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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요한복음 공부 제5강
* 말씀 : 요한복음 5:1-9
* 요절 : 요한복음 5:8,9a
베데스다에 오신 예수님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8,9a)
오늘 말씀은 베데스다 못 가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베데스다’는 히브리어인데 우리말로는 ‘자비의 집(House of Mercy)’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름과는 달리 베데스다에는 자비가 없었습니다. 도리어 살벌한 경쟁만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베데스다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그 경쟁 사회에서 패배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서른여덟 해 된 병자를 일어나 걸어가게 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그의 ‘진정한 베데스다’가 되셨고, 그의 경쟁력이 되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 베데스다 (1-4)
1절을 보면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명절이니까 모두들 기쁘고 즐거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명절이기에 더욱 가슴 시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2절을 봅시다. 예루살렘 동북 편에는 양문(羊門)이라는 성문이 있었고, 그 곁에는 베데스다라 불리는 못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못 가의 다섯 행각(行閣) 안에는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인간의 의술로는 고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얼굴은 모두 고통으로 일그러졌고, 베데스다는 신음과 한숨 소리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베데스다 못 가에 누워 있는 것은 하나의 전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천사가 가끔 베데스다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그때 맨 먼저 못에 뛰어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상 어디를 가도 나을 수 없는데 이곳 베데스다에서 나을 수 있다는 점에서는 희망적입니다. 그러나 그 희망이 이루어지는 데에는 조건이 있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먼저는 천사가 내려와 못 물을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가끔’ 내려왔습니다. 하루 한 번 또는 1주일에 한번 도 아니었습니다. 1년에 최소한 한번 내려오는 것도 아니었고, 선거철이나 월드컵이 있는 해라고 꼭 내려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야말로 ‘가끔’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희망은 기약 없는 희망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못 물이 움직이는 그 순간에 맨 먼저 뛰어들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베데스다 못 가에는 치열한 경쟁이 생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에 뛰어 들기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서로 자리다툼을 해야 했고, 다른 사람이 먼저 뛰어 들어가지 않나 하여 잠도 자지 못하고 충혈 된 눈으로 서로를 견제해야 했습니다. 돈 받고 자리 잡아 주는 깍두기 머리 아저씨들이 눈을 부라리고 있거나, 언제 어느 쪽에서 물이 동한다는 걸 알아맞힌다는 도사들이 여기 저기 돗자리를 깔고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들은 사람 사는 세상이 이렇게 살벌해서야 되겠냐 싶어 ‘천사모(천사를 사모하는 모임)’나 ‘베데스다 환우회’ 같은 모임을 만들어 ‘짱’도 뽑았고, 병이 덜한 사람들은 더 심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자고 결의도 했을 것입니다. 특히 다리 저는 사람은 맹인의 눈이 되고 맹인은 다리 저는 사람의 다리가 되어 서로 돕자며 ‘1촌’을 맺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물이 동할 때 맹인은 다리 저는 사람을 업고, 다리 저는 사람은 맹인의 양 귀를 잡고 방향을 조정하면서, 못 가에 당도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먼저 물에 뛰어드는 한 사람밖에 나을 수 없는데, 둘 중에 누가 양보하겠습니까? 물이 자주 동한다면야 이번에는 네 차례, 다음번은 내 차례하고 양보 할 수도 있지만, 물이 언제 동할지 모르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무리 1촌을 맺은 사이라 해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서로 경쟁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베데스다 못 가에서 휴머니즘은 사치나 구호일 뿐, 이기심과 경쟁심으로 인한 팽팽한 긴장만이 가득 찰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베데스다는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디 베데스다 못 가뿐입니까? 요즘 세상이 대학 나와야 행세할 수 있는데, 대학에는 정원(定員)이 있고 또 일류 대학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래서 미리 경쟁력을 키운다고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부터 영어 유치원에 들여보내는데, 그게 아이들에게 보통 스트레스가 아닙니다. 그래서 강남에서는 소아과 병원은 잘 안 되는데 소아정신과는 잘 된다고 합니다. 중고등학교에서는 친구 사이에서도 어려운 문제를 물어보면 알아도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오면 거기에 또 경쟁이 있습니다. 대학을 졸업해도 취직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2009년 8월 기준으로 대학 졸업생의 62.8%밖에는 취직하지 못하고, 그 중에서 30.6%는 보수도 작고 언제 그만 둘지 모르는 비정규직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대학 졸업하는 사람들 중 40% 정도만이 일자리다운 일자리를 얻게 되는 셈입니다. 그래서 대학에 들어와도 마음 편할 날이 없습니다. 어쩌다 기업에서 사람을 추천 해달라는 서류라도 날아들면 마치 베데스다 못 물이 움직이기라도 한 것처럼 서로 덤벼들어야만 합니다. 그때 맨 먼저 뛰어들기 위해 서로들 좋은 자리를 잡으려고 혈안이 됩니다. 교수나 친구도 미리미리 사귀어 두어야 하고, 자격증도 이것저것 따 두어야 하고, 언어연수나 리더십 등의 스펙도 잘 관리해야 합니다. 거기다가 기업들이 졸업예정자들을 선호하기 때문에 졸업을 미루고 미루어서 여학생들은 평균 6년 만에, 남학생들은 군대 갔다와야 하기 때문에 평균 8년 만에 졸업합니다. 그래서 처음 직장을 얻는 나이가 평균 28.7세, 그때까지 부모들은 뒷바라지하느라고 등골이 휩니다. 그러나 취직된다고 해서 경쟁이 끝나는 건 아닙니다. 입사 후의 경쟁은 더 치열하고 살벌합니다. 같이 입사한 동기들 중에도 한 두 사람 승진하고 나머지는 패배감을 씹으며 다음 물이 동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한 번 승진했다고 안심할 일도 아닙니다. 또 다른 경쟁이 기다리고 있고, 직급이 상당히 올라가서 승진하지 못할 때는 바로 퇴출당해야 합니다. 그 치열한 경쟁 속에서 끝까지 승자로 남는 사람은 단 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일등과 일류만이 살아남는 시대로 변천해 가면서 ‘경쟁력’이 우리 시대의 키워드가 되었고, 세상은 ‘Red Ocean-피바다’가 되었습니다. 이곳에서는 자비나 희생은 어리석은 자들이나 약한 자들의 덕목이 되어버립니다. 살아남으려면 동정하고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짓밟아야 합니다. 너 죽고 나 살자는 ‘정글의 법칙’을 익혀야 하고, ‘전략적 사고방식’에 익숙해야 합니다. 베데스다 못 가가 병든 자들의 사회였다는 점에서, 그리고 치열한 경쟁 사회였다는 점에서, 그것은 인간 사회의 축도(縮圖)였습니다. 그런데 이 베데스다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2. 베데스다에 오신 예수님 (5-9a)
이제 5절을 보면 그 베데스다 못 가에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무슨 병에 걸렸는지는 모르지만 서른여덟 해면 참으로 긴 세월입니다. 아마 베데스다에서도 최고참 병자였을 것이고, 어쩌면 그는 평생 동안 그곳에 누워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그도 다른 병자들을 제치고 일등으로 못에 뛰어 들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여러 번 재수를 했지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고, 그래서 계속해서 병자들 사이에 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베데스다 못 가에 오셔서 그 서른여덟 해 된 병자를 보셨습니다. 6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예수님은 그의 형편을 잘 아셨습니다. 서른여덟 해를 베데스다 못 가에 누워 보내면서 입었던 마음의 상처와 한(恨), 그리고 그 패배감과 절망도 아셨습니다. 그는 아마 베데스다 못 가에서도 가장 초췌하고 보기만 해도 부담스러운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보면 부담스러워서 말도 걸지 않고 지나칩니다. 대학생들은 모두 잘 생기고 똑똑하고 활기찹니다. 그러나 형편을 좀 자세하게 알고 보면 의외로 힘든 사람이 많습니다. 집안 형편이 너무 힘든 사람도 많고, 성격이 이상해지거나 인격이 파괴된 사람들도 많습니다. 우리는 부담스러워서 그런 사람들과는 관계를 맺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싶지만 이런 사람들은 양 삼고 싶지 않습니다. 그냥 지나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데스다 못 가에 누워있는 서른여덟 해 된 병자를 보셨습니다. 그의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에게 다가가셨습니다.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거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런데 “네가 낫고자 하느냐?”하는 예수님의 질문은 필요 없는 질문 같습니다. 그 병자가 얼마나 낫고 싶어했겠습니까?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가 낫지 않고 누워 있으면 동정도 받을 수 있고, 돈벌이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그가 나아서 걸어다니게 된다면 취직 전선에 뛰어 들어야 하고, 가족도 부양해야 합니다. 서른여덟 해 동안이나 누워있던 사람이 이제 일어나서 그런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은 끔찍한 일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대로 누워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 사회에 경쟁이 점점 치열해지면서 소위 ‘은둔형 외톨이’가 더욱 많아진다지 않습니까? 경쟁에서 떠 밀려난 사람들이 서울역과 영등포역에서 노숙자로 떠돕니다. 그들에게는 방에서 나오려는 소원이 조금도 없습니다. 절대로 나오려 하지 않습니다. 방에서 나와 사람들과 부대껴야 할 일이 끔찍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그가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낫고자 하는 소원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이 병자에게 “낫고 싶지요?”하고 물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물었다가 그가 낫고 싶다고 하면 어떡한단 말입니까? 우리는 그를 낫게 할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감기 환자에게라면 몰라도 서른여덟 해 된 병자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낫고 싶으시지요?” 하는 위로의 말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낫게 해 주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위로의 말씀만 아니라 “네가 낫고자 하는 소원을 가진다면 내가 너를 낫게 해 줄 수 있다.”는 희망과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 예수님이 우리들에게도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또 우리도 예수님을 믿고 캠퍼스의 친구들에게 “낫고 싶지요?” 하고 물을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서른여덟 해 된 병자와 같이 소망이 없어 보입니다. 이 세계가 서른여덟 해 된 병자보다 더 병색이 짙어 보입니다. 내 자신과 우리 모임이, 내가 돕는 양들이 서른여덟 해 된 병자와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우리가 희망의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낫고자 하는 소원을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자, 이제 7절을 봅시다. 예수님께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서른여덟 해 된 병자는 대답합니다.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님은 그가 낫고자 하는 소원을 갖기 원하셨고, 그가 낫고자 하는 소원을 가진다면 고쳐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병자는 예수님보다도 여전히 베데스다에 희망을 두고 있습니다. 천사가 내려와서 베데스다 못 물을 움직이게 하고, 그리고 그때 맨 먼저 뛰어들어 낫고자 하는 생각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맨 먼저 뛰어들려면 그가 일등 할 능력이 있든지, 아니면 후견인이 있어서 그의 뒤에 서 있다가 못의 물이 동하면 재빨리 그를 못에 넣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는 일등 할 수도 없었고 그를 못에 넣어줄 후견인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낫고 싶어도 저는 일등을 할 수가 없습니다. 또 이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누가 나를 못에 넣어 주겠습니까? 그러므로 저는 나을 수 없습니다.”예수님이 그를 도우시려고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시는데, 그는 여전히 일등을 할 수 없는 자신의 능력을 생각하고, 든든한 후견인 없는 자기 신세를 한탄하고, 싸늘하기만 한 세상을 원망합니다.
그런데 8절을 봅시다. 예수님은 그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말씀은 병자에게 순종하기 힘든 말씀입니다. 병이 낫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일어나 걸어갈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9절을 봅시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령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자, 이 장면을 초고속카메라로 다시 돌려볼까요? 서른여덟 해 된 병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임하자 병자는 일어나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자리에서 엉덩이가 떨어지는 게 아니겠습니까? 일어난 김에 걸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발이 떨어지고 앞으로 나가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몇 발자국 떼어 보다가 이윽고 그는 자기가 누워있던 자리를 말아들고 힘차게 걸어갔습니다.
서른여덟 해 된 병자는 일등을 하지도 못했고 또 그를 못에 넣어 줄만한 든든한 빽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병이 나아 일어나 걸어가게 되었습니까? 능력의 주 예수님께서 그를 도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도우시되 베데스다 못 물을 움직여주시거나 그를 못 불에 넣어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다만 그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서른여덟 해 된 병자를 일어나 걸어가게 했고, 그 병든 곳을 벗어나 힘찬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서른여덟 해 된 병자를 도와주지 않는 것은 반드시 사람들이 매정하고 이기적이어서가 아닙니다. 그를 도와 줄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계속해서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하면서 그를 도와줄 사람만 찾고 있었다면, 그는 영영 베데스다 못 가의 귀신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를 찾아오시고 그를 도우셔서 일어나 걸어가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도우셨을 때, 그리고 그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그는 일어나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시편 121편의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이 시인이 노래하고 사모하던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에 오셨으니, 그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 안에서는 일등을 할 능력이 없어도 됩니다.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도 됩니다. 다만 예수님을 믿으면 됩니다.
우리가 신년 수양회 때 보았던 ‘Fire-Proof'라는 영화의 감독이 새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제목은 ‘믿음의 승부(Facing the Giants)'입니다. 이 영화는 미국 한 시골의 샤일로 고등학교 미식축구 팀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고 합니다. 샤일로 고등학교 팀은 6년 동안 한번도 이겨 본 적이 없었습니다. 감독인 테일러는 몇 년 동안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어 기도마저 포기했습니다. 거기다가 임신을 위해 노력했지만 아이를 가질 수 없었고, 의사로부터 불임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는 말을 듣고 아내에게 그것을 고백하고 아내와 함께 웁니다. 또 팀의 선수 중의 하나인 데이빗은 원래 축구를 했었는데, 휠체어에 앉아 생활하는 아버지의 권유로 미식축구를 하기 위해 샤일로 학교로 전학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출전한 첫 번 경기에서 킥에 실패하고 말았고, 그는 아버지에게 불만을 쏟아냅니다. 샤일로 고등학교 미식축구 팀은 이렇게 감독부터 선수들까지 모두 절망 가운데 있었습니다. 새로운 시즌이 시작되어도 그들은 패배감에 사로잡혀 연습도 열심히 하지 않았고, 벌써 세 경기를 연속으로 졌습니다.
그런데 샤일로 학교와 학생들을 위해 늘 기도하는 브릿지 선생이 있습니다. 그는 테일러 감독을 찾아와 만일 그가 비가 오길 믿음으로 기도했다면 “빗물을 받을 준비를 하라”고 말합니다. 테일러 감독은 그때 그가 기도는 했지만 정작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실 때를 대비한 준비가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 후 그는 경기의 목적과 자세를 모두 바꿉니다. 즉 승리에 목적을 두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삼습니다. 또 이기든 지든 하나님을 믿고 패배감과 절망을 극복하고자 도전합니다. 그는 학생들에게 경기의 승패에 관계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힘을 다해 연습하도록 격려합니다. 불가능한 훈련에 도전하게 함으로써 믿음을 가르칩니다.
이렇게 하자 샤일로 팀은 이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제 무패의 팀 자이언츠와의 경기를 앞두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영화제목이 ‘Facing the Giants’입니다. 그런데 경기를 앞둔 두 팀의 목적이 다른 만큼 두 감독의 자세도 다릅니다. 자이언츠 팀의 감독은 선수들과 코치들에게 지면 죽을 줄 알라는 식으로 겁을 주지만, 샤일로 팀의 테일러 감독은 중압감에 눌려 포기하려는 선수들을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아줍니다.
참, 이 얘기도 빼놓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테일러 감독이 자기 때문에 아내 브룩이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고 함께 울던 밤에 그는 아내에게 아이를 갖지 못하더라도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때 브룩은 대답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몇 주가 지나고 자이언츠와의 경기가 있기 전 브룩은 병원에 가서 다시 임신 검사를 하지만, 결국 임신이 아니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 말을 듣고 브룩은 울면서 고백합니다. “그래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샤일로 팀이 이겼을까요, 자이언츠 팀이 이겼을까요? 이 영화가 한국에 들어오면 우리가 함께 보면서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만 예고편 마지막 장면에는 그 경기 후로 수많은 샤일로 고등학교 학생들이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단하는 장면이 나오고, 테일러 감독을 찾아와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도왔던 브릿지 선생이 복도에서 학생들의 사물함에 손을 얹고 기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샤일로 팀이 이겼는가 졌는가는 별로 의미가 없는 게 아닐까요? 이 이야기를 통해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예수님의 도움을 바라고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배우는 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이번 주 읽었던 뉴욕 양키즈의 마리아노 리베라 선수의 인터뷰 기사가 생각납니다. 그는 저와 태어난 해가 같고, 파나마 출신이고, 양키즈의 수호신이라 불리는 마무리 전문 투수입니다. 기자는 “당신은 위기의 순간마다 마운드에 올라 타자들과 상대해 거의 대부분 승리를 거두는데, 어떤 마음으로 던지느냐?”라고 묻자 “나는 지금까지 한번 도 내 힘으로 타자들을 상대한 적이 없다. 마운드 위에서 공을 던질 때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 그리고 그는 항상 나를 도와주신다. 나는 단지 매일 기도하며 성경을 읽을 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너무나 자주 반복되는 위기상황이 우리를 심히 피곤케 하고, 절망케 합니다. 우리가 리베라 선수의 자세를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닉 부이지치라는 청년을 압니다. 그는 날 때부터 사지 중의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저 머리와 몸뚱이뿐이었고, 그의 몸뚱이에 있는 것이라고는 발인 것 같지만 전혀 발 같지 않은 아주 작은 부위가 달려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믿고 도전했습니다. 그는 그 작은 부위로 일상생활 하는 법을 익혔고, 고등학교 때는 반장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수영 등의 온갖 운동을 즐기고, 락과 락 댄스까지 즐깁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오대양 육대주를 다니며 젊은이들에게 믿음과 희망을 전합니다. 그의 간증을 들으면서 많은 젊은이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그보다 좋은 조건을 가지고도 인생을 낭비하는 죄를 회개하고 새 삶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그처럼 멋있는 삶을 살고 싶어하고, 활동영역이 넓고 보람된 삶을 살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경쟁력이나 스펙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닉 부이지치가 그런 삶을 살고 있습니다. 능력이 없는 것도 문제가 아니고, 빽이 없는 것도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문제입니다. 조건을 탓하고 세상을 원망하기보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예수님을 믿고 어려움에 도전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맺는 말 :
이 시간 우리가 ‘베데스다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꼭 일등을 하거나 빽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적도 일등이어야 하고 자격증도 많이 따 놓아야 하고 스펙도 빵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거기다가 부모님이나 친척들도 유력해야 하고, 교수님이나 선배들도 잘 사귀어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가 죽거나 염려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나 꼭 일등을 해야 세상에서 성공합니까? 빽이 든든해야만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일등이시고, 예수님이 우리의 빽이 되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진정한 베데스다이십니다. 우리가 젊은 날에 미래를 준비하려 노심초사하기 이전에 예수님을 믿고 도전하는 삶을 훈련하여 예수님을 경쟁력으로 삼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 안 에 있으면 그의 삶은 Red Ocean이 아니라 Blue Ocean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그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든 일에 마음을 다하고, 어려움이 있으면 믿음으로 극복하고자 도전할 뿐, 사람들과 경쟁하며 초조해하거나 악한 일을 도모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의 도움을 믿는 믿음으로 삶으로써 살벌한 세상에서 병들어 짓눌리지 않고 일어나 힘차게 걸어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