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아버지의 자전거 권오웅
몇 개월째 담장 옆에 세워둔 아버지의 자전거. 그 자전거 바퀴에 거미줄이 쳐져있다. 매일 굴러야 할 바퀴가 멈춘 자리에 또 다른 생명이 생존을 위한 공간을 마련한 셈이다. 나는 헛바퀴라도 슬쩍 돌려 보려다 말고 너무나 섬세하게 공들여 쳐놓은 거미줄을 손상시킬까봐 그만 두었다. 10년전쯤이었던가? 낡은 자전거의 잦은 고장으로 아버지께서 손수 수리하는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 새 자전거를 사드렸을 때, 아버지께서는 “암 밤밤바 아바 밤바….” 기분 좋은 소리와 함께 엄지손가락을 뽑아들고 내가 최고라면서 좋아하셨다. 그 이후로 거의 매일같이 4Km 거리의 농장에 출퇴근용으로 그 자전거를 이용하셨다. 폭 좁은 시골길이 온통 아버지 길인 양 내리막을 달리거나 오르막길에 끌고 다니실 때에도 길 가운데를 점령하며 유유자적 거리낄게 없으셨다. 그런 아버지였기에 더러 그 뒤를 따르던 차량운전사들의 빈축을 사기도 했지만 차량의 클랙슨 소리를 듣지 못하시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청각장애 2급이시다. 태어나면서부터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시는 청각언어 장애인. 그렇지만 눈으로 보고 하는 일이라면 못하는 게 없으셨다. 전형적인 시골 농촌 환경에서 필요한 생활도구들은 모두 손수 만들어 사용하셨다. 볏짚으로 만들어 쓰는 새끼 꼬기부터 삼태기며 멍석이며, 가마니와 고드랫돌로 엮는 왕골 돗자리, 해마다 새로 지붕을 이는 이엉과 용마름까지 그리고 나무지게와 쟁기 틀이며 바소쿠리, 다래끼, 싸리 빗자루와 수수 빗자루도 닥나무나 뽕나무 노끈을 꼬아 만들어 쓰셨다. 한마디로 촌에서 사용하는 모든 것들을 스스로 만들어 쓰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만큼 아버지는 눈썰미도 있었고 손재주도 좋아서 마을 사람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셨다. 그렇지만 9남매 중 셋째의 위치에서 어머니와 결혼할 땐 세간 살림으로 전답 한 평 물려받지 못하셔서 머슴처럼 부잣집 농사일을 하시거나 남의 산을 손수 개간하여 토지를 확보하고, 소작 농지를 부치며 우리 6남매를 낳으셨다. 그런데 우리 6남매를 낳기만 했지 길렀다고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아버지의 그 속 깊은 뜻이야 아직도 헤아릴 수 없을뿐더러 정확한 언어의 표현을 알아먹을 수 없어서 도무지 잔정이라고는 느껴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우리 6남매의 막내 여동생을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도 아버지는 아무런 변화도 흔들림도 없이 그저 주어지는 생활환경 속에서 몸에 익은 농사일로 40년을 더 살아 오셨다. 궁핍한 생활환경 탓으로 내 나이 열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 후 4년 만에 누나가 죽고, 또 다시 4년 만에 막내 여동생이 죽어 나갔지만, 아버지께서는 조금도 슬퍼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다. 그때그때마다 가난한 집안 살림은 아버지를 제외한 우리 남매들이 번갈아가며 해야 했고, 일하지 않으면 굶어 죽는다는 아버지의 철저한 생활철학에 세뇌되어 먼 학교 길을 오가면서도 우리 남매들은 아버지의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으므로, 너무나 힘에 겨운 어린시절을 보내야만 했었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던 해 형님은 이미 근육병으로 건강이 많이 안 좋은 상태였고, 어머니 대신 부엌살림을 맡아주던 누나가 영양실조로 죽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부엌살림에 관여하지 않으셨다. 감자와 수제비죽으로 연명을 하든지 넉넉지 않은 꽁보리밥으로 끼니를 때워도 말없이 드시며 그저 매일같이 들로 나가 일만 할뿐이었다. 나는 누나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형님이 시키는 대로 동생들과 일거리를 분담하며 동네 우물의 물을 길어다 덜 마른 솔가지 땔감으로 아궁이에 불을 지펴 가마솥 밥을 해먹으며 20리길 중학교를 다녔다. 그 틈틈이 보리밭 조밭 콩밭 고추밭 할 것 없이 김을 매야했고 퇴비로 만들 잡풀이며 소꼴을 베야했고 흙거름을 무겁도록 밭으로 져 날라야 했다. 그뿐만 아니라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찬바람 술술 들어오는 허름한 옷을 입고 먼 산에 가서 땔나무를 한 짐씩 해 와야 했다. 잠시도 쉴 사이 없는 그 생활이 나에게는 너무나 힘에 벅찼다. 피할 수 없는 그 혹독한 겨울을 보내고 중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어린 나이였지만 죽고 싶다는 생각이 더러더러 생겨나던 무렵, 나에게도 근육병의 초기증세가 나타났고 그 엄청난 절망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나는 죽음을 각오하며 가출을 했었다. 말로는 다 표현 못할 나의 가출 3년 동안 집에서는 막내 여동생마저 알 수 없는 병으로 죽어버렸는데 아버지는 여전히 그 농사를 지으시며 그 자리를 지키고 계셨다. 내가 주민등록증을 발급받기 위해 잠시 귀향했던 그 길이 그대로 고향지기가 되어 50년 내 인생에서 단 3년을 뺀 시간이 지금껏 아버지와 함께 살아온 세월이 되었고, 아주 서서히 진행되는 나의 근육병 병력도 그 아픈 세월과 함께였다. 그렇지만 객지에서 몇 번인가 시도했던 죽음을 포기하고 귀향한 이후에는 아버지의 농사일을 거들며 내 꿈을 키우기 위해 무엇이든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모든 시간을 게을리 하지 않았었다. 귀향한 초기 5년 동안은 개간지에 뽕나무를 심어 누에사육으로 농외소득을 올렸고 산주가 심어준 사과나무를 손수 가꾸어 어엿한 과수원으로 만든 뒤 그 산을 매입하여 우리의 재산으로 불렸으며, 암소를 키워 해마다 송아지를 생산하였고, 주변 농민들보다 앞선 농사기법으로 고추며 참깨 밭에 비닐 피복 재배를 선도하여 다수확의 기쁨을 전파하였다. 그러면서도 나는 책읽기를 즐겨한 덕분이었을까? 새농민지에 영농수기를 발표하여 그 인연으로 우연찮게 찾아온 지금의 아내와 어렵잖게 결혼을 하였고, 딸과 아들을 하나씩 낳아 아버지께 선물로 안겨 드렸다. 그로서 장애인 가정이라고 업신여기고 손가락질 받던 우리 집은 여느 가정 못지않게 자리를 잡았고, 아버지께서도 훨씬 더 자신 있는 삶의 모습을 보이셨다. 그렇지만 그 무렵이었을까? 객지로 나간 남동생도 근육병이 발병하였고, 형님께서는 스스로 설 수도 없는 지경으로 악화되었으며 나 역시 힘든 과수원 일은 못할 정도로 근육병이 진행된 상태였기에 우리의 미래를 위해 형님과 의논하여 면소재지 장터에다 신발 가게를 차렸으나 경험 부족으로 1년 만에 6백 여 만원의 손실을 보고 폐업을 하였고, 아내와 함께 분식가게를 개업했다가 점차 잃어가는 내 건강에 맞추어 청소년용 컴퓨터 게임장으로 전업을 하였고, 틈틈이 도장을 새기며 컴퓨터를 배워서 잠시나마 초등학교 과외 강사로 출근도 하면서 근육병으로 잃어가는 힘에 맞게 주어지는 환경에 최선을 다해왔다. 아버지께서는 그런 아들이 대견해서였을까? 면소재지 장터에 집을 사서 이사 온 이후로도 계속 농사를 지으시며 주변의 지인들을 만나면 어김없이 집으로 모시고 와서, “아 바바바 밤, 바암 바바 바”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 아버지만의 특이한 목소리로 한껏 자랑을 해대곤 하셨다. 그런 아버지께서 80평생을 거짓 없는 흙과 함께 사셨는데, 올해는 허리도 굽으시고 기력이 쇠잔하시어 부치던 농토를 남에게 넘긴 뒤 좀 쉬셨으면 했는데, 지난겨울이 시작될 때부터 올 봄이 지나는 시기까지 마을회관을 다니시며 마을 어른들과 화투도 치고 막걸리도 마시며 잘 지내셨는데, 둘째 아들인 내가 이끌어 가는 330여명의 금춘가족 만남의날 행사까지 정말로 잘 지켜봐 주셨는데, 내 딸이기도 한 아버지의 손녀사위가 낳은 증손자의 돌잔치까지 화려하게 치르고 난 이 걱정 없는 시절에 아버지 몸의 일부였던 그 자전거를 세워두고 병원에 계신다. 입원한지 한 달이 다가오도록 여러 가지 최신식 장비로 검사를 하고 있지만 뚜렷한 병명도 찾지 못한 채 먹은 음식을 토하기만 하고 계신다. 장애인 차별이 혹독했던 이 나라의 청각장애인으로 평균연령을 넘어 82세까지 살아온 세월이 이제는 버거운 것일까? 42세에 홀로되어 40년을 곁눈질 한번 안하시고 홀아비로 살면서도 자신의 일에 빈틈없이 꿋꿋했기에 건강한 딸 하나에 근육병 삼형제를 남기고서도 세상 부러울 것 없었던 그 자신감을 누가 감히 잠재우려고 하는 것일까? 아버지! 아버지! … …. 아무리 불러도 듣지 못하시는 우리 아버지. 눈 내린 날 아들이 미끄러져 넘어질까봐 가는 길 앞서서 눈길을 쓸어 주던 아버지. 그 어느 여름 땡볕아래 손모내기 하던 날 아들이 심은 모가 드물다고 일일이 머들거(보충) 심던 아버지. 어릴 때부터 일하지 않으면 굶어 죽는다고 아버지만의 수화로 우리들을 세뇌시킨 당신의 그 숭고한 철학 덕분에 근육병을 앓든 말든 남은 우리 4남매는 정말로 잘 살고 있습니다. 제발 쾌차하셔서 병원이 아닌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세요. 지금 아버지가 비워둔 담벼락 아래 화단에는 여러 대궁 중에 유독 한 포기가 쓰러져서 꽃피운 저 고결한 백합꽃이 꼭 아버지의 인생 같아서 더욱 마음이 아픕니다. 어렵게 핀 백합꽃이 지기 전에 어서 돌아와 세워둔 자전거 바퀴를 아버지의 힘으로 다시 한 번 힘차게 굴려 주세요. 쓸쓸히 서 있는 이 자전거도 쓰러진 채 꽃피운 백합꽃 향기보다 아버지의 그 땀내 나는 체취를 그리워하고 있을 테니까요.♣
---------------------------------------------------------------------------------- 2009년 6월29일 권오웅作
『2009 전국장애인근로자문화제 작품현상공모』에 산문부문으로 응모했던 작품.
결과 : 2009.10월 8일. 63시티에서 행사(불참). 입선작으로 선정되어 상금 10만원 받음.
|
첫댓글 아버지의 자전거 잘 읽었습니다. 코끝이 찡하네요. 아버지와 함께 했던 자전거가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거미줄이 쳐졌군요. 6남매를 키워오신 청각장애인 아버지 ... 그 아버지가 병마를 털고 일어나기를 필자는 간곡히 기원하는군요.
예, 김선생님.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사시다가 그만 돌아가셨어요.
한글을 읽지는 못하더라도 아들이 쓴 이 글의 마음이라도 더듬어 보시고,
병마를 이겨내어 좀더 사시기를 바랬었는데,
지난 6월29일날. 원고마감 하루전날 이 글을 급히 완성하면서
저도 눈물이 핑 돌았었습니다.
가신분의 빈자리 가 사뭇 느껴지시는 금춘님의 감성 잘 읽었습니다. 계실때는 데면데면 한 그 모든것 다 생각나시겠지요..
자식이란것이 참 그렇게 알면서도 앞에 계신 부모님 께 마음내지 못하는 것이 그것이 속물의 마음 인가 봅니다.
젊어서 해보고 싶었던 그 모든것 참아가며, 아버지 가슴에 상처내지 않으려고 참고 참고 참으며 살았었는데..., 정말 무엇하나 부러울 것 없이 살만 하니까 그만 부자지간의 사별이 그 정을 끊어 놓더군요. 그래도 이글 쓸때는 숙표아내가 병간호하러 병원에서 밤 세우던 날이었는데... 치료하고 몇년은 더 살아주시기를 바랬었는데... 그만 7월3일 아침에 아버지라는 큰 그늘 하나를 잃고 말았습니다.
두 분 말씀에 공감하면서 정말 코끝이 짱해오는 아버지의 자전거.
잘 읽었습니다. 긴글 쓰시는라 수고 하셨구요. 그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
잘 극복 하셨으니. 이제는 평탄하고 평화로운 삶만 있으시길 바랍니다.^*^
산을 넘고나면 어디 더이상 산이 없겠습니까? 이슬누님.
인생길에 주어지는 현실에서 가장 마음 덜아픈 행로를 더듬어 찾아가며 삽니다.
아직도 형님집에 드나들면 그 아버지의 자전거가 잘 지켜주고 있습니다.
오늘이 아버지 생신날인데, 여동생은 가족들과 함께 아버지 산소를 찾아보고 갔지만,
우리 3형제 아들들은 그것도 마음뿐이었습니다.
이제부터 순탄한 앞길 열리기를 기도하며 살께요.
아버님 나름대로 최선의 삶을 살아 오신것 같습니다.
누구도 그 상황에서는 그 부지런함이 최선이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때로는 내가 그때의 아버님이었다면 그런 생각을 하며
슬퍼도 슬퍼만 할수 없는 가정의 기둥이었기에 ..............
그렇지요. 아버지의 상식으로는 그 삶이 가장 잘 사는 방법이었어요.
그렇게 살지 않고는 다른 방법이 있을수가 없었으니까요.
자유의지가 부여된 인간의 오염된 생각이 최소화 된 삶으로 순박하게 살았다고 할까요? 나쁜 표현이라면 무지로 인한 엉뚱한 고통의 세월이었지만서도요.
아무튼 나는 그런 아버지의 심성을 반쯤은 닮아 오늘을 삽니다.
아버지의 빈자리가 아직도 허전하기만 하네요. ★
너무 가슴 아픈이야기 군요 가여우신 아버지군요 자식들 먼저 보네고 부인도 보네요 아픈 자식들을 두고 얼마나 가슴이 아프셧을까요..이젠 아버지도 편히 좋은곳에 가셔서 쉴것입니다...햇살님의 고생도 무지 많으셧군요 ㅠㅠ 수고 많으셧어요 장시간 ...
예, 삶이란게 그렇잖아요. 아버지도 자식들도 주어진 운명을 거스를 수는 없잖아요. 그 상황에서 참 용케도 잘 견뎌왔지요. 그 아버지께서 이글 쓴 며칠후에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지금까지의 고생은 견딜만한 고생이었는데, 다가올 고생이 더 걱정입니다.
1월달에 처음으로 아버님을 요양보호사 란이름으로 찾아뵙고 넙쭉 절을 올린일이 생각납니다 연락을 하셨으면 가뵐수도 있었는데 애도를 표하고 효도하는 아들들이 있었기에 편안한 일생을 살았을것입니다 희로애락과 희비애락을 격으면서도 절망하지안고 자식들에게 모범을 보이신 아버님 하늘나라에서도 자식들의 행복을 빌겄입니다 아버지의 자전거 잘읽었습니다 추운 날씨에 건강조심 하세요.
예, 아버지의 삶을 이렇게 짧게 간추려 보았는데, 육선생님께서 읽어주셨군요. 이 글을 쓸때 이미 예감은 하였지만, 아버지 살았을 적에 꼭 마무리 짓고 싶었기에, 그날 아내만 병간호하러 병원에 보내고 저는 아버지의 흔적을 뒤적거렸었습니다. 큰상은 아니어도 장애인근로자 문화제에 이 글이 영원히 남게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저역시 코끝이 찡해옵니다. 아니 이미 눈가에 눈물이 맺혔습니다...아버지 가신 지 얼마 되지 않으셨네요..못가뵈 정말 죄송합니다.. 아버지 이제 좋은 곳에 가셔서 편히 내려보고 계실거예요..
예, 아버지 모습은 내컴퓨터 내그림 화면보호기에 자주 나타나시고,
아버지 육신은 양지바른 아버지의 산에 고이 묻혔습니다.
이제 5개월 남짓 지났지만, 늘 우리 주위에서 돌보아 주실것만 같아요.
신정희님께서 긴글 읽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저도 엄마 가신 지 벌써 3년이 다 되어 가네요..엄마가 항상 저를 돌봐주시고 계심을 느낍니다..모두 부처님의 가피이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