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풍부한 성량이나 출중한 기량을 국악인들은 모두 인정하고 있다. 천년의 향기를 이 시대에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는 전통가곡의 대명사 이 명인을 만나 그가 안내하는 가곡의 세계를 여행해 보기로 한다.
대담 -서 한 범(본지 편집고문 - 단국대 교수)
서한범 교수(이하: 서) 이동규 명인, 오랜 만입니다. 문화타임즈 독자들을 위해 시간을 내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동규 명인(이하: 이) 반갑습니다. 영광입니다.
서 : 이동규 명인은 정가(正歌), 특히 그중에서도 남창가곡의 간판격으로 국내뿐 아니라,국제적으로도 그 명성이 자자하신 분인데, 특별히 가곡을 좋아하게 된 배경이나 이 분야를 전공하게 된 계기를 말씀해 주실까요¡
이 : 어린시절, 부친을 따라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했는데, 제 나이 6세 때 우연히 단가 ‘죽 장망혜(竹杖芒鞋)’를 배우게 됬어요. 그 때는 때가 때인 만큼 부산으로 피난 온 많은 국악인들이 부산의 국립국악원으로 늘상 모여 들었지요. 자주 듣게 되니까 저절로 익혀지더군요. 부산과 서울 등지의 국민학교를 전전하다가 졸업을 하고, 아버지 손에 이끌려 1958년, 국립국악원에서 만든 국악사양성소 제 4기생으로 입학하게 되었지요.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이후 국악과 더불어 평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보고 들은 게 아버지의 피리소리였고 가곡이나 시조, 가사와 같은 노래들이었어요. 가정환경이 자연스럽게 저를 국악인으로 살게 만든 셈이지요.
서 : 특별히 가곡을 전공하게 된 계기는¡
이 : 네, 국악사양성소에서는 가야금을 전공했습니다. 당시에는 성악전공이 따로 없었기에 기악을 전공했지요, 처음 들어가 편종이나, 편경, 적, 소금, 단소, 장구, 춤, 정가, 민속 성악, 등 폭넓은 기초를 다졌지만, 특히 기다리는 시간은 이주환 선생님이 지도해 주시던 가곡시간이었지요. 이주환 선생님은 저에게 아버지를 그대로 닮아 목이 좋다는 칭찬과 함께 열심히 연습하면 대가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신 분이지요. 그래서 가곡에 주력하게 된 것입니다.
서 : 이주환 선생께서는 이동규 명인을 일러 <천(千)에 만(萬)에 하나 있을까 말까한 소리> 라는 말씀을 하셨다는데¡
이 : 열심히 하라는 뜻의 격려말씀이겠지요. 선생님께서는 <두봉에 못지 않은 목>이라는 칭 찬을 자주 주셨지요. 스승과 사별 후에는 아버지(두봉 이병성)한테 미처 전수받지 못한 부분은 녹음 테이프를 구입해 <아버지의 목>을 배우는 일에 열중했습니다.
서 : 국악계에서는 이 명인이 5대째 전통음악의 가업(家業)을 잇고 분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에 대한 구체적인 말씀을 주신다면¡
이 : 저의 가계에 대한 내력은 국립국악원이 개원40돌(91년 4월)을 맞아 펴낸 <이왕직 아악부와 음악인들>이란 단행본에도 소상히 기록되어 있어 참고하시고 간단하게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의 4대조이신 이인식(李寅植)님은 피리의 명인으로 조선조 헌종때의 궁중악사이셨고 증조부는 역시 고종때의 궁정악사로 피리의 명인이셨던 이원근(李源根)님이시며, 조부는 정악 거문고의 명인으로 알려진 송사(松史) 이수경(李壽卿)님이시지요. 조부의 제자들이 곧 성경린, 장사훈 선생들이지요. 그리고 저의 부친은 가곡과 가사를 부르시던 두봉 이병성(李炳星)님입니다. 가업승계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한편, 선대에 누가 되지 않기 위해 겪는 남모르는 고충도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서 : 혹시 할아버지에 관한 기억을 떠 올리신다면¡
이 : 어려서부터 여러 선생님들이 할아버지에 관한 말씀들을 해 주셔서 저는 고조 할 아버지나 증조 할아버지가 매우 가깝게 느껴집니다. 특히 "(이수경)할아버지는 거문고도 즐겨 타셨지만 오동나무를 구해다가 집에서 직접 거문고를 만드시기도 하셨어요. 어린 저와 명주실을 잡고 거문고 줄을 꼬는 걸 좋아하셨지요. 할아버지 사랑을 많이 받았어요 할아버지 심부름은 제가 도맡아 해드린 기억이 새롭습니다. 제가 열 살때 돌아가신 것으로 기억됩니다.
서 : 가곡의 아름다움이라고 할까. 가곡속에 내재되어 있는 음악적 특징을 강조하신다면¡
이 : 그 문제야 가곡에 관련된 글을 많이 발표하고 계신 서 교수가 더 잘 아실 텐데-- 교수의 이론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습니다. 가곡은 어렵지만 멋이 있는 노래이죠. 저는 어릴적에 아버님께서 부르시는 노래를 들을 때마다 저 소리는 아무나 흉내 낼수 있는 노래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단순한 음의 연결이 아니라, 음 하나 하나에 마음 을 싣지 않으면 노래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거든요. 유연하게 이어가는 완만한 곡선의 아름다움, 슬픔이나 기쁨의 감정을 겉으로 들어내지 않는 절제(節制)미, 창법이나 발음법에서 느껴지는 장중한 분위기, 등등 가곡의 참 멋은 하나 둘이 아니지요. 가곡에 빠져 들고 보니 가곡과 만나려면 마음속의 사념(邪念)을 뽑아버리고 겸손하고 도 따듯한 마음가짐을 갖는 자세부터 바로 가져야 노래가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요즘 세상이 얼마나 험합니까¡. 이러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가곡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이러한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자신이 얼마나 복 받은 일인가를 생각하며 스스로 감사할 때가 많습니다.
서 : 이 명인은 무대에 임하는 자세가 철저하기로 정평이 나 있던데¡
이 : 감사합니다. 저 뿐이 아니라, 모든 예술인들이 나름대로의 무대준비가 있겠지요. 제 노래를 들으러 오시는 분들을 생각하면 여러번 반복해서 연습을 하지 않을 수 없지요. 한 치의 소홀함도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지론입니다. 특히 가곡은 정좌 해서 처음부터 끝까지흐트러짐이 없는 모습을 유지해야 합니다. 아랫배에 힘을 주고 뒷목을 끌어 올려 발성을 해야지 앞 목을 쓰면 흔히 말하는 노랑목이 되고 말아요. 정가는 정신에서 나오는 소리거든요. 그래서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혼연일체가 되지 않으면 절대 좋은 소리가 나오지 않습니다. 무대는 단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곳입니다. 준비하고 또 준비해서 무대에 오르는 것을 습관화 하고 있습니다. 이수(貳數大葉)나 태평가(太平歌)와 같은 노래들은 느리기도 하고 낮은 음, 높은 음들 이 이어져 호흡조절을 요합니다.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땀이 흐르고, 파리가 귀찮게 굴 때도 있지만 그래도 움직여서는 안됩니다. 선비의 노래인 가곡은 자세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거든요.
서 : 아호가 우봉(又峯)이신데 어떤 의미가¡
이 : 가곡을 부를수록 아버님에 대한 그리움이 간절해 졌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노래를 찾기 위해서 방송국이며 문화재관리국, 서울대를 비롯한 각 대학의 라이브러리를 찾아 다니면서 아버님의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어렵게 구한 녹음테잎을 독방에서 듣 고 또 들으면서 그 가락들을 연구하고 연습했습니다. 아버님의 도움이라고 할까, 어느날 목에서 맑고 깨끗하면서도 힘찬 소리가 터져 나오더라구요. 목소리가 아버님과 비슷해 두봉(斗峯)이 또 한 명 나왔다고 해서 저를 우봉(又峯)이라고 불러주기 시작했습니다. 대전의 연정(燕亭)선생이 처음 불러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서 : 국립국악원의 감독직을 맡게 되셨다는데¡
이 : 올해로 34년째입니다. 이곳은 제 할아버님들의 고향이기도 하고 제 음악의 고향이기도 해요. 그래서 그런지 국악원만 오면 마냥 좋고, 내 집처럼 편안해요.곁눈질 않고 미련하게 33년 동안 국악원에 몸담고 있는 이유로 감독이라는 중책을 맡긴 것으로 압니다. 힘도 없고 능력도 모자라지만 동료들과 함께 뜻을 모으고 힘을 합해 국악원만이 지니고 있는 우리 음악의 정통성을 지켜가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서 : 앞으로의 계획은¡
이 : 우리 음악, 특히 정가를 배우게 되면 사람들 마음이 순화가 돼 순한 양이 됩니다. 그래 서 좀더 많은 사람들에게 정가를 알리기 위해 공연활동이나 교육활동을 지속할 것입니다. 그 일을 하기 위해 정가합창단을 만드는 게 마지막 꿈입니다. 또 하나는 정가를 중심으로 한 음악극을 무대에 올리는 공연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서 교수께서도 가곡에 누구보다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계시니까 도움 주시리라 믿고 있습니다.
서: 구상하고 있는 일들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우봉 선생의 건투를 빕니다.
이: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