대의 경우가 되면 저주다. 왜 이런 식의 평가가 일어나는가? 그것은 최후 심판을 아직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빌닷의 주장대로 그들이 원하는 일이 성취되고, 모든 것에 흡족할 만한 그런 삶을 누리게 되었다고 하자. 마치 욥이 과거 행복했던 시절을 다시 찾는 것처럼. 그러나 그 삶의 끝이 지옥으로 귀결된다면 그 전에 이 땅에서 누렸던 부귀영화를 복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 바꾸어 말하면, 현재 욥이 당하는 이런 극심한 고난을 지속하다가 그 영혼이 주님 품에 안겼다면 욥이 거친 고난의 삶을 저주로 평가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올바른 평가를 내리려면 최후를 알아야 가능하다. 그러나 그 시점이 이르지 않았다 할지라도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가를 알고 감사한다. 자신이 당하는 육신의 어떤 문제와 무관하게 하나님의 은총을 깨닫는다. 이 말은 내 몸의 안락과 연관해서 복과 저주를 논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사도행전 13장 48절 말씀에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는 구절이 있다. 이것은 지극히 단순하고 확실한 말씀이다. 누가 복을 받은 자인가? 육신의 안락을 추구하는 자를 복된 자라 하는 것이 아니라 영생 얻기로 작정된 자가 복 있는 자다. 그리고 이렇게 작정된 자는 결국 다 믿도록 조치하신다. 이 보다 더 분명하고 확실한 것이 어디 있는가?
이사야 53장 6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 구절은 무엇을 말하는가? 간추려 말하자면, 우리는 몽땅 죄인이라 엉뚱한 길로 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우리의 죄악을 용서해 주시기 위해 자기 아들을 대신 죽게 하시고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셨다는 말씀이다.
그러니 이것은 우리에게 착하게 살아야만 천국 넣어주겠다는 것이 아니요, 또 복 받기 위해 어떤 일을 하라는 것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다. 그냥 우리의 죄악을 그 아들에게 담당시키셨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뭘 더 바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자기 아들에게 우리 죄악을 담당시키셨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믿지 못하는 자들은 스스로 죄 씻을 방도를 간구하게 된다. 즉 자신의 선행으로 죄도 탕감 받고, 복도 따 내겠다는 것이다. 마치 본문에 등장하는 욥의 친구 빌닷처럼. 이런 자들을 향해 갈라디아서 5장 4절에서 주님은 참으로 냉담한 말씀을 던지셨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라고.
잘못된 사단의 속삭임에 속지 말자. 성도는 이미 영생을 얻은 자이며, 영생을 얻었다는 것은 모든 것을 다 받은 자이다.
욥기 9:1-35절
모든 성경이 다 그러하겠지만 특히 욥기의 내용은 인간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를 대비시켜 인간의 지혜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가 하는 점을 폭로하면서 하나님의 지혜를 부각시키는 것으로 말씀을 끝맺고 있다.
인간들은 누구나 보편적인 신관을 가지고 있는데, 그 보편적인 신관으로 하나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고, 또 그런 관점으로 세상 만물을 논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인간들의 상식적인 관점 모두는 전혀 하나님의 지혜와는 무관한 것이며, 오히려 참 하나님을 배척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미리 결론부분을 조금 인용하면,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향해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38:1)고 책망하시고, 이에 대해 욥은,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42:3)고 하면서 회개하는 것으로 끝난다.
사실 십자가 사건이 이렇게 해서 유발된 것이다. 인간들이 기다리고 알고 있는 메시아관으로 판단해 볼 때 예수는 메시아일 수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스스로가 자신을 메시아라고 우겼다. 그러니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로 비쳐졌고, 도저히 그냥 묵과할 수 없어서 결국은 죽인 것이다. 메시아를 학수고대하고 있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고린도전서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십자가가 미련한 것으로 여겨지고 구원 얻는 자들에게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가온다(고전1:18). 그러니 세상 사람들은 십자가를 조롱하고 비웃으며 그것 외의 다른 방법의 구원을 찾아 나서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 외에는 다른 구원의 길은 없지 아니한가?
오늘 본문에서도 욥은 나름대로의 신관으로 열심히 하나님에 대해 논하고 있다. 창조주로서 하늘을 펴시며 각양 별들을 만드셨고, 지혜가 한이 없으신 분으로 그분의 질문에 인간은 단 한 마디도 대답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전능자로서 산을 무너뜨리기도 하시고 땅을 움직이기도 하시는 분으로 묘사했다.
물론 하나님은 욥이 표현한 것처럼 전능자이며 한없는 지혜를 가진 분이기도 하고, 창조주이시다. 그러나 이런 표면적인 지식으로는 참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가 없다. 즉 인간의 지혜로 참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말이다.
많은 이들이 이 부분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그분이 창조주이며, 전능한 분이고, 지혜로운 분으로서 천지만물을 주관하시는 분이란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믿음으로는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다고 말할 수 없다.
이런 정도로 아는 것은 인간의 이성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욥이나 욥의 친구들도 이런 정도로는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회개해야 했고, 그들의 신관을 다 버리고 참 하나님을 다시 알아야 했음을 상기하자.
성경은 참으로 인간의 상식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내용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 대표적인 구절 중 한 대목을 살펴보자. 요한복음 12장 40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 말씀은 우리의 생각과는 정 반대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묘사해 주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이시는 분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위 구절에서의 하나님은 인간 구원을 적극적으로 막으시는 분으로 나타나고 있다. 못 보게, 그리고 못 깨닫게 하기 위해 눈을 멀게 하시고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런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 아니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인간 이성으로 알 수 없는 분이란 말이다. 이런 하나님이기에 그분 스스로가 자신을 나타내 주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그분을 알 방법이 없다.
인간의 경험과 지식, 사고를 가지고는 기껏해야 욥과 그의 친구들이 말하고 있는 그런 정도의 신관을 가질 뿐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아는데 아직 많이 부족한 정도의 지식을 가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전혀 엉터리로 알고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다. 즉 성령을 보내셔서 자신의 뜻을 가르쳐 주시고, 우리의 참 모습을 보게 하신다. 이런 은혜는 아무에게나 내려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하신 자기 백성에 한해서 주어지는 은총이다. 따라서 참 하나님을 알고 믿게 된 것은 인간의 지혜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하심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욥기를 보면서 더 이상 내 경험과 지혜로 하나님을 알려는 교만을 버리고, 철저히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신 말씀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 이외의 하나님은 다 우상이다.
욥기 10:1-22절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나 이런 끔찍한 사태는 늘 벌어지고 있다. 물론 인간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들의 불평과 원망이 타당해 보이는 측면도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이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이다.
2절에 “나를 정죄하지 마옵시고 무슨 연고로 나로 더불어 쟁변하시는지 나로 알게 하옵소서”라는 구절은, 욥의 심정을 너무도 잘 표현해 주고 있는데, 이것은 욥이 스스로를 죄 없다고 단정하고 있기에 나오는 말이다. 그리고 ‘죄 없는 나를 왜 이렇게 곤경에 처하도록 하십니까?’ 라는 하나님을 향한 반발심이 그대로 실려 있다.
죄 없는 인간도 없거니와, 설사 죄 없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자기 뜻대로 우리를 인도하실 수 있다는 생각을 간과해서는 아니 된다. 주님은 자신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 보여 주기 위해 소경을 소경으로 태어나게 하시는 그런 분이다(요 9장 참조). 그러기에 욥이 갑자기 환경이 변하여 고통에 처한 사실은 자기 죄와 연결해서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런 것과 무관하게 하나님이 자기 뜻을 펼치시기 위해 욥을 그렇게 하실 수도 있는 것이다.
“진흙이 토기장이를 대하여 너는 무엇을 만드느뇨 할 수 있겠으며 너의 만든 것이 너를 가리켜 그는 손이 없다 할 수 있겠느뇨”(사45:9) 라는 이사야의 말씀은 무엇을 나타내고 있는가? 창조주의 하시는 일에 피조물은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를 징벌하는 차원에서 인간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으실 경우가 있다. 그러나 죄를 징벌하는 것과 무관하게 우리에게 아픔과 고난을 주시기도 한다. 이런 사실에 대해 인간들은 잘 이해하지 못한다. 마치 욥이 자기 고통을 죄의 형벌차원에서만 생각해서 특별히 범죄한 사실도 없는 자신을 왜 징벌하시는가 하고 하나님을 향해 불평하는 것처럼.
그렇다면 왜 욥처럼 이런 불평들을 늘어놓으면서 우리는 살아가게 되는가? 그 이유는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모습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치 욥이 자신을 죄 없는 사람으로 규정하듯이 우리 또한 얼마나 심각한 죄인인가를 잊고 살기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원래 죄인은 심판받아 멸망한 자이다. 그런 우리의 형편을 정확히 안다면 환경이 좀 열악해 지고, 과거에 비해 생활하기 더 힘들어졌다고 해서 감히 하나님을 원망할 수 없지 아니 한가? 피조물이 창조주를 향해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라고 말 할 입장이 못 된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하나님은 자기가 원하는 큰 그림이 있다. 그 원대로 하나는 이렇게 만들고, 또 다른 것은 그와 달리 저렇게 만드셨다. 그러기에 피조물끼리 서로 비교하면서 이러쿵저러쿵 해서는 아니 된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섬기려면 우선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 하는 점을 먼저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물론 이것이 인간의 이성으로 깨달을 수 없다는 점이 또한 중요한 문제이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셔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악한 죄인인가를 깨달은 후에라야 참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고 그분을 향한 경배와 찬양을 드릴 수 있다.
인간은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여겨 열심히 공부하고, 다양한 경험을 쌓고, 이런 것들을 바탕으로 해서 깊이 생각하면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것 또한 전혀 무지한 발상이다. 인간은 아무리 노력하고 궁구해도 자신이 멸망 받아 마땅한 죄인이란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따라서 당연히 창조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할 자란 사실에도 둔감할 뿐이다.
자신이 죄인인줄도 모르고, 삶의 이유도 모르는데 그런 자를 향해 지혜롭다고 할 수 있는가? 또 어떤 가능성을 가진 존재로 인정할 수 있는가? 전혀 아니다. 아무런 가능성도 없다. 만약 가능성이 있다면 그 가능성은 죄 지을 가능성뿐이다.
이 부분에서도 인간들은 착각하고 있다. 본인의 의지에 따라 죄를 범할 수도 있고, 선을 행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은 어떤 일을 해도 불의한 것이다. 본인은 선한 일이라고 여길지 모르나 주님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하는 일 모두는 불의한 것이다.
왜 그런가 하고 묻는다면, 하나님의 일 외에는 의가 없기 때문이다. 불의란 말은 의가 아니라는 표현이다. 그러니 인간은 하나님이 아니기에 의를 행할 수 없고 불의만을 행할 뿐이다. 그러니 당연히 그들이 어떤 일을 할지라도 불의한 것이다.
욥은 아직 창조주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기에 자신이 얼마나 악한 죄인인가에 대해서도 모른다. 그래서 자신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께 감사하는 마음이 억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진정 자신이 죄인인줄 알 때만이 불평 아닌 감사가 나온다.
욥기 11:1-20절
욥기의 내용을 보면, 욥이 곤경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위로하기 위해 세 친구가 찾아오는데(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 그리고 나아마 사람 소발), 이 세 친구들이 돌아가면서 욥에 대해 권면하면 욥은 그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면서 서로의 주장을 펼치면서 진행 된다.
본문은 소발이란 친구가 욥을 향해 권면하는 내용인데, 이 친구의 주장 역시 앞서 말한 다른 두 친구의 주장과 흡사하다. 우선 앞선 친구들의 주장을 먼저 간추려 보고 그 후 소발의 주장을 생각해 보자.
첫 번째 권면에 나선 엘리바스는 굉장히 조심스럽게 욥에게 말을 끄집어냈다. 너무도 형편이 참담하고 친구가 격고 있는 아픔이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상황임을 목도하고 있기에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침묵만 지키고 있을 수 없었기에 어렵게 입을 떼는데 그 내용인즉, ‘죄 없이 망한 자가 있느냐?’(4:7)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더 이상 고집 부리지 말고 너희 허물과 죄악을 회개해서 예전의 은총을 되찾으라는 주장이었다.
두 번째로 빌닷이란 친구의 주장을 살펴보자. 그 역시 엘리바스의 주장과 유사하지만 그와 비교하면 한결 강하고 직설적인 말을 했다. ‘잘못한 것이 있으니까 심판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네 자녀들도 틀림없이 범죄 했기에 심판 받았다’(8:4)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녀 문제까지 거론하고 나선 것이다.
이제 본문에 등장하는 소발이란 친구의 주장을 살펴보자. 이 친구 역시 앞선 두 친구의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더 강하게 친구를 몰아붙인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앞선 친구들의 주장에 대해 욥은 한 마디도 수긍하지 않았고, 이를 지켜보고 있던 자로서 얼마나 욥이 얄미웠겠는가? 그래서인지 그의 주장은 사뭇 강한 어조로 전개된다. “하나님의 벌하심이 네 죄보다 경하니라”(6절)고 한 것이다. 그러니까 ‘너는 아직도 멀었어. 더 혼나야 돼!’ 뭐 이런 식의 말을 한 것이다.
우리는 이상 세 친구들이 욥을 향해 안타까운 심정으로 말한 내용들을 보면서 각자의 주장이 일리가 있고 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전혀 터무니없는 말을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친구들의 주장에 대해 자신을 변호하고 있는 욥의 말 또한 근거 없는 외침은 아니다. 욥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답답하고 억울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끼게 되는가? 과연 하나님은 왜 이런 환경을 조성하셔서 곤경에 빠진 자의 주장과 그를 바라보는 친구들의 주장을 모두 다 잘못된 것이라고 규정하시는 것인가?
이것을 밝히려는 것이 욥기의 주된 목적이다. 즉, 하나님의 지혜와 인간의 지혜를 비교함으로써 하나님의 지혜 앞에 인간들이 지혜라고 내세우는 것들이 얼마나 거짓되고 부패한 것인가를 고발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인간의 지혜를 무시할 수 없다. 그리고 같은 인간이라도 더 지혜로운 자가 있고 그렇지 못한 자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더 나은 지혜를 소유한 자에게 그 지혜를 배우려 하고, 그 지혜로 세상을 보다 편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물론 하나님의 지혜와 비교한다면야 인간의 지혜가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전락하고 말겠지만 그래도 인간의 지혜도 쓸모가 있고 대단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인간의 지혜로 하늘을 날기도 하고, 물 속으로 다니기도 하고, 먼 거리에 있는 사람의 모습을 보며 대화를 주고받는 이런 일들도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앞으로도 더 많은 지혜로 새롭고 놀라운 일들을 만들어 갈 것이다. 어쩌면 인간이 인간을 만들 수도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알 것은 이런 인간의 지혜를 하나님은 불의하다고 심판해 버리셨다는 사실이다. 의가 아니라는 말이요, 진리가 못 된다는 것이다. 의가 아니고 진리가 아니라면 결국은 다 무용지물이란 말이 되기에 우리는 인간의 지혜가 아닌, 의를 찾아야 하고 진리를 깨달아야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자신이 계획하시고 운영하시는 나름대로의 규칙이 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언약’이라고 하는데, 그분은 자신의 언약대로 모든 것을 이끌어 가신다. 바꿔 말하면 ‘언약’이 아닌 것은 다 무너진다. 따라서 성도는 이 사실을 알고 그분의 언약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분의 언약의 말씀만을 믿고 의지하는 삶이 성도의 지혜요 생명이다.
욥기 12:1-25절
욥기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인간이 마지막까지 놓지 못하는 것이 자기 자존심이란 사실에 새삼 놀라게 된다. 욥의 화목하던 가정이 완전히 풍비박산이 났다. 열 자녀는 다 죽었고, 그 많던 재산이 하루아침에 몽땅 소멸되었고, 아내도 그리고 가장 절친했던 친구들도 욥을 비난했으며, 심지어는 자신의 몸까지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 형편이지만 자기 의와 자존심은 버릴 수 없었다. 이것이 인간인가보다.
이렇게 엉망진창이 된 욥이 자존심을 고수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발악을 하는 마당에 어찌 건강하고 평안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친구들이 자신의 자존심을 버릴 수 있겠는가? 세 친구들 모두가 욥이 당하는 환란에 대해 자신의 지혜를 자랑하며 각자의 의견을 피력한다.
그러나 그 누구의 주장도 욥이 당한 일에 대한 정확한 해석을 하지 못했고, 보편적인 상식과 지극히 편협한 자기 경험에서 나온 지식을 마치 하나님의 지혜인 냥 떠들고 있다. 이런 친구들의 주장을 들으면서 욥은 나름대로 자기변호에 나서는데 이 또한 자기 합리화로 치달을 뿐 하나님의 지혜와는 거리가 먼 내용들이었다.
그러니까 욥이 당한 일에 대한 각자의 견해는 모두가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는 허무맹랑한 논리들이었다는 말이다.
친구 소발의 주장에 대한 욥의 변호는 눈물겹도록 간절하고 처량하게 들려진다. 2절 말씀에 “너희만 참으로 사람이구나” 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그래, 네 잘랐다.’고 친구를 향해 공격의 화살을 날리고 있다. ‘내 꼴이 이렇게 되었다고 너마저 날 멸시하느냐?’는 이야기다.
사실 욥의 입장에서 보면 친구들이 너무 얄밉고 잔인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친구가 곤경에 처하면 위로하고 격려를 하는 것이 마땅하거늘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친구들이 오히려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는 꼴이니 어찌 화가 치밀지 않겠는가?
그래서 욥은 이런 친구들을 향해 ‘이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고 쏘아 붙인다. 7, 8절에 있는 말씀이 바로 그런 내용이다. “이제 모든 짐승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네게 가르치리라 공중의 새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또한 네게 고하리라”
정말 친구들은 짐승과 벌레만도 못한 자로 여겨졌다. 누구도 뻔히 아는 이야기를 마치 혼자 깨달은 특별한 지혜인 냥 떠들고 지껄이는 친구들이 야속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그들이 주장하는 것과 욥이 당하는 고난과는 전혀 관련 없는 동떨어진 이야기다.
‘잘못한 일이 있어서 그에 대한 징벌을 받는 것’, ‘허물이 있어서 책망을 받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욥 자신은 무엇을 특별히 잘못하거나 큰 죄악을 저질러서 당하는 일이 분명 아님에도 이런 어설픈 상식으로 욥을 공박하고 나오니 어찌 자기변명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도 욥기를 읽으면서 이런 부분들이 참으로 답답하게 느껴진다. 욥의 친구들이란 작자들은 왜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제 멋대로 지껄여, 가만 내버려둬도 참기 어려운 곤경에 처한 친구를 더 큰 고통의 나락으로 떠밀고 있는지?
그리고 욥은 왜 끝까지 자기 의로움만 계속 우기면서 자기변호에만 급급한지 참으로 안타깝다. 물론 친구들의 주장처럼 자신이 특별히 죄를 범해 이런 환경이 처한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그래도 하나님 앞에 자신은 허물투성이인 자이며, 자신의 주장처럼 하나님은 모든 것의 주인이시기에 건강을 주시기도 하고, 질병을 주시기도 하고, 재물과 명예를 안기시기도 하고, 그런 것들을 회수해 가시기도 한다(1:21, 2:10). 그렇다면 많은 것들을 주신 하나님께서 다시 그것들을 회수해 가셨다는 것을 안다면 원망하고 불평할 일은 분명 아니다.
우리가 뭔가를 지식으로 안다는 것과 그것을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차이가 있다. 남의 문제에서는 그냥 아는 지식을 적용하면서 ‘그렇게 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쉽게 넘길 수 있는데, 그 문제가 자신에게 해당된 것이라면 그런 식으로 쉽게 넘길 수 없는 법이다.
즉, 안다는 것이 얼마나 상황에 따라 달리 적용되는가 하는 말이다. 참고 견딜만한 상황에서는 그것을 인정하고 용납할 수 있지만, 더 힘든 상황에 닥치면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또한 인간이다.
욥이 처음에는 자신이 당한 환경에 대해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러나 더 큰 어려움이 닥쳐오고 고통이 밀려오니 초기에 자신의 입으로 주장했던 그 모든 외침들이 다 사라져버리고 원망과 불평이 노골적으로 표출되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다.
이처럼 환경 따라 주장이 달라지고, 지식도 바뀌는 나약한 자가 어찌 변하지 않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알 수 있겠는가? 도무지 인간 스스로 하나님을 깨닫기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스스로를 나타내 보이신다. 이렇게 될 때만이 우리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있다.
욥기 13:1-28절
사르밧에 사는 한 과부는 극심한 흉년을 만나 먹을 것이 바닥난 상태에서 집에 남은 마지막 양식을 선지자 엘리야에게 대접함으로 그 집에 양식이 떨어지지 않는 놀라운 은총을 경험했다(왕상 17장). 자칫 이 구절을 가지고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선지자를 대접하면 축복 받는다.’는 식으로 몰아간다면 본문을 완전히 오해한 것이다. 어쩌면 선지자를 대접한 과부도 그런 생각에 빠져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본문은 전혀 다른 이야기로 분위기를 만들어 간다. 과부의 아들이 갑자기 병들어 죽게 되었고, 이런 일이 발생하자 과부는 선지자를 향해 원망을 쏟아낸다. ‘왜 나를 찾아와서 내게 이런 큰 시련을 주시는 것입니까?’ 하면서.
이런 상황에서 엘리야는 하나님께 기도했고, 그 아이는 살아났다. 일이 이쯤 이르니 과부는 그제야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었다. 진정한 은총은 흉년 중에도 양식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도 살리시는 분이 바로 자신을 찾아오신 하나님이란 사실을. 그러니까 양식을 계속 공급해 주셔서 육신의 생명을 연장해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죽은 자도 부활시키는 능력을 가진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란 사실이다.
이제 본문으로 돌아와서 욥을 생각해 보자. 과연 그는 자신이 당한 환경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할 자격이나 있는 자인가? 그리고 자신을 공격하는 친구들을 향해 거친 독설을 내뱉고 항변할 수 있는 입장인가? 아니면 주님이 주신 환경에 대해 과거와 변함없이 여전히 감사하며 찬송해야 하는 자인가?
욥은 과거의 환경과 현재를 비교해 볼 때 참으로 어렵고 고통스런 처지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그 변환된 환경 때문에 하나님께 불평할 수 있다고 여긴다면 하나님을 잘 못 알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님이 그런 변화된 환경을 주시려면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그릇된 생각이다.
인간은 항상 자기 안락과 행복만을 꿈꾼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자들도 그 목적이 자기 기쁨과 만족을 위해서다.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이 그들이 원하는 희망을 빼앗아 가버리면 더 이상 하나님을 섬길 수 없게 된다. 아니 원래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폭로된다.
과연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것인가? 아니면 내 행복과 만족을 위해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것인가? 이것을 정확히 구별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가 원하는 것과 정반대의 상황으로 몰아가신다. 마치 사르밧의 과부에게 아들 생명을 빼앗는다든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물 없고, 양식 없는 빈들로 인도한다든지, 욥처럼 극심한 환경으로 몰아가신다.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해 자신 있게 대답할 이는 이 땅에 그 누구도 없다. 그 이유는 믿음이 우리의 소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 의지와 결단으로 믿음을 갖는 것이라면 긍정이든 부정이든 대답할 수 있겠지만, 이 믿음이 바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기에 믿어지는 순간 ‘아멘’이라고 고백할 뿐 그 이상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다.
사단은 믿음을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래서 ‘재물도 주시고, 건강도 주시고, 가정의 행복도 주시니까 욥이 하나님을 섬기고 믿는 것이지 이런 것들을 빼앗아 가신다면 하나님을 버릴 것입니다(1:9-11).’ 하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런 것이 아니기에 욥이 가진 모든 것이 다 사라져도 그는 하나님을 저주하고 외면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욥이 끝까지 스스로 믿음을 고수해서가 아니라, 믿음은 인간이 소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에 그런 것이다.
물론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친구를 향해 욕하고 하나님을 만나면 반드시 따져보겠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끝까지 하나님이 욥을 붙잡고 계시기 때문이다.
만약 믿음이 우리의 의지와 결단으로 주어지는 것이라면 우리는 더더욱 믿음과 거리가 먼 자가 될 것이다. 그 어떤 인간도 환경을 극복할 그런 자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 믿음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기에 믿음은 영원한 것이다.
죄인인 우리에게, 지옥에서 영원히 형벌 받아 마땅한 나에게 용서의 은총을 베푸시고 믿음을 선물로 주신 그 주님을 생각하면 우리는 감사와 감격 이 외에 더 이상 주님께 뭐라 할 말이 없다. 내 사업 실패했다고 원망하고, 내 아들 시험 떨어졌다고 불평하고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면, 다시금 주님 앞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라. 그래도 계속 원망과 불평을 접을 수 없다면 그는 용서의 은총과 믿음을 선물로 받은 자가 아니다.
욥기 14:1-22절
역경과 시련을 통해서 욥은 차츰 자신의 참된 모습에 다가가고 있다. 1장부터 14장 현재까지 욥이 한 이야기를 살펴보면서 그가 어떻게 변화되어 가는지 살펴보자.
1장에서는 자신에게 닥친 일에 대해 상당히 당당하고 자신 있는 태도를 취한다. “주신 자도 여호와 취하신 자도 여호와”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2장에서도 이와 비슷한 고백을 하는데 “우리가 하나님께 복도 받았는데 재난을 당하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하면서 자신이 당한 상황에 대해 담담히 받아들인다.
그러나 3장에 넘어가면 상황이 많이 바뀐다. 자신의 난 날을 저주하고 있다. 6장에서는 하나님께 고통을 호소하며, 자신을 이해해 주지 않는 친구에 대한 원망과 함께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한다. 7장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나오고, 9장에서는 ‘하나님은 전능자요 나는 나약한 자’라고 고백하면서 주님 앞에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할 수 없다고 한다.
10장으로 넘어오면 “주여, 왜 나를 이런 지경으로 빠뜨리십니까?” 하면서 자신이 이런 벌 받을 일은 하지 않았다고 항변하고 있다. 그리고 12장에 넘어오면 친구들을 향해 공격하면서 자신을 변론한다. 13장에서도 역시 친구들에게 ‘너희들이 내 잘못을 입증한다면 내가 굴복하겠다.’고 하면서, 주님께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가르쳐 달라고 한다.
이상의 내용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차츰 자신이 나약한 존재이며 하나님의 의로움 앞에 하잘 것 없는 자임을 실토해 간다. 이것은 참으로 중대한 문제이다. 만약 자신의 정당함만 끝까지 고수하게 된다면 주님의 용서하심과 은총이 스며들 틈이 없기 때문이다.
14장에 와서는 ‘인생은 연약한 자이며, 그 화려함도 잠시 잠깐’이란 사실을 고백한다. 그리고 죽은 후에는 주님께 나아가 모든 것을 말씀드리고 자신의 허물을 용납해 주실 것을 고대하고 있다.
만약 욥이 이런 아픔과 역경을 만나지 않았다면 자신이 한없이 나약한 자이며, 세상 영광 또한 잠시 있다 사라져 버릴 것이란 사실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풍성하고 넉넉한 환경 속에서 감사하고 기뻐하며 찬양하는 삶을 살 수는 있었겠지만 주님의 고난과 아픔이 어떤 것인지, 또 인간의 죄악이 얼마나 깊고 심각한 것인지, 이런 죄인을 용납하시고 사랑하시는 주님의 긍휼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등등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로마서 8장 28절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는 욥기를 묵상하면서 그가 당하는 이유 없는 고난에 대해 의아해 하고 궁금해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이미 1장에서 밝히고 있듯이 우리들에게서 일어나는 일이 인간 자체의 목적과 이유 때문이 아니라 크신 하나님의 목적하신 바가 있기 때문이란 사실을 생각하면 모든 의문은 일시에 해소된다. 그리고 로마서 8장의 말씀처럼 이 모든 일들은 결국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결과를 낳는다.
이 말씀은 내 자신에게 유리하게 일이 결론 맺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모든 것이 성취된다는 말씀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성도는 그분의 뜻을 찬양하는 자이기에 매사에 감사와 경배를 드리게 되는 것이다.
아직 욥이 하나님의 깊으신 뜻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지금까지의 상황을 놓고 보아도 주님의 놀라우신 인도하심을 조금씩 느끼게 된다. 그렇게 스스로에 대해 자신만만해 하고, 성실함과 충성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행했던 모든 자랑스런 행동에 대해 스스로를 돌이켜 볼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 어떤 인간도 자신의 행동에 대해 정당함을 내세울 수 없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용납하심 때문에 여전히 살아있는 것이지, 그들이 살 가치고 있다거나 그들의 하는 행위가 의롭고 보람이 있어서 살아있는 자는 없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 자신의 삶과 행위가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으로 믿고 있다. 그래서 자신 또한 하나님 앞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로 여긴다. 욥의 처음 마음이 그러했다.
이런 욥을 갑자기 궁지에 몰아넣으시고 엄청난 고통의 환경으로 이끄시면서 인간의 완악함과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다가가게 하신다. 즉 믿음이 무엇인지, 주님의 크신 사랑이 어떠한지를 보여주시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된 자라면 이것은 그분의 은총이며 긍휼히 여기신 결과이다. 내가 믿음이 좋아서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았다거나 다른 이들은 세상을 좋아해서 세상으로 나갔는데 나는 끝까지 주님 말씀만 따른 결과로 주님 사랑을 받았다고 주장한다면 그런 자는 분명히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가 아니다.
욥기 15:1-35절
본문은 엘리바스가 두 번째로 욥에게 말한 내용인데, 첫 번째의 주장과 비교했을 때 그 내용의 핵심에는 전혀 변한 것이 없고 다만 말의 강도가 두 번째는 더 세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일 수 있다.
친구 욥을 비난하는 더 강도가 세진 엘리바스의 주장에 대해 좀 살펴보자.
그 동안 욥이 다른 친구들의 주장에 대해 변론한 말에 대해 ‘참으로 무지하고 어리석은 말’이라고 공박하고 있다. 또 “너를 정죄한 것은 내가 아니요 네 입이라”(6절)고 몰아세운다. 그리고는 자신의 나이를 거론하면서 그 동안 쌓은 경륜과 지식으로 다시 한 번 충고 한다고 하면서 ‘여인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할 수 있으며 의로울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거룩한 자들도 믿지 아니 하시는데 악을 짓기를 물 마시듯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을 믿겠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지혜를 가르쳐주겠다고 하면서 ‘악인은 일평생 고통을 당하고 유리하며 식물을 찾아 허덕이게 되는데 이는 하나님을 대적하며 교만하여 전능자를 배반함’ 때문이라고 했다.
참으로 무서운 말이다. 역경에 처한 친구를 위로하고 또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찾아온 자의 말이 오히려 더 친구를 혼란으로 빠뜨리고 마음의 상처까지 입히고 있다. 이런 말이라면 차라리 하지 아니함만 못한 것이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친구의 모습을 보면서 왜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기회로 삼지 못하는가 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엘리바스 본인이 지금 욥처럼 고통을 당하고 아픔에 처한 것은 아니나 친구의 아픔을 보면서 자신을 삶을 돌이켜 볼 줄 알아야 진정 지혜로운 자다. 그러나 그는 욥에 대한 공세만 폈을 뿐, 제 모습을 돌아볼 줄 몰랐다.
우리는 욥기를 묵상하면서 과연 어떤 생각을 하게 되는가? 계속 고집을 부리는 욥을 어리석은 자라고 정죄하며 비난할 것인가? 아니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멋대로 주절거리는 욥의 친구들을 향해 분노의 마음을 품을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며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은 자기 뜻대로 나를 다스리고 계심에 대해 감사하고 경배하고 찬양할 것인가?
욥기의 말씀은 욥 개인의 이야기로 넘겨버릴 수 없는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다. 우리는 오늘도 주님의 다양한 인도하심 속에 놓여 있다. 내가 원하든 원치 안든 그런 것과 무관하게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펼치시기 위해 우리들을 사용하신다.
이 사실을 잊는다면 우리에게 닥친 원치 않은 일들에 대해 원망과 불평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다. 즉 하나님을 나의 유익과 만족과 기쁨을 위해 이용할 줄은 알면서 그분의 영광을 위해 내가 만들어진 피조물이란 사실에 대해서는 캄캄하기 때문이다.
내 기쁨과 만족을 위해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당연시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주님의 기쁨에 내가 참여됨을 인하여 나의 죽음도 당연한 것으로 여겨야 합당한 것이다. 즉 내 만족과 기쁨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과 만족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욥이 자기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의 생각을 갖고 있다면, 스스로의 정당함을 주장하고 하나님에 대해 억울해 하는 그런 입장을 취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욥의 친구들이 현 상황에 대해 단순히 인과응보의 관점이 아니라 하늘에서의 원인이 이 땅에서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결코 어리석은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욥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지혜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인간들이 주장하는 지혜는 각자가 살아온 삶의 경험을 지혜로 삼는다. 또 내가 직접 경험할 수 없는 것이라면 다른 이의 경험을 내 것으로 여겨 그것을 지혜로 받아들인다.
그 동안 우리가 살핀 욥기의 내용을 보아도 역시 이런 것들을 가지고 서로 지혜라고 우기며 다투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지혜는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지혜는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그분의 뜻이 지혜이며 그분의 행하심이 진리이다. 그리고 그분의 계획하신 바가 진리이다.
하나님 아닌 다른 곳으로부터 지혜를 찾으려한다면 이는 다 헛수고에 지나지 않는다. 욥기는 바로 이런 하나님의 지혜를 보여주기 위한 말씀이다. 따라서 욥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의도하신 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였다. 욥 개인의 의지와 노력으로 자기 삶이 형성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욥기 16:1-22절
가까운 친구들이 계속 자신을 몰아세우는데 대해 욥은 상당히 격앙되어 있다.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으로 친구들이 나서고 있다는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갑작스런 환경 변화에 대해 엄청난 고통을 겪음과 동시에 친구들이 자신을 파렴치한 인간으로 몰아가는 것에 대한 심적 고통까지 갖게 된 것이다.
욥의 반론을 들어보면, 친구들은 마치 자신들이 대단한 지혜와 많은 경험들을 통해 난관에 처한 친구를 격려하고 충고도해서 현재의 환경에서 벗어나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진정한 위로도 충고도 되지 못하고 오히려 번뇌만 가중시킬 뿐이란 것이다. 그리고 만약 입장이 바뀌어 자신이 위로하는 처지에 서고 친구들이 고통 중에 처했다면 자신은 정말 용기를 북돋아 주고 근심을 풀어주었을 것이라고 한다.
이런 표현들을 보면서 욥의 답답한 심정을 충분히 읽을 수 있다. 본인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가정의 파멸과 질병으로 만신창이 된 몸으로 친구들의 공세에 답해야 하지만 전혀 합당한 논리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싸움이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그리고 자신의 초췌한 골몰과 풍비박산이 난 가정을 보면서 어느 누구도 욥이 정당하다고 인정할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에 대해 너무도 억울해하고 있다. 이것은 과거의 자기 삶과 비교하면서 느끼는 감정일 것이다. 모든 것이 평안하고 넉넉할 때에는 이웃의 칭송과 존경을 받으며 살았다.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욥의 삶이 그를 선한 자로 인식하게 했고, 또 그런 인식이 사람들에게 있었기에 모든 이들이 욥을 부러워하고 존경한 것이다.
그러나 정 반대의 환경으로 바뀐 지금에는 사람들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도 역시 정반대로 바뀌었다. 존경 대신 조롱으로, 부러움 대신 불쌍히 여기며 가까이 하기를 꺼리는 그런 기피인물이 되고 만 것이다.
욥은 지금 자기모순에 빠져있다. 친구들이 욥의 가시적인 삶을 보면서 평가하는 것에 대해 화를 내지만 본인 스스로도 그런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만약 욥 본인이 그런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면 의외로 문제는 간단하다. 스스로 억울해 할 일도 없고, 친구들을 향해 분노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의 은총을 입었다는 것은 부자로 산다거나, 이웃으로부터 높임 받는 위치에 있다거나, 또는 온 가족이 건강하고 화목하게 지내는 등등의 것과는 별개의 사안이다. 주님의 은총은 그분의 사랑으로 허물 많은 죄인을 용납하심이다. 즉 죄 사함 받은 것이 주님 사랑의 유일한 증거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자꾸 외적으로 드러나는 삶으로 주님 사랑의 유무를 확인하려고 하니 이 잘못된 기준 때문에 혼란을 겪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면 인간들은 아무리 연구하고 지혜를 모아도 그것은 탁상공론이다. 지루하게 반복되고 있는 욥과 친구들 간의 격론이 일보의 전진도 없이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다는 것을 본문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해 볼 수 있다.
욥에게 닥친 일들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으니 친구들은 친구들대로 욥의 고집스런 면에 화가 치밀어 있고, 반대로 욥은 친구들의 태도가 심히 섭섭하고 불쾌한 상태다. 결국은 주님이 해답을 주셔야 모든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다.
그럼 왜 하나님은 욥에게 이런 환경을 주셔서 고통에 고통을 더하게 하시는가? 욥기는 여기에 초점이 맞춰져야 합당한 해석이 나온다.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 고백’이다. 짝사랑으로만 끝낼 수 없는 고귀한 사랑이기에 그 사랑을 상대인 욥도 깨달아 알게 하시려고 욥을 시련의 늪으로 인도하신 것이다.
만약 욥이 과거의 화려한 삶을 지속했다면 하나님의 참 사랑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환경 변화를 통해서 주님의 자기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마치 자기 사랑을 백성에게 나타내 보이시기 위해 안달하는 모습이 바로 욥기를 통해 보여지고 있다. ‘왜 너희들이 내 사랑을 그렇게 몰라주니?’ 하면서 애달아하시는 모습으로.
성도여! 제발 주님의 사랑을 느끼며 살자.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향해 한없는 사랑의 고백을 쏟아내고 계신다. 성경 어떤 구절을 펴도 그분의 자기 백성을 향한 사랑은 멈출 줄 모른다. 이 크고 놀라운 사랑 앞에 눈물로 감격하며 같이 서로 사랑을 고백하는 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스바냐 3:18)
욥기 17:1-16절
“나를 조롱하는 자들이 오히려 나와 함께 있으므로 내 눈이 그들의 격동함을 항상 보는구나”(2절)라는 표현이나, “하나님이 나로 백성의 이야기거리가 되게 하시니 그들이 내 얼굴에 침을 뱉는구나”(6절)라는 구절을 통해 볼 때, 욥은 지금 자신에게 닥친 모든 환경과 처지에 대해 상당히 고통스러워하면서 원망의 마음을 품고 있다.
화목하고 풍족하며 행복했던 가정이 풍비박산 되고, 자녀들은 일시에 다 죽고, 자신의 몸마저 만신창이 된 상태에서 친구들뿐 아니라 이웃사람 모두가 조롱하고 비아냥거리는 상황에 대해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너무도 억울해서 이 누명을 하나님이 벗겨 주시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다.
만약 우리들이 욥의 입장이었다면 어떠했을까 생각하면 우리도 역시 욥처럼 불평과 원망을 늘어놓으며 자신을 향한 터무니없는 비방과 조롱에 대해 하나님이 나서서 해명해 주시기를 갈구했을 것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주님께서 자신을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시고 사람에게 구경거리(고전4:9)가 되게 하셨지만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아니 감사와 찬양을 드리고 있다. 겉보기에는 초라해 보이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자로 보이지만 실상은 모든 것을 다 가진 부요한 자란 사실을 고백(고후6:9)하고 있다.
욥은 자신의 억울함을 주님께 호소하면서 자신의 무죄함을 보증해 달라고 당부한다. 이에 반해 바울은 성령께서 나의 보증이 되셔서 자기 백성 삼으심을 깨닫고 감사드린다. 그러니까 바울은 자신의 정당함을 주께서 보증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죄와 허물투성이인 자신을 주께서 용서해 주셨다는 사실을 성령이 보증해 주신 것에 대해 확신하고 감사를 드리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유사한 처지에 놓인 두 사람이 서로 다른 반응을 나타내 보였을까? 환경과 처지가 비슷하다면 그에 대한 반응도 비슷해야 할 것 같은데 서로 정반대의 반응을 나타내고 있으니 이것은 분명 누군가가 문제가 있음이 틀림없다.
예수님 말씀 중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작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7:13-14)는 말씀이 있다.
이 구절에 비춰 욥을 보면, 그는 지금 좁은 문으로 인도하고 계신 주님에 대해 엄청난 불만과 불평을 늘어놓고 있다. 그는 과거의 넓고 평탄한 길을 떠올리며 그런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 안달이다.
욥의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주께서 좁은 길로 인도하시는 깊은 뜻을 알지 못한 채 과거와 달라진 욥의 삶을 저주 받은 것이라 하고, 지은 죄에 대한 심판이라 여기며 하루속히 회개하고 과거의 안락한 삶을 되찾으라는 것이다.
화려하고 평탄한 그리고 많은 이들이 동행하는 넓은 길이 지금 당장 걷기에는 너무 좋으나 그 길의 종착점은 멸망이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어리석은 인간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멸망을 향해 너도나도 웃으며 걸어가고 있다. 심지어는 서로 다투며 그 넓은 길을 더 많이 차지하면서 걸으려고 한다. 만약 그 길이 죽음의 길인 것을 안다면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아무도 알지 못하는 길의 종착점을 주님은 아시기에 자기 백성이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을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그래서 그들이 알지 못하고 원치 않는 좁은 길로 몰아가신다. 그래야만 생명을 얻기 때문이다.
지금 욥은 주님의 사랑을 입어 좁은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그는 넓은 길의 안락과 평안을 기억하며 그 길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뿐이다. 사람들에게 조롱과 멸시를 당하며 몸과 마음이 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좁은 길을 벗어나기를 원한다.
자기 사랑하는 백성을 좁은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이끄심에 대한 인간들의 반응은 욥과 유사하다. 주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세상을 향유하고 싶다. 넓고 평탄한 길을 여러 이웃과 함께 걷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을 걸으며 이웃으로부터 사랑받고 인정받고 높임 받기를 원한다. 욥은 과거에 그런 삶을 살았다.
이 과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는 한 고통은 계속될 것이다. 반대로 주께서 이끄시는 새로운 길, 좁고 협작해서 찾는 이가 심히 적지만 그 길이 생명의 길임을 깨닫게 된다면 그는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어 감사와 찬양과 기쁨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바울은 욥처럼 조롱거리가 되고 비방을 들으며 살았지만 감사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주께서 인도하시는 좁은 그 길이 바로 영생이 있음을 알기에.
욥기 18:1-21절
본문은 빌닷이 욥을 향해 두 번째 자기주장을 펼치고 있는 내용인데 그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그가 첫 번째 욥에게 했던 이야기부터 간추려보자.
빌닷은 엘리바스와 욥이 주고받는 말을 지켜보면서 8장에서 처음으로 욥을 향해 입을 열었다. “욥 네가 아무리 변명해도 소용없다. 하나님이 잘못 심판하실 리가 없고, 너희 자녀들도 하나님께 범죄한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벌을 주셔서 다 죽게 하셨다. 더 이상 너의 정당함을 고집하지 말고 지금이라도 돌이켜서 회개하면 다시 하나님이 축복해 주실 것이다. 지금은 이렇게 초라한 모습이지만 나중에는 심히 번성하고 창대할 것이다.” 이런 내용의 말을 했다.
이제 본문에 나타난 두 번째 빌닷의 주장에 대해 살펴보자. 첫 번째에 비해 훨씬 강하게 욥을 몰아 부친다. 아예 저주를 퍼붓고 있다고 해야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그가 처음 욥을 향해 말할 때는 그래도 애정을 갖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물론 처음부터 그 주장이 엉터리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희망과 용기를 가질 수 있는 대목도 있었다. 그러나 두 번째 주장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공격 일변도다. “악인은 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찾아온다. 가는 길마다 함정과 올무와 덫에 걸리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아들도 자손도 없이, 그리고 세상에 왔다 간 흔적조처 없이 사라져 버릴 것이다.” 라는 식의 말을 했다.
한 마디로 욥에 대한 증오와 함께 그가 완전히 파멸해 버리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보인다. 초라해진 욥이 자신을 보면서 존경과 부러움으로 대해주기를 은근히 기대했는데 전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고 아직도 욥이 자신을 낮춰 보는 듯한 인상에 화가 치밀어 올랐는지 모른다. 여하간 빌닷은 욥을 보면서 한없이 얄밉고 지금보다 더 큰 고통에 휩싸여 이 땅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기를 소망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모습은 경쟁의식에서 싹튼 것은 아닐까? 친구로서 서로 힘과 지혜를 겨루는데, 어떤 부분은 네가 낫고 어떤 부분은 내가 나은데 하면서 서로 견제하고 비교하면서 지내야 하는데 모든 면에서 자기보다 나은 친구를 보면서 열등감과 시기심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고, 이제는 모든 상황이 역전 되었으니 당연히 자신의 우월함을 그 친구가 인정해 주고 부러워해 주어야 유쾌하고 우쭐댈 수 있는데 끝까지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잘난 척하는 친구가 죽도록 미운 것이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7:3)는 말씀이 있는데 본문을 보면서 그 말씀을 떠올리게 된다. 과연 우리는 우리의 비뚤어진 잣대로 남을 측정하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게 하는 말씀이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는 진리가 없는데 우리는 말씀을 기준으로 해서 평가하고 측정하기 보다는 우리의 배운 지식과 경험들 그리고 세상 통념에 따라 모든 것을 평가하고 바라본다.
지금 빌닷은 자신의 막연한 신에 대한 지식으로 친구 욥을 평가하고 있고, 그 평가에 따라 욥에게 저주의 화살을 날리고 있다.
내가 내 자녀를 평가하고, 아내를 혹은 남편을 평가하고, 교회 내에서 다른 형제를 평가하는 기준은 과연 무엇인가? 내 상식의 잣대를 진리인 냥 착각하며 그 잣대를 사용하고 있지는 않는가? 만약 그러하다면 빌닷의 어리석음을 우리가 범하고 있는 꼴이다.
사회적 통념이란 수시로 변하는 것이고, 그 변화하는 것을 진리로 여기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가시적인 번성을 성공으로 간주하니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욥은 패배자요, 완악한 죄인이요, 쓸모없는 인생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반대로 어떤 자가 많은 물질을 소유하게 되고, 높은 직위에 앉아 있고, 많은 권력을 쥐고 있다면 그는 의로운 자요, 보람 있는 인생을 보내는 자요, 값진 생을 살고 있는 자가 된다.
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기준인가? 빌닷은 그런 허무맹랑한 기준으로 친구 욥을 저울질 하고 있다. 빌닷뿐만 아니라 욥 자신도 이런 잣대를 버리지 못한다. 그래서 자신에게 닥친 환경을 해석해 내지 못해 혼란한 상태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잣대로 나를 측량하고 세상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가? 가정에 우환이 생기고, 가족이 건강을 잃고, 직장에서 내 위치가 흔들리는 등의 상황을 맞으면서 빌닷같은 그런 해석을 내리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 보자.
주님의 최후 심판이 있기 전에는 오히려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을 받는 것이 이 세상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땅에서 고생하고 사람들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되고, 가난과 질병으로 고생하는 삶을 정당한 것으로 여길 수는 없다. 문제는 세상 살아가는 형편이 어떠하든 주님의 인도하심을 감사함으로 받고 순종하는 삶이다.
욥기 19:1-29절
욥은 지금 자신의 처지에 대해 너무도 못마땅해 하고 있다. 그런 마음을 갖게 된 것은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할 때 생긴 결과일 것이다. 과거 화려하고 잘나가던 시절에는 모두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정 반대로 모두가 자신을 조롱하고 비웃는 형편에 처해있다. 아내, 형제, 친척, 친구, 종, 이웃 할 것 없이 모두가 욥을 싫어하며 멀리한다(13-19절 참조).
이런 환경에 처한 것 자체만 해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더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친구들이 계속해서 욥의 허물을 지적하고 공박하고 있다는 점이다. 본인은 특별히 친구들에게 지적받을 일을 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그들은 쉬지 않고 욥을 몰아세운다. 그러면서도 구체적으로 뭘 잘못 했는지 말하지는 못하고 그냥 막연하게 뭔가 하나님께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런 형벌이 왔다는 식으로 공격한다.
참으로 답답할 노릇이다. 친구들은 뭘 잘못했는지 말해주지도 않고 무조건 자신을 파렴치한 죄인으로 취급하고, 본인 스스로도 왜 이런 일을 당했는지 아무리 궁리해도 모르겠고, 그런데 하나님마저 자신의 궁금증에 대해 침묵하고 계시니 얼마나 답답할 노릇인가?
이런 자신의 처지를 그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내가 포학을 당한다고 부르짖으나 응답이 없고 간구할지라도 신원함이 없구나 그가 내 길을 막아 지나지 못하게 하시고 내 첩경에 흑암을 두셨으며 나의 영광을 벗기시며 나의 면류관을 머리에서 취하시고 사면으로 나를 헐으시니 나는 죽었구나 내 소망을 나무 뽑듯 뽑으시고 나를 향하여 진노하시고 원수 같이 보시는구나”(7-11절).
여기에서 욥은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벗기시며, 면류관을 취하시고, 소망을 뽑으셨다.’고 했는데 왜 이런 발언을 하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가 생각하는 ‘영광, 면류관, 소망’은 어떤 것인가?
그는 과거의 삶을 두고 영광된 것이었고, 면류관을 쓴 모습이고, 참 소망을 간직한 것으로 생각한 것이 틀림없다. 그러기에 과거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현재의 초라한 모습을 생각하고 이런 것들을 하나님이 다 빼앗아 가셨다고 말한 것이 아닌가?
이것이 바로 욥의 크나큰 오해이다. 이 세상의 물질, 명예, 권세 등등은 하나님이 주신 영광이나 면류관이 될 수 없다. 단지 죄인들이 그렇게 착각할 뿐이다. 하늘의 신령한 것을 맛보지 못했기에 기껏 땅의 것들을 가지고 영광이네, 면류관이네, 소망이네 하는 것이다.
하박국 선지자는 주님의 용서와 사랑의 참 맛을 알았기에 세상 사람들이 소망하고 부러워하는 것들에 대해 전혀 다른 시각을 갖게 되었다. 그의 고백을 들어보면,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3:17-18절) 라고 했다.
바울 사도의 고백을 들어보아도 마찬가지다.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란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2-24절)고 했다. 이 말씀은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가면 그곳에서 잡혀 죽을 것이란 사실을 알았지만 주님이 주신 사명을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버리겠다는 것이다.
어떻게 자기 목숨을 내 놓을 결단을 할 수 있게 되었는가? 그것은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한 생명 되신 주님을 만났고, 그 주님의 사랑을 입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 주님은 부활의 주님이기에 죽음이 문제될 것이 없고, 고난 받는 것은 장차 누릴 영광을 위해 필수적인 것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주님과 더불어 영생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해서 빨리 세상을 떠나 그곳으로 가기를 갈망했다.
세상은 유혹의 선악과로 가득 차 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온갖 것들이 즐비하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이 손짓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멸망을 안겨줄 뿐 결코 지혜롭게 하는 것이 아니다.
비난, 멸시, 조롱, 고난, 핍박,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당하신 분이 우리 주님이다. 우리는 그분의 자녀이기에 그분이 가신 길을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 내 힘으로는 그 길을 갈 수 없지만 주님이 이끄시기에 성도는 찬송하며 그 길을 걸을 수 있다.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8:17)
욥기 20:1-29절
인간들은 땅의 일(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등)에만 관심이 있지 하늘나라에는 별 관심이 없다. 혹 관심을 갖는다 해도 그 관심은 땅에 기울이는 관심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할 뿐이다. 즉 육신의 쾌락과 만족을 사랑하기에 하늘나라에 가서도 극도의 안락을 꿈꾸는 식이다.
이런 생각에 사로잡힌 인간들이 욥이라는 한 사람에게 닥친 환란을 이해하고 그 원인을 찾는다는 것은 예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껏해야 땅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그곳에서 단 한치도 벗어난 사고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본문은 욥의 친구 소발의 두 번째 주장이 펼쳐지고 있는데,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역시 땅의 생각을 하고 있고, 땅의 문제로 현재의 결과가 왔다고 믿기에 전혀 하나님의 뜻과 무관한 엉터리 소리를 지껄이고 있다.
욥과 친구들의 공방은 끝이 없어 보인다. 일단 욥 본인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볼 때 과거와 특별하게 달라진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육체의 시련이 닥쳐왔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고 있다. 즉 자신의 잘못으로 현재의 고통이 온 것은 아니란 것을 안다. 그러나 친구들은 욥의 몰락을 목도하면서 분명 그가 많은 은밀한 죄를 범했기에 이렇게 형벌을 받은 것으로 굳게 믿고 있었다.
사실 욥은 자신의 허물과 죄악 때문에 고난 받는 것이 아니라 장차 이 땅에 오셔서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해서 고난 받으실 예수님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선지자의 모습으로 ‘이유 없는 고란’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욥도 욥의 친구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모든 인간들은 자신에게 닥치는 일의 원인과 그 결과에 대해 욥의 친구처럼 땅의 것으로 이해한다. 욥이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가정이 화목하고, 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고 산 것은 그만큼 하나님을 잘 섬기고 그분으로부터 복을 받았기에 그런 삶을 산 것이고, 지금 현재의 욥은 뭔가를 잘못 했기에 이 땅에서 벌을 받아 몸이 병들고 가산을 탕진했다는 식이다.
땅에 사는 인간들은 무엇이든 땅, 땅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거기에서 즐겁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기 원한다. 그것 때문에 신을 찾아 기도하고, 땀 흘리며 노력하고, 지혜를 짜내 성공을 향해 매진한다. 그러니 당연히 하늘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는 무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성도는 그 본향이 하늘나라이다. 그래서 이 땅에서는 나그네로 살 수밖에 없는 자들이다. 나그네의 삶이란 잠시 잠깐 머물러 있는 것이고, 잠시 후면 본향을 향해 떠나야 할 자들이다. 그러기에 늘 떠날 채비를 하며 살 수밖에 없다.
또한 성도는 내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행하심에 모든 것을 기대하는 자이다. 따라서 내가 무슨 잘못을 했든, 혹은 무슨 잘한 일이 있든 그것에는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내 행위로 하늘나라에 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형벌 받으시고 우리를 죄 가운데서 용서하셨다는 신호로 부활하신 그분의 행하심에 모든 관심과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다.
믿음은 땅의 것을 기대하고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 신령한 것,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것들을 믿는 것이다. 만약 땅의 것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는 자가 있다면 그 믿음은 거짓 믿음이며, 그 신앙은 우상을 향한 신앙이다.
오늘 본문 1,2절 말씀을 보면, 소발이 온통 “내 생각, 내 중심, 나를 부끄럽게 하는 책망, 나의 슬기로움 마음” 등등의 표현으로 오로지 관심이 자기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음을 본다. 그러니 이런 자들은 자기 만족, 자기 행복, 자기 명예 이런 것들에 얽매여 살아간다. 이런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육신에 속한 자이기에 육신의 일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먹고 마시고 즐기는 땅의 것을 의지하며 산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 나는 땅의 일에 관심을 기울이는 자인가, 하늘나라에 기대와 소망을 두고 사는 자인가? 또 나는 내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며 사는가, 아니면 주님의 행하심에 관심과 희망을 갖고 사는가?
주님의 십자가 지심 때문에 모든 것이 성취되었음을 믿는 자들은 자기 행위에 크게 관심 기울이지 않는다. 또 주님과 더불어 사는 삶을 영생으로 아는 자들은 이 세상 일에 몰두하며 희로애락에 빠지지 않는다.
성도는 세상 풍파가 닥쳐도 염려할 필요가 없는 자들이다. 그들에게는 세상 환경과 무관하게 그들의 손을 붙잡고 인도하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세상은 변해도 십자가 피의 효력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바뀌고 변해도 주님은 영원히 동일하신 분이다.
욥기 21:1-34절
계속되는 친구들의 공격에 대해 분노하며 힘겨운 저항을 하고 있는 욥이지만 그들 주장 전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죄인이란 사실이나, 하나님 앞에 그 어떤 인간도 의로울 수 없다는 등의 주장에 대해서는 욥도 수긍한다. 그러나 욥이 끝까지 양보 못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죄 없이 망한 자가 없는 것처럼, 욥 너도 죄악 때문에 이런 형벌이 왔다’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해 욥은 본문에서 강하게 반론을 전개하고 있다. 악인들이 망한다고 하는데 욥이 보기에는 망하기는커녕 이 땅에서 얼마든지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어찌하여 악인이 살고 수를 누리고 세력이 강하냐 씨가 그들의 앞에서 그들과 함께 굳게 서고 자손이 그들의 목전에서 그러하구나 그 집이 평안하여 두려움이 없고 하나님의 매가 그 위에 임하지 아니하며 그 수소는 영락없이 새끼를 배게 하고 그 암소는 새끼를 낳고 낙태하지 않는구나”(7-10절) 라고 하면서 친구들의 주장이 틀렸음을 항변하고 있다.
이렇게 반론을 펴 보지만 친구들을 설득하고 이해시킬 속 시원한 해답을 내 놓지 못하는 것 때문에 욥 자신도 너무나 답답하다. 분명히 죄 때문에 자신이 고난 받는 것은 아닌데 그렇다면 왜 다른 친구들이 받지 않는 고난을 욥 자신이 받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욥 자신도 이유를 모르기 때문이다.
친구들의 주장처럼 하나님께 죄를 범해서 고난이 왔다고 하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그 이유는 과거나 현재나 자신의 하나님을 향한 마음에는 별반 차이가 없고, 과거의 자기 삶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자신의 입장에서는 느닷없는 고난이요, 갑작스런 환란이 닥쳐온 것이다. 그러기에 욥의 고난은 분명 이 세상에서 그 이유와 원인을 찾을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왜 본인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이런 아픔을 주시는 것일까? 욥이 그런 고난을 받을 짓을 하지 않았는데 그런 고난을 주셨다면 그 고난을 안기신 분이 부당하단 말인데 이것은 어떻게 해명할 수 있겠는가? 사실 욥기는 이 부분이 너무도 중요한 대목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만 욥이 당하는 고난은 이 땅에서 그 원인을 규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여주는 차원에서 동원된 자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욥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선택된 자인데, 그가 이유를 알지 못한 채 고난당하듯 장차 오실 메시야도 이유 없는 억울한 고난을 당하신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의 고난을 미리 보여주기 위해 욥을 선택하셨고 욥이 지금 당하는 고난은 장차 오실 메시야의 모습을 담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해 보라.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았고, 아무 죄도 없이 죄인들의 손에 죽임 당했다. 즉 죽을죄가 없음에도 죽임 당한 것이다. 이런 억울한 고난을 욥은 미리 앞당겨 보여주고 있다.
성경에 나타난 여러 인물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을 설명하고 보여주는 일을 위해 동원되는데, 다윗 같은 인물을 예로 든다면 그는 장차 오실 참 이스라엘의 왕 예수님을 보여주는 사명을 위해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장되었다. 그는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져 하나님께 사랑을 입음으로 온 백성이 은혜를 누리고(삼하7장 참조), 반대로 그가 하나님 앞에 범죄 함으로 온 백성이 고난당하는(삼하 24장 참조)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15:22)는 말씀을 기억하는가? 이와 같이 인간 아담은 죄인의 운명을 보여주는 자로 뽑힌 것이고,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살리는 사역을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이 땅의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그 스스로의 목적이나 이유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는 도구들이다. 이 말은 인간이 인간 스스로의 만족과 기쁨을 추구하며 산다는 것이 잘못된 생각이란 것이다. 지상의 그 어떤 인간도 자기 행복을 위해 피조된 것이 아니다.
욥이나 그의 친구들, 그리고 우리 자신들까지도 스스로의 기쁨을 생의 목표로 해서는 아니 된다. 피조물의 존재 이유는 창조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기쁘시게 하는데 있다. 이런 사실을 바로 알 때 비로소 성도는 자기 위치에 서 있는 것이다. 만약 내 목적과 평안을 위해 다른 모든 것들이 있어야 하는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면 그 때부터는 모든 것이 뒤죽박죽 혼란할 뿐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중심에 놓고 모든 것을 바라 볼 때 모든 문제는 풀린다. 그분의 뜻에 따라 모든 것이 지어졌고, 그분의 목적하신 바에 따라 모든 것이 운행되고, 그분의 예정하심에 따라 모든 것이 결론난다. 이보다 더 분명한 진실은 없다.
욥기 22:1-30절
엘리바스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주장이 펼쳐지고 있는데, 그 내용을 간추리면 ‘욥 네가 아무리 의롭다고 한들 그것이 하나님보시기에 완전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너를 책망하시는 것이 너의 경건함 때문이겠느냐? 결코 아닐 것이다. 너는 스스로 착한 척하지만 가난한 형제를 괴롭혔고, 고아와 과부를 학대했고, 그리고 권세 있는 자에게는 네 땅을 제공해서 살게 하지 않았느냐? 이러했기 때문에 지금 너는 두려움 속에 빠져 있고, 공포의 홍수에 뒤덮여 있는 것이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욥의 친구들이 주장하는 내용을 보면 한결같이 모든 문제의 원인을 땅에서 찾고 있고, 또 땅에 대한 관심으로만 채워져 있다. 그래서 하나님마저도 인간들이 사는 땅 위의 문제에 매여 있는 분으로 생각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 세상만물이 움직여지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 모든 피조물을 이끌고 계시다는 생각은 꿈에도 못하고 있다. 그래서 욥의 고난을 이해함에 있어서도 그의 범죄로 말미암아 형벌이 주어졌기에 그 문제를 해결하면 다시 평강이 찾아들고 축복을 누릴 수 있다는 식의 주장만 펼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들이 죄인이란 사실을 전혀 감지하지 못한데서 나온 발상이다. 인간은 죄를 범해서 죄인이 아니라, 예초부터 죄인이기에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자들이다. 이런 기본적인 사실을 알지 못했기에 추상적인 하나님을 믿고 있었고, 인간 중심적인 생각으로 모든 문제를 접근하고 해결하려고 한다.
인간들의 생각은 우리 스스로의 행동을 통해 행, 불행이 결정된다고 믿는다.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가 어느 정도 악한가, 혹은 선한가에 따라 그에 합당한 형벌이나 축복을 주시는 공정한 심판자일 뿐이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발상 아닌가? 감히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우리 목적과 만족을 위해 이용하고 있다니 이보다 더 교만하고 불충한 일이 있겠는가? 이럴 바에야 차라리 하나님을 없는 분으로 취급함이 더 낫지 않겠는가?
자기중심에서 단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불행한 인간들의 모습을 욥기를 통해 바라본다. 어떤 일이 벌어지고, 무슨 일을 해도 그 모두는 나의 행복과 즐거움으로 귀결되어야 한다. 내 만족, 내 기쁨이 아닌 다른 이유 때문에 어떤 사건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자들이 바로 우리들이다. 내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면 그것은 섭섭하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과 동시에 나에게도 영광이 되는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어야 그것이 정당한 것이라고 여긴다.
이런 사고의 틀 속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으니 어찌 욥이 당하는 이유 없는 고난을 바로 해석할 수 있겠는가?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자기중심적 사고에 빠져있는 자들은 늘 하나님을 생각해도 자신에게 은총과 사랑으로 복을 주시는 하나님만 생각하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이 헌신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추호도 할 수 없다. 그래서 내 생각대로 일이 안 될 때 원망하고 불평할 뿐 범사에 감사하는 삶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죄인들은 어쩔 수 없다. 늘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생각뿐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마저도 하나님을 이용해서 이득을 얻고자 하는 생각에서 하나님을 찾지 하나님 영광 위해 내가 죽어도 좋다는 생각을 하는 자들은 없다. 이런 인간들이 감히 천국을 소망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정말 우리들과 천국은 너무도 무관한 다른 동네의 이야기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라고 단정적으로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은 다 지옥으로 떨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다음 구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24절).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죄인인 우리는 안 된다. 형벌 받아야 마땅하고, 멸망해야 마땅하고, 지옥 가야 하는 자들이다. 고난당하는 것에 대해 억울해 하거나, 내가 원하는 일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불평할 그런 존재가 못된다.
이렇게 우리 자신의 처지를 바로 알 때,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이 은혜와 크신 사랑으로 다가온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6:9)고 말씀하셨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생각은 꿈에도 할 수 없는 자들이다. 그런데 그 뒤 11절 말씀에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고 하신다.
잊지 말고 기억하자. 인간은 안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뜻대로 다 이루시는 분이다.
욥기 23:1-17절
욥은 자기 스스로를 평가하면서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11-12절) 라고 했다.
이 정도로 욥은 자신이 철저히 신앙 생활했고, 스스로를 아무리 돌이켜 보아도 크게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잘못된 길로 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말씀 사모하기를 음식을 먹는 것보다 더 좋아했다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현재 자신이 겪고 있는 일이 너무 부당하고 억울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자신이 무엇 때문에 완악한 죄인이나 받을 고통과 아픔을 당하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고, 자신이 당하는 재앙이 너무 중해 견디기 힘들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만나 시시비비를 가리고 자신에게 닥친 고난에 대한 명확한 이유를 밝히 알기를 원했다.
그러나 이런 욥의 마음을 하나님이 아는지 모르는지 전혀 욥을 만나주지 않으시고 묵묵부답이시다. 그래서 욥은 더더욱 답답해하고 참기 어려워 부르짖고 있다.
자! 그렇다면 ‘내가 나 스스로를 평가하는 것이 과연 하나님보시기에 정당한 것인가?’ 하는 문제부터 따져 보자. 욥은 분명히 다른 사람과 비교했을 때 자신은 그 누구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한 사람이었고, 그의 삶 자체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바른 길로 걷기를 무던히 애썼고, 특별히 어그러진 길로 행치 않았다.
이런 자신의 삶에 대해 많은 이웃들이 칭찬했고, 하나님마저 축복해 주셨다. 그래서 모든 이들의 존경과 부러움을 사며 행복하고 풍족한 아쉬울 것 없는 생을 보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자녀의 죽음과, 질병과 가난이 찾아 왔는가?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욥이 크게 착각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욥 본인이 자신을 평가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그 평가에 동의하는가 하는 점을 미처 생각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과연 하나님도 욥의 삶을 욥 스스로 자랑스러워하듯 그렇게 여기고 계시는가?
물론 욥이 당하는 고난 문제가 ‘욥이 옳으냐, 그렇지 못하냐’ 하는 문제에 초점이 맞춰져서는 아니 된다. 그러나 여하간 욥 스스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정당한 신앙인으로 여기고 있으니 이 점을 따져보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평가하면서 욥처럼 이런 생각에 빠져 있지는 아니한가? 물론 나 스스로를 완벽한 인간이라거나 혹은 하나님께 당연히 복을 받을 자라는 그런 생각을 감히 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늘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이며 살아가고, 신앙인으로서 불신자들과는 다른 구별된 삶을 살기 위해 나름대로 힘쓰고 있다. 주일이면 만사 제쳐두고 예배드리기 위해 교회에 가고,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해도 연보하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고 있다. 이런 내가 욥처럼 가정이 파탄 나고, 재산이 소멸되고, 질병까지 찾아왔다면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만약 이런 상황이 닥친다면 우리도 스스로를 평가하면서 ‘내가 하나님께 이런 대우를 받을 만큼 크게 잘못한 것이 무엇인가?’ 생각하며 억울해 하고, 분통을 터트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크나큰 오해에 빠지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에 따라 복을 주시고 심판하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다. 만약 하나님이 이런 하나님이라면 정말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다.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께 복 받을 행위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행위를 자랑스러워 할 수 있으나 불꽃같은 눈으로 감찰하시는 여호와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 모두가 허물과 죄악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를 평가하시는가? 이 점이 본문을 이해하는데 너무도 중요한 대목이다. 그분은 우리들의 행위에 따라 우리를 심판하고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아들을 희생을 통해 자기 백성을 평가하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욥기 식으로 말한다면 욥이 은혜를 받고 살아가는 것은 욥의 선행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과 그 허물을 사하시는 용서에 근거한 은총이다. 이 사실을 바로 알 때 성도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 있다.
욥의 상황에서 이야기한다면, 그가 극심한 고통과 아픔을 당하고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 사랑인데, 이를 통해 자신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고 하나님이 하시는 깊은 뜻을 만방에 전하는 기회로 삼으시는 그분의 일하심임을 믿고 그저 감사, 찬양해야 한다.
욥기 24:1-25절
욥은 자기의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의 정당함을 부르짖고 있는데, 문제는 그런 외침이 결국은 자신을 그런 처지로 만드신 하나님을 불의한 자로 몰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하나님께서 악인을 심판하는 날을 정하지 않으시므로 계속 악인이 득세하고, 반대로 공의를 믿고 바르게 살아가는 자신은 낙심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욥의 말처럼 세상은 요지경이다. “사람들이 지계표를 옮기며 양떼를 빼앗아 기르며 고아의 나귀를 몰아가며 과부의 소를 볼모잡으며 빈궁한 자를 길에서 몰아내”(2-4절)는 그런 세상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이 그 불의를 보지 아니하시”(12절)고 그냥 내버려 두신다는 것이다.
과연 욥의 주장처럼 하나님이 불의한 자인가? 악한 자는 형통하게 내버려두시고, 오히려 정직하게 바로 사는 자들을 환란과 고통 속에 방치하고 계신가?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짧게 보면 욥처럼 그렇게 보여 질 수 있겠지만 좀 더 멀리 본다면 결코 그렇게 될 수 없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공의대로 판단하시는 분이며 악한 자들에게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심판을 내리신다. 비록 그 때가 인간이 원하는 그런 때가 아닐 수는 있지만 결코 불의에 대한 심판을 외면하시는 하나님은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욥이 가진 선악의 기준이 전혀 하나님께서 제시하는 기준과 다르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욥은 인간의 행실을 근거로 해서 선과 악을 판별하고 있다. 즉 고통 받는 사람들을 돕고, 약한 자를 보살피는 등의 삶을 사는 의롭고 선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약자의 것을 빼앗고 남의 것을 훔쳐 자기 소유로 삼는 등 불의한 행동을 하는 악한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 이전에 태생 자체가 불의 가운데서 출생하기에 그들이 하는 모든 짓들이 악한 것이며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그 무엇 하나 하나님이 인정할 만한 거룩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인간들이야 자신들의 행동을 선과 악으로 구분지어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인간 자체를 악으로 간주한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하나님이 세우신 기준에 의해 평가를 내린다면 ‘지계표를 옮기며 양떼를 빼앗아 기르며 고아의 나귀를 몰아가는 자’들만 악한 자가 아니라, 가난한 자들을 돌보고 자신의 것을 고아와 과부에게 나눠주는 자들 역시 악한 자들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은 인간 자체를 악으로 간주하시기에 그렇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욥이 그렇게 미워하고, 하나님이 왜 심판 날을 정하셔서 빨리 그들을 멸하지 않으시는가 하는 자들 속에 욥 자신도 포함되어야 한다. 욥 본인은 스스로 자신의 말과 행동이 정직하고 합당한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내 말을 거짓되다 지적하거나 내 말이 헛되다 변박할 자 누구랴”(25절)고 큰 소리 치고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보지 않으신다. 우리는 아무리 우리의 정당함을 변호해도 심판주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시니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세상의 모든 것들을 인간의 행위를 근거로 해서 판단해서는 아니 된다. 욥이 자신이 당한 환경에 대해 불만을 갖고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잘못된 근거에서 판단했기 때문이다. 만약 욥이 참 하나님을 알고,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깨닫는다면 이런 식의 판단으로 하나님에 대해 불평하고 원망하는 대신 오히려 감사와 찬양을 드렸을 것이다.
자신은 마땅히 죽을 죄인이지만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그를 들어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 계신 것에 대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주님인지 말로 다할 수 없는 감격과 기쁨으로 자신에게 닥친 일을 받아들일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행동 여하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5:6)는 말씀처럼 여전히 죄악 가운데 있고, 허물과 죄로 살아가지만 오직 그분의 약속에 따라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의롭게 만드시고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는 그런 사랑이다.
만약 우리의 행위에 따라 심판하신다면 어떤 인간도 살아남을 수 없다. 모든 인간은 불의한 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사랑을 근거로 우리를 용납하시고 의롭다 칭하신다. 이 새로운 하나님의 독특한 기준에 의해서만 죄인인 우리에게는 유일한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는 이 새로운 기준 십자가의 도를 자랑하고 찬양하고 감사하며 사는 자이다.
욥기 25:1-5절
욥이 자신의 정당성을 강하게 변호한 나머지 하나님을 불의한 자로 몰아가는 것에 대해 분노를 느낀 빌닷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욥에 대한 공격의 화살을 날려 보낸다.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서서 감히 의롭다고 주장할 수 있으며 여인에게서 난 자가 어떻게 깨끗할 수 있는가”(4절)라고.
본문은 비록 짧으나 인간의 본 모습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하고, 한편으로 하나님에 대해 많은 것을 상고해 볼 수 있는 구절들이다.
“하나님은 권능과 위엄을 가지셨으며 하늘나라를 평화로 다스리는 분이시다. 그가 거느리고 있는 천사의 무리를 누가 감히 셀 수 있으며 하나님의 빛을 받지 않는 자가 세상에 어디 있는가”(2-3절)라는 구절에서 느낄 수 있듯, 정말 하나님은 인간의 두뇌로 측정하거나 한계를 정할 수 없는 엄청나게 큰 분이시다.
또 세상 만물의 창조주시요 당신의 뜻에 따라 직접 모든 것들을 주관하고 계신다. 여기에는 자신이 부리는 천사들을 동원해서 자신의 손이 미치지 않는 부분이 없도록 세세히 살피시고 이끌어 가신다.
바다의 고기가 몇 마리나 되는지 우리는 감히 예측도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그들 모두를 먹이시고 살리신다. 또 지상에 얼마나 많은 생명체들이 존재하는지 우리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으나 그 많은 것들을 일일이 보살피시고 움직여 가신다. 우주만물의 모든 것을 장악하셔서 자신의 뜻에 따라 이끄시는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도 하나님이 허락지 아니하시면 불가능하고, 우리의 머리털까지 다 세시는(마10:29-30) 하나님이 어찌 인간들의 삶에 관여하지 않으실 수 있겠는가? 내 몸에 질병이 찾아오고, 우리 가정에 우환이 닥치고, 우리나라에 경제적 위기가 닥치는 등등의 일이 어찌 하나님의 간섭 없이 이뤄지겠는가?
우리가 보기에는 순수해 보이고 깨끗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라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런 모든 것들에서 티끌을 발견하시고 더러운 것을 찾으시는 분이다. 그런 하나님 앞에 어떤 인간이 감히 죄 없다 하고, 거룩한 생활을 했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인간은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으로 평가할 때 벌레와 구더기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는 존재들이다.
빌닷이 말하는 내용이 이상의 것들이다.
이것은 하나도 틀린 말이 없고, 누구도 이 말에 대해 시비를 걸 수 없는 것들이다. 참으로 크고 놀라우신 하나님. 이에 비해 지극히 나약하고 초라하며 보잘 것 없는 존재인 인간. 이런 인간들이 어찌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불평을 늘어놓으며 항의할 수 있겠는가?
또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자신의 계획과 뜻대로 이끌어 가시는데 인간이 자신이 고통스럽고 불편하다고 해서 불만을 터뜨리며 화를 낼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도무지 하나님 앞에 그럴 수 없는 자들이다.
수많은 피조물 중 하나인 우리는 그분의 은혜로 지금도 살아가고 있다. “땅에 있는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창8:22) 않고 지속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간섭하시고 섭리하심의 결과이다.
우리는 항상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들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그것들로 인해 감사도 하고 불평도 했었는데, 욥기를 묵상하면서 보다 깊은 주님의 사랑과 죄인 된 우리를 본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은 창조주시기에 모든 것을 주관하시기에 합당한 분으로 세상만사를 자기 뜻에 따라 움직여 가신다. 이 하나님의 일에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으며, 방해할 수도 없다. 그러기에 내 신상에 해가 오고, 내가 원치 않는 일들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께 시정을 요구하거나 불평을 토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놀라운 사실은, 내가 원하는 일이 이뤄지는 것보다 주께서 원하시는 일이 이뤄져야 하나님이 영광을 얻으시고 우리들도 진정한 평안을 찾게 된다. 내 뜻대로 이뤄져서 기뻐하는 것은 순간일 뿐이다. 그러나 주님의 뜻이 이뤄질 때는 영원한 감사와 찬양을 드리게 된다. 궁극적으로 모든 피조물은 주께 영광 돌리게 창조되었고, 영광 돌리는 그 자리가 평강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롬11:36)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그로 통해 영원히 영광을 누리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다.
욥기 26:1-14절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얻고자 하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이 차이 때문에 우상종교가 세워지고 하나님 아닌 우상을 섬기게 된다. 좀 더 각도를 달리해서 표현하자면, 인간은 참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일이 불가능하고 다만 하나님께서 자기 택한 백성에게 자신을 계시할 때만 하나님을 발견하고 신앙하게 된다.
따라서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지만 대부분은 거짓된 하나님이며, 우상에 지나지 않는다. 25장에서 빌닷이 욥을 향해 분노하면서 쏟아놓는 말들을 보면 자신은 하나님의 깊고 오묘함에 대해 잘 알고 있는데 욥은 전혀 모른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친구의 공격에 대해 26장에서 욥이 반격하면서 하는 말을 보면, 그 친구보다 더 깊고 심오한 하나님을 장황하세 설명하면서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 더 정확히 그리고 폭넓게 알고 있음을 과시한다.
그러나 이런 서로의 지식 과시가 결코 신앙으로 나아가는 주춧돌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이들은 온전한 하나님을 알고자 이런 논쟁을 펼침이 아니라 자신의 우월함을 상대에게 과시하고 그를 굴복시키고 싶은 마음에서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고 있을 뿐이다.
모든 인간들의 심성이 바로 이러하다. 끝없는 정복욕과 자기과시 그리고 상대를 굴복시키며 자신의 위상을 더 높이고자 하는 발상들이 그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아담의 후손이란 명백한 증거이다. 피조물의 자리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스스로 신이 되어 자기 뜻대로 하고 싶은 욕망. 그래서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죄인이다. 아무리 겸손을 가장하고 양보를 미덕으로 삼아도 궁극적으로 최후의 승자는 자신이기를 고대하고 있다.
이런 인간을 성경은 구제불능의 존재라고 말하고 있는데 몇 군데를 찾아보면, 예레미야 13:23에는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고 했고, 로마서 3:10-12에는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고 했고, 마태복음 14:19에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라고 했다.
이런 인간들이기에 구약 성경에서는 인간 자체를 부정하게 보는 구절들이 나온다. 예를 들면, 아이가 출생해도 부정한 것이고(레12:1), 사람이 죽어 시체가 되어도 부정한 것이고(민19:11), 남자들이 설정을 해도 부정한 것(레15:16)이고, 여인들이 생리를 해도 부정한 것(레15:19)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니까 인간의 총제적 부정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우리들이 어찌 감히 하나님을 상대할 수 있으며, 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무슨 자격으로 행복을 꿈꾸고 자기 정당성을 부르짖을 수 있는가? 욥은 스스로 하나님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큰소리 치고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하며, 그런 자신이 현재 당하고 있는 처사가 너무도 부당하기에 억울해 하고 있다. 이런 생각 자체가 죄인이란 증거가 아닌가?
인간이 인간을 대할 때는 상대적으로 내가 너보다 더 지식이 많고, 힘도 강하고, 윤리적으로 정당하다고 기세등등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절대자이신 주님 앞에서는 감히 우리는 비교대상조차 되지 못한다. 굳이 자신의 정확한 모습을 알고 싶다면 상대를 인간으로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습을 견줘보아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자신의 부정한 모습을 발견하고 되고, 이런 나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용납하시는 그분의 은혜와 사랑에 봉착하게 된다.
욥기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사랑을 발견해야 하는데, 그 사랑은 우선 욥이 지식적으로 알고 있는 그 하나님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가를 먼저 노출시키는 작업을 하신다. 욥뿐만 아니라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이런 작업이 선행된 후에 하나님은 참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신다. 그러기 전에는 아직은 숨어계신 하나님이고 본인이 스스로 자신을 계시하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하나님을 알 수 없기에 거짓 하나님을 말할 뿐이다.
하나님 스스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아무리 부지런히 공부하고 기도하고 열심히 신을 위해 봉사한다고 해도 그것이 계기가 되어 하나님을 만나지는 못한다. 그러기에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 외에는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다.
욥기 27:1-23절
로마서 10장 32절에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는 말씀이 있는데, 현재 욥의 태도가 그러하다. 그는 자기 정당함을 친구에게 나타내고자 하나님을 불의한 분으로 몰아가고 있는 실정이다.
욥은 하나님을 “나의 의를 빼앗으신 하나님”으로 말하고 있고, 또 “나의 영혼을 괴롭게 하신 전능자”라고 표현했다. 이런 표현들이 바로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는 어리석은 자의 모습 아닌가.
물론 욥 자신은 억울한 측면이 다분히 있을 것이다. 친구들의 비난처럼 가난한 자를 학대하지도 않았고, 고아나 과부를 멸시하지도 않았으며, 이웃에 대해 사랑을 베푸는 척하면서 이면에는 그들을 착취하는 그런 파렴치한 행위도 결코 없었다. 그러나 이런 행위들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자신이 의롭다고 주장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계속해서 욥이 자신에 대해 하는 말을 들어보자. 그는 스스로 이르기를 “결코 내 입술이 불의를 말하지 아니하며 내 혀가 궤휼을 발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결단코 너희를 옳다 하지 아니하겠고 죽기 전에는 나의 순전함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 내가 내 의를 굳게 잡고 놓지 아니하리니 일평생 내 마음이 나를 책망치 아니하리라”(4-6절)고 했다.
과연 어떤 인간이 정당하고 옳은 말만 하며, 순전한 마음으로 평생을 살 수 있겠는가? 또 자신을 책망치 않을 만큼 완벽하고 후회 없는 생을 보낼 자가 누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욥은 친구 앞에서 아주 자신만만한 태도로 큰소리 치고 있다. 이런 태도 자체가 교만한 짓이며, 불의한 행위이다. 지난 날도 떳떳하게 살았고, 그리고 앞으로도 결코 순전함을 잃지 않고 살겠다고 맹세하지만 지금 당장 그가 내뱉는 말이 옳은 말이 아님을 왜 모르는가?
자신의 의로움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자는 계속해서 자기 의를 쌓아가면서 스스로의 담을 높여간다. 이 담은 결코 스스로 무너뜨리지 않는다. 만약 자기 의를 허물려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목숨을 걸고 대항해서 싸울 것이다. 자기 의를 위해 날마다 새로운 지식을 쌓고, 그 지식을 기반으로 해서 열심히 선행을 하고, 또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마음으로 헌신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를 의로움으로 간주한 적이 없고, 그 행위를 바탕으로 하나님께 접근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셨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더러운 인간을 상종도 하실 수 없을 만큼 거룩하신 분이다. 그래서 범죄한 인간들을 자신이 계신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신 분이시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추방된 우리들이 무슨 재주로 하나님을 직접 만나겠다는 것인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은 차단되었고 지금도 천사들이 화염검을 들고 지키고 있는데 어떻게 그분께로 가려고 하는가?
우리는 욥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같은 인간으로서 동정이 가고 편들고 싶은 마음이 꿀떡같다. 그러나 누가 누구를 편든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잖은가. 아무리 욥이 불쌍하고 가슴 아픈 일을 당하고 도와주고 싶은 측은지심이 발한다 할지라도 그런 마음 때문에 그가 하나님께 용납되어야 한다거나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인간들은 늘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욥뿐만 아니라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창조주 하나님의 언약을 근거로 해서 모든 일이 펼쳐지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건만 우리는 계속 내 개인의 사적인 문제를 중심으로 해석하고 판단해서 결론을 내린다.
그러니 당연히 하나님 하시는 일이 못마땅해서 강하게 항변하고 싶고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막고 내 원하는 대로 일을 진행시키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욥이 “나의 의를 빼앗으신 하나님, 나의 영혼을 괴롭게 하신 전능자”란 말이 바로 그런 불만 가득한 마음의 표출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구제불능의 존재로 인식하지 않을 때가 종종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처음부터 영원히 가능성 없는 존재로 보신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잘못을 저지를 때는 불의한 존재로 인식하다가도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되는 일을 행할 때에는 자기도 의로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의로움을 더 많이 행하면 하나님도 용납해 주실 것이란 착각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결코 아니다. 인간이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길 만한 것들도 하나님보시기에는 불의한 것들에 불과하다. 그러니 더 이상 우리 행위를 근거로 한 하나님께 접근할 생각은 아예 포기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우리는 할 수 없기에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지 않았는가. 그분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이기에 우리는 그 아들의 용서를 덧입고, 그 아들 예수 안에 있을 때 자동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아들을 기뻐 받으시는 아버지 하나님이기에 우리는 그 아들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욥기 28:1-28절
욥은 친구들의 공격에 대해 반격을 가하면서 하나님에 대해서도 그리고 인간에 대해서도 친구들 보다는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음을 천명했다. 그러나 이런 지식으로도 풀리지 않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었다.
세상에서 귀하다고 하고 신비롭게 여기는 금, 은, 보석들은 땅 깊은 곳에서 찾아낼 수 있지만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서는 그 어디에서도 출처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에 의해 배울 수 있는 학문이나 세상살이에서 오는 경험도 하나님을 아는 것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단 말인가? 아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어찌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부분이 욥은 궁금해서 견딜 수 없고, 스스로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인간들의 상식으로는 악인들은 마땅히 벌을 받아 고통 중에 살아야 하고, 자신처럼 하나님을 섬기며 선하게 사는 자들은 당연히 주님의 사랑으로 은총을 입어 이 땅에서 이웃으로부터 존경받고 사랑을 받으며 풍족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지금 욥이 겪는 상황은 정 반대이니 말이다.
하나님은 욥과 같은 생각에 사로잡인 자들을 향해 외치고 계신다. “어리석은 인간들아 너희들이 알고 있는 상식선의 생각은 다 사단이 가져다준 거짓이야. 나는 결코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야. 너희들의 행위에 따라 내가 복도 주고 화도 준다고 생각하지? 이런 바보 같은 녀석들. 그래 너희들 생각처럼 내가 그런 식으로 대처한다 치자. 그렇다면 너희들 중 복 받을 인간이 과연 있겠니? 감히 이 땅에 태어난 그 누가 선을 행할 수 있단 말이니? 너희들은 스스로 선하다고 여기는 일이 있겠지만 하나님인 내가 보기에는 그 모두가 악한 짓이야. 그러니 너희들 생각처럼 선행을 하는 자에게 내가 복주고, 악을 행하는 자에게 화를 준다는 생각은 스스로 접는 게 좋을 걸. 나는 내가 은혜 주고 싶은 자에게 은혜를 주고 구원하고 싶은 자에게 구원하는 그런 하나님이야. 그리고 내가 용납하고 사랑하는 자들은 내 아들의 십자가 희생 때문에 내가 용납하고 받아들이는 거야. 내 아들의 희생이 아니면 그 누구도 내 앞에 설 수 없어.”
이런 하나님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꾸 내 식으로 하나님을 이해한다. ‘열심히 노력하고 힘쓰면 하나님도 기뻐하셔서 내 뜻대로 일을 성사시켜 주실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명하신 말씀을 잘 순종하면 그분도 내 원하는 바를 들어 주신다. 그래서 서로 주고 받으면 피차 좋은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인간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들을 순종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예를 들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7:13)고 하셨는데, 이 말씀을 우리가 순종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사람들은 흔히 생각하기를 ‘좁은 문’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자기 유익과 만족을 따라 살아가는데 이것을 ‘넓은 문’으로 여기고, 이런 삶 대신 희생하고, 헌신하고, 내 만족이 아닌 이웃의 기쁨을 위하고, 내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을 ‘좁은 문’으로 이해해서 그렇게 살아가려고 한다.
‘좁은 문’은 인간들이 바라고 소망하는 ‘넓은 문’과는 반대되는 개념이 맞다. 그러나 그런 곳으로 갈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는 전무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에 마치 우리가 힘쓰고 애쓰면 ‘좁은 문’으로 갈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사실 ‘좁은 문’은 이 땅에는 없다. 그러니 당연히 그 길을 찾아 그 길로 가는 일은 불가능한 것이다. 이 땅에는 없는 길이기에 우리는 갈 수 없다. 그런데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가 발생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런 길을 만드시고 자기 백성에게 그 길을 걷게 하실 때만 가능한 일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해서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홍해를 건너는 사건이 발생했다. 원래 홍해는 바다이기에 사람들이 걸어서 건널 수 없는 곳이다. 그런데 그 바다에 길을 만드시고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그 길을 걷게 하셨다. 이런 길이 바로 ‘좁은 길’이다.
“지혜는 어디서 오며 명철의 곳은 어디인고”(20절) 라고 욥은 묻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지혜나 명철은 세상 살아가는 방편으로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뜻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 되는 일이 결코 아니다. 다만 그분이 스스로 자신을 나타내 보여 주실 때(혹은 ‘좁은 길’을 마련하실 때)만 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하실 때 주를 경외할 수 있고, 악을 멀리할 수 있다. [“주를 경외함이 곧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라”(28절)]
욥기 29:1-25절
욥은 과거의 화려했던 시절을 추억하면서 그 시절의 아름다웠던 모습을 나열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현재의 비천한 처지에 대한 원망과 고통을 표출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만약 단순히 과거를 추억하는 것이라면 자신을 그런 풍성함 속에 살게 하신 하나님에 대해 감사할 수도 있을 텐데 욥은 지금 그런 마음이 아니다.
본인이 느끼는 과거는 특별히 하나님이 자신을 보호하시던 시절이었고, 전능자가 자신과 함께 계셨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그 시절에는 욥이 강장하던 날이었는데, 그 때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나열하면, 욥은 자녀들에 둘러싸여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경제적으로도 풍족하여 아쉬움 없이 소비할 수 있었고, 사회적으로도 존경과 칭송을 들으며 존귀한 자의 신분을 유지하며 살았다.
그리고 이처럼 이웃으로부터 존경받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욥 자신이 누구보다 더 헌신적으로 이웃을 향해 사랑을 베푼 결과였는데, 그는 “소경의 눈도 되고, 절뚝발이의 발도 되고, 빈궁한 자의 아비도 되며, 생소한 자의 일을 사실하여 주었으며 불의한 자의 어금니를 꺾고 그 잇사이에서 겁탈한 물건을 빼어내었다.”고 하지 않는가?
이처럼 모든 면에서 부족함이 없는 삶을 누렸던 욥은 그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임을 의심치 않고 믿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런 삶을 영위하다가 마지막 날에 주님의 부름을 받고 이 땅을 떠나 주님 품으로 안길 것을 확신했다.
이런 욥이 왜 갑자기 그 아름답던 모든 것을 한꺼번에 다 잃게 되었는가? 친구의 말처럼 이웃을 향해 불의한 이를 취했는가? 아니면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서 연약한 자를 억압했는가?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 숭배에 빠져 교만한 삶을 살았는가?
본문에서는 결코 그런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 그리고 욥의 말을 들어보아도 자신은 결코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과연 욥이 왜 이런 비참한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는가? 도대체 욥이 처한 현재 모습은 무슨 이유 때문에 발생한 것인가?
욥기를 읽으면서 늘 부닥치게 되는 한결같은 질문이 바로 이것인데, 해답을 알고 보면 우리가 가졌던 의문 자체가 우습고, 우리가 너무 하나님을 몰라서 어리석은 의문을 품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떤 인간도 하나님께 복 받을 자격은 없다. 그런데도 복을 누리게 되었다면 이것은 일방적은 주님의 긍휼과 사랑의 결과이다. 다시 말하건대 우리가 복 받을 만한 짓을 해서 복이 온 것이 아니란 사실이다.
그렇다면 비참한 처지에 이른 것에 대해 불평할 이유가 없다. 어차피 우리는 죄인이고 그 죄에 대한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것 아닌가? 죄인이 고통 받는 것이 뭐 그리 이상할 것이 있는가?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장 11-12절에서 이런 고백을 했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바울은 자신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말한다. 이것은 욥이 과거를 회상하며 현재를 비관하고 있는 심정과는 전혀 딴판이다. 그렇다면 바울의 현재 처지는 욥처럼 그 정도로 극심한 환경이 아니었기 때문에, 즉 참을만한 형편이기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만약 그런 식으로 이해한다면 크나큰 실수이다. 결코 바울의 처지가 욥보다 나은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환경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는 것은, 자신이 죄인중의 괴수인 사실을 깨달았고, 그런 죄인이기에 어떤 환경에 처해지든지 불평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자신에게 주님은 십자가 복음을 전할 사도로 부르셨다는 그 사실 한 가지만으로 만족하고 감사하고 있다. 형편이 어떠하든 복음만 전해지면 감지득지한 일이기 때문이다.
욥이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모두가 자기 영광, 만족, 기쁨으로 충만해 있다는 사실이다. 그 어디에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은 불신앙이다. 아니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상상한 우상 하나님을 섬긴 꼴이다.
욥이 생각한 이런 하나님은 없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에 대해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족케 하시는 분이 아니라 자기 영광을 취하시는 분이다. 그런데 이 하나님이 자기 영광을 위해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고, 자기 택한 백성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 지게 하시고, 그 일을 근거로 자기 백성의 죄를 사하셔서 의롭다 칭하시고 자기 품으로 부르시는 그런 하나님이다.
욥기 30:1-31절
죄인들의 기본적인 심성 중에는 나보다 나은 사람에 대해서는 시기하고 나보다 못한 자들에 대해서는 멸시하는 것이 들어 있다. 그러면서도 나보다 나은 사람이 나를 멸시하는 것에 대해서는 적의를 나타내며 불쾌해 하고.
그러니까 이중적은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나는 나보다 못한 자에 대해 경멸하면서 나보다 나은 자가 나를 경멸하는 것에 대해서는 용납하지 못하는 이러한 마음가짐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본문에 나타난 욥도 이런 범주의 사람이다. 그가 과거 평안하고 모든 것이 풍족할 때에는 자신이 남들을 멸시하거나 비하하는 말을 하지 않았을지 모르나 막상 곤궁에 처하고 고통 중에 있으니 은근히 본색이 드러나 자신을 조롱하는 젊은이들을 향한 경멸의 태도를 여지없이 드러낸다.
즉 힘없고,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자들을 향해 “나의 양떼 지키는 개 중에도 둘만하지 못한 자”(1절)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내뱉고 있다. 이런 표현은 과히 극언이라 할 만하다. 어떻게 사람을 자기 집 개만도 못한 자로 취급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타인으로부터 멸시당하는 것이 아픔이고 고통이라면 남들도 똑같은 심정일 것이다. 어느 누가 멸시당하는 일을 즐기겠는가? 그렇다면 함부로 남을 조롱하는 태도는 적절치 못한 것이다. 이것은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보아도 적절치 못한 것이요, 또 자신의 처지를 제대로 알 때도 부당한 짓이다.
남을 비하하기 전에 내 모습을 보자. 그럴 때에 감히 함부로 남 이야기 할 처지가 못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7:3)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의 어리석음이 바로 이와 같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짐승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자들이다. 아니 짐승보다 더 악랄한 존재들이다. 짐승들이야 제 배가 부르면 더 이상 탐내지 않는데 인간들은 제 배가 부른 것으로 족하지 못하고 미래의 먹을 것까지를 생각하느라, 남이 배고픈 것에 아랑곳 하지 않는다. 이런 인간이기에 남을 경멸할 위치에 있지도 않고, 설사 내가 멸시를 받는다 할지라도 불평할 입장도 못되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당연히 멸시받아 마땅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욥은 자신을 조롱하는 자들을 향해 엄청난 독설을 퍼부으면서 이런 자신의 현재 처지를 굉장히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경제적 빈곤이나 육체적 질병이 고통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나, 이보다 더한 고통은 이웃으로부터 멸시를 당하고 비천히 여김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처지로 몰아넣으신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만이 가득 차 있다. ‘나는 과거 곤경에 처하고 어려움에 빠진 자들을 보았을 때 도움의 손길을 보냈는데, 정작 내가 고통 중에 처하게 되니 아무도 내게 도움을 주는 이 없고, 심어지는 하나님마저도 침묵하고 계시니 어찌 이럴 수 있는가’ 하고 불평을 터뜨리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몇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먼저는 “왜 외형을 보면서 남들을 깔보는 마음을 갖는가?” 하는 점이다. 가난이, 혹은 무지가, 또는 나약함이 멸시의 조건인가? 만약 그러하다면 스스로 멸시받지 않기 위해 부자가 되어야 하고, 많은 지식을 쌓아야 하고, 권력의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모두가 그렇게 될 수는 없는 법이니 그런 것으로 상대를 평가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둘째로는 “왜 내 처지를 정확히 바라보지 못하는가?” 하는 점이다. 만약 내 처지를 제대로 파악했다면 함부로 남을 평가하는 일을 자제하게 될 것이다. 내가 교만에 가득 차 있고, 허물투성이인데 남의 허물을 거론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 아닌가?
셋째로 “하나님의 사랑은 이처럼 죄악으로 가득한 나를 무조건 용납하시는 사랑이다.” 라는 점이다. 욥이 남들에게 조롱을 당하고 있는 지금도 사랑하고 계시고, 과거 남들로부터 존경과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있을 때도 하나님의 사랑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 이것은 모든 것을 용납하시고 사랑하신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 때문이지 욥의 태도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다.
만약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을 깨달았다면 더 이상 세상 환경을 가지고 나를 평가하고, 남을 평가하고, 하나님을 저울질 하는 어리석음을 그만두자. 그분의 사랑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고, 그 아들의 십자가 희생은 영원한 효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랑은 나뿐 아니라 그분이 원하시는 내 이웃에게도 공히 펼쳐지는 사랑이다.
따라서 이웃을 대할 때도 세상의 조건이나, 물질의 유무, 기타 이 땅의 것으로 대할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사랑 안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는 그런 안목이 되어야 바른 것이다. 내가 십자가를 근거로 주님 앞에 용납되었듯이 남들도 그런 관점으로 대해야 한다는 말이다.
욥기 31:1-40절
인간은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자기 의를 버리지 못한다. 이 말은 자신의 노력이나 지혜로 이룬 것이라면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의미를 부여하고 값진 것으로 간주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평생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흔적 남기기(의 쌓기)에 온 정열을 쏟는 것이 인생이다.
또 이런 노력의 자취에 근거해서 행복이 오고, 천국을 갈 수 있는 기준이 마련되고, 신으로부터 내리는 은총도 챙길 수 있다고 믿는다. 이것이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신 관념이고, 축복 개념이다.
따라서 모든 이들의 행위는 이런 자기 행복을 위한 씨 뿌림이며 그것을 통한 욕망 챙기기인데, 본문에 등장하는 욥이라는 사람도 예외가 아니다. 그는 자신의 만족과 행복을 위해 부지런히 그리고 착하게 살았다. 가난한 이웃에게는 의복과 음식물을 제공했고, 외로운 이웃에게는 따뜻한 친구가 되어 주었으며, 고통과 실의에 빠진 자에게는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스스로의 삶을 절제하며 남에게 피해를 입히는 행동을 자제했다. 즉 여인을 탐하지 않았으며, 남을 속여 이득을 취하지 않았고, 비록 자신이 거느리는 종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요청을 경청했고, 하나님 아닌 우상을 섬기지도 않았고, 세상 물질에 취해 살아가지도 않았다.
이런 철저한 섬김과 봉사와 절제의 삶을 살았기에 그는 누구보다 더 많은 은총과 복을 누리는 것이 당연하고, 이웃으로부터 칭찬과 사랑을 받는 것이 합당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런 사고방식은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무지의 소치이다. 죄인은 어떤 행동을 해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다 죄다. 그래서 스스로 쌓는 행위들이 몽땅 불의한 것이며 칭찬의 대상이 아니라 책망의 대상일 뿐이다. 그러니 무슨 행위를 얼마나 했는가에 따라 스스로의 은총 분량이 정해진다고 착각하는 자들은 교만의 극치를 달리는 것이며, 심판의 대상이 될 뿐이다.
끝까지 자기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인간들의 심성을 잘 아시는 주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 같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고. 이것은 무엇을 말씀하심인가? 너희들은 자꾸 행위를 거론하면서 그에 대한 보상을 기대하는데 이것은 터무니없는 짓이라는 말씀이다. 마치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을 제대로 만난 사람은 자기 행위를 자랑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자신의 모든 것들이 더럽고 추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이 내세우는 유일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이 십자가야 말로 자신의 허물을 정결케 하는 유일한 능력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모르는 자는 스스로의 행동을 자랑한다. 자신의 성실함과 지혜와 열심과 헌신과 봉사 등등을 내세우며 그것을 근거로 영생을 꿈꾼다. 그리고 이 땅에서의 행복도 같이 소망한다. 욥이 바로 이런 생각에 빠져 있었기에 스스로에게 닥친 불행에 대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자신의 의를 조목조목 나열하면서 이런 내가 왜 이렇게 부당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하나님께 시위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자신은 당연히 과거 풍성함과 강건함과 평안함을 누렸던 것이 정당하지 않았느냐는 식으로.
그동안 우리는 참으로 지루하리만치 다양한 인간들의 엉터리 신관, 축복관, 영생관을 살펴보았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참 뜻과는 동떨어진 인간들의 주장이었다. 하나같이 하늘의 일을 이 땅의 사건과 연결 짓고 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이 땅에서 근거를 찾는 자체가 어리석음 아닌가. 어찌 하늘의 일을 이 땅에서 근거를 찾으려 하는가?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 스스로의 계획과 목적에 따라 펼쳐질 뿐인데.
모든 것이 그분의 뜻대로만 이루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것을 그분께 의지할 뿐이며, 우리가 기대하고 소망하는 모든 것은 그분의 손에 달려있다. 은총이 그분에게서 오는 것이며, 죄와 허물의 씻음도 그분이 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주와 함께 영생하는 것도 그분의 용납하심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이래도 아직 내 행위를 내세울 것인가? 내 선행, 내 열심, 내 희생을 자랑하며 하나님을 협박할 셈인가? 이런 자들은 자신의 그 완악한 행위 때문에 영원한 심판을 면치 못한다. 그리고 이런 자들을 위해 주님은 지옥을 마련하셨다.
욥기 32:1-22절
지루하게 이어지던 욥과 그 친구들의 공방은 끝이 나고, 이제 이들의 주장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엘리후가 자기 의견을 제시하기 시작한다. 이 사람은 본인이 직접 고통에 처한 사람도 아니고, 또 어려움 당한 욥과 아는 사이도 아닌 것 같다. 그저 우연히 곁에서 구경삼아 지켜보고 있다가 개입한 제 3자의 모습이다.
그래서 그는 진작부터 이 논쟁에 끼어들고 싶었지만 그럴 처지가 못 되어 참고 기다렸다. 남의 논쟁에 전혀 낯선 사람이 개입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고, 또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은 자신에 비해 훨씬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어서 젊은 자신이 어른들 대화에 끼어든다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속 논쟁을 지켜보면서 전혀 해답을 빗나간 대화들을 그냥 묵과하고 넘어갈 수가 없어서 그들의 대화가 종식되는 시점을 틈타 개입하게 된 것이다.
엘리후는 욥과 욥의 친구들 모두에 대해 상당히 분노하고 있다. 그 이유는 욥은 스스로 의롭다고 우김으로 하나님을 불의한 자로 몰아가는 것에 대해 화가 치밀었고, 욥의 친구들에 대해 화가 난 것은 그들이 욥의 잘못된 주장에 대해 정확한 허점도 밝히지 못하면서 무조건 욥을 정죄하는 미숙한 태도에 대해 울화가 치밀어 오른 것이다.
앞으로 얼마만큼 엘리후가 욥이 당하는 고난에 대해 적절한 해석을 내리는지는 차츰 살펴보기로 하고, 왜 자기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의 논쟁에 개입하게 되었는가 하는 점부터 생각해 보자.
엘리후는 욥 일행이 나누는 대화를 지켜보면서 자신은 확실한 해답을 가지고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핵심을 비켜난 대화들이 한심하게 느껴졌고, 또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은 신앙인으로서는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불경스런 일이기에 비록 제 3자의 입장이지만 이 문제를 바로 잡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욥을 알지도 못하는 제 3자인 엘리후가 등장하는 것은 그가 해답을 알고 있어서가 아니라 인간들의 생각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다 끄집어내서 그들이 생각하는 전부가 다 하나님의 진리와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고발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진리는 인간의 상식으로 접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세상의 이치, 인간들 간의 예절, 자연의 법칙 이런 것들을 배우고 안다고 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이해하고 믿게 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 진리는 절대 인간의 지혜로 깨달아 알 수 없다고 했고, 그러기에 그는 말의 지혜로 복음을 전하지 아니한다고 했다. 십자가의 도는 사람들에게 한없이 어리석은 논리로 들려진다. 그러나 구원 얻을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가와 믿어지는 것이다. -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이처럼 주님의 자기 계시가 있기 전에는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지혜에 접근할 수 없다. 욥처럼 하나님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며 살아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욥의 친구들처럼 많은 것을 공부하고 삶을 통해 여러 가지를 경험한다고 해도 역시 마찬가지다. 또 엘리후처럼 스스로 지혜로운 척하고 젊은 감각으로 논리 정연한 이론을 가지고 있고, 감정이 개입되기 쉬운 당사자가 아닌 제 3자의 입장에서 아주 냉철하고 객관적으로 문제를 바라본다고 해도 그 역시 인간의 생각에 지나지 않을 뿐 하나님의 지혜에는 도달할 수 없다.
그러기에 우리는 더 이상 내 지혜를 의지할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인간의 지혜를 의지할 이유도 없다. 배웠다고 하고, 경험했다고 하고, 안다고 하는 자들의 그 지식들 모두가 하나님의 지혜에 접근하기에는 너무도 거리가 먼 것들이기 때문이다.
욥이 당하는 고난은 하나님에 의한 형벌도 아니요, 죄악의 결과로 닥쳐온 것도 아니다. 그는 다만 그리스도의 대신 당하는 고난을 앞서 보여주는 역할을 맡은 자일뿐이다. 그런데 아무도 이 사실을 알지 못했기에 다양한 이론과 잡다한 사설들을 늘어놓은 것이다.
모든 것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죄인들은 그렇게 보지 못하고 모두가 자기중심으로 사건을 바라본다. 그래서 욥의 문제를 접근하는 방식이 전혀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 짓지 못하고 단순히 표면적으로 드러난 고난을 어떤 방식으로 해결할까 하는 점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그러니 각자의 주장은 답도 없이 서로 공허한 이론들만 외쳐진 것이다.
세상 만물은 주를 위해 지어졌고, 주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러기에 주를 중심으로 보아야 한다. 이 사실을 명심하자.
욥기 33:1-33절
엘리바스가 욥을 향해 쏟아 놓는 발언을 보면 그 역시 인간 행위를 근거로 복과 저주를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즉 욥이 고난당하는 것은 그의 죄악 때문이란 세 친구들의 입장과 차이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세 친구와 엘리바스가 이 문제를 접근하는 방식은 차이가 나는데, 그 이유는 세 친구는 욥에 대해 잘 알고 있지만 엘리바스는 욥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입장에 있기에 구체적으로 욥의 잘못된 행위에 대해 지적하지는 못하고 대신 욥이 한 말에 대해 시비를 걸고 나온다. “욥 당신의 말을 들으니 ‘나는 깨끗하여 죄가 없고 허물이 없으며 불의도 없다’고 하는데 이런 말 자체가 네가 의롭지 못하다는 증거다.’(8-12절) 라는 식이다.
물론 엘리바스의 말처럼 욥이 스스로 죄가 없고 허물도 없다고 말하는 것은 틀림없는 오만이고 자신을 포장하고 미화시키는 거짓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문제는 욥이 죄가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니라 왜 욥이 당하는 고난을 굳이 죄와 연관시키는가 하는 점이다.
다른 세 친구에 비해 엘리바스의 주장이 일견 발전한 면이 없지 않아 있다. ‘대속물’을 거론(24절)하는 것을 보면 주님의 자기 백성을 대속하신 사랑을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그가 말한 대속물은 그리스도가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욥이 그동안 병들고, 재산을 잃고, 이웃으로부터 멸시와 조롱을 당하는 등의 일을 죄의 대가를 치른 것으로 간주한다는 차원에서 그런 것들을 대속물로 여기는 표현이다.
그러하다면 욥이나, 욥의 세 친구, 엘리바스 모두가 뭔가를 크게 오해해서 진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는 공동점이 있다. 이들 모두가 인간 행위를 출발점으로 하나님의 복과 저주를 인식하고 있고, 그러기에 욥이 당하는 고난에 대한 정확한 해석을 해 낼 재간이 없는 것이다.
원래 아담의 후손인 인간들은 하나님의 복과는 무관한 자들이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자들이기에 저주아래 놓여 있는 것이 인간들의 현실인데 그 누구도 이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니 당연히 주님의 일방적인 용서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대속물은 바로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 아들은 우리들의 죄를 대신하는 대속물이며, 그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죄가 사함 받았고, 그 일방적인 용서의 은혜로 멸망 받을 우리들이 은총과 사랑을 입게 되었다.
욥이 고난당하는 것은 우리의 대속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보여주는 역할 때문이다. 따라서 욥의 고난과 그의 죄악을 연결시키는 것은 전혀 잘못된 연결이다. 그러니까 우리들의 보편적인 죄관, 은혜관, 신관 이 모두는 사단이 심어준 인간 중심적인 사고에서 비롯된 잘못된 것들이다.
우리는 늘 내 중심적인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기에 주님의 은혜를 이해함에 있어서도 인과응보식 인식에 갇혀 있다. 이렇게 될 때 결국은 각자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게 되고 이렇게 되면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합작해서 뭔가를 이루는 식이 된다. 이것은 주님의 홀로 이루신 그 희생의 업적을 약화시키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한다.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의 힘을 빌려 자신의 목적을 성취시키는 그런 분이 아니시다. 성경을 보면 오히려 그 반대로 일하시는 분이다. 한 사건을 예를 들면, 기드온을 사사로 세워 미디안을 치게 하시는데, 이 때 미디안을 치러 갈 병사를 300명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집으로 돌려보내라고 하셨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자신들의 막강한 전력이 미디안을 쳐 승리했다고 할까봐 사전에 병력을 최소화 시킨 것이다(삿7:2 참조).
이렇게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을 위해 스스로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성취시키는 분이다. 다만 여기에 동원되는 인간들은 자신의 능력을 보태는 것으로 하나님의 일을 돕는 것이 아니라 주님 홀로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진행하여 이루신다는 사실을 똑똑히 보게 하셔서 주님 일하심의 목격자로 뽑아 세운 것 뿐이다.
제발 착각에서 깨어나자.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우리들을 용서하시고 받아주시는 분이지 우리의 행위를 근거로 움직이는 그런 분이 아니시다. 우리의 행한 대로 갚으신다면 그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는 자들이 우리들이다.
그러기에 어설픈 내 행위 자랑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행하심에 기대며 살자. 그분의 십자가 은혜를 감사하고 우리의 본래 자리를 깨달으며 살아가자. 이것이 진정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길이다. 내가 바른 행동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 희생으로 말미암은 용서와 사랑에 감복하는 자가 주를 기쁘게 하는 자이다.
욥기 34:1-37절
엘리후의 주장이 사람들의 보편적인 상식에 머물 뿐 결코 복음을 깨달은 자의 주장이 아니란 사실은 오늘 말씀에서도 여실이 증명되는데, 그의 잘못된 주장 두 가지만 오늘 말씀에서 찾고, 그것이 왜 틀린가를 생각해 보자.
첫째 그는 ‘입이 식물의 맛을 변별함 같이 귀가 말을 분변한다’(3절)고 하면서, 자신의 주장이 얼마나 타당한가를 평가해 달라고 한다.
이 말은 인간이 진리에 대한 분별력이 있어서 옳고 그름을 평가할 수 있다는 말인데 과연 그러한가? 만약 그러하다면 왜 많은 사람들이 참 진리의 말씀인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거부하는가? 엘리후가 지금 우리 곁에 있다면 당장 묻고 싶은 물음이다.
엘리후는 근본적으로 크게 착각하고 있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이 참과 거짓을 분별할 만한 지혜가 있다는 생각이다. 즉 인간의 가능성을 전제로 문제를 풀어가려 한다는 말이다.
이런 엘리후의 생각은 대부분 인간들의 생각이기도 하다. 진리를 논하고 거룩을 말할 때 그들은 항상 자신들이 의와 거룩을 이룰 수도 있고, 반대로 악과 불의를 저지를 수도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이런 사고방식이 바로 죄인이기에 나올 수밖에 없는 생각이란 사실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다. 인간은 날 때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존재로 태어난다. 즉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채 출생한다는 말이다. 이런 인간이기에 그들의 소행은 어릴 때부터 악하고 진리와는 거리가 멀다.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창8:21)는 말씀을 왜 하였겠는가? 인간에게는 선을 행할 가능성 자체를 부인하는 말씀이다. 그래서 죽었다 깨어나도 인간에게서 뭔가를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인간이기에 주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마13:13)고. 봐도 모르고, 들어도 모르는 인간들인데, 이들에게 “내 말을 들어보고 누가 옳은지 판단해 보라”는 말이 성립될 수 있는 말인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없거늘 지금 엘리후는 그런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
둘째로 그는 “사람의 일을 따라 보응하사 각각 그 행위대로 얻게 하시나니”(11절) 라고 했는데, 이 말은 ‘욥 네가 뭔가 잘못해서 벌을 받는 것이다’는 말이다. 착한 일을 했으면 복을 받을 것이고, 악한 짓을 했으면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한데 네가 고난을 당하는 것을 보면 틀림없이 악을 행했다는 뜻이다.
이것도 말이 안 되는 것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악을 행할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선을 행하면 복을 받는다는 말이 성립될 수 있는가? 도무지 진리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의 가능성을 배제하고 출발하신다. 그래서 우리의 지식이나 경험으로 진리에 접근하려는 생각 자체를 말아야 한다. 아니 우리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 못할 분이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은 우리 이성이 아닌 성령이 깨닫게 하셔야만 가능한 것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요6:56-57절)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을 인간의 이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어떤 특정인의 살과 피를 먹어야 한다는 것이 도무지 무슨 망발인가? 그러나 이것은 진리요, 생명의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지 아니하면 죽는다. 반대로 먹는 자는 영원히 산다.
이런 말씀은 엘리후의 주장처럼 귀가 말을 분변해서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성령이 오셔야만 진리의 말씀을 분별할 수 있다.
주님은 우리의 행한 대로 갚으시는 분이 아니라 자신의 십자가 피를 보고 우리를 대하시는 분이시다. 즉 십자가 피로 용서받은 자는 복이 임하고, 그 피가 없는 자는 저주인 것이다. 이것은 인간 이성이 아닌 성령이 임한 자가 깨닫는 진리이다.
욥기 35:1-16절
복음이란 온통 예수님께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고, 복음이 아닌 것은 예수님 외에 다른 것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욥은 지금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일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있고, 그런 가운데 왜 자신이 이런 고통과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지, 그리고 언제까지 이런 아픔이 계속될지, 또 이런 억울한 문제를 어떤 방법으로 해결할지 등의 문제에 집착해 있다.
하기야 어떤 인간이 욥과 같은 처지에 이르게 된다면 이와 같은 생각에 빠져들지 않겠는가만 여하간 이렇게 자기 문제에 집착하는 것은 복음을 아는 자의 태도가 아니며, 진리를 깨달은 자의 자세는 분명 아니다.
엘리후의 표현을 빌리자면 욥은 ‘내가 아무리 의롭게 살아도 범죄한 자보다 유익한 것이 무엇인가’(2-3절) 하면서 자신의 처지에 대해 비관하고 있는데,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를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내가 의를 행했으니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복이 떨어져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하나님과 흥정하는 태도이다. 마치 장사꾼들이 물건을 서로 주고받는 거래를 하는 것처럼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을 대하면서 ‘주님 내가 이런 것을 하나님께 드렸으니 주님은 저에게 뭘 주시겠습니까?’하는 식이 아닌가?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생애를 표현하면서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딤후4:6)라고 했다. 이 말은 자신의 삶을 구약의 제사제도를 비유해서 나타낸 구절인데, 관제(전제)는 번제를 드릴 때 그 제물의 크기에 따라 일정한 양의 포도주 혹은 독주를 부어 드리는 것으로(민28-29장 참조) 바울은 자신의 생애를 이렇게 온전히 부어져서 한 방울도 남김없이 완전히 없어져버리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렇게 내가 주님을 위해 희생했으니 무엇을 주세요’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딤후4:8) 되었다고 하면서 빨리 이 세상 삶을 끝내고 주님 품에 안겨 주님과 더불어 사는 것을 소망하고 있다.
욥처럼 몸이 병들고, 억울함을 당하고, 가족과 친구 그리고 이웃 모든 이들로부터 외면당해도 그에게 참 복음은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나, 억울함을 푸는 일이나,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복음이다.
엘리후는 욥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그들이 악인의 교만을 인하여 거기서 부르짖으나 응답하는 자가 없음은 헛된 부르짖음은 하나님이 결코 듣지 아니하시며 전능자가 돌아보지 아니하심이라”(12-13절)고.
이 말은 교만을 버리고 겸손한 성품을 가지고 기도해야 하나님이 응답하시는데 너는 계속 교만을 버리지 않고 있으니 하나님이 너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는 말이다.
얼른 생각하면 맞는 말인 것 같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보라. 하나님은 인간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 그분은 자기 아들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고 응답하신다. 그러니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는 것은 그 아들 예수 안에서 간구할 때만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성도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그분의 십자가 공로를 의지해서 아버지께 나아간다.
교회는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을 아는 자들의 모임이다. 그래서 교회에 모인 성도는 온통 예수에 관심을 기울이고 예수 이야기로 꽃피운다. 마치 요즘 유행하는 유명인들의 팬클럽처럼. 팬클럽 회원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그 스타에게 열광한다. 그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그 스타에게 집중하고 그의 말이나 행동 모두에 대해 경탄해 마지않는다.
야고보서 2장 1절에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라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은 믿음이 인간의 노력이나 열심 혹은 지식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받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다. 이 선물을 받은 자들은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안다.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는 것이며, 우리가 아무리 찾고 구해도 도무지 얻을 수 없는 보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선물을 받은 자들은 그 주신 분을 향해 감사하고 찬양하며 경배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욥기 36:1-33절
엘리후의 엉터리 주장이 본문에서도 계속 이어지고 있는데, 그는 한 마디로 하나님을 빙자한 자기 자랑을 일삼으면서 그것이 마치 대단한 신앙인 양 자랑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뭔가를 열심히 하는 척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
정말 주를 위하는 자는 주님 때문에 비천한 처지에 떨어지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매 맞고 굶주리고 헐벗어도 여전히 주님을 높이고 찬양한다. 그래서 이런 자들의 삶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고,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
이에 비해 엘리후는 고통에 처해 신음하는 자를 보면서 자신의 지혜를 뽐낼 기회로 삼고 있다. 이런 자가 “하나님을 위하여” 뭔가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모두가 거짓말이다.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할 뿐이다.
신앙인이라고 하는 자들이 이런 오류에 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자신의 행위가 하나님을 위한 희생이라고 말하면서 주님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거룩한 삶을 은근히 드러내고, 하나님께 은총을 받았다고 하면서 자신의 지혜와 부와 명예를 자랑하는 류의 사람들.
11절을 보면 “청종하여 섬기면 형통히 날을 보내며 즐거이 해를 지낼 것이요”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자기 자랑을 일삼는 자의 신관이요, 하나님을 섬기노라고 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자랑하고 높이는 자들이다.
성경에 나타난 여러 인물들은 주님 말씀에 순종하므로 형통하고 즐거운 날을 보낸 것이 아니라 고난과 역경의 삶은 사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몇 사람만 예를 든다면 이사야는 주님 명령에 따라 벌거벗고 3년을 지내면서 애굽과 구스에 대하여 경고하는 삶을 살았다(사20:2-3). 호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음란한 이스라엘을 고발하는 차원에서 창녀와 결혼해서 평생을 살았다(호1:2). 마리아는 처녀의 몸으로 예수님을 임신했다(마1:18-20).
이처럼 하나님 명령 때문에 비난과 고통과 아픔을 겪으며 살아가는 성도들을 생각해 보았는가? 이런 사실을 엘리후가 알았다면 함부로 입을 열어 제 멋대로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디모데후서 1장 9절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는 말씀이 있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인간의 행위에 따라 구원이 성사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하신다는 말씀이다. 그러니 엘리후가 주장하는 것과는 정 반대의 개념이다. ‘형통히 날을 보내고 즐거이 해를 지내는 것’만이 하나님께 은혜를 누리는 자의 삶이 아니다.
우리는 욥기를 통해서 계속 인간들의 상식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고 세상만사를 바라보는 어리석은 모습들을 목도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우리들의 시선이기도 하다. 이처럼 인간들의 보편적인 상식은 하나님의 지혜와 거리가 멀고, 진리와는 무관하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찾아야 하고, 계시의 말씀을 통해 모든 것을 다시 바라보아야 한다.
말씀에 근거하지 않는 모든 판단은 다 허망한 것이며 오류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들의 경험, 학문, 판단력, 상식 이런 것들은 모두가 죄악 된 마음에서 출발한 것이기에 진리와는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어리석인 인간들은 엘리후처럼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고, 자신의 경험이 유일한 진리인 양 선전하고 있다. 이런 것들은 세상살이에 도움이 될 수는 있을지 모르나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뜻을 깨닫는 것에는 무용지물이다.
이런 하잘 것 없는 것들을 얻기 위해 몸부림치고 발버둥치는 삶이 우리들의 생애 아닌가? 이런 것들을 얻었다고 해서 기뻐하고, 반대로 이런 것들을 갖지 못했다고 해서 좌절하고 절망하면서 과연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물질의 풍성함, 육신의 강건함, 세상 권세나 명예 이런 것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대가로 주어지는 상이 아님에도 인간들은 그렇게 착각하고 있다. 그래서 이런 것과 반대의 환경이 왔을 때 그것을 심판이나 저주로 간주하게 되는 것이다.
진정한 복은 죄인이 용서받고 주님과 더불어 영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은총을 감사하고 찬양하는 삶이 복된 삶이다. 반대로 자신의 죄와 허물을 주님께 용서 받지 못하고, 또 그 은혜를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삶이 저주받은 삶이다.
욥기 37:1-24절
그동안 욥기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마치 긴 터널을 통과하는 기분이었다. 욥을 비롯한 그의 친구들, 그리고 뜨내기 엘리후의 주장까지 참으로 다양하고 많은 이론들이 출연했고, 장황한 말들이 오고 갔다.
그러나 이들의 이야기는 결코 진리와는 거리가 먼 인간 이성에서 도출된 죄악 된 사고방식에 머물러 있었기에 참 진리에는 접근도 할 수 없었고, 마냥 어둡고 캄캄한 밤을 지내는 그런 상황이었다.
이제 그 지루한 터널을 벗어날 시점이 된 것 같다. 37장을 끝으로 어리석은 인간들의 자기주장은 끝을 볼 것이다. 그동안 인간들의 머리에서 나올 수 있는 온갖 이론과 경험들을 다 쏟아 놓도록 주님이 허락하셨지만 그 결과는 암흑뿐이었다.
37장에서 마지막으로 거론되고 있는 엘리후의 주장은, 자연 만물을 통해 하나님의 크고 놀라우심을 깨닫자는 내용이다. 하늘에서 천둥 번개가 치고, 구름을 통해 눈과 비가 내리고 얼음이 얼고 하는 현상들을 인간이 어찌 다 이해할 수 있는가 하는 이야기를 거론하면서 이처럼 하나님의 크고 놀라우신 섭리를 측량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기에 더 이상 하나님을 이러쿵저러쿵 하지 말고 그냥 하나님을 경외하면 된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무조건 경외한다는 것이 도무지 말이 되는가? 만약 엘리후의 주장대로 하나님은 우리가 감히 측량할 수 없는 분이고, 제대로 알 수 없기에 무조건 경배하자고 한다면 이런 신은 전능자요 창조주는 될 수 있겠으나, 우리의 허물과 죄를 용납하시고 십자가에 아들을 대신 죽이신 참 하나님은 아니지 않는가?
욥의 처지를 보면서 인간들은 가차 없이 그를 정죄하기에 나섰다. 화목하던 가정이 산산조각이 나고, 존경받으며 호화로운 삶을 누리든 자가 질병과 가난으로 내 몰리게 되니 모두가 그를 행해 심판의 돌을 던지며 그를 죄인으로 몰아 세웠다.
그러나 하나님이 택하신 자를 송사하고 정죄하는 일이 얼마나 무서운 교만이요 죄악인가를 그들은 전혀 알지 못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 하리요”(롬8:33).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롬8:1)고 하신 말씀을 알았다면 욥을 함부로 그렇게 취급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말은 욥이 죄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용납하시고 받아주신 생명인데 감히 누가 그를 정죄하며 허물을 거론할 것인가 하는 말이다.
바로 복음은 여기에 있다. 한 개인의 잘, 잘못을 거론하는 것이 아니라, 즉 인간의 행위를 논함이 아니라,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과연 그 사람이 주님의 사랑을 입었는가, 그렇지 아니한가 하는 점에서 축복과 저주가 나뉘어 진다.
그런데 지금까지 욥기에 등장한 인간들의 사고는 한결같이 인간 행위에 근거한 복과 저주였다. 그리고 이 땅의 것에 바탕을 둔 평가였다. 쉽게 말하면 이 땅에서 평안하고 넉넉하게 살면 그것이 복이요, 반대로 가난과 질병으로 시달리면 그것이 저주인 것이다. 그래서 욥을 평가하면서 분명히 네가 하나님께 큰 죄악을 저질렀고, 그 결과 하나님의 저주가 임해 현재 너 같은 형편에 처하게 되었다는 결론이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욥기에 등장하는 자들의 사고방식을 고스란히 소유하고 있다. 인과응보, 권선징악. 이런 생각에 머물러 있으니 어찌 하나님의 용서와 대속의 희생 이런 것에 마음을 둘 수 있겠는가?
내 노력과 내 열성과 내 지혜와 내 절제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복만을 생각하고, 인간들이 피부로 느끼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흡족한 결과가 오면 그것을 기뻐하며 스스로 대견해 한다. 자신의 노력의 열매로 여기기에. 반대로 아무것도 손에 잡히는 것이 없고, 육신의 만족을 줄 그 무엇이 없다면 이것은 대단히 부끄러운 일이며 어찌하든 속히 벗어나야할 환경인 것이다.
이런 자들이 거론하는 하나님은 오로지 자기만족과 기쁨을 위해서만 필요한 신일뿐이다. 내 소원 들어주면 고맙게 여기고 그 신에게 경배를 드릴 것이고, 내 소망에 대해 외면하면 나도 그런 신은 더 이상 섬기지 않겠다는 태도이다.
이제 더 이상 엉터리 신을 거론하지 말자.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은 자기 뜻대로 세상 만물을 주관하시는 분이다. 인간의 행위대로 평가하시는 분이 아니라 자기 아들이 죽은 십자가를 근거로 모든 것을 평가하시는 분이다. 그 아들의 피가 모든 것의 기준이다. 이 사실을 믿는 자가 복 받은 자이다.
욥기 38:1-41절
욥이 처한 환경을 놓고 욥과 그의 세 친구 엘리바스, 빌닷, 소발, 그리고 엘리후는 각자 자신의 의견을 토로하는 장면이 그동안 진행 되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인간들의 행위에 따라 복과 저주를 내리는 그런 하나님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욥은 자신에게 벌을 내리신 하나님에 대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틀림없이 욥이 무언가 잘못한 것이 있기 때문에 이런 벌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진리에서 한 참 벗어난 인간들의 주장들을 듣고만 계시던 하나님께서 이제 드디어 입을 여셨는데, 먼저 욥의 의문과 궁금증에 대해 답하신다. 그 답하시는 방법이 욥에게 거꾸로 질문을 던짐으로 그의 의문에 답하는 형식을 취하신다. 즉 수많은 질문들을 던짐으로써 자신의 능력과 권위와 위엄에 대해 열거하신다.
인간들은 항상 제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 그리고 몸으로 느끼고 머리로 상상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 그것도 내 중심으로 이해하고 풀이한다. 그래서 자신과 무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들이 관심 갖지 않는 부분까지 깊이 생각하시고 그런 것들을 친히 주관하고 계심이 그분의 던지는 질문을 통해 밝혀진다.
우리는 내가 살고 있는 집의 넓이를 생각하면서 좁아서 불편하다면 더 넓은 집으로 옮겨간다. 그러나 우주의 크기에 대해서는 별 관심도 없다. 그리고 내가 먹는 것이 맛이 있는 것인지 혹은 영양이 있는 것인지를 생각하면서 먹거리를 찾아 나선다. 그러나 숲속의 맹수들이 무엇을 먹는지, 혹은 산속의 새들이 어떻게 추위를 이기는지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는다.
과학이 차츰 발달하고부터는 인간의 문제가 단순히 인간들만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와 우리의 삶이 연관이 있음을 깨닫고 지구 생태계 전체를 염려하고 생각하는 수준에 까지 왔다.
그러나 인간이 우주만물을 주관할 그리고 다스리고 살릴 능력이 없기에 자연히 우리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다. 세상에 가장 많은 돈을 가진 자라 할지라도 그가 바다의 고기 먹이를 단 한 끼라도 챙긴 적이 있는가? 그리고 숲의 짐승들을 위해 끼니를 제공하는가? 하늘의 새들을 위해 혹은 수많은 식물들의 보존을 위해 그들이 기울이는 노력이 얼마나 되겠는가?
욥의 삶을 돌이켜 보면, 그는 많은 재물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며 그렇게 살아왔다. 그러나 그는 결코 사자의 먹이를 걱정한 적이 없었고 까마귀 새끼가 배가 고파 버둥거릴 때 그에 대해 염려하며 먹이를 챙긴 적이 없었다.
그리고 욥이 자신의 몸이 질병으로 고생하며 괴로워하면서도 제 몸만 생각했지 지구상에 있는 수많은 생명체의 건강에 대해 관심 기울인 적이 없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욥 한 사람만 상대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리고 욥 개인의 행복과 만족을 위해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광범위하고 오묘한 것인가를 고백할 수밖에 없다. 오늘도 여전히 날을 밝히시고 태양 빛으로 이 땅을 환히 비춰주신다. 신선한 공기와 물을 제공하신다. 온갖 곡식과 열매들을 자라게 하시고 먹게 하신다. 지금 이시간도 쉬지 않고 우리들의 심장을 박동케 하시고, 생명을 허락하셨다.
무엇 하나 그분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것도 되는 것이 없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 크신 은혜와 사랑에 대해 감사하지 못하고, 내 욕망을 채우는 일에만 급급해 있는가? 채워지지도 않는 욕망 때문에 괴로워하고, 아쉬워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지 않은가?
이제 다시 한 번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자. 세상 만물이 내 원함대로 이뤄져서는 아니 된다. 모든 것의 주인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그분이 모든 것을 지으셨고, 자기 뜻대로 이끌고 계신다. 따라서 나를 포함한 모든 피조물은 그분의 영광을 위한 존재들이다.
더 이상 내 고통과 아픔에만 시선을 고정시켜서는 아니 된다. 우리의 눈을 주님께 향하자. 그분의 하시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분의 말씀에 집중하자. 그리고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으며 생애를 보내자. 그리하면 모든 것이 그분에 대한 감사와 찬송으로 밖에는 결론나지 않을 것이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바로 그런 의미들이 담겨있다. 주님의 섭리를 놓고 볼 때 모든 것은 그분의 뜻대로 되고 있고, 그분의 뜻대로 되어 현재 내가 이런 처지에 놓여 있다면 그것 또한 감사할 일 아닌가?
욥기 39:1-30절
38장에서 하나님은 천지만물의 창조주시며 주관자이심을 천명하셨다. 그리고 39장에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산 염소, 암사슴, 들 나귀, 들 소, 타조, 말, 매, 독수리 등을 언급하시면서 이런 모든 피조물들을 각자의 특성에 맞게 지으시고 지금도 여전히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선포하고 계신다.
그러면서 왜 이런 짐승들이 이런 특성을 가졌는지, 혹 그들이 그런 힘과 용맹을 가진 것에 대해 욥 네가 도움을 준 적이 있는지에 대해 물으셨다.
우리는 단 한번도 산 짐승이나 공중의 새들에 대해 염려하거나 걱정하지 않았다. 그들이 뭘 먹는지, 추운 겨울에는 어떻게 추위를 피하는지에 대해 무관심했다. 늘 내 먹을 것을 염려하고, 어떻게 하면 따뜻하게 지낼까만 생각했을 뿐이다.
하나님이 욥을 향해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의외로 간단하다. 왜 항상 자신의 문제에만 집착해서 자기 불편함 만을 호소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좁은 안목으로 너 자신만 바라보지 말고 더 크고 넓은 창조의 세계를 바라보라는 것이다.
우리는 내 문제에만 국한해서 생각하고 내 중심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크고 넓은 세계를 주관하고 계신다. 즉 해와 달과 별을 주관하시는 분이고 공중의 새와 들의 짐승을 주관하실 뿐 아니라 심지어는 내 생애까지도 주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욥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광범위한 능력과 지혜에 대해 감히 측량할 수 없다면 이러쿵저러쿵 따지고 시비할 일이 아니라 잠잠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며 찬양하는 것이 합당한 일 아닌가?
우리가 자연 만물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다 알지 못하듯이 나를 향해 그분이 행하시는 권능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조주시기에 자신의 뜻대로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불평, 불만을 갖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불신앙이 바탕에 깔려 있다. 즉 하나님을 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은 몰라도 최소한 나의 주인은 나 자신이란 사실을 주장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내 일은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야 하고, 내 삶은 내가 꿈꾸고 소망하는 대로 이뤄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우리네 삶은 이런 내 만족과 기쁨을 위해 활동하는 것이다.
그런데 창조주 하나님은 이런 나의 생각을 죄악으로 규정하신다. 너희들의 만족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살라고 명하신다. 너희들의 기쁨은 너희들 스스로 쟁취할 수 없는 것이며 그것마저도 하나님 자신의 손아귀에 있다는 말씀이다. 그분이 평안을 주시면 평안을 얻을 것이고 반대로 그분이 고통을 주시면 고통을 겪어야만 하는 것이 피조물인 인간이란 말씀이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을 기쁨으로 받지 못한다. 왜 당신 마음대로 하는지 따지고 싶다. 최소한 나에게도 조금의 권한은 주셔야 하지 않는가 하고 묻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의 죄성에서 비롯된 사고라는 사실을 주님은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일러 주신다.
세상을 살면서 우리 스스로를 돌이켜 볼 때 너무 힘이 없고 나약하다는 생각이 든다. 들 소는 저렇게 강한 힘을 가졌는데 왜 우리에게는 저런 힘이 없을까? 또 급하게 어디를 가야하는데 길이 막히고 빨리 갈 수 없는 상황에서는 하늘을 나는 새를 보면서 내게도 날개가 있어서 창공을 훨훨 날아다니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능력을 주시지 않았다. 이것은 인간에게만 능력을 제한 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이 다 그러하다. 마치 타조가 그렇게 빠른 걸음으로 달려갈 수 있지만 자신이 낳은 알을 스스로 짓밟을 만큼 어리석게 하신 것처럼. 그리고 독수리가 그렇게 멀리 볼 수 있고 빠르게 날 수 있지만 그들이 찾아 먹는 것은 겨우 썩은 시체들뿐인 것처럼.
내가 갖지 못한 것에 대해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내게 허락하신 것에 대해 감사하자. 나의 모자람에 대해 불평하기 전에 나를 지으시고 만드신 그분의 능력을 찬양하자. 모든 것이 내게 다 필요했다면 하나님은 그렇게 만드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필요도 이유도 없었기에 하나님은 그렇게 만들지 않으셨다. 지금의 내 모습으로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이 모습 이대로 주께 영광 돌리자.
욥기 40-41장
거듭되는 하나님의 질문 공세에 욥은 정말 힘겹게 입을 뗐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행위에 대한 변명을 위해서가 아니라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말과 함께 그동안 알지도 못하고 지껄인 것에 대해 부끄러워 손으로 입을 가릴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 모습이 바로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자의 참된 고백이라 할 것이다. 감히 어떤 인간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할 자가 있으랴!
자! 그렇다면 하나님의 쏟아지는 질문에 대해 누구나 다 욥처럼 항복 선언을 하고 더 이상 변명하지 않겠다고, 그리고 그동안 잘 알지 못하고 한 말이 창피해서 입을 가릴 수밖에 없다는 반응을 보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믿음이 없는 자는 어떤 경우에라도 자기변명을 포기하지 않고,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만약 천지만물의 주 되시는 하나님이 자신의 깊은 뜻에 따라 모든 것을 만들고 인간인 너마저 내가 지었다고 하실 때, 믿음 없는 자의 대응은 ‘이왕 나를 지으셨다면 내가 멋지게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도록 이끄실 것이지 왜 몸이 병들게 만들고, 특별하게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자녀들 다 비명횡사하게 하시고, 많은 이웃들로부터 외면당하게 하십니까?’ 하고 나올 것이 틀림없다.
욥처럼 “나같이 보잘것없는 자가 주께 무엇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다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입니다.”(40:4) 라는 반응이 나온다는 자체가 주님의 은혜가 임했다는 것이고, 그분 사랑에 사로잡혔다는 증거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마지막 부분에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인사를 하면서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고전16:22)라고 말했다. 이런 표현이 어찌 편지 말미에 사랑하는 형제들을 생각하면서 쓸 수 있을까 의심이 간다. 하나 이것은 주를 사랑하는 형제들에게 전하는 글이기에 이런 말에 당연히 ‘아멘’으로 받을 것이다. 그래서 주를 사랑하는 자 모두가 바울의 이런 편지 글을 통해 다시 한번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게 되고 성도로서의 사명을 깨닫는 계기로 삼을 것이다.
어떤 인간도 하나님처럼 능력을 소유하지 못했다. 그분처럼 세상만물을 다스리고 주관할 지혜도 힘도 없다. 이것은 오로지 창조주의 권능이며 지혜이다. 하마가 엄청난 힘을 지지고 살아가지만 그가 먹는 것은 겨우 초원의 풀이다. 이 짐승은 땅 위에서도 물속에서도 자유자제로 활동하며 거리낌이 없다. 이렇게 독특하게 지으신 것은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 때문에 된 것이지 그 어떤 인간도 이런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개입하거나 동참한 적이 없었다.
또 흔히 인간들이 하나님을 향해 내뱉는 말 가운데, ‘하나님, 내가 이러 이러한 것을 주께 드리지 않았습니까? 그 정성을 보셔서라도 내게 은혜를 내려 주세요.’ 라는 것이다. 시간도 받쳤고, 물질도 받쳤고, 많은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얼마나 하나님을 모독하고 피조물의 자세를 망각한 발언인지 모른다. 그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께 뭔가를 드릴 것이 없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먼저 하나님께 뭔가를 드려서 그에 대한 보답을 하나님께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에게 준 것이 있다고 갚아라 할 자가 누구인가? 하늘 아래 있는 모든 것이 다 내 것이다.”(41:11)
그러나 우리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욥을 생각해 보아도 그는 분명 하나님에게 많은 것을 드렸다고 생각했다. 물론 물질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지만 그 물질을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기도 했고, 억울한 일을 당한 자가 있으면 어떻게 하든 그의 억울한 사정을 해결해 주었고, 외롭고 쓸쓸한 자가 있다면 위로하고 격려하며 울타리가 되어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욥의 자랑거리가 되지 못하며 피조물로서 당연히 할 일을 한 것뿐이다. 그리고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덕분이다. 그러기에 ‘내가 하나님을 위해 뭔가를 했으니 하나님도 내게 뭔가를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는 발상은 크나큰 오산이다.
과연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우리는 창조주가 지으신 피조물 중 일부이다. 이런 우리는 오로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기쁘게 하기 위해 지음 받았다. 따라서 내 만족과 기쁨을 위해 살아서는 아니 되며 오로지 주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 이렇게 살아가는 자에게는 불평이나 원망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 오직 기쁨과 감사만 있을 뿐이다. 어떤 환경도 다 주님이 자기 영광을 위해 조성하신 것이기 때문에 성도는 범사에 주님께 감사드린다.
욥기 42:1-17절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만 모든 것을 제대로 알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을 모르는 자는 아무것도 제대로 알 수 없다는 이야기다. 즉 하나님을 모르는 자는 자기 자신도 제대로 알 수 없으며 사물에 대한 판단 또한 흐릴 수밖에 없다.
욥이 하나님에 대해 원망을 쏟아놓고 친구와 이웃을 향해 불평하는 이유를 들어보면 한편 일리라 있어 보인다. 욥처럼 착하고 성실하게 산 자가 왜 그런 비참한 환경을 맞이했는지 의아하고 하나님이 참 야속하다는 생각이 든다. 또 욥처럼 이웃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면서 살아온 자가 어려운 처지에 떨어졌다고 해서 그를 파렴치한 죄인 취급하며 몰아붙이는 자들을 배은망덕한 자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욥이 하나님을 알고 난 후에는 너무도 뜻밖의 행동을 취하게 된다. 하나님을 향해 불평하던 자가 오히려 자신의 무지함을 부끄러워하며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했고, 또 자신을 공격해 온 친구들을 위해 기도하는 자로 변했다.
이런 놀라운 변화는 그의 인격이 성숙한 것 때문이 아니며, 그가 마음을 넉넉히 쓸 만큼 환경이 바뀐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하건대 외적으로 볼 때 욥에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욥은 정 반대로 바뀌어져 있다.
왜 이렇게 욥은 변화된 것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을 만나 그분을 제대로 알았기 때문이다. 과거에도 그는 하나님을 알았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귀로 듣기만 했던 그런 하나님이었다.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을 통해 하나님을 섬겼고, 자신의 지식과 감정을 통해 추측했던 하나님이었다. 그러나 그런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 아니었다.
참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행위를 불의한 것으로 간주하시고, 다만 자신의 행위만을 정당한 것으로 여기신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계획과 소망을 무너뜨리시고 오직 자신의 언약하신 대로만 모든 것을 이뤄 가시는 분이다.
이런 하나님을 만나고 난 이후부터 욥은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생각도 바뀌고 삶도 바뀌고 소망하는 바도 바뀌었다. 과거처럼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도 않았고,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았고, 친구나 이웃을 향한 적개심도 사라졌다. 오로지 하나님 앞에 선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고 부끄러울 뿐이었다. 과거 그렇게 당당하고 자신에 찬 심정으로 하나님을 만나 따지고자 했던 욥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나의 정당함과 떳떳함을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 주기를 바라고, 하나님도 인정해 주시기를 바라며 산다. 내 자신의 정당함을 위해 온 몸을 던진다. 즉 자기 지키기의 삶을 산다. 자존심도 지키고, 명예도 지키고, 물질도 지키고, 몸도 지키는 식으로 삶을 꾸려간다. 그리고 이런 자기 지키기를 제대로 하며 사는 자를 성공한 사람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난 자들은 자기 정당함을 위해 살았던 삶이 얼마나 부끄럽고 추한 것이었나를 발견하게 된다. 자기 정당함을 사수하기 위해 놀렸던 입이 부끄러워 가릴 수밖에 없는 자로 변신한다. 이제는 더 이상 내 정당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크고 엄위하심만 보인다. 즉 하나님 앞에 완전히 나라는 존재는 죽은 자처럼 된다.
이런 모습은 외적으로 볼 때 완전히 항복해서 패배한 실패자처럼 보이나 이런 자가 진정 행복한 자이며 은총을 입은 자이며 최후 승리자이다. 내가 강자가 되어 그 누구에게라도 내 뜻을 관철시키고 내 의지대로 모든 것을 추진해 가는 자가 성공자요 승리자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완전한 착각이다.
욥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은 이제 욥의 친구들에게도 나타나셨다. 그들을 향해 심하게 질책하시면서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의 우매한대로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8절)”고 하셨다.
이 한 구절 말씀 속에 그동안 인간들의 엉터리 신관이 폭로되는 순간이다. 권선징악의 하나님이 가짜 하나님이란 사실이 밝혀지고, 그들이 굳게 믿었던 복과 저주의 원인도 전혀 엉터리란 사실이 밝혀진다. 하나님은 인간의 우매한대로 갚지 아니하시고, 대신 자기 아들 예수의 희생을 통해 그들을 용납하시는 그런 하나님이다.
욥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 그리고 욥의 친구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은 바로 이런 하나님이었고 이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주관하시는 참 하나님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