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홍범도장군의 의병부대는 1908년 3월 차도선(車道善), 태양욱(太陽郁) 등 의병수뇌부가 일제의 회유공작에 말려 수난을 겪게 되었고홍범도장군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차도선, 태양욱 양인은 '귀순'을 원하던 2백여 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1908년 3월 17일 일군에게 '귀순'해 버렸으나 일군들은 무장해제 유예기간 1개월의 약조를 지키기는커녕 '귀순'의병들을 즉각 무장해제시켜 버렸고 이에 저항하던 태양욱은 총살되었고, 차도선 등은 홍범도를 유인할 목적에서 피체, 투옥되었습니다.
이들의 '귀순'은 의병부대의 전력에 중대한 손실을 가져와 항일전 수행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이 무렵 일제는 홍범도장군을 위협, 유인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의 아내와 아들 용범(龍範) 등 가족을 구류시켜 인질로 삼는 비열하고도 잔인한 짓까지 서슴치 않았다. 그러나 홍범도장군은 구국대의를 위해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의병부대의 전열을 가다듬기에 바빴고 결국 그의 가족(부인과 큰아들)은 끝내 일군에게 희생되는 비운을 맞고 말았다.
그후 불굴의 투지로 의병부대의 재편성에 착수한 홍범도장군은 1908년 4월부터 5월 중순까지 삼수, 갑산, 무산, 북청 일대를 몸소 돌아다니면서 아직 의병부대에 가입하지 않은 산포수들과 청년들을 권유하여 의병에 가담시켰다. 그 결과 홍범도장군의 의병부대는 재편되어 1908년 4월 말에는 5백여명, 다시 5월 중순에는 650여 명에 달해 새로운 항일전을 펼칠 수가 있었던 것이다. 홍범도장군은 1908년 4월부터 의병항전을 재개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그는 같은해 12월 노령 연해주로 근거지를 옮길 때까지 삼수, 갑산, 장진(長津), 북청 등지를 오가며 각처에서 일군과 조우,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뿐만 아니라 각 지방의 일진회 회원 등을 비롯한 부일주구들을 처단, 민족반역자들에게 경종을 울리기도 하였다. 홍범도장군은 한반도 북부지방의 의병항일전을 주도하는 핵심인물로 부상하게 되었으며, 이 일대의 주민들로부터는 열렬한 추앙을 받게 되었다. 이때 당시 함경도 북부지방에서 그의 의병부대의 항일전을 찬미하며 불리던 노래가 “날으는 홍범도가“이다.
이처럼 홍범도장군이 도처에서 일군들을 격파하며 의기(意氣)를 드높히자, 일제는 크게 당황해 일군 동부 및 북부수비관구 전 병력을 동원하여 6, 7월 2개월을 홍범도장군의 의병부대 '대토벌' 기간으로 정해 놓고 홍범도 의병 '토벌'에 전력을 기울였으나 홍범도장군은 신속한 유격전술을 효과적으로 벌여 이들의 예봉을 피해가며 영웅적인 항전을 계속해 나갔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할수록 홍범도 의병부대는 전력이 점차 소모 되었다. 한 기록에 의하면, 홍범도장군의 의병부대가 1907년 11월 15일 봉기 이후 탄약 고갈로 고통을 받던 1908년 9월까지 일군과 약 37회의 대소 회전을 치뤘다고 한다. 홍범도장군이 연해주로 건너간 것은 무기와 탄약을 구입하는 일방, 연해주 일대의 의병부대 및 남한의 의병부대와도 연락을 취해 대규모 의병항전을 수행하기 위한 목적이었으나 그는 그러한 목적을 쉽게 달성할 수가 없었다. 안중근(安重根), 엄인섭(嚴仁燮) 등이 인솔하는 의병이 국내진입작전에서 일군에 패한 뒤 연해주의 의병항전 분위기가 침체되어 있었던 까닭에 그의 의병규합노력은 여건상 불리한 형편이었고 결국홍범도장군은 1910년 3월 마침내 일단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서간도의 장백현(長白縣) 왕개둔(汪開屯)으로 망명하고 말았다. 1913년 그는 부하들을 거느리고 노령 연해주로 근거지를 옮겼고이로써 홍범도장군의 의병항전은 종료되었다.
 | 1913년 노령 연해주로 옮아간 홍범도 일행은 블라디보스톡 등지에서 '노동회(勞 會)'를 조직하고 시베리아철도부설공사 등 각종 노동현장에서 일하면서 무장항일투쟁의 적기(適期)만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그러던 중 국내에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거족적인 항일기운이 일게 되자, 홍범도장군은 즉각 독립군 조직에 착수, 그해 3∼6월 사이에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을 창설하기에 이르렀고 그리고 그해 8월에는 간도의 백두산 부근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홍범도장군의 대한독립군은 간도로 근거지를 옮긴 직후인 8월에 독립운동자들의 숙원이던 국내진입작전을 전개해 두만강을 건너와 혜산진(惠山鎭)의 일군수비대를 습격, 이들을 섬멸시켰고 이것은 3·1운동 후 전개된 최초의 국내진입작전으로, 이후 왕성하게 펼쳐지는 독립군 항전의 도화선이 되었던 것이다. 이어 10월에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은 강계(江界), 만포진(滿浦鎭)에 진입하여 그곳을 점령하고 자성(慈城)에서 일군과 격전을 벌여 일군 70여 명을 살상시키는 전과를 올렸고이듬해(1920) 봄이 되자, 홍범도장군의 대한독립군은 대규모 국내 진입작전을 계획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분산된 독립군단을 하나로 통합, 군력을 집중시키는 일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이에 홍범도는 군단 통합에 착수, 우선 대한국민회의 국민군과 대한독립군을 통합하였다.
간민회(墾民會)의 자치와 전통을 계승, 간도에서 결성된 대한국민회는 3·1운동 이후 간도지방에서 가장 세력이 큰 항일단체로 부상하면서 군무위원 안무(安武)를 지휘관으로 하는 국민군을 편성하였던 것으로 이를 홍범도장군의 주장에 따라 대한독립군과 통합한 것이다. 그 통합된 군단의 행정과 재정은 국민회가 관장했으며, 군무는 대한독립군을 홍범도장군이, 국민군을 안무가 담임하여 지휘토록 하고, 군사작전을 전개할 때에는 홍범도장군이 두 군단을 '정일제일군사령관'(征日第一軍司令官)이란 이름으로 통수케 하였고 이어 정일제일군은 최진동(崔振東)의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와의 군사통일도 이룩하였다. 결국 홍범도장군 등의 군사통일 노력에 의하여 1920년 5월 28일에는 대한독립군, 대한국민회의 국민군, 군무도독부가 연합하여 하나의 독립군단인 대한군북로독군부(大韓軍北路督軍府)를 조직하고 화룡현(和龍縣) 봉오동(鳳梧洞)에 병력을 집결시키면서 강력한 국내진입작전을 계획하였다. 이 무렵 대한군의 병력은 군무도독부계가 약 6백 70명, 홍범도장군과 안무계를 합하여 약 5백 50명, 도합 1천 2백여 명으로 추산된다. 통합된 독립군단은 1920년 6월 7일에, 청산리승첩과 더불어 독립군항전사에 영원히 기록될 봉오동 승첩을 거두게 된다.봉오동승첩은 그 전단이 독립군이 수행하던 통상적 국내진입작전에서 비롯되었다. 6월 4일 새벽 30여명으로 구성된 일단의 독립군 소부대가 종성(鍾城) 북방 5리 지점의 강양동(江陽洞)으로 진입, 일제헌병순찰소대를 격파한 뒤 날이 저물어 두만강을 건너 귀환하였고 일제 이 패배를 설욕코자, 남양수비대 소속의 1개 중대와 헌병경찰중대로 하여금 독립군을 추격케 하였으나, 도리어 이들은 삼둔자(三屯子)에 이르러 독립군의 반격으로 전멸되고 말았다. 이것이 봉오동 승첩의 서전에 해당하는 삼둔자전투이다. 일제는 삼둔자전투의 대패소식에 커다란 충격을 받아 함남 나남(羅南)에 사령부를 두고 두만강을 수비하던 일군 19사단은 즉시 안천(安川) 소좌가 인솔하는 월강추격대대(越江追擊大隊)를 편성하여 두만강을 건너 중국령 북간도에 진입, 독립군을 공격케 하였다. 그들은 미리 상부로부터 시달받은 작전명령에 따라 안산(安山) 방면을 거쳐 고려령(高麗嶺)을 향해 곧바로 봉오동 입구로 진입하여 왔다.
홍범도장군이 지휘하는 독립군은 일군 추격대의 진로를 정확히 예측하고 만반의 요격계획을 세워 포위망을 쳐놓고 이들의 진입을 기다렸다.홍범도장군의 부대는 봉오동의 주민을 모두 대피시킨 뒤 험준한 사방 고지에 독립군 각 중대를 매복, 배치하여 일군 추격대를 유인, 포위하여 일망타진한다는 작전을 세워 놓았던 것인데이와 같은 독립군의 매복상황을 알지 못한 채, 일군 추격대는, 이화일(李化日)이 이끄는 독립군 유인부대와 접전을 벌인 뒤, 7일 오후 1시경 완전히 독립군의 포위망 속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홍범도장군은 일제사격의 신호탄을 발사하였다. 미리 매복해 있던 독립군은 이를 신호로 삼아 삼면고지에서 일군을 향해 집중사격을 개시하였고불의의 기습공격을 받은 일군은 신곡(神谷) 중대와 중서(中西) 중대를 전방에 내세워 결사적인 돌격을 시도하는 한편 기관총대로 하여금 응전토록 하였으나, 지형적 우세를 점한 채 퍼붓는 독립군의 일제공격을 감당할 길이 없어 사상자만 속출할 뿐이었다. 이러한 포위망 속에서 3시간 동안 필사적인 저항을 하던 일군 추격대는 사상자가 속출함에 따라 더 이상 응전치 못하고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독립군 제2중대장 강상모(姜尙模)는 부하들을 독려하여 퇴각하는 일군을 맹렬히 추격, 다시 큰 타격을 가하였다. 이로써 독립군 본영을 일거에 분탕하려던 일제의 월강추격대대는 봉오골에다 엄청난 전사자만 남겨 놓은 채 동남방의 비파동(琵琶洞)을 거쳐 유원진(柔遠鎭)으로 패퇴하고 말았다. 이것이 봉오동승첩의 경과이다. 상해 임시정부 군무부의 발표에 의하면, 봉오동 승첩에서 올린 전과는 일군 사살 1백 57명, 중상 2백여 명, 경상 1백여 명에 달하였다.홍범도장군이 지휘한 봉오동승첩은 독립군들 뿐만 아니라 전독립 운동자들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켜 놓았으며 독립군들은 이러한 봉오동 승첩을 10년 이래의 숙원인 '독립전쟁의 제1회전'이라 부르면서 계속적인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준비를 갖추어 가게 되었던 것이다. 홍범도장군은 봉오동승첩을 거둔 뒤 군무도독부를 떠나 약 3백여명의 부하들과 함께 연길현(延吉縣) 명월구(明月溝)로 근거지를 옮겼다. 그러나, 일제가 간도지역에 대하여 정치적, 군사적 압박을 가해옴에 미쳐 여러 한국독립군단은 1920년 8월부터 새로운 항전기지를 찾아 장정(長征)을 떠나게 되었다. 홍범도장군이 거느리는 대한독립군단이 제일 먼저 근거지 이동을 개시해 안도현(安圖縣) 방면의 백두산 기슭을 향하였고, 뒤이어 국민회군, 의군부(義軍府) 등의 독립군단도 이도구(二道溝) 방면으로 이동하였으며,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도 왕청현(汪淸縣) 서대파(西大坡)를 떠나 삼도구(三道溝)로 향하였던 것이다. 이곳에서 그는 국민회의 지원을 받아가며 군사통일에 주력하는 한편, 간도 일대의 지리를 연구하며 독립군의 전력을 강화시켜 장차 있을 독립전쟁에 대비하였다. 한편, 일제는 이 무렵 봉오동에서의 참패를 설욕코자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間島地方不 鮮人剿討計劃)이라는 대규모 독립군 '토벌' 계획을 세워 놓고, 1920년 10월 2일 소위 혼춘사건(琿春事件)을 조작, 일군의 간도 출병 구실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일군은 5개 사단에서 차출한 2만 5천여명의 엄청난 병력을 동원해 10월 7일부터 간도를 침입, 독립군 '섬멸'작전을 펴기 시작하였다. 그 가운데 일부의 병력인 19사단의 동지대(東支隊)가 인솔하는 5천여명의 일군이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 주둔한 이도구(二道溝)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이 주둔한 삼도구(三道溝)로 진격해 들어 왔다.
그리하여 독립군과 일군은 청산리 일대에서 일대 격전을 벌이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청산리전투이다. 한국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빛나는 대첩을 기록한 청산리전투는 김좌진이 지휘한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가 지휘한 대한독립군, 국민회의 국민군 등의 연합독립군이 1920년 10월, 두만강 상류의 북쪽으로 40∼50km 지점에서 위치한 화룡현 삼도구와 이도구 서북방의 청산리, 어랑촌, 봉밀구 등지에서 간도를 침입한 일제의 독립군 '토벌군'과 대회전을 벌인 것이다. 청산리승첩은 백운평(白雲坪)전투를 시작으로 완루구(完樓溝), 천수평(泉水坪), 어랑촌(漁郞村), 맹개골, 만기구(萬麒溝), 쉬구, 천보산(天寶山), 고동하곡(古洞河谷) 전투 등 1920년 10월 21일부터 10월 26일까지 6일동안 벌어졌던 일련의 독립군항전을 통칭하는 이름이다. 이 전투들은 모두 홍범도의 연합독립군과 김좌진이 인솔하는 북로군정서군이 단독, 혹은 연합작전으로 수행하였던 것이다. 이 일련의 전투에서 독립군은 실로 막대한 전과를 거두었다. 연대장 1명 대대장 2명을 포함, 일군 장병 1천 2백여명을 사살했고, 200여명을 전상(戰傷)시켰으며, 기타 많은 전리품을 노획하였다. 이로써 일군은 독립군을 '초토'하려던 당초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고, 이후 그들은 무고한 한인양민들을 대상으로 경신참변(庚申慘變)이라 통칭되는 잔인한 보복살육행위를 자행하게 된다. 봉오동, 청산리승첩을 이룩한 뒤 홍범도장군은 부하들을 이끌고 북상길에 올랐다. 그리하여 밀산(密山)을 거쳐 1921년 1월초에는 우수리강을 건너 노령 이만으로 들어갔다.홍범도장군의 대한독립군 외에도 북로군정서, 국민회군, 군무도독부군 등 만주에서 활동하던 거의 모든 독립군단들이 이곳으로 집결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곳에 모인 대소 독립군단의 대표들이 회동하여 독립군 대회를 열고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결성하게 된다. 그 총재에는 서일(徐一)이 올랐으며, 홍범도장군은 부총재가 되어 군사작전을 실제 총지휘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이만으로 들어간 이 대한독립군단은 그후 다시 북정을 개시, 알렉세호스크 자유시(自由市)로 이동하였다.
자유시 참변과 항일 독립운동침체 홍범도장군의 만년 그러나, 그해 6월 한국무장독립투쟁사상 최대의 비극적인 사건인 자유시사변이 발생하게 되어 대한독립군단의 항일전 재개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후 홍범도장군은 이르크츠크에 있던 코민데른 동양비서부의 독립군 집단이주 정책으로 말미암아 8월 5일 이르크츠크로 이송되었고 그 후 그는 민족해방유격대의 원로로서 예우만 받게 되었던 것이다. 1922년 1월 22일에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 상당한 기간 동안 그곳에 머물었고그뒤 홍범도장군은 1922년 전반기에 다시 이만으로 돌아갔다. 이후 그는 브라고웨시첸스크[자유시, 흑하(黑河)]에서 이동휘(李東輝), 문창범(文昌範) 등과 함께 고려중앙정청(高麗中央政廳)을 조직하고 9월 1일에는 치타에서 그 대표자회의를 여는 등 한인사회의 자치활동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1937년에 홍범도장군은 그의 부하들과 함께 스탈린의 한인 강제이주 정책에 따라 다시 중앙아시아로 이주하게 되었으며 그는 최후의 귀착지가 된 현재의 카자크공화국의 크즐-오르다 지방에 정착, 집단농장에서 만년을 외로이 보내다가 1943년 75세로 작고해 그곳 공동묘지에 묻혔다. 대한민국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를 추서 하였다. |
 | 1920년 만주 봉오동에서 독립군부대가 일본 정규군을 대패시킨 전투. 1920년 6월4일 독립군 홍범도.최진동부대의 1개소대가 북간도 화룡현 월신강 삼둔자를 출발하여 두만강을 건너와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에 주둔하고 있던 1개소대 규모의 일본군 헌병 국경초소를 습격, 격파하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157명의 전사자와 200여명의 부상자를 내었으며, 아군은 장교1명, 병졸 3명이 전사하고 약간의 부상자를 내었을 따름이었습니다."
당시 일본군은 독립군의 국내 진입전과 대안의 활발한 독립군 활동에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방비책을 강구하고 있었기에, 강양동의 전투는 대전투의 도화선이 되었다. 급보를 받은 일본군 남양수비대는 1개 중대를 출동시켜 반격전을 전개해왔다. 독립군사령부는 1개소대를 삼둔자 서남쪽 봉화리에 매복시키고, 약간의 병력으로 총격전을 벌이면서 일본군을 유도하였다. 일본군은 잠복해 있는 독립군부대 앞까지 추격해왔으며, 이 때가 6월 6일 오전 10시였다. 독립군은 100m 고지에서 일제히 사격을 퍼부어 60명을 사살하였는데, 독립군은 2명이 전사하고 재류동포 9명이 유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홍범도·최진동 등 독립군 수뇌부에서는 열세한 병력으로 우세한 적과 대결하려면 작전상 요지를 점령하는 것이 득책이라 판단하고, 북편으로 퇴각하여 안산촌락 후방고지에서 수세를 취하였다. 6월 7일 새벽 야스카와부대가 전방 300m의 텅빈 안산촌락으로 돌입할 때에 잠복 중이던 독립군이 일제히 총격을 가하였다.
야스카와부대는 니히미중대와 합세하여 응전하였으나 지리적 악조건과 불의의 기습을 받아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 다시 대오를 정비한 야스카와부대는 야마자키중대를 주력으로 독립군을 추격하였다. 야스카와부대가 고려령 서방에 도착하였을 때 북방 및 동북방 고지에서 매복하고 있던 독립군의 치열한 사격을 받은 일본군은 소수의 독립군에게 참패를 당하였다. 안산과 고려령 두 전투에서 120명의 전사자를 낸 뒤에도 거듭 독립군의 유도작전에 말려들어 봉오동으로 유인되었다. 봉오동전투는 삼둔자 부근 전투에 이어 전개되었다.
|  | 봉오동은 두만강에서 40리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려령의 험준한 사줄기가 사방을 병풍처럼 둘러쳐진 장장 수 십리를 뻗은 계곡지대이다. 봉오동에는 100여 호의 민가가 흩어져 있었는데 독립군 근거지의 하나로서 최진동의 가족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 민가는 상촌(북촌)·중촌(남촌)·하촌 등 3개 부락에 흩어져 있었으며, 상촌은 봉오동을 대표하는 곳으로 독립군의 훈련장이 있었다. 독립군은 6월 7일 아침부터 일본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홍범도와 최진동의 연합부대를 새로 재편성하였다.
1·2·3·4 중대의 각 책임자로 이천오.강상모 강시범 조권식을 정하였으며 별개로 2개 중대를 두었다. 안무는 사령부부관으로, 이원은 연대부장교로, 최진동을 사령관으로 홍범도를 연대장으로 정하였으나 이는 형식에 불과하고 실제로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끈 것은 홍범도장군이었다. 작전진행은 다음과 같다. 제1중대는 상촌서북단에, 제2중대는 동쪽고지에, 제3중대는 북쪽고지에, 제4중대는 서산남단 밀림 속에 매복하고, 연대장 홍범도는 직접 2개 중대를 인솔하고 서남산 중턱에 위치하여 일본군의 선봉이 봉오동 어구를 통과하도록 유도하여, 일본군 주력부대가 독립군이 잠복한 포위망 중에 들어설 즈음에 일제히 사격을 단행하도록 하였다.
일본군은 독립군의 작전계획대로 봉오동 상촌 독립군 700명이 잠복해 있는 포위망 가운데로 들어왔다. 홍범도장군의 명령에 따라 동·서·북 3면에서 일본군을 협공하니 일본군은 갈팡질팡하면서 쓰러졌다. 오후 3시 소좌 야스카와는 가미야중대와 나카니시소대를 지휘하여 동쪽고지에 매복한 강상모중대를 향하여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강상모중대는 이를 격퇴하여 100여명을 사살하였다. 여기서 일본군은 온성 유원진으로 패주하였다.
봉오동 전투의 전과와 의의 이 압도적인 전승의 원인은 독립군의 앙양된 사기와 지휘관의 예지, 지리적 요지를 선용한 뛰어난 작전계획이었습니다. 봉오동전투는 홍범도·최진동 부대가 일본군 정규군을 대패시킨 전투로 독립군의사기를 크게 진작시킨, 항일 무장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전과의 하나입니다. 또 우리민족에게 자신감을 안겨준 승리 이기도 합니다

청산리 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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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산리전투는 좁은 개념으로 보면 1920년 10월 21일 김좌진이 지휘한 대한군정서 독립군이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 백운평 계곡에서 독립군 토벌을 위해 칩입한 일본군 동지대 소속의 산전연대(山田聯隊)를 크게 격파한 전투로 한정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청산리전투라 할 때에는 대한군정서는 물론 이도구 어랑촌 부근의 산림지대에 집결한 홍범도 휘하의 독립군연합부대(대한독립군을 비롯한 대한국민군·훈춘한민회·의민단·대한신민당 등)가 10월 21일부터 26일 사이에 청산리 백운평전투를 시작으로 완루구(完樓溝)·어랑촌(漁郞村)·천수평(泉水坪)·고동하(古洞河) 등 2, 3도구 서북편의 밀림장곡에서 전개한 대소 10여 회의 승첩을 통칭하여 의미한다.
일제의 간도 침략군 가운데 청산리 일대에 침범한 동지대는 용정과 무산 방면에 진출하여 천보산(天寶山)에 주력을 두고 있었으며, 그 산전연대의 주력부대는 20일 삼도구로부터 청산리 골짜기로 침입해 오기 시작하였다. 김좌진 사령관은 그들과 대전하기에 가장 유리한 지형이라고 판단한 골짜기마다 독립군을 전투편제로 이중 매복시켜 놓은 뒤 일본군을 현장으로 유인하였다. 독립군이 매복한 계곡은 청산리 골짜기 중에서도 폭이 가장 좁고 좌우 양편으로 깍아지른 듯한 절벽이 솟아 있으며 그 사이에는 백운평이라 부르는 공지가 있어 청산리계곡을 통과하려면 단 하나의 오솔길인 그 공지를 지나게 되어 있었다.
안천(安川)소좌 인솔 하의 산전연대의 전위 부대는 독립군 매복사실을 전혀 알지도 못한채 21일 아침 8시경 백운평을 침입하기 시작하여 1시간 만인 상오 9시경에는 그 곳을 점령하다시피 하였다. 일본군이 최전선의 독립군 매복지점으로부터 불과 10여 보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바싹 근접하였을 때, 김좌진 사령관의 공격 명령과 함께 600여 명의 독립군은 일본군이 다다른 중앙의 공지를 일시에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불의의 협공을 받은 안천 전위부대는 독립군의 공격에 대한 응전을 시도하였으나 매복장소조차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상황속에서 전열이 곧 무너지고 말았다. 결국 독립군은 30여분 동안의 집중 공격으로 200여 명의 전위부대 전원을 섬멸하는 커다란 전과를 올리게 되었다.
안천(安川)전위부대의 전멸에 뒤이어 백운평 방면으로 뒤따르던 山田 연대의 주력부대도 기관총·산포(山砲) 등의 중무기를 앞세우고 백운평 교전지를 향하여 돌격해 왔다. 그러나 주력부대 역시 절대적으로 유리한 지형을 확보하고 있던 독립군의 집중공격에 수많은 사상자만 나오게 되자 보병과 기병으로 몇 개의 중대를 편성하고 독립군을 협공하기 위해 고지를 따라 돌격하면서 우회하였으나 절벽 위에서 사격하는 독립군의 화력을 당할 수가 없었다.
이에 부대를 약간 후퇴시켜 전열을 재정비한 뒤 산포와 기관총의 엄호하에 정면과 측면에서 최후의 돌격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독립군은 고지 위, 완전히 은폐된 지점에서의 이들을 향한 독립군의 집중사격을 당해내지 못하고 산전(山田) 본대는 끝내 백운평에 다수의 시체를 남겨둔 채 본영을 향하여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결국 대한군정서 독립군은 이 전투에서만 일본군 2∼3백 명을 사살하는 커다란 전과를 올렸던 것이다.
|  | | 완루구 전투 | 청산리대첩 가운데 백운평 전투에 이어 10월 22일 홍범도가 지휘하는 독립군 연합부대가 이도구 완루구에서 동지대의 주력을 맞아 대승한 전투다. |
| | 천수평 전투 | 백운평 전투를 치른 직후 밤새 행군을 재촉하였던 대한군정서 독립군은 이튿날(22일) 새벽 2시 30분경 이도구 봉밀구 갑산촌에 이르렀을 때 갑산촌 주민들로부터 인근의 천수평에 일본군 기병 1개 중대가 주둔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이에 다시 강행군을 재촉하여 연성대를 앞세우고 1시간 가량을 행군한 끝에 천수평에 당도하였다. 이 곳에는 일본군 1개 중대 120여 명의 기병이 독립군이 접근해 온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깊은 잠에 떨어져 있었다.
독립군은 이들을 완전히 포위한 채 5시 30분경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깊은 수면 중에 불의의 기습을 당한 일본군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채 허둥대기만 하다가 어랑촌 본대로 탈출한 4명을 제외하고 전원이 몰사하였다. 이에 비해 독립군의 피해는 전사 2명에 부상 17명에 불과했다. |
| | 어랑촌 전투 | 청산리대첩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또 가장 오랜 시간 격전을 벌였던 전투가 어랑촌 전투이다. 어랑촌은 1910년 국망 이후 함경북도 경성군 어랑사의 주민이 이도구에서 서쪽으로 10리 가량 떨어진 골짜기 안에 이주하여 개척한 마을인데 이 마을을 중심으로 10월 22일 아침부터 독립군 2,000여 명과 일본군 5,000여 명간의 격전이 종일토록 계속되었다.
일본군이 독립군에 비해 병력과 화력 모든 면에서 월등히 우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투철한 항일의지로 무장한 독립군은 유리한 지형과 뛰어난 전술로 이날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
| | 청산리 전투의 전과와 의의 | 청산리전투의 총체적인 전과는 자료마다 다르지만 대략 다음과 같다. 일본군 전사자는 연대장 1명·대대장 2명을 포함하여 1,254명, 부상자는 200여 명, 독립군측은 전사 1명·부상 2명·포로 2명이라고 한다.
독립군은 우선 정신적 측면에서 조국광복을 위하여 굶주림을 견딜 뿐만 아니라 생명을 돌아보지 않는 항전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또 전술적 측면에서 볼 때 독립군이 사격에 유리한 고지를 먼저 점령하여 일본군에게 정확한 타격을 가할 수 있었던 데 비해, 일본군은 삼림과 계곡 등의 지형과 지세를 적절히 이용하지 못하고 자상전(自相戰)까지 벌이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독립군은 지휘관의 작전 수립·지휘 능력면에서 일본군을 능가했다.
그 동안 독립군을 양성해 온 간도와 연해주의 한인사회는 국내진입작전이 개시된 1919년 여름부터 더욱 적극적으로 독립군의 항전에 뒷바라지를 해 왔다. 대개가 개척농민으로 형성된 한인사회는 아직 경제적으로 생활기반조차 확고하지 못한 형편에서 군자금을 내어 무기와 여러 가지 군수물자를 마련케 하였고, 독립군의 식량·피복 등을 전담하다시피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일제 토벌군의 동태를 광범하고 정확하게 탐지하는 정보활동은 물론 독립군의 각종 통신연락을 담당하였으며 때로는 지형·지세를 적절히 이용해야 하는 독립군의 행군이나 전투시에 훌륭한 안내자가 되어 주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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