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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별곡(靑山別曲)과 강화도 — ‘고려가요’를 다시 생각함
살어리 살어리랏다. 靑山(쳥산)애 살어리랏다. 살아야 할 것이었다. 청산에 살아야 할 것이었다! 멀위랑 다래랑 먹고, 靑山(쳥산)애 살어리랏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아야 할 것이었다.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악장가사』에는 1연에만 얄랑성으로 표기되고 2~7연은 얄라셩으로 표기되었음)
우러라 우러라 새여, 자고 니러 우러라 새여. 노래하라 새여! 자고 일어나 노래하라 새여! 널라와 시름 한 나도 자고 니러 우니노라. 너보다 시름 많은 나도 자고 일어나 노래하고 있노라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이하 후렴구 생략)
가던 새 가던 새 본다. 믈 아래 가던 새 본다. 갔던 새 보았느냐? 물 아래 갔던 새 보았느냐? 잉무든 장글란 가지고, 믈 아래 가던 새 본다. 이끼 묻은 농구를 가지고 물 아래 갔던 새 보았느냐?
이링공 뎌링공 하야 나즈란 디내와손뎌. 이렇게 저렇게 하여 낮은 지낼 수 있다손 치더라도 오리도 가리도 업슨 바므란 또엇디 호리라. 왕래하는 이 없는 밤은 또 어찌할 것이라고 하느냐?
어듸라 더디던 돌코, 누리라 마치던 돌코. 어디라고 던진 돌인가? 누구라고 맞힌 돌인가? 믜리도 괴리도 업시 마자셔 우니노라. 호오(好惡)하는 사람도 없이 맞아서 울고 있노라
살어리 살어리랏다. 바라래 살어리랏다. 살아야 할 것이었다. 바다에 살아야 할 것이었다! 나마자기 구조개랑 먹고 바라래 살어리랏다. 나마자기 굴조개랑 먹고 바다에 살아야 할 것이었다!
가다가 가다가 드로라, 에졍지 가다가 드로라. 갔다가 갔다가 들었다. 애정지 갔다가 들었다. 사사미 짐대예 올아셔 奚琴(해금)을 혀거를 드로라. 사슴이 짐대에 올라서 해금을 켜니까 들었다.
가다니 배 브른 도긔 설진 강수를 비조라. 가다니? 배부른 독에 설진강 술을 빚었다. 조롱곳 누로기 매와 잡사와니, 내 엇디 하리잇고. 조롱꽃 누룩이 매워 잡사오니 내 어찌 하리까?
현전하는 고려가요 중 <서경별곡>, <가시리> 등과 함께 백미(白眉)로 평가되어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는 <청산별곡>의 원문과 현대어 번역입니다. 저도 과거에 이 알듯말듯한 노래 가사와 읽을 때의 리듬감이 좋아서 8연을 몽땅 외우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청산별곡은 3.3.2조의 독특한 운율이 내재되어 있으니 외우기에도 크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음악 교과서에는 ‘금강(金剛)에 살어리랏다’(이은상작시, 홍난파작곡)라는 노래도 있어 청산별곡과 ‘살어리랏다’라는 단어를 매우 친근하게 받아들이고 살아 온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요즈음에는 이 노래들과 유사한 정서를 담은 듯한 ‘청산에 살리라’(김연준 작사.작곡)라는 국민애창 가곡이 있습니다. 저는 사람들이란 대개 비슷한 감정들을 공유하며 살아간다고 알고, 또한 같은 민족이라면 ‘민족의 공통정서 D.N.A’ 같은 게 분명히 있다고 믿는 편입니다. 그러하니 저의 개인적인 감정을 떠나 — 청산별곡은 민요 ‘아리랑’처럼 우리 민족의 가장 오랜 ‘겨레의 노래’라고 생각합니다.
<청산별곡>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으로는 고려말의 혼란된 시기에 창작되고 구전(口傳)되어 작자를 알 수 없는 노래이며, 1443년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 이후 문자로 정착되어 <악장가사>와 <시용향악보, 사진>에 실렸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지금까지도 연구자들마다의 제각기의 방식으로 재해석되고 있는 노래라는 것입니다. 이상향인 ‘청산’에 살려는 화자의 간절한 바람이 담겨 있다고도 하고, 작자의 계층이나 성별, 신분, 노래의 성격 등에 관한 다양한 해석들이 존재하니 아직까지도 한 가지 견해로 통일되지 못한 상태라는 말이지요. 현재까지 이루어진 논의를 간략히 살펴보자면, 농토를 빼앗긴 농민의 노래(김태준, 신동욱 외), 사랑과 관련된 노래(양주동, 조윤제, 최철 외), 현실도피(김사엽 외), 유랑인의 노래(김형규, 박노준 외), 현실의 고뇌를 표출한 노래(박병채, 김종오, 김대행 외) 등으로 실로 다양합니다. 그래서 <청산별곡>은 ‘누구나 알고 있는 작품’이면서 또한 ‘아무도 모르고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다양하게 연구되는 것은 이 노래가 작자 미상의 구전노래이고 아직 명확한 의미를 못 밝힌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오랜 세월 속에 한국인의 어떤 정한(情恨)을 대변하며 사랑을 받은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청산별곡>을 읽을 때에는 논란이 되는 부분들을 자기 나름으로 해석해 위의 견해들에서 어떤 것이 가장 설득력이 있는 해석인지를 알아보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또 내용과는 직접 관련이 없는 후렴구(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는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또 이것이 노래의 전체 구조 속에서 어떤 구실을 하는 것인지? 등에도 의문을 가져보자는 것이지요.
저는 여기에서 <청산별곡>과 <강화도>와의 밀접한 관련성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조금 더 용기를 내어 도발적으로 규정하자면 <청산별곡>은 <강화도의 노래>라는 것입니다. 몇 발짝을 양보하더라도, 저는 적어도 이렇게 믿고 싶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제가 청산별곡 이야기를 하게 되는 구체적인 사연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한 보름 전 새로 나온 신간을 구경하러 강화도서관에 들렀다가, 뒷골목 서가의 한구석에 그동안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했다는 듯 박혀있던『강화천도, 그 비운의 역사와 노래』(임주탁, 2004, 새문사, 사진) 라는 제목의 책에 저도 모르게 필(feel)이 꽂혔습니다. 그래 빌려와서는 지금까지 틈틈이 두 번이나 읽어보게 되었지요. 쉽게 읽히는 글이 아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연관된 자료들도 들춰보곤 하다가, 결국 어제 아침에는 저자이신 임주탁교수(부산대학교 국어교육과)와 전화 통화까지 하게 되었네요. 저자와 직접 대화를 나누는 일은 궁금증을 해소하는 점과 함께 육성을 통해 저자의 진정성을 함께 호흡해 볼 수 있어 저의 공부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임교수께서는 1999년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고려시대 국어시가의 창작 및 전승 기반 연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으시고, 그동안 관련된 학회에 고려가요 관련 글과 논문만도 수십편을 발표하신 중견학자이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외형적인 학교나 많은 글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저는 제가 읽은 책의 내용이 너무나 놀랍고 충격적이었습니다. 지난 10여 년간 ‘강화역사문화연구소’에서 강화의 여러 책 읽는 분들과 함께, 3천년 동안의 강화도와 관련된 중요한 주제들은 대략이나마 알고 있다고 생각해 왔는데, 여태껏 ‘고려가요와 강화도’라는 연결 고리를 생각해보지 못한 저의 빈약한 상상력이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하였습니다.
오늘 저의 글은 위 임주탁교수의 책을 간략하게나마 재정리하는 일이 될 것 같습니다. 또한 관련 자료들을 찾아보다가 청산별곡의 후렴구인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를 밝힌 또 다른 한 견해도 여러분들께 잠깐 소개드리려고 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고려사절요』의 관련 기사도 조금 언급해야겠습니다. 어려운 한자를 새겨보고, 8백년 전 고려시대의 사건들을 되돌아보는 일이 되겠지만, 이 모두가 우리가 발붙여 살고 있는 강화도의 물과 바람과 땅을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라 생각하시고 끝까지 경청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야기의 순서는 1) 임주탁의 고려가요 연구 2) 최기호의 <청산별곡> 후렴구 견해 3) 나마자기, 기타 관련된 이야기들입니다.
임주탁의 고려가요 연구
임주탁교수님의 연구방법론과 강화도와 관련된 부분의 결론부터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임교수는 현전하는 고려가요의 텍스트들을 1) ‘언어 텍스트(Lingual text)’와 2) 언어 텍스트의 ‘외적 텍스트(Extra-text)’를 함께 고려하여 고려시대의 노래들을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우선 텍스트를 구성하는 언어(중세국어)들을 새롭게 꼼꼼히 재확인하고, 다음으로는 이렇게 해석한 언어 텍스트들이 구체적인 고려시대의 역사 사건에서 어떤 부분에 놓일 수 있는가?(... some language usages and historical events related with its words.)를 깊이 천착하였습니다. 이것을 전문용어로 작품들의 구체적인 ‘생성 문맥’(Creating Contexts and Meaning)을 밝히는 일이라 하는 모양인데, 저는 전문적인 이론은 모를지라도 대충이나마 감은 잡힐 듯도 합니다.
임교수께서 상기의 지난한 연구과정 끝에 내놓은 결과는 놀랍게도 아래와 같았습니다.
“(고려가요) 여섯 편의 노래가 생성된 시기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① <서경별곡 西京別曲1> 고종 20년(1233) ~ 고종 24년(1237) ② <가시리> 고종 20년(1233) ~ 고종 24년(1237) ③ <정석가 鄭石歌> 고종 24년(1237) 전후 ④ <청산별곡 靑山別曲> 고종 36년(1249) 전후 ⑤ <한림별곡 翰林別曲> 고종 38년(1251) 전후 ⑥ <서경별곡 西京別曲2> 원종 10년(1269) ⑦ <만전춘별사 滿殿春別詞> 원종 11년(1270) ~ 원종 12년(1271)
위 여섯 편의 유명한 고려가요들이 모두 ‘강화도읍기 시절’(1232~1270)에 만들어졌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처음 듣게 되는 강화인이라면 모두가 놀랄만한 결론이지요. 제가 읽어서 이해(못)한 내용들을 여기에 자세히 설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이해를 돕고, 또 임교수의 기나긴 논지의 다만 한 부분만이라도 논자(임주탁)의 독법와 논리에 공감하기 위해, 저는 논자가 인용한 <고려사절요>의 해당 부분들을 나름대로 유심히 찾아보았다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이야깁니다. 아래에서 저자가 인용한 많은 논거 자료들 중 몇 부분만 재인용하여 <서경별곡>, <청산별곡>을 다시 읽어보도록 하지요.
1) ‘외적 텍스트(Extra-text)’로서의 고려사와 ‘서경별곡’ 해설
계사 20년(1233), 송 소정 6년ㆍ금 천흥 2년ㆍ몽고 태종 5년
○ 서경 사람 필현보(畢賢甫)와 홍복원(洪福源) 등이 선유사(宣諭使) 대장군 정의(鄭毅)와 박녹전(朴祿全)을 죽이고 성을 빼앗아 반역하였다. 겨울 12월에 최우가 가병 3천 명을 보내어 북계병마사 민희(閔曦)와 더불어 쳐부수고, 현보를 사로잡아 서울로 보내어 거리에서 요참하였다. 복원은 도망쳐서 몽고로 들어갔으므로 그 아비 대순(大純)과 동생 백수(百壽)와 그 아들딸들을 사로잡고, 나머지 백성들은 다 섬으로 귀양보내니, 서경이 드디어 폐허가 되었다. 복원의 처음 이름은 복량(福良)이니, 본래 당성(唐城) 사람이다. 조상이 인주(麟州 평북 의주 남쪽 35리)에 옮겨와 살아서 서경 낭장(西京郞將)이 되었었다. 후에는 복원이 항상 몽고에 있어, 드디어 동경 총관(總管)이 되어서 고려 군민을 통솔하니, 몽고에 항복하여 붙은 40여 성(城)의 백성이 이에 속하였다. 참소로 본국을 얽어매고 몽고 군사를 따라 왕래하니, 그 때 사람들이, '주인보고 짖는 개' 라 하였다. 우가 복원의 아비를 대장군으로 삼고 복원의 동생을 낭장으로 삼았으며, 장위(張暐)를 그 사위로 삼고 뇌물을 주기를 그치지 않았다. (西京人,畢賢甫,洪福源等,殺宣諭使大將軍鄭毅,朴祿全,擧城叛,冬十二月,崔瑀,遣家兵三千,與北界兵馬使閔曦,討之,獲賢甫,送京,腰斬于市,福源逃入蒙古,擒其父大純,弟百壽,及其女子,悉徙餘民于海島,西京遂爲丘墟,福源舊名福良,本唐城人,先世,徙居麟州,爲西京郞將,是後,福源常在蒙古,遂爲東京摠管,領高麗軍民,凡降附四十餘城,民皆屬焉,讒搆本國,隨兵往來,時人,以爲吠主,瑀官其父,爲大將軍,其弟,爲郞將,選張暐,爲壻,賂遺不絶。)
임교수의 논리에 의하자면, 위 인용한 계사년(1233) 기사는 <서경별곡1>과 관련된 부분입니다. 이 기사와 연관되어 서경별곡 첫 연의 독법(讀法)은, 개경 정부의 강화천도(1232년)를 계기로 다음해인 1233년에 일어난 홍복원과 필현보의 반란 사건에서 생성된 것으로 보아야 서경별곡 텍스트를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사년의 기사는 서경별곡을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한 ‘외적 텍스트(Extra-text)’ 라는 것입니다.
서경(西京)이 아즐가 서경(西京)이 셔울히 마르는 서경(西京, 평양)이 서울이지만 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디리 (후렴구, 이하 생략) 닷곤대 아즐가 닷곤대 쇼셩경 괴오마른 닦은 데 소성경(昭盛京)의 고요(皐陶)이지만 여해므론 아즐가 여해므론 질삼뵈 바리시고 (님을) 여의기보다는 (님이) 길쌈 베 버리시고 괴시란대 아즐가 괴시란대 우러곰 좃니오이다. 괴시므로 (님을) 울며울며 쫓아가겠습니다.
다음으로, <서경별곡2>는 1269년(원종 10년)에 일어난 원종 폐위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최탄과 한신 등의 반란 사건이 진행되는 와중에 생성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해당되는 <고려사>의 기사(열전 ‘최탄’조, ‘김방경’조)는 지면 관계상 생략하였습니다.
대동강(大同江) 아즐가 대동강(大同江) 너븐디 몰라셔 대동강(大同江) 넓은지 몰라서 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디리 (후렴구, 이하 생략) 배내여 아즐가 배내여 노한다 샤공아 배내여 놓았느냐 사공(沙工)아 네가시 아즐가 네가시 럼난디 몰라셔 네까짓것이 넘는지 몰라서 녈배예 아즐가 녈배에 연즌다 샤공아 행선(行船)에 얹었느냐 사공(沙工)아 대동강 아즐가 대동강 건넌편 고즐여 대동강 건너편 꽃이야 배타들면 아즐가 배타들면 것고리 이다 배 타 들면 꺾을 것이다.
(* 서경별곡1과 2는 <서경별곡> 전체 노래에서 해당되는 부분을 논자가 임의로 나눈 것임)
논자에 의하면 — 우리들은 노래 전체가 동일 발화자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 강화천도 이후인 1233년과, 원종 폐위직후 1269년의 서경별곡 창작자를 전혀 다른 인물로 보아야만 텍스트의 독법이 보다 명확해진다고 합니다. 저는 이러한 논리를 따라 가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알기에 ‘묘청의 난’(1135)이란 소외받았던 서경(西京, 평양)사람들이 보수적인 개경 세력들과 벌였던 ‘朝鮮歷史上 一千年來 第一大事件’(신채호)이었다는 역사지식을 조금만 참조해서 생각한다면, 1233년의 <서경별곡1>은 강화천도 이후 홍복원 등의 반란을 계기로 서경 또는 왕경(강화)에서 분리·이탈해 가는 서북지역(北界, 대동강 이북) 사람들의 목소리이고, 1269년의 <서경별곡2>는 원종의 폐위 사건 이후 최탄 등의 반란사건으로 다시 강화 중심의 국가 통치 체제에서 분리·이탈하여 대동강을 사이에 두고 고려 정부군과 적대하고 있는 상황에서의 정부군을 향해 드러난 목소리임을 알 수 있다는 추론입니다. 생성 문맥과 제작 시기가 다른 노래임에도 이렇게 한 편의 노래로 같이 묶일 수 있었던 것은, 이 노래의 주제가 서경과 서경 관할 하에 있던 지역 사람들의 운명을 담아낸 역사이고, 종국에가서는 모두 서경을 중심으로 다시 재흡수·통합된 데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충분하고 설득력 있게 이 논리와 해석들을 설명드리지 못함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여기에 일일이 설명 드리지 못하는 많은 디테일한 부분들이 있는데, 저로서는 이것들의 대부분이 충분히 공감이 가는 내용과 추론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논자께서 위와 같은 생성 문맥 추론의 치밀하고 핍진(乏盡)한 논리로 <가시리> <정석가> <한림별곡> <만전춘별사>와 같은 고려가요들을 더욱 가깝고 친밀하게 이해할 수 있는 독법(讀法)과 지평(地平)을 열어 놓았다는 점에 대해서, 저는 임교수의 성찰과 노력에 감탄과 고마움을 전해 드리고 싶습니다. 더구나 이것은 8백년 전의 우리 강화도에서 이루어졌을지도 모르는 또 다른 차원에서의 한 역사의 실마리를 발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2) 강화도읍기 시절과 ‘청산별곡’의 이해
을사 32년(1245), 송 순우 5년
○ 최이가 8일에 연등하면서 채붕(綵棚)을 만들고 기악(伎樂)과 온갖 잡희를 베풀어 밤새도록 즐기니, 성중의 구경하는 사녀들이 담장처럼 빙 둘러 서서 구경하였다. (崔怡,以八日,燃燈,結綵棚,陳伎樂百戲,徹夜爲樂,都人士女,觀者如堵。)
○ 5월에 최이가 종실의 사공(司空) 이상과 재ㆍ추들을 위해 그 집에서 잔치하였다. 이 때 채색 비단으로 산을 만들어 비단 장막을 두르고 가운데 그네를 매었는데, 문수(文繡)ㆍ채화(綵花)로 장식하였다. 또 팔면(八面)을 은단추와 자개로 꾸민 4개의 큰 분(盆)에 각각 얼음 봉우리가 담겨 있고, 또 4개의 큰 물통에 붉은 작약과 자줏빛 작약 10여 품(品)을 가득히 꽂았는데, 빙화(氷花)가 서로 비치어 겉과 속에서 찬란하게 빛을 발하였다. 기악과 온갖 잡희를 베풀고, 팔방상(八坊廂)의 공인(工人) 1천 3백 50여 명이 모두 호화롭게 단장하고 뜰에 들어와 풍악을 연주하니, 거문고와 노래와 북과 피리의 소리들이 천지를 진동하였다. 팔방상에게는 각각 백은(白銀) 3근씩을 주고, 영관(伶官)과 양부(兩部)의 기녀(伎女)와 광대에게도 각각 금과 비단을 주니, 그 비용이 거만(鉅萬)에 달하였다. (五月,崔怡,宴宗室,司空,已上,及宰樞於其第,置彩帛山,張羅幃,中結鞦韆,飾以文繡綵花,以八面銀釦貝鈿,四大盆,各盛氷峯,又四大樽,滿揷紅紫芍藥,十餘品,氷花交映,表裏燦爛,陳伎樂百戲,八坊廂工人,一千三百五十餘人,皆盛飾,入庭奏樂,絃歌館鼓,轟震天地,八坊廂,各給白銀三斤,伶官,兩部伎女,才人,皆給金帛,其費鉅萬。)
사신(史臣)이 말하기를, “팔방상(八坊廂)이란 것은 나라가 태평하였을 때나 있을 법한 성대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몽고 군사가 침략하여 해도(海島 강화)로 들어가 숨어 사직을 보전하고 있는 상태이니 진실로 군신이 걱정을 같이 하여 마치 못[淵] 위의 엷은 얼음을 밟고 지나가는 것처럼 두려워하고 조심하여야 할 터이다. 그런데 최이가 국가의 권력을 도둑질하여 망녕되게 사치하고 과장하며 조금도 두렵게 생각하거나 거리낌이 없으니, 죄가 진실로 죽어도 남을 것이다." 하였다. (史臣曰,八坊廂者,國朝之大平盛事也,今蒙兵侵擾,竄入海島,社稷僅存,實君臣同憂,若涉淵氷之日也,而怡,乃盜竊國柄,妄矜侈大,略無畏忌,罪固不容誅矣。) <이상 한국고전종합DB ‘고려사절요’ 부분>
을사년(1245) 기사를 참조해보면서 저는 우리의 ‘강화도읍기 시절’(1232~1270)을 더욱 가깝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용한 기사는 1245년 4월의 일이었는데 최이(우)가 초파일에 연등(燃燈)하였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채붕(綵棚, 나무로 단을 만들고 오색 비단 장막을 늘어뜨린 일종의 장식 무대를 이르던 말. 신라 진흥왕 때 시작한 팔관회에서부터 설치된 기록이 있다)이니, 기악(伎樂)이니, 온갖 잡희(百戲)니 하는 단어들이 예사롭게 보이질 않습니다. 사실 오늘날 공휴일이 된 ‘부처님 오신 날’의 기록상 맨 처음이 이 기사입니다. 1975년 4월 8일을 공휴일로 지정할 때의 대한민국 관리들도 이 기록을 분명히 참고하였을 터이고, 또한 우리 민족 최초의 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 연등행사의 가장 처음이 강화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귀한 기록이기도 합니다.
1245년이면 당시의 최고 실권자 최우(사진, '무신'에서 정보석 분)가 혼신의 힘을 기울인 팔만대장경 판각사업도 거의 완성해가는 시기(1251년 완성)였을 테니, 그의 정치적 프로파간다를 위해서도 요란뻑적지근하게 연등행사를 치루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겠습니다. 기악(伎樂)과 백희(百戲)가 정확히 무언지는 몰라도, 오늘날로 하면 최고 수준의 ‘국립국악원’의 최정예 단원들이 연등행사에 동원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의 5월 기록을 자세히 보면 저의 예상이 크게 어긋남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겠네요. “팔방상(八坊廂)의 공인(工人) 1천 3백 50여 명이 모두 호화롭게 단장하고 뜰에 들어와 풍악을 연주하니, 거문고와 노래와 북과 피리의 소리들이 천지를 진동하였다.”고 하고, 또 이를 기록하는 공무원인 사신(史臣, 사초史草를 쓰는 신하)조차 잔치 규모의 방대함과 사치함에 대해 크게 걱정할 정도이니 말입니다. 하기사 최우로서는 충분히 그럴만한 연유가 있을 법도 하겠습니다. 제 생각에, 이 5월 기사에서 기록한 잔치(宴)는 아마 ‘선원사(禪源社) 낙성식’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선원사 초대주지를 역임한 진명국사(眞明國師 混元, 1191~1271)의 비명(‘臥龍山慈雲寺王師贈諡眞明國師碑銘’)을 찾아보니 “을사년(1245)에 진양공이 선원사를 새로 짓고 크게 낙성회를 벌이는데, 대사를 청하여 그 법석을 지도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는군요. 선원사는 집권자 최우가 발원하여 세운 사찰이니 강화성내 사람들이 모두 와서 보라고 거창하게 한 번 낙성식(落成式)을 제대로 하였으리라 짐작해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1245년의 역사에서 ‘선원사 낙성회’가 아니고는 최우의 집에서 잔치 벌일 일이 없을 것 같아 보이는, 단지 저의 추측일 뿐입니다.
여기에 ‘팔방상(八坊廂)’이란 단어가 보입니다. 이것은 고려시대에 음악을 담당하던 관청이라고 합니다. 원래 12개의 방상이 조직되었는데, 강화에 와서 8개로 축소되었다고 봅니다. 논자는 8방상에서 연행하는 ‘가악 레퍼토리(歌樂 repertory)’에 ‘별곡(別曲)’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상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청산별곡> <정석가> <서경별곡> <한림별곡> 등의 가요들이 모두 ‘8연(장)구성’이라는 형식은 당시의 세계관으로 볼 때 이 고려가요들이 궁극적으로 신민(新民)의 조화로운 체제를 지향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8 ’이라는 숫자는 ‘井田法’에 의한 토지 구획에서 중심(즉, 황제)을 제외한 8방의 땅입니다. 그리고 노래의 구성에서 8회 반복되는 후렴이나 8방(方) 8풍(風, 각기 다른 풍속을 가진 세속 공간)은, 이 잔치에 참여한 관객들의 반목과 갈등을 조화와 통일로써 아우르고, 참여자 모두가 동일집단이라는 소속감과 유대감을 가지게 하는 효과를 준다는 것이지요. ‘팔방상(八坊廂)’이라는 음악기구로 유추해 보는 고려가요들의 생성시기에 대한 이러한 독법과 이해가 단지 추론이 아닌 것은,『악장가사樂章歌詞』<한림별곡>의 원문에 “高宗時 諸儒 所作”이라 기록된 작가 정보를 신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종(高宗, 1192~1259, 68세 졸, 재위 46년/1213~1259)은 강화에서만 27년을 재위하셨으며, 청산별곡과 한림별곡이 생성된 시점은 1249~1251년 전후일 것이라고 논자는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악장가사』의 정보와 고종 36년(1249) 무렵이라는 역사시기를 바탕으로 추정하여 볼 때, <청산별곡>은 ‘몽골에 억눌린 시대’의 임시 수도인 강화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갈등하는 세 목소리’를 담은 ‘저항의 노래’라는 것입니다. 즉 청산별곡의 노랫말(원곡 전문 참조)은 강화천도 때부터의 고려정부의 정책인 ‘산성·해도 입보책’(山城海島入保策, 몽고침략을 당하여 산성이나 바다의 섬에 가서 숨어 있으라는 정책. 고려사, “遣使諸道 徒民山城海島”)에 의해, ‘청산과 바다’로 상징되는 공간에 계속 머무느냐? 아니면 ‘물아래와 애정지’로 상징되는 공간으로 가기 위해 청산과 바다를 떠나가느냐? 의 문제로 갈등하는 화자(A)와, 청산과 바다에 계속해서 머물기를 희구하는 화자(B) 둘 사이의 논쟁적 대화, 그리고 ‘물아래’나 ‘애정지’를 이미 경험한 화자(C)의 증언으로 구성된 노래라는 것입니다. 노래에서는 C의 증언으로 A와 B의 논쟁은 종결되지만, 전체적으로는 ‘청산’과 ‘바다’ — 곧 강화도 중심의 임시 체제 안에 머물러 있기를 희망하는 최우 정권의 전략적 노래이리라는 것입니다. 원문의 전체 8연과 대조하여 보면 A화자(1,4,5,6연), B화자(2,3,8연), C화자(7연)가 됩니다.
저는 임교수의 청산별곡의 새로운 해석에 대한 연구결론만 요약했으므로, 이 요약만을 읽고 전체 청산별곡의 문맥과 해석을 다 따라잡는 것이 어렵고 불편한 일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쉽게 이렇게 해 보았습니다. A와 B, 그리고 C 화자를 각각, 정부정책에 회의와 갈등을 느끼는 신하 또는 백성(A), 강화에서 계속 정권을 유지하고 싶은 최우(B), 그리고 삼별초의 신의군으로 몽골에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온 군인(C)로 대치해보는 것이지요.
아래는 백성(A)과 최우(B)와 군인(C)의 가상적 대화입니다.
A : 정부의 말을 믿고 여기 강화도에 와 산 지가 벌써 20년이 다 되어 가는데, 갈수록 살기는 힘들고... 우리들이 지금 잘 하고 있는거야? 고려산이나 동막 바닷가에 나가 머루·다래, 나마자기·구조개 먹고 사는 것도 이젠 지쳤어. 청산과 바다라! 말이야 좋기만 하지. 높은 사람들 싸움에 우리만 고생하고 있는 것 같아. 낮에는 그럭저럭 지내겠는데 밤이 되면 잠도 안 오고 미치겠어. 우린 이런데 진양공 최우는 어떨까? 백성들의 힘겨운 사정을 알기나 할까? 근데 그 사람 요즘 골골 한다며... (1,4,6연)
B : 너희 신하들과 백성들의 심정을 내가 잘 알고 있어. 잘 생각해봐! 내가 너희들보다 걱정이 더 많다는 걸 모르겠어?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모아 희망을 갖고 살아야 하는거지. 나무 위 미물인 새들도 저렇게 노래하고 있쟎아! 자~, 희망을 갖자고. 지난번에 농사짓는다고 묵은 쟁기 꺼내들고 개경에 숨어 들어간 네 친구들 이야기 못 들었어? 다 몽골 오랑캐들한테 잡혀 죽었데. 힘들더라도 조금만 견디면 반드시 좋은 날이 올거야. (2,3연)
A : 이런 제길~,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란 만날 그딴 이야기나 하지. 우리 백성들이 뭔 죄가 있어 너희들의 싸움에 말려들어야 하는 거야? 우리 백성들은 뭐가 옳고 뭐가 그른지도 잘 모르겠어. 다 너희들끼리만 잘 먹고 잘 살자는 거 아니야? 우리는 그저 이 상황을 벗어나고만 싶은 거야. 몽골 치하라고 여기보다 나쁠 게 뭐 있겠어. 저기 좌별초하다가 포로로 잡혀 갔다 온 군인 이야기도 한 번 들어보자고... 어이 신의군! 몽골제국이 어떻던가? (5연)
C : 나는 애정지에 갔다가 포로로 잡혔었지. 몽골군대에 막상 가서 보니까 원나라 황제가 정치 잘 한다는 소문이 자자하던 걸. ‘그냥 몽골에 귀화해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더라고... 금나라건 송나라건 원나라건 어때. 어쨌든 크고 센 나라한테 붙어야 먹고사는 거야. 큰 나라는 다 큰 나라가 된 이유가 있는 거야. 나는 다시 개경으로 돌아갔으면 좋겠어! (7연)
B : 가다니? 다시 돌아가겠단 말이야? 자~ 자, 이러지들 말자고. 여기 큰 독에 잘 익은 술이 있어. 술 한 잔 마시면서 천천히 생각해보도록 하자고. 우리가 어쨌으면 좋겠어! (8연)
저는 대략 이런 대화 정도의 갈등 속에서 <청산별곡>의 노래가 창작된 것이라고, 임교수의 글을 읽었습니다. 고등학교에서 배운 바 어떤 한 사람의 단일화자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혹은 최자 같은 문인이 자기 혼자 노래를 만들면서도 이 갈등들을 모두 포괄하는 전지적 시점으로 창작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갈등에 쌓인 강화도 정부의 대략 3갈래의 여론 등을 ‘노래’로 통합코자 한 집권세력의 고육지책(苦肉之策)의 전략으로, 국가차원에서 이러한 노래를 만들어 계속 반발하는 백성들을 무마하자는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런 노래가 효과적으로 불리어지게 하는 연주 형식은 뱃노래처럼 ‘메기고 받는’ 형태인 선창(先唱)과 후창(後唱)의 방식이나 교환창(交換唱)의 방식이 적절합니다. 이 때 후렴구인 ‘얄리 얄라...’는 코러스(Chorus)로! (이건 제가 합창단에서 20년 노래해 봐서 실감으로 잘 압니다.)
이상으로 임주탁교수의 ‘<청산별곡>의 독법과 해석’을 다시 설명드린 저의 요약을 마치겠습니다. 제가 잘못 읽은 부분이 있다면 임교수께 죄송한 말씀을 드려야지요. 잘못 읽은 부분이 분명히 있을 것이오니, 마지막에 임교수의 육성으로 이 단락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청산별곡>은 강화 중심의 국가 통합 체제가 현저한 위기 국면에 직면하는 고종 36년 무렵 이들을 통합하는 차원에서 제작된 노래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독법과 해석은 아직 입증되어야 할 부분이 많다. 특히 생성 문맥과 연관된 부분의 논의는 실증적인 논증보다는 역사적 상상력에 더 많이 기대고 있어, 앞으로 보완해 나가야 할 과제를 더 많이 안게 되었다. 하지만 합리적인 이해가 가능한 텍스트 독법을 제시한 것만은 분명하다. 이 독법이 적어도 어학적인 측면에서 가능하고, 그래서 결정적인 결함이 없다고 확신한다. 또 텍스트의 독법과 생성 문맥을 연관 짓는 방법이 한층 더 확고하게 다져진다면 사회학적 · 역사주의적 방법도 한 걸음 진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이 글이 <청산별곡>을 비롯한 고려시대 시가 연구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어 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최기호의 <청산별곡> 후렴구 견해
최기호(상명대학교 국어교육과 명예교수, 몽골학회 회원) 교수의「<청산별곡>의 형성과 몽골 요소 」(2004, 몽골학 제13호)란 논문을 위 임교수의 책을 읽다가 참고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먼저 설명 드린 임교수의 논리와는 다른 견해여서 여기에 소개하면 제 글의 통일성이 떨어지는 듯 싶지만, 이 논문 또한 우리 강화도와 관련된 부분이 있고, ‘얄리 얄라...’의 후렴구에 대한 논리가 색다르고 특별하여 소개드릴까 합니다. 지금까지도 긴 글이니 결론만 말씀드리고 복잡하지 않게 지나가도록 하지요.
최교수님은 상기의 논문에서 우선 <청산별곡>의 구체적인 창작 시기와 작자를 밝혔습니다. <청산별곡>의 창작 시기는 1274~1281년 사이의 몽골이 일본 정벌을 준비하던 시기에, 원감국사(園監國師 충지, 1226∼1292, 사진- 원감국사 진영)라는 승려가 당시 백성들의 고통을 주제로 <영남간고상24운(嶺南艱苦狀二十四韻)>이라는 한시를 지었는데, 이 시를 번역해보니 주제와 형식이 <청산별곡>과 일치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청산별곡의 작자는 충지스님이고, 지어진 장소도 합포(合浦, 지금의 마산)에서 가까운 지리산과 경상도 전라도의 남해안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악기의 여음을 표현한 것으로 인정되어 왔던 후렴구 ‘얄리 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는 몽골어 ‘얄라’의 기본형에서 파생되는 단어들(얄라, 얄리아, 얄상, 얄르상, 얄라호승 등이 있음)로써, 이는 ‘이기다, 승리하다, 정복하다, 극복하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최교수님이 말하는 원감국사 충지 스님의 한시는 아래와 같습니다.
嶺南艱苦狀二十四韻 — 庚辰年造東征戰艦時作 작자 : 圓監國師 冲止 (영남 백성들의 참상을 읊은 시 24운)
1 嶺南艱苦狀 欲說涕將先 영남 백성들 고통의 참상은, 말로 할려니 눈물이 앞선다. 雨道供軍料 三山造戰船 두 도에서 군사물자로 공출하여, 세 산에서 전함을 만든다. 征徭曾百倍 力役亘三年 징병은 예전의 백배요, 부역은 삼 년동안 계속됐다.
2 星火徵求急 雷霆號令傳 성화같이 물자를 징수하고, 우뢰와 같은 호령을 내린다. 使臣恒絡繹 京將又聯翩 원나라 사신은 항상 드나들고, 서울 장수들은 연이어 오간다. 有臂皆遭縛 無胰不受鞭 팔 있는 자들 모두 묶이고, 채찍 맞지 않은 등짝이 없구나.
3 尋常迎送慣 日夜轉輪連 관리들 영접 전송이 일상화되고, 밤낮으로 물자수송 이어진다. 牛馬無完脊 人民鮮息肩 소와 말도 성한 등짝이 없고, 백성들 어깨도 쉴 새가 없도다. 凌晨採葛去 踏月刈茅還 새벽부터 칡 캐러 가고, 달밤에야 꼴을 베어 돌아온다.
4 水手驅農畝 梢工卷海堧 농부 수군되어 농토에서 쫒겨나고, 목수 바다로 다 보내진다. 抽丁擐甲冑 選將荷戈鋌 장정들 선발하여 갑옷 입히고, 장정들 가려 뽑아 무장시켜서, 但促尋時去 寧容寸刻延 시간 맞춰 빨리 가라 재촉하니, 촌각인들 지체할 수 있겠는가?
5 妻孥啼躃地 父母哭號天 처자들 땅을 치며 울부짖고, 부모는 하늘 향해 울며 통곡한다. 自分幽明隔 那期性命全 죽고 삶은 스스로 갈리는 것, 어찌 목숨이 보존되기를 바라리? 孑遺唯老幼 强活尙焦煎 남겨진 이는 늙은이와 어린이, 살자니 속 태우고 볶인다.
6 邑邑半逃戶 村村皆廢田 읍마다 반은 달아나 집을 떠나고, 촌마다 모두 농토를 묵혔다. 誰家非索爾 何處不騷然 어느 집이 쓸쓸하지 않으며, 어느 곳이 소란스럽지 않겠는가? 官稅竟難免 軍租安可蠲 관청의 세는 면해지기 어렵고, 병역세라고 감해질 수 있을까?
7 瘡痍唯日甚 疲□曷由痊 백성들 상처 갈수록 심해지니, 지친 몸 마음 어찌 낫게 할고? 觸事悉堪慟 爲生誠可憐 일마다 통곡으로 맞아야 하고, 삶이란 가련키만 하구나. 誰知勢難保 爭奈訴無緣 형편은 보장하기 어렵고, 아는 이 없이 억울함 호소할꺼나?
8 啼德靑天覆 皇明白日懸 다행히 황제 덕망 하늘 덮고, 황제 총명함 밝은 해에 걸렸다. 愚民故且待 聖澤必當宣 백성들아! 조금만 기다리면, 황제 은혜 반드시 고루 미치리라. 行見三韓內 家家奠枕眠 보리라 우리 삼한에, 집집마다 베개 높여 편히 잠 자는 것을.
충지스님의 한시가 대단합니다. 그리고 이 한시를 번역하시고 꼼꼼히 읽어 <청산별곡> 8연과 비교한 ‘주제 대비표’까지 만들어 자신만의 논리를 구성하신 최기호교수님의 노력에도 박수를 보냅니다. 그러나 <청산별곡>의 근원이 되는 시가 위 <영남간고상 24운>이고, 이를 원감국사가 같은 주제로 우리말 시를 지어 불렀다거나, 또는 스님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이를 바탕으로 지어 부른 것이 <청산별곡>일 것이라는 논지에는 아직까지 저의 판단을 유보하려고 합니다. 문외한(門外漢)이지만 이 논리와 내용에서 무언가 더 실속 있게 채워져야만 할 부분이 있는 것도 같고, 무엇보다 제가 임주탁교수의 ‘생성 문맥’ 논리의 충격에서 아직까지 헤어나질 못한 것 같기 때문입니다. 두 분의 논리들을 비교하며 앞으로 조금 더 고민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얄리 얄라...’의 후렴구 문제도 더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다만, 강화도의 향토사와 관련해서 — 원감국사께서 구족계(具足戒, 승려로서 지켜야할 계율)를 받고 승려가 되신 곳이 강화도 ‘선원사’였다는 점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충지스님은 전라도 장흥에서 1226년 태어나셨는데(속명, 위원개 魏元凱) 19세에 과거시험에 장원(壯元)으로 오르고, 사신으로 일본에 파견되기도 한 경력이 있습니다. 그러다 29세 때인 1256년에 강화도 선원사(禪源社)의 원오국사(圓悟國師) 문하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습니다. 훗날 수선사(修禪社, 현 송광사)의 6세조사가 되신 큰 스님이기도 합니다. 고려의 지성(知性)을 대표하여 연경(燕京)에 가서 원세조(쿠빌라이 칸)을 만나기도 하였으며, 여러 걸출한 한시를 남긴 당대의 대시인이기도 하였습니다. 언젠가 읽어 본 충지스님의 입적(入寂)하실 때의 광경은, 범인(凡人)들은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찬란한 노을과도 같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1292년 1월 10일 삭발 목욕한 뒤 옷을 갈아입고 문인(門人)들에게 “생사(生死)가 있는 것은 인생의 일이다. 나는 마땅히 가리니 너희는 잘 있거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정오가 지나자 분향하고 축원을 올린 뒤 선상(禪床)에 앉아 ‘설본무설(說本無說)’이라 설하고, 제자들이 청하는 바에 따라 마지막 게송(偈頌)을 남겼습니다.
閱過行年六十七 돌아보니 세상살이 67년인데, 及到今朝萬事畢 오늘 아침에야 모든 일을 마쳤네. 故鄕歸路坦然平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 이리 평탄하고, 路頭分明未曾失 길머리 분명하니 어찌 길을 잃으랴. 手中裳有一枝筇 손에는 겨우 한 개 대지팡이뿐이지만, 且喜途中脚不倦 가는 길에 다리가 피로하지 않을 것이 또한 기뻐라.
충렬왕은 충지스님에게 원감국사(圓鑑國師)라는 시호와 함께 보명(寶明)이라는 탑명(塔名)을 내렸습니다.
나마자기, 기타
<청산별곡>의 6연에 ‘나마자기’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나마자기 구조개’는 해초인 ‘나문재’와 ‘굴과 조개’라는 뜻입니다. 8백년 전의 단어이지만 고유명사라 현대에까지 발음이 크게 변하지 않았고, 강화도에서는 나마자기(사진), 나문재, 해이, 경징이풀(1636년 병자호란 때 영의정 김류의 아들 강도검찰사 김경징이 도망하자 이에 분노한 백성들이 붙인 이름. 신숙주와 ‘숙주나물’의 관계와 같음) 등의 이름으로 불리어지고 있는 명아주과에 속하는 1년생 풀입니다. 저는 언젠가 석모도 보문사에 갔다가 식당의 밑반찬으로 나온 ‘나문재나물’을 한 번 맛본 적이 있습니다. 제가 지금 그 맛을 기억할 수 없으니, <청산별곡>에서처럼 그저 배고플 때 허기를 채우려고(맛이 아니라!) 뜯어 먹은 해초일 것 같습니다.
<청산별곡>과 관련한 오늘 글의 마지막으로 강화섬 화도면 동막에서 15년을 산 함민복시인 (1962~ , 사진)의「나마자기」라는 현대시를 소개합니다. 예전에 저는 이 시가 너무 좋아서 사무실 탁자 유리덮개 밑에 깔아 놓고 매일 한 번씩 읽어보기도 했습니다. 사람들한테 자랑도 많이 했습니다. 이런 일을 한 것은, 강화도에 살면서 강화도의 정서를 대표할 만한 시로 함시인의「나마자기」를 (무)의식적으로 선택하였던 것 같습니다. <청산별곡>을 공부하고 이제 다시금 함시인의 글을 찬찬히 음미하자니, 이 시는 ‘강화문학의 전통’에서 필연적으로 만들어져야만 했던 노래인 것도 같습니다. (함민복시인께서 이런 투의 말을 덜 좋아한다는 걸 제가 압니다. 허락없이 사진과 글을 옮겨서 ‘미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다음에 술 한 잔 살께여.)
「나마자기」는 ‘2006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시’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오~,나마자기!
나 마 자 기
어찌 멸망(滅亡)의 빛이 이리 아름답다냐 뻘이 돋아지며 죽어가고 있다는 환경지표식물이라 했던가 뭍 쪽 붉음에서 바다 쪽 푸르름까지 색 경계 허물어 무지개밭이로구나 조금발에 뻘물 뒤집어쓰지 않아 빛깔 더 고운 나마자기야 너는 왜 해질녘에 가장 아름다운 것이냐 채송화 잎처럼 도톰한 네 잎 따 씹으면 눈물처럼 짭조름하다 뻘에 박혀 있던 둥근 바위 그림자 해 떨어지는 순간 너희들 위로 무게 버리고 길게 몸 펴며 달린다 바위 그림자 달리는 속도라니 소멸이 이리 경쾌해도 되는 것인가 깨줄래기 떼 그림자 투하하며 날자 칠게들 일제히 뻘구멍 속에 숨는다 얄리얄리 얄라셩 — 망조(亡兆) 든 나라 슬퍼 굴조개랑 너를 먹고 산다 했던가 나마자기야, 나마자기야, 어찌 유서(遺書)가 이리 아름답다냐
('나마자기' 캐는 강화도 아낙네들, <사진> 박찬숙 2011년 4월 29일)
오늘 <청산별곡>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강화도> 이야기를 하는 맥락(context) 속에 함시인의 의미 있고 아름다운 시를 정식으로 소개할 수 있어 참 좋습니다. 지난 보름 동안 임교수의 책을 읽으면서, 저는 제가 사는 ‘강화도의 문학전통’에 대해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보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르는 체 무심코 지나친 강화도의 흙과 바람과 공기 속에, 우리들과 더불어 오랜 시간을 함께 호흡해 온 ‘시’와 ‘시인’들에 대해서도 새삼스레 고마운 마음을 느끼게도 되었습니다.
강화도에는 이규보, 최자, 이제현, 이색, 충지, 함허 등으로 이어오는 위대한 고려문학의 전통이 전해져 옵니다. 제가 결례를 무릅쓰고 소개드린 위 임교수의 논의가 학계에서 아직 정설(定說)로 채택된 것이 아닐지라도 — 한 20년 뒤에 학계의 정설로 인정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 이와 같은 강화도 문학의 전통에, 널리 알려진 우리의 고려가요들을 자신 있게 덧붙여 소개할 수 있는 논리와 상상력을 갖게 되어 가난한 마음이 갑자기 부자가 된 듯 뿌듯하기만 합니다. 우리 강화인들은 기왕의 ‘금속활자’ ‘팔만대장경’ ‘상감청자’ ‘고려왕릉’ 등의 역사적 유형 자산에다, ‘가시리’ ‘청산별곡’ ‘서경별곡’ ‘만전춘별사’ 등 고려시대 최고 수준의 문학적 무형 자산까지 두루 갖추게 되었다는 긍지와 자랑의 말인 것이지요.
공장들을 세우고, 아스팔트를 새로 깔고, 수천억을 들여 다리를 놓고 또 발전소를 짓는 것이 우리의 삶과 우리 고장의 발전에 중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돈’만 들이면 언제라도, 누구라도, 시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런 예산의 1,000분의 1만 들여 강화도의 자랑스럽고 위대한 인문학에도 마찬가지로 다리를 놓고 발전설비와 장비들을 갖추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함석헌)고 합니다. 밥 먹고 ‘생각하는 일’ 만을 전문으로 하는 학자, 시인, 예술가들을 더욱 소중히 예우하는 강화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해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예우하지 않고 있다.”는 말이 아니라, “더 예우하였으면 좋겠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긴 글을 여기에서 마칩니다.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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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2012년에 위 글을 썼습니다. 그리고 다음 주에 임주탁 교수를 모시고 청산별곡, 가시리 등 ‘강화도읍기 시절의 문학’을 공부하게 되어서 기쁩니다. 금속활자(고금상정예문) 주조, 팔만대장경 판각, 최항 무덤의 청자진사상감청자, 삼별초항쟁 등 1232 ~ 1270년 사이의 역사·문화적 사실들이 많고 많지만, 우리 <강화도가 ‘고려가요’의 고향>이라는 것은 정말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여러분들의 관심과 사랑과 참여를 기대합니다.
드디어 양이사님이 하시고 싶은 일을 시작 하시는 군요~~~
축하드립니다.
양선생님의 끝없는 공부에 경탄할 따름입니다.
진정한 이 시대의 선비이십니다.
대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