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의 질문들을 통하여 스님의 가르침을 확인하기 위한 자료를 저는 여쭈었었고 그에 대한 답은 듣지를 못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 질의와 응답의 근본적인 문제는 순수-위빠사나라는 용어와 함께 선정의 유무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글을 빨리 적다보니 선정의 용어사용에 혼란을 겪으셨다니, 하지만 글을 제대로 따라갔으면 이런 혼란을 겪지 않았을 것이란 말씀에 오히려 혼란스럽습니다.
스님의 답변을 확인하게 위해 재 질문들을 했으나 제 의문을 풀지 못한 것에 아쉬움을 느끼며 이와 관련한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여쭙겠습니다.
THAMBHO ▷
선정수행은 거듭 말씀드리지만 중요합니다. 저도 여기에 아무런 이의가 없고 오히려 저도 강조합니다. 청정도론에서 위빳사나만 닦는자를 숙카(매마른)로 표현했다는 자체가 청정도론을 위시한 전통적인 주석서에서는 선정/본삼매의 수행을 중시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이런 점은 삿다님과 저의 의견이 일치한다고 봅니다.
saddha ▶
선정의 수행없이 아라한이 되고 이것이 순수한 위빠사나 수행인데 이것만으로도 아라한이 되는데 선정 수행이 중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날 마하시 사야도의 방법으로 수행을 하는 것은 모두 순수위빠사나 수행이라고 말하니 선정수행이 없어도 아라한이 된다는 얘기로 알고있습니다. 그런데 왜 스님께서는 선정 수행이 중요하다고 생각을 하시는지요? (원점으로 돌아가는 느낌입니다.)
THAMBHO ▷
삿다님이 주장하고 계신 “저는 이렇게 형성되고 향상되어지는 고요와 안정을 사마타의 요소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 기본적으로 이러한 고요와 안정(사마타)은 계속 유지되고 향상되어야 그 토대 위에서 정확한 내관(위빠사나)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요와 안정을 사마타로 또 무상, 고, 무아를 관찰하는 것을 위빠사나로 볼 때에 이 둘의 관계는 서로 보완관계에 있는 것이지 서로 양분관계에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라는 말에서 사마타란 용어를 삼매나 집중으로 바꾸어 이해하면 주석서와 남방에서 강조하고 있는 위빳사나수행과 일치한다고 봅니다. 마음챙김과 집중이 없다면 어떻게 무상고무아를 수관할 수 있겠습니까? 이건 너무도 당연한 말입니다. 무상고무아를 관찰하려는 위빠사나적인 수행에도 반드시 마음챙김과 마음의 안정이든 고요든 집중이든 그 무어라 부르든 이런 것들이 함께합니다.
saddha ▶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사마디를 세 가지로 나눈 적도 없으며 본삼매를 주장한 적도 없습니다. 위의 제 생각에 스님께서는「사마타란 용어를 삼매나 집중으로 바꾸어 이해하면 주석서와 남방에서 강조하고 있는 위빳사나수행과 일치한다고 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samatha는 √Sam (to be quiet)에서 파생된 남성명사로서 원 의미는 ‘고요함, 맑음’이다.... 마음이 하나의 대상으로 집중되어서 마음의 떨림이나 동요가 가라앉았고 끝이 났기 때문에 고요함(사마타)이라 불리는 것이다.(DhsA.144; Expos., 191.)]라는 가르침 역시 스님의 글에서 퍼온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 사마타라는 용어를 순간-사마디라는 용어로 바꿔야하는지요? 저는 사마타로써 깨달음을 얻는다고,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같다고 절대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 생각은 스님께서 저와 동의하신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선정 수행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사마타가 순간-사마디로 바뀌어야 한다면 사마타는 어디에서 필요한가요? 부처님은 왜 사마타를 안 버리셨는지요?
THAMBHO ▷
문제는 사마타를 본삼매로 간주하기 때문에 본삼매에 들면 위빳사나를 할 수 없다는 것이지 위빳사나가 투철해질 때 본삼매에 버금가는 근접삼매가 이루어진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 순수 위빳사나의 입장 아닙니까. 위빳사나를 할때는 삼매나 고요함이나 안정이나 집중 등이 없다고는 남방의 어느 누구도 어느 곳에서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saddha ▶
위의 근접삼매는 upacara-samadhi와 같은 용어겠지요? 순수위빠사나에 근접삼매가 있다고 강조하는 것에 대해서 출처를 알고싶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제가 간혹 혼동을 하는데「止行者(samathayaanika)에게는, 近行定과 安止定이라는 定이 없이는, 또 한 편(觀行者 vipassanaayaanika)에게는 찰나정이 없이는, 다시 (止行者와 觀行者) 양자에게 (無相 無願 空이라는三) 解脫門이 없이는 출세간(出世間)을 얻을 수 없다. 때문에 ‘三昧와 觀을 修習하여’ 라고 말한 것이다. (Vism 3)」로 알고있습니다. 후대 주석서나 아비담마를 통해 근접삼매와 찰라정이 함께 사용된 용례가 있다면 알고싶어서 여쭙니다. 그리고「위빳사나를 할때는 삼매나 고요함이나 안정이나 집중 등이 없다고는 남방의 어느 누구도 어느 곳에서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이는 너무나 당연하신 말씀이십니다. 단 이 고요함, 안정, 집중을 사마타 없이 일군다는 것이 의문이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