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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야구기록의 역사 (1)
목동구장 창고에 보관 중인 1981년 한국 청소년 대표팀 사진. 한일 고교친선대회가 끝나고서 찍은 사진이다. 강기웅(사진 맨 왼쪽)과 김상국(왼쪽에서 두번째), 조계현(사진 가운데 줄 오른쪽에서 세번째) 등 낯익인 야구인들의 사진이 보인다. 습기와 곰팡이로 썩어 들어가는 이 사진처럼 한국 야구사는 우리들의 무관심 속에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지금의 야구 기록법과 박스스코어(경기 성적표)는 1858년 미국의 야구기자 헨리 채드윅이 창안했다. 그래서일까. 웬만한 야구팬은 채드윅의 이름을 알뿐더러 메이저리그 기록 변천사에 대해서도 해박하다. 그러나 정작 한국 야구기록의 역사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한다. <스포츠춘추>가 3회에 걸쳐 한국 야구기록사(史)를 재조명하려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지금껏 ‘기록’이 한국 야구 발전을 이끌고, 야구사의 산증인 역할을 했다면, 이젠 우리가 그 야구기록사를 정리하고, 재조명할 차례다.
한국 야구기록의 태동 1910년 황성 YMCA와 한성학교의 경기 장면
1906년 3월 15일 서울 훈련원(현 국립의료원 자리)에서 황성기독교청년회 야구단과 덕어학교 야구단의 경기가 열렸다. 한국에서 열린 최초의 야구경기였다. 그러나 이 역사적인 경기의 점수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저 ‘덕어학교가 3점 차로 이겼다’는 설(說)이 입으로 전해져 내려올 뿐이다.
사실 당시만 해도 야구경기는 ‘어느 팀이 이겼느냐’가 중요했지, ‘어느 팀이 몇 대 몇으로 이기고, 누가 어떻게 던졌으며, 누가 얼마나 잘 쳤느냐’는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았다. 직접 경기에 나서는 이들도 경기 상황을 머릿속으로만 기억했고, 어째서 경기 내용을 기록으로 남겨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국내 야구경기에 기록이 등장한 건 1910년대에 들면서다. 이때부터 경기 점수와 양팀의 타수와 안타, 사사구, 삼진 등이 조금씩 기록되기 시작했다. 1915년 6월 13일 용산철도공원에서 열린 전조선야구대회 오성친목회와 철도구락부소년단의 경기가 대표적이다.
이날 경기에서 오성친목회는 7안타, 1사사구로 12득점 해, 6득점에 그친 철도구락부소년단을 이겼다. 당시 대회 주최사였던 <조선공론사>는 이날 경기 결과와 양팀의 안타, 삼진 등을 자세히 소개했다. 하지만, 개인기록은 찾아볼 수 없었다.
대한야구협회 사무국장과 한국야구위원회(KBO)운영팀장을 역임했던 신현철(86)은 40년 전, 한국 야구기록사를 정리하려고 국립중앙도서관과 대학도서관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옛날 신문과 서적을 모조리 뒤져 옛날 야구기록을 찾을 요량이었다. 하지만, 1910년대 신문이나 서적을 아무리 뒤져도 박스스코어나 개인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
신현철은 “선수 개개인의 활약과 성적을 구체적으로 표기하기 시작한 건 1920년대부터였다”고 회고했다. 사실이다. 한국 야구기록의 본격적인 태동은 1920년대부터 시작됐다. 동아일보가 앞장섰다.
일본강점기 민족신문을 표방했던 동아일보는 당시로선 생소한 체육에 큰 관심을 보였다. 일제의 압제와 수탈에서 벗어나려면 민족 구성원 모두가 활발한 체육 활동으로 건강을 다져야 한다는 게 동아일보의 생각이었다. 민족이 하나가 되는 단결의 구심체로 체육을 꼽은 까닭도 있었다. 어쨌거나 동아일보는 체육 기사를 비중 있게 다뤘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실험을 통해 체육 기사의 질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특히나 야구 기사에서 처음으로 개인별 기록을 소개했다.
1921년 7월 18일 자 동아일보에 실린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 야구단과 휘문고보의 경기 기사가 대표적이다. 이 기사엔 점수와 경기상황뿐만 아니라 출전선수들의 상세한 개인별 박스스코어까지 실어놓았다. 승패에만 관심이 있던 이전 야구기사와는 차원이 달랐다.
1921년 7월 18일 동아일보 기사. 동경유학생조선기독교 학생야구단과 휘문고보의 경기 결과가 박스스코어와 함께 자세히 실려있다 |
이후 동아일보 야구 기사를 더욱 발전시킨 이가 이길용이었다. 10대 때부터 인천의 주요 인사들과 친분을 쌓으며 체육, 문화운동에 투신했던 이길용은 1919년 3·1운동 때 임시정부의 비밀문서를 철도편으로 운송하는 책임을 졌다가 현행범으로 체포돼 만해 한용운 등과 함께 3년 형의 실형을 선고받은 독립투사였다. 1922년 출옥 후, 동아일보 사장 고하 송진우의 설득으로 동아일보에 입사한 뒤로는 1927년 동아일보 서울 본사로 근무지를 옮기며 체육기자로 이름을 날렸다.
‘조선운동기자단(한국체육기자연맹의 전신)’을 조직해 한국 스포츠 언론 태동에 산파 역할을 한 것도 이길용이었다. 특히나 이길용은 야구에 관심이 많아 대회가 있는 날이면 항상 야구장을 찾았다.
그는 경기 결과만 메모하던 여느 기자와는 달랐다. 경기 내용을 상세히 취재수첩에 적었고, 그것을 고스란히 기사 안에 녹였다. 특히나 ‘어느 팀이 이겼느냐’보다는 ‘어떻게 점수가 났고, 누가 잘했는지’를 구체적으로 묘사하는데 능했다. 이길용의 생생한 현장 기사를 접한 독자들은 야구장에 가지 않고도, 직접 관전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이길용이 기록을 집계해 통계를 내기 시작한 건 1926년에 열린 제2회 4구락연맹전부터였다. 역시 동아일보가 주최한 이 대회엔 서울의 4대 명문 야구부(중앙, 휘문, 배재, 경신고보)가 총출동했다.
당시 이길용은 기자로 현장을 누비면서도 경기가 시작하면 본부석에 앉아 기록원으로 변신했다. 이길용보다 야구기록에 해박한 이가 없는데다 그즈음 야구기자들은 기록원과 심판원 등을 병행했다.
제주도 서귀포 야구박물관에 걸려 있는 이길용 기자의 기념패(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이길용은 이해 4구락연맹전의 개인기록을 전부 집계해 타율왕을 뽑았다. 팀당 방어율(평균자책)을 계산해 최우수 방어율 팀을 선정하기도 했다. 우승팀에만 주목했던 야구계와 야구팬들은 이때부터 개인 타이틀에도 시선을 집중했다.
1928년 9월 12일 경성운동장에서 열린 4구락연맹전 휘문고보와 배재고보의 경기는 한국 야구기록사에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 경기에서 휘문 투수 한기준은 무려 22개의 탈삼진을 기록했다. 이길용은 이틀 뒤 ‘한께임(게임)에 삼진 입이(卄二, 스물두 개)’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휘문투수 한기준이 삼진 22개를 기록해 일본 최고기록인 와나카 오자와의 21개를 뛰어넘었다’고 보도했다.
이 기사가 획기적이었던 이유는 두 가지였다. 먼저 이길용이 한국뿐만 아니라 국외 야구기록에도 해박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이길용이 한기준의 22탈삼진을 알아챘다는 건 그가 기록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보관하며 수시로 과거와 현재 기록을 비교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길용은 어떤 식으로 기록하고, 집계를 했던 것일까. 신현철은 “평소 교류가 있던 일본 기자에게 기록법을 배운 이길용 선생이 미즈노와 다마자와 기록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 본격적인 기록을 시작한 것 같다”며 “체계적인 기록이 이뤄지면서 집계도 가능해졌던 게 아닌가 싶다”고 추정했다.
1929년 9월 21일 자 동아일보 기사. 이길용은 기록뿐만 아니라 별도로 집계를 내 타율왕과 각 팀의 평균자책을 산출했다. 동아일보는 한국 야구 기사의 전형을 바꿔놓은 신문이었다. |
1920년대 한국에서 활동하던 일본 기자들은 두 가지 방식의 야구기록법을 썼다. ‘미즈노’식과 ‘다마자와’식이 그것이었다. 미즈노와 다마자와는 일본의 유명 스포츠용품사로, 두 회사는 서로 다른 양식의 기록지를 판매했다. 양식이 다르다 보니 기록법도 상이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 기자들은 자신이 사용하기 편한 기록지를 선택했고, 이는 한국 기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일본 야구기록사엔 ‘미즈노식’과 ‘다마자와식’이란 말은 찾을 수 없다. ‘와세대식’과 ‘게이오식’이 있을 뿐이다. 여기서 잠시 한국 야구기록사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일본 야구기록사를 살펴보자.
일본 야구기록법의 양대산맥, 와세다식과 게이오식 1968년 고교대회 당시 경북고 기록지. 투수 임신근(작고)의 기록이 자세히 나와있다. 이 기록지에 적힌 기호와 방식은 이정렬이 '와세다식'을 차용해 만든 한국식이었다. 현재 일본에서 쓰고 있는 와세다식 기록법과 매우 유사하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일본에 야구가 소개된 건 1872년이다. 미국인 영어교사 호레이스 윌슨이 일본 입국 때 들고 온 공과 배트를 이용해 학생들을 가르친 게 일본야구의 시작이었다. 그 후, 야구는 ‘무사도’라는 일본 특유의 전통문화와 결합해, 정신주의 색채를 강하게 띠며 비중 있는 ‘학생 스포츠’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이때까지 일본 야구는 걸음마 단계에 불과했다.
그러던 중 1905년 와세다대 야구부가 미국 원정을 다녀오면서 일본 야구는 급격한 발전을 이룬다. 와세다대 야구부는 미국 팀들과의 26차례 친선경기에서 7승 19패로 열세를 기록했지만, 미국 원정을 통해 선진 야구기술뿐만 아니라 미제 유니폼, 배트, 공을 일본으로 들여오는 데 성공했다. 일본인들은 미제 야구용품을 토대로 자국 야구산업을 발전시켰다.
기록도 마찬가지였다. 와세다대 야구부는 미국 원정길에 눈여겨봤던 미국식 기록법과 기록지를 그대로 들여와 사용했다. 1925년 와세다대 출신의 도비타 쓰이슈가 자국 야구실정에 맞게 기록법을 수정하면서 일본 야구계는 이 기록법을 ‘와세다식’으로 불렀다.
와세다식 기록법은 많은 이의 흥미를 이끌었다. 기록지의 기록으로부터 타율, 평균자책, 수비율을 산출할 수 있고, 이를 통해 팀과 선수의 특징을 간명하게 파악하는 게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여기다 기록을 보는 재미도 관전 못지않게 쏠쏠했다.
1915년 아사히신문사 주최로 오사카 도요나카 운동장에서 제1회 전국중등학교 야구대회(일명 여름 고시엔대회)가 열렸을 때의 공식기록지. 이 기록지는 현재 오사카 고시엔구장 안에 있는 '고시엔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사진 속의 기록지는 '게이오식'기록법으로 작성돼 있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나오키는 미국식보다 기호와 표기가 간단한 새로운 야구 기록법을 창안하기에 이르렀다. 바로 ‘게이오식 기록법’이었다. ‘합리적이고 간결한 표기를 위해, 필요한 요소만을 기록한다'는 취지로 개발된 게이오식 기록법은 와세다식보다 기호가 간결해, 조금만 익숙해지면 훨씬 보기가 편하고 집계 실수도 줄일 수 있었다.
와세다식 스코어북(사진 왼쪽)은 기록란이 '십자 모양으로 4등분'돼 있다. 하지만, 게이오식(사진 오른쪽) 스코어북은 기록란에 구분선이 없고 백지상태다. 사진 위는 유격수(6)가 땅볼을 잡아 1루수(3)에게 던져 1아웃(I)이 됐다는 걸 표기한 것이다. 와세다식과 게이오식은 표기에서 차이가 난다. 사진 아래 우익수를 넘어가는 홈런 역시 표기에서 차이가 난다. |
현재 일본에서 ‘와세다식’은 주로 일반인이 사용한다. ‘게이오식’은 일본야구기구(NPB) 공식기록원들이 사용하고 있다. 신현철이 말한 미즈노식과 다마자와식은 바로 ‘와세다식’과 ‘게이오식’을 뜻하는 것이었다.
‘제2의 이길용’ 이정렬의 등장 '한국의 핸리 채드윅' 이호헌(이정렬) 선생(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4구락연맹전은 1936년 돌연 중단됐다. 이길용도 이해 동아일보를 떠났다. 이른바 ‘일장기 말소 사건’때문이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이 금메달을 따자, 이길용은 손기정의 시상식 장면을 찍은 사진에서 의도적으로 일장기를 지웠다. 비록 손기정이 일본 국기를 가슴에 달고 금메달을 땄지만, 그가 어디까지나 조선인임을 자부하고 싶은 ‘참 언론인’의 항거였다.
하지만, 조선총독부는 이를 문제 삼아 동아일보를 무기 정간조치했으며, 이길용을 비롯한 관련자들을 구속했다. 동아일보는 해방 전까지 더는 야구대회를 개최하지 못했다.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았던 이길용의 기사도 다시 볼 수 없었다. 여기다 침략전쟁에 광분한 일본이 1941년부터 일체의 야구경기를 금지하며 야구는 기나긴 동면에 들어간다.
야구가 긴 잠에서 깬 건 1945년이었다. 일본의 패전으로 기나긴 침략전쟁은 종지부를 찍었고, 조선은 해방을 맞았다. 이듬해인 1946년 조선야구협회가 결성되며 야구는 새로운 시대를 맞았다. 이해 5월 17일부터 19일까지 3일간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4도시대항야구대회는 해방 이후 처음으로 개최되는 야구대회라 의미가 각별했다.
이길용도 다시 동아일보로 돌아왔다. 그리고 1947년 전국규모 중등학교 야구대회인 ‘전국지구대표 중등학교 야구쟁패전’ 출범에 앞장섰다. (주:이 대회는 오늘날 황금사자기대회로 이어져 오고 있다)
그러나 해방 후, 이길용은 더는 현장을 누비는 체육 기자가 아니었다. 사업부 차장으로 일하며 대한체육사를 정리하는 일에 바빴다. 이길용의 손을 떠난 야구기록은 별로 발전한 게 없었다. 일본강점기 야구기록 수준을 유지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며, 야구는 다시 오랜 침체기에 빠졌다. 1953년 전쟁이 끝나자 뜻있는 야구인들이 과거의 야구기록지를 찾았지만, 대부분은 전쟁의 화마에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하지만, 이때 마산(지금의 창원)에선 ‘제2의 이길용’이 될 한 젊은이가 야구기록지를 보며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고 있었다. 그가 바로 훗날 ‘이호헌’이란 이름으로 개명하는 이정렬(80)이다.
일본 도쿄돔 지하에 위치한 야구박물관에 전시 중인 후지모토 히데오(한국명 : 이팔용)의 퍼팩트게임 당시의 기록지. 부산 출신의 이팔용은 1960년 6월 일본 프로야구 최초로 퍼팩트게임을 달성했다. 기록지는 단순한 기록용지를 떠나 이렇듯 한 시대의 야구사를 정리하고, 증언하는 귀중한 유물이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경남 마산 출신의 이정렬은 마산상업(현 마산 용마고) 시절 우수한 학업성적과 뛰어난 야구실력으로 ‘마산 천재’로 불렸다. 서울대 상대에 입학해서도 그는 학업과 야구를 병행했다. 지금이야 서울대 야구부 실력이 다른 대학팀에 비해 전력이 떨어지지만, 이정렬이 재학 중일 때의 서울대는 강팀 축에 끼었다. 당대 최고의 선수 장태영(작고) 역시 서울대 야구부의 일원이었다.
1953년 한국전쟁 휴전과 함께 이정렬은 서울대를 졸업하고 산업은행에 입사했다. 여기저기 입사 제의가 많았지만, 이정렬은 은행원과 야구선수를 병행하는 산업은행을 택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산업은행 야구부는 해체됐고, 이정렬은 고심 끝에 고향 마산으로 낙향한다.
“당시 집안이 전국에서 가장 큰 양조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야구부가 해체된 산업은행에서 일반 행원으로 남느니 고향에서 가업을 잇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곧바로 짐을 싸 마산으로 내려갔다.” 이정렬의 회고다.
고향으로 내려간 이정렬은 가업을 이으면서 ‘마산군’이란 사회인야구팀에서 뛰었다. 그러다 협회 일을 돕게 된다.
“하루는 회사로 마산야구협회 회장과 이사들이 찾아왔다. 대뜸 ‘협회 운영자금이 부족하다. 네가 경비 좀 대라’고 했다. 안면이 있는 분들의 부탁이라 거절하지 못하고 수시로 운영비를 보태줬다. 그렇게 협회 일을 돕다 보니 어느새 마산야구협회 임원이 돼 있었다.”
그즈음 이정렬은 야구장에 갔다가 무심코 기록원들이 작성한 기록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한국전쟁 당시 읽을 책이 없어 과거의 기록지를 책 삼아 수백 번이나 읽었던 이정렬로서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록지였다.
“기록지에 적힌 내용이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기호들도 난생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기록원한테 물으니 자기가 만든 기호들이라고 했다. 다른 기록원의 기록지를 보니 또 기호가 달랐다. 두 기록원에게 ‘서로의 기록지를 알아보겠느냐’고 물었더니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니나다를까, 기록원마다 기록지 작성법이 다르니 개인별 기록 집계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정렬은 빈약한 기록 내용에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볼 카운트를 전혀 기록하지 않았다. 타자가 볼넷으로 출루해도 도대체 몇 구에 나갔는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안타, 볼넷, 삼진, 실책 정도만 간단히 표기할 뿐이었다. 미국과 일본의 기록지는 해가 갈수록 정교해지는데, 우리의 기록법은 해방 전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이렇게 해선 한국 야구사를 바르게 기록할 수 없다는 우려가 생겼다.”
1964년 동아일보 야구기록 칼럼을 썼던 이정렬 |
‘앞으로 한국야구도 미국과 일본처럼 기록과 통계를 중시할 것’으로 내다본 이정렬은 일본 지인에게 “야구기록법과 관련한 서적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일본에서 서적이 도착하자 이정렬은 밤을 새우며 책들을 읽어나갔다. 그리고 한국 실정에 맞는 기록법 통일안을 만들고자 연구를 거듭했다.
“일본 기록은 기호나 설명에서 일관성이 있었다. 오늘 경기와 내일 경기의 기록지 기호가 같았다. 라디오로 일본 프로야구를 들으면서 책에서 본대로 기록지에 직접 기호를 썼다. 의문점이 한둘이 아녔지만, 당시는 한·일 국교정상화 이전이라, 일본 야구인들에게 물을 수가 없었다. 그럴 때면 내가 새롭게 기호를 만들고, 기록법을 수정했다. 지금 한·일 야구기록이 일정부분 다른 건 바로 그 때문이다.”
그로부터 반년 가량이 지나자 이정렬은 서울에 올라와 스포츠 기자들과 접촉하며 자신이 만든 기록법을 설명했다. 반응은 좋았다. 스포츠 기자들은 이정렬의 기록법을 직접 써보고는 “왜 진작 이런 기록법을 보여주지 않았느냐”며 타박 아닌 타박을 했다.
이윽고 이정렬은 '기록의 대가'로 불리며 마산을 넘어 서울에까지 이름을 알린다. 그러던 1963년 이정렬에게 제안이 들어왔다.
“그해 서울에서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가 개최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공식기록원을 맡을 사람이 없었다. 기록원으로 활동하는 이들은 있었지만, 다들 손 사례를 쳤다. 그도 그럴 게 외국 선수단과 기자들에게도 기록지를 줘야 하는데, 자기만 아는 암호를 잔뜩 적어놓았으니 자신이 있을 턱이 없었다. 결국, 대한야구협회에서 나보고 '대회 기록위원장과 공식기록원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이정렬은 고심 끝에 수락했다. 대한민국 야구 사상 첫 공식기록원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아시아경기대회를 무사히 끝낸 이정렬은 이후 뜻이 맞는 기자들과 함께 '기록연구회'를 만들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기록강습회를 열었다.
“조동표, 조광식, 노진호 등 쟁쟁한 기자들이 모임에 참가했다. 그들과 함께 일본 야구기록을 토대로 우리식의 야구기록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토론은 진지했다. 한국식 기록법을 통일하기 위해 이정렬과 기자들은 갑론을박했다. 시간이 흐르고, 이정렬과 기자들은 드디어 한국식 기록법 통일안을 만들었다. 현재 한국 야구계가 쓰는 기록법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기록법은 와세다식과 게이오식 가운데 어느 것과 비슷했을까. 이정렬은 “와세대식을 기본으로 했다”고 털어놨다.
“게이오식은 간결하고 보기에 편했지만, 보다 자세한 기록을 적기엔 한계가 있었다. 공교롭게 일본 지인이 보내준 기록 서적들도 와세다 기록법에 관한 것들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와세다식 기록법을 한국식 기록법의 토대로 삼은 건 잘했다는 생각이다.”
이정렬은 협회 사무국장을 맡으면서도 대회가 있는 날이면 기록원을 도맡았다. 그리고 다른 일은 제쳐놔도 기록강습회만은 빠지지 않고 강사로 나왔다. 이정렬의 등장으로 한국야구는 본격적인 데이터 야구를 할 수 있게 됐다.
“이정렬 씨의 주장으로 1964년 한국 야구 사상 처음으로 패넌트레이스가 도입됐다. 개별 대회라면 그날 컨디션에 따라 승패가 좌우되겠지만, 패넌트레이스는 팀마다 철저한 준비와 대비가 필요했다. 이정렬 씨는 미국과 일본 프로야구처럼 패넌트레이스엔 무엇보다 데이터가 중요하다는 걸 인식해 자신이 작성한 기록을 토대로 다양한 데이터를 만들어냈다. 이것이 중심이 돼 본격적인 개인 시상제도가 시행됐고, 각 팀에서도 데이터를 토대로 타순과 선발투수를 정하게 됐다.” 신현철의 설명이다.
서울운동장에서 해설가로 야구경기를 중계 중인 이호헌(사진 맨 위쪽)과 KBS 이규항 아나운서(사진 중간) |
1964년 이정렬은 우연한 기회로 야구 해설을 맡게 된다.
“라디오 방송을 할 때면 캐스터와 해설가 옆에 항상 내가 앉아 기록했다. 그날 KBS가 방송했는데, 해설가가 무슨 일인지 펑크를 냈다. 그러자 PD가 찾아와 '이번 한 경기면 해설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단발 해설인 줄 알았던 이정렬은 그 후, 기존 해설가들을 제치고 한국 최고의 야구해설가로 발돋움한다. 방송과 협회 일이 바빠지자 이정렬은 이름을 이호헌으로 바꾸고, 1968년 공식기록원 자리를 신현철에게 물려준다.
인천고-성균관대-경성전기 야구단에서 선수로 뛰었던 신현철은 모교 성균관대에서 감독을 맡고 있었다. 이정렬의 요청으로 공식기록원이 될 때까지 기록과는 담을 쌓고 살았다. 하지만, 야구기록의 중요성을 인식한 신현철은 밤낮없이 기록법을 공부했고, 어느덧 이정렬에 맞먹는 ‘기록의 대가’가 됐다.
특히나 신현철은 실업, 대학, 고교야구의 공식기록을 집계하는데 정성을 쏟았다. 그의 노력으로 1천여 명에 달하는 선수들의 개인기록 카드가 완성됐다. 신현철은 이정렬이 만든 기록법을 토대로 부단히 개선작업을 벌였고, 한국야구 기록사 정리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하며 이정렬은 한국야구위원회(KBO) 사무차장, 신현철은 기록통계를 담당하는 KBO 운영부장을 맡았다. 신현철은 프로야구 출범을 준비하며 일본을 왕래하는 상선을 통해 NPB 야구연감을 구했다. 그해 모든 기록이 실리는 KBO 야구연감은 신현철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1982시즌이 끝나고서 신현철은 박기철, 이상일을 신입 기록원과 통계원으로 뽑았다. 박기철은 훗날 한국 야구기록의 대부로, 이상일은 KBO 행정을 책임지는 사무총장이 된다.
목동구장 창고에 보관 중인 과거 기록지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신현철은 “과거의 귀중한 기록지들이 야구인들의 무관심과 대한야구협회의 무지로 대거 사라졌다”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1980년대 대한야구협회 관계자들이 ‘저런 종이들을 보관해서 뭐하느냐’며 과거의 귀중한 기록지들을 대거 폐기했다. 동대문구장 창고가 불타 사라진 기록지도 수천 장에 이른다. 특히나 대회 기록 시 일관성 있게 하나의 기록책(스코어북)을 써야 하는데, 기록원들이 손에 잡히는 데로 스코어북을 쓰는 바람에 대회 기록이 뒤죽박죽으로 섞였다. 그 사람들이 야구 기록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역사임을 알았더라면 감히 기록지를 그런 식으로 대하진 않았을 것이다.”
야구 역사를 대하는 방식은 지금도 여전하다. 그나마 남아있는 아마추어 야구기록지는 곰팡이가 잔뜩 쌓인 채로 목동구장 창고 한편에서 가는 숨을 쉬고 있다.
- 2편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