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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개의 말이 연이어 붙어 있는 말을 간편하게 줄이고자 할 때, 첫 글자들만 모아쓰는 방법을 많이 사용한다. 이를 영어로는 아크로님(acronym)이라 하고, 한자어로는 약성어(略成語), 두문자어(頭文字語)라고 한다고 한다. 우리말로는 아직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없는 것 같은데 ‘첫머리(모음)말’, 또는 ‘첫머리(모음)글’로 함은 어떨는지...
‘United Nations’의 첫 글자를 딴 ‘UN’이라든가(일본에서는 ‘국제연합(國際聯合)’을 줄여 ‘국연(國聯)’이라고 함.), ‘입학시험(入學試驗)’의 ‘입시’가 그러한 보기이며, 개화기 때 일본 사람들이 ‘북 키핑(Book Keeping)’을 첫음절 모으기 방식으로 ‘부기(簿記 : 자산, 자본, 부채의 수지‧증감 따위를 밝히는 기장법(記帳法))’라 한 것도 같은 보기라 하겠다.
우리나라 방송국의 이름들인 ‘KBS’, ‘MBC’, ‘SBS’도 그러한 보기들이다. 이들은 각각 ‘Korean Broadcasting System’, ‘Munhwa Broadcasting Company’, ‘Seoul Broadcasting System’의 첫 글자들로 ‘KBS’는 ‘한국방송조직’, ‘MBC’는 ‘문화방송회사’, ‘SBS’는 ‘서울방송조직’이란 뜻임은 아실 수 있을 것이다. 영국의 ‘BBC’는 ‘British Broadcasting Corporation’의, 미국의 ‘NBC’는 ‘National Broadcasting Company’의 첫 글자로서, 각각은 그들 단어의 첫 글자를 딴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의 ‘KBS’, ‘MBC’, ‘SBS’도 애초부터 좀 더 주체의식을 가지고 생각해 보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다. 특히 공영방송인 ‘KBS’에 더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
영어로 표기를 하는 데 무슨 주체의식이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웃나라 일본의 경우를 보자. 일본의 공영방송인 ‘NHK’가 무엇의 약자일까. 한자로 ‘日本放送協會(일본방송협회)’라고 쓰니까 단순한 생각으로는 ‘JBA(Japan Broadcasting Association)’정도로 써야 하는데...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말로 그대로 옮겨 ‘Nippon Hoso Kyokai-にっぽん(日本) ほうそう(放送) きょうかい(協會)-닛뽄 호소 교우까이’로 옮겨 첫 글자를 따고 있다. 축구나 야구 같은 종목의 국제경기대회에서 그들의 유니폼에서 보았겠지만 그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이 불러주는 ‘Japan’을 쓰지 않고 그들 고유의 ‘Nippon’을 쓰고 있다. 입에 익숙해진 말인 것을 어떻게 하겠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세계화시대에도 일본은 다른 나라 사람들이 익숙한 ‘Japan’을 ‘Nippon’으로 고쳐서 쓰고 있다. 우리가 일본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이 있다할 지라도 이런 면을 볼 때는 무조건 일본을 매도해서도 안 될 일이라 생각한다.
이처럼 영국이나 미국이나 일본은 다 제 나라 말의 첫 글자를 따서 그들의 방송국 이름으로 쓰는데, 우리는 그러지 못한 것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글자 생활에서도 ‘우리’는 ‘우리’를 찾아야 하겠다. 우리 스스로가 느끼지도 못한 채 우리 겨레의 말과 얼이 죽어가고 있다. 지난 수천 년 동안 한문 종살이를 했고, 일제강점기 때에는 일본말에 치어 사라질 뻔 하였으며, 해방이후 우리말이 제대로 나랏말로서 대접받고 제 몫을 하려던 차에 이번에는 미국말에 치어 몸살을 앓고 죽어가고 있다.
회사도 정부기관까지도 제 겨레말 이름을 버리고 미국말 이름으로 바꾸기 바쁘다. KT, KTF, KT&G, KB, SK, SKT, SDS, LG, GS, POSCO 등 온통 영문 간판과 이름이 어지럽다. 이름만 그런 게 아니다. 기차는 KTX를 타야하고, 축구는 K-league를 봐야한다. 영어를 공용어로 하는 회사가 있고 영어로만 수업을 하는 대학과 고등학교도 있고, 영어 마을도 여기 저기 생기고 있다.
창피함을 느끼면서 외국의 자기말사랑 운동을 살펴보자. 독일에서는 2차 대전 뒤에 그들이 천여 년 동안 써 오던 라틴어를 내쫓고 새 말을 만들 때 ‘창문’을 ‘해(日) 받아들이는 구멍’으로, ‘코’를 ‘얼굴의 탑’으로, ‘극장’을 ‘연극 구경시키는 성곽’으로 고쳤다고 한다. 비록 성공은 못 했다지만, 그들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자기말가꾸기 운동이다. 또한 일본은 서양 외국어인 ‘culture’를 ‘문화(文化)’로, ‘grammar’를 ‘문법(文法)’으로 바꾸었고, 영어의 ‘week’에 해당하는 네덜란드 말을 반세기에 걸친 노력으로 ‘주일(週日)’로 정착시켰으며, ‘사회(社會)’나 ‘동기(動機)’란 말을 중국의 옛 책인 <근사록(近思錄)>에서 따다가 외국어를 대신했다. 우리는 그 말들을 가져다가 아무 거리낌이나 부담감 없이 그대로 쓰고 있고...
미국에서는 해마다 철자법(맞춤법) 경시대회가 열리는데, 10살에서 15살까지의 어린이들이 참가하는 이 대회는, 미국민들에게 국어에 대한 애호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한다. 예전에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받아쓰기라는 시험이 있었는데 요즘도 받아쓰기를 하긴 하는 모양인데 영어 단어 받아쓰기를 한다고 한다. 맞는지는 모르겠다.
자기말사랑의 극치(極致)를 보여주는 나라가 프랑스이다. 러시아사람들은 영어를 몰라서 대답을 못하지만 프랑스사람들은 영어를 알아도 자기나라에서 자기나라말로 물어보지 않으면 웬만해서는 대답을 하지 않는 다는 것은 얘기를 하지 않아도 다 아는 사실일 것이다.
한글날이 국경일임에도 국가 공휴일에서 제외하는 나라의 윗분들이, 영어를 모국어처럼 사용하고들 계시면서 국민에게만 겨레말을 사랑하라고 말기는 민망하겠지만 공영방송인 한국방송공사 사장님! 한번 생각해 주시렵니까? ‘KBS’를 국내에서는 ‘한방공’, 대외적으로는 ‘HBG’로 하는 것에 대하여... “Hankook Bangsong Gongsa”의 ‘첫머리(모음)말’인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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