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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작가회의영주지부 원문보기 글쓴이: 강태규
게시된 시-----------
은밀한 매복 도꾸리蘭 때 미는 철학자 포석정, 호랑가시나무 어둠 또는 허공이 된 사람 트럼펫벌레잡이통풀 운암지 수련잎은 초록 접시 비, 토끼풀꽃
대구작가회의 회원이며 <운암지 수련잎은 초록 접시> <수성못 연못> <왜관> <이팝꽃 그늘>등 좋은 작품 많음
은밀한 매복
이해리
이상하지
도꾸리蘭
베란다 화초들 중에 가장 볼품 없는 도꾸리蘭 언제 꽃 한 번 피운 적도 없고 이파리란 것이 꼭 빗다 만 머리카락처럼 부스스한 그것에게 날마다 물뿌리개 기울여 뿌린 물은 물이 아니라 무관심이었음을 이미 감지하고 있었던 것일까 마른 잎 뜯어주려 손 내밀자 순식간에 쓱싹, 손가락을 베어 버린다 뭉클 치솟는 핏방울 감싸쥐고 바라보니 시퍼런 칼을 철컥, 칼집에 넣고 있었다
때 미는 철학자
교수면 뭐하고 박사면 뭐 하능교 때 잘 나오고 팁 많이 주는 손님이 최고지 수성하와이 목욕관리사 아줌마들 철학자다, 필기구와 서책 없이 활딱 벗은 맨몸으로 체득한 때의 철학 단순 명쾌한 결론이 놀랍다
때 밀어 보믄 안다카이, 그 사람 성격, 신분 재력, 취미까지 다 보인다카이 몸매 이뿌고 맘씨 곱은 사람은 때도 수밀도처럼 수월한데 심술 사나운 심뽀에 인색해 빠진 몸띵이들은 때도 눌은 양철냄비 맹키로 애 믹인다카이, 그런 손님 만나믄 오뉴월 염천에도 막걸리 한 사발 들이키야 일 할 수 있다카이
수증기에 쪄진 허벅지 트실트실 튼 살갗이 가문 고향의 논밭보다 아득한 자신의 몸은 볼 줄 모르고 발가벗은 남의 때에서 가득 껴입은 무엇을 통찰하는 쓸쓸하도록 단순한 결론이 내 생각을 복잡하게 한다
포석정, 호랑가시나무
호랑가시나무
수의 패션쇼
강남 한복판에서 수의 패션쇼가 열렸다
어둠 또는 허공이 된 사람
현관 센서등이 한참 있다가 켜진다 뒤죽박죽 몇 켤레 어둠이 발등을 밟을 때까지 안 보이는 외출 더듬더듬 챙길 때까지 기척도 않다가 정작 내가 나가고 현관문이 닫힐 때 벌컥 켜진다 참 센스도 없는 센서등, 그러므로 센서등에 있어 나는 가까이 오면 캄캄한 空이거나 텅 빈 어둠이다가 안 보이게 사라지고나면 뚜렷이 감지되는 어떤 존재이다 센서등을 지날 때마다 空이 된 나는 조금 쓸쓸하다, 어떤 때는 없는 나를 인식해 보라고 손 휘저어 본다 있는 내가 결코 어둠이 아니라고 소리 질러본다 허연 천정에 매달려 묵묵부답인 센서등 첨벙첨벙 물 속 같은 어둠을 풀어내려 시효가 어긋난 사랑 같은 것 삶 같은 것을 떠내려 보낼 뿐이다 시험 끝난 후에 번쩍 생각 나던 정답 같은 것 열차 떠난 후에 문득 생각 난 시각표 같은 것 아아, 가까이 있을 땐 몰라보고 멀리 떠난 후에 들어오는 등불 같은 것들 허공에 밟힌다
고구마 캐는 날
번식이란 뭔가가 줄어드는 것이다 이 세상에 퍼져있는 많은 種들의 뒤에는 그것들을 퍼뜨리기 위해 소멸해가는 것들이 있음을 본다 아기를 낳지 않는 여자는 늙지 않는데 아닐까라고 애기하는 그녀를 따라 고구마 캐러 가는 날 개도 출산을 하고 나니 털이 거칠어지고 얼굴이 미워지더라는 그녀의 목소리 끝에 고구마밭은 고랑을 파고 누워 있었다 새끼를 낳다가 항문이 빠진 돼지의 피가 꽃잎처럼 뚝 뚝 도살장 쪽으로 가고 있는 밭에서 호미는 흙의 몸을 파헤치고 흙은 열려진 밭의 자궁 속에서 갓난아기같이 발가벗은 고구마들을 줄줄 뽑아냈다 고구마의 파종을 내가 물었을 때 씨고구마의 싹을 꺾꽂이 한다는 대답이 그녀의 머릿수건 밑에서 들려왔다 싹을 밀어 올리는 동안 복압에 못 이겨 항문이라도 터진 걸까 아랫도리 짓무른 고구마의 몸 하나가 봅혀 나와 내 호미날에 피를 묻히며 어디론가 버려졌다 번식 뒤 아프게 사라져 가는 쓸쓸한 이름들 붉은 노을 속으로 흘러가는 저물녘 걷어놓은 비닐 덮개들이 바람소리를 냈다
이슬의 눈 속에
여름 아침 토란잎이 가만히 받쳐들고 있는 이슬을 보아라 간밤에 분명 누군가가 울고 간 흔적이 있다 얼마나 투명하고 깊은 슬픔이 몰래 밤길 다녀 간 것일까 바람이 일렁이면 초록 손바닥 펴드는 토란잎 위에서 깨어질 듯 방울방울 빛나는 눈물 산도 하늘도 새소리도 그 속으로 들어가 한 방울 보석되어 고요하다 함부로 울 수 없는 세상 몰래 울고 난 자국 저렇듯 영롱할 수 있다면 나도 한 방울 찬란한 슬픔이 되고 싶다
현금지급기
촤르르르... 바닷물이 조약돌 훑는 소리를 내고 딸깍, 개폐기가 열리면서 현금이 나온다 토요일 오후, 이용자는 뜸하고 CCTV는 외계인 눈알 같이 섬찟한데 현금을 집어드니 놀랍게도 따뜻하다 무엇인가 차가운 기계가 돈에 묻혀 보내는 온기.. 따뜻함이 오래 품은 달걀 같다. 어떤 계좌는 알처럼 아슬아슬 하다는 뜻일까 설핏 닫히는 개폐구 속은 빽빽한 톱니, 윙윙 도는 롤라와 콘베이어벨트... 한 치 여유 없이 치밀하고 복잡하게 맞물려있다 평생 세기만하다 가는, 스스로에겐 마음껏 쓸 수도 없는 그것 때문에 속이 저리 복잡해서 어찌 사나, 혹시 내 손에 닿았던 온기,기계의 슬픔은 아니었을까 실수하면 돌이킬 수 없다 불 켠 신경회로들이 빨갛게 충혈되어 낡아가는 묵묵한 현금지급기 저 충직한 시지프스의 가슴에 비밀번호를 넣으면 촤르르르.... 한 움큼 바람 부는 내 가슴이 나온다
이팝꽃 그늘
고소한 뜸 냄새를 풍기며 변함없는 밥솥이
제3회 평사리 문학대상 수상 시 (토지문학상)
제 떠나왔던 도래지로 날아가려는 겨울 철새는 맹목적이다
조그만 새의 의지를 거대한 비행기가 꺾지 못하는 이유, 무어라 설명할까 조류학자들은 인상받기*라고 명명했지만 차가운 동체에 묻힌 한 점 혈흔의 가엾음으로 나는 그 맹목이 그리움이라 유추해 본다 총과 경음기 폭음기로 위협해도 청, 청, 청, 푸른 하늘 들이받으며 날아오르던 새, 그렇지 그리움이란 것, 제 떠나왔던 물가의 물소리 바람소리 사무친 기억 같은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안 들리고 안 보이는 것, 안 보이지만 뜨겁게 사무치는 간절함은 끝까지 믿고 행하는 것, 지구의 반 바퀴나 되는 비행거리를 찬 날개 두 쪽과 가슴에 오므려 붙인 가느다란 두 발이 전부인 行裝으로 날아가도 서럽지 않은 것, 그 망망한 외로움을 위해 한 목숨 분쇄되는 장애물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 펄럭 펄럭 붉은 석양이 적시는 흰 가슴의 날개로 제 몸 매질하여 구만리장천을 후회 없이 날아가는 것, 그리움도 그쯤은 되어야 지상의 계절을 번갈을 수 있지, 한 세상 사랑해서 건너왔다 할 수 있지
성인의 조건
프로이트는 말했다 일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으면 成人이라고 너무 미흡한 정의 아닌가 프로이트 아카시아 우거진 오솔길 한 모롱이 성인용테잎 판매 현수막을 두르고 트럭 한 대 서 있다 일 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몸을 가졌지만 일 할 데 없고 사랑할 데 없어 한적한 오솔길 같은 데나 찾아와 시간을 죽이고 있는 딱한 성인처럼 트럭은 무력하고 무료해 보였다 노곤한 햇볕을 덮고 주인인 듯한 사내는 잠들어 있는데 뼈와 살이 타는 밤 무릎과 무릎 사이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야릇한 제목을 가슴에 붙여놓고 테잎의 자켓 사진 속 반라의 여인만 요염한 자세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멀리 노란 유채꽃 사이로 스르르 기차가 지나가고 살랑 바람에 떨어진 벚꽃잎이 여자의 흰 허벅지에 화르르화르르 들러붙는 동안 아무도 오지 않는 그 길 벚꽃잎 샤워하는 사진 속 여자, 아름다워서 고요하고 청바지를 입고 꿈에 든 사내는 잠들어서 고요한 그 길 프로이트 그 사람 일 없고 사랑 없어 쓸쓸한 성인의 외로움에 대해선 왜 정의를 내리지 않았나 한참을 가다 돌아보니 천지에 꽃 핀 봄날 쏟아진 벚꽃잎 뒤집어 쓰고 무슨 이물질처럼 오솔길에 우두커니 서 있는 성인용테잎 판매 트럭 한 대
안전기지
아기가 처음 일어설 때, 이 세상 첫발자국 두어걸음 떼다간 꼭 뒤를 돌아본다네, 엄마가 지켜 보는지 돌아본다네 그 때 아기가 돌아보는 엄마를 심리학에선 안전기지라고 부른다네 안전기지란 그 어감(語感) 먼 고향집 불빛 같이 뭉클해서 입 속에서 가만히 뇌어 보았다네 다가오는 막막한 세상걸음걸이 서툴러 비틀비틀 쓰러지면 울면서 돌아갈 곳, 밤중에라도 찾아가면 코눈물 닦아 안아줄 그 곳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무장경비 튼튼한 철옹성이 아니라 바람숭숭 등뼈허술한 어머니 가슴이란 걸 가르치지 않아도 아기는 아는 모양이라네 그래서 다 늙어 꼬부라진 고향 어머니들 손마디 안엔 솥단지 하나씩 숨어있고 그 솥단지 안에 국과 밥 따뜻하게 묻혀 있는가 껑껑 언 얼음깨어 머리 감고 정월대보름 찬 하늘에 치성으로 燒 紙올리며 용왕도 먹이시는가 나, 내 안전기지였던 어머니 돌아보며 첫걸음 걸어 또 한 채 안전기지되었지만 코스모스 사잇길로 어머니 상여 나가는 날 어머니는 뒤돌아보지 않으신다네, 북망산천 어둡고 막막한 길 코스모스 덤불 흔들어 영영 감추신 뒤론 어른이어도 나는 안전기지 잃어버린 고아가된다네
트럼펫벌레잡이통풀
유인하고 있어요 윤나게 닦아 둔 트럼펫, 벌레의 귓전에 얼마나 달콤한 세레나데를 불어제꼈 던지 벌레 한 마리 정신없이 풀대궁 속으로 빠져들고 있어요 엉뎅이를 한껏 치켜들고 트럼펫 감미로운 음계에 코를 박고 어지어질 풀의 궁전에 깔아놓은 양탄자를 따라 안단테 칸타빌레 들어가고 있어요 몰래 황소 팔아 클레오파트라 카페 술잔 속으로 잠적한 외삼촌을 닮았군요 깊숙히 들어갈수록 화려한 색깔 향기로운 냄새, 깊은 어느 지점에서 풀은 입구를 오므리고 벌 레를 흡수해 버리네요 그 때 막 정신이 깬 벌레에게 사랑의 천국은 환멸의 지옥으로 바뀌었을 까요 통풀이 거세게 몸부림칩니다, 사랑에 빠져
목숨을 잃어보지 못한 그대여
오로지 사랑에만 목숨 건 그 벌레가 나는 왠지
종묘의 마지막 궁중악사
역대 왕과 왕후神位 모셔진 종묘 영녕전. 오월 첫 째 일요일 종묘대제를 관람한다. 고색창연한 판위대* 위엔 흙바람만 불고 가마 아래 우물은 완강한 뚜껑에 덮였는데 햇살부신 마당, 綠衣紅衣 휘날린다. 악사와 무원들 춤과 주악이 화려하다. 북쪽을 향해 네 번 절하고 용찬에 술을 따르는 제관들. 푸른 그늘 아래 혼백이 된 왕들 차례로 불려나와 즐기다 간다. 나는 종묘수풀 늙은 악사의 독백에 귀가 젖는다. 그는 이조 왕실의 마지막 궁중 악사, 주름진 얼굴에 회한의 그늘이 드리우고 감회어린 눈으로 먼 곳을 우러러 독백한다. 녹음방초승화시야! 녹음방초승화시! 그 아득한 소리 굽이쳐 하늘도 구름마차 바퀴자국 남겨놓고 출궁해버린 종묘공원의 오후, 꽃과 풀에도 戰意를 부여해 놓고 무엇에게 敗하였길래 왕은 자취 없는가.
*판위대: 왕이 몸소 제사 올릴 때 영녕전 동문으로 난 御路를 따라 묘정에 들어와 제사 올릴 예를 갖추는 곳, 이때 왕은 초헌관 왕세자는 아헌관 영의정은 종헌관이 된다
수성못 공원
허연 꽃눈 휘휘 날리는 버드나무 다 베어지고 꽃잎 또랑또랑 눈뜨는 벚나무가 심겨졌다 하늘 향해 가지 뻗는 벚나무보다 땅 가까이 축축 늘어지는 버드나무는 아무래도 노인성이다 자연사를 꿈꾸기엔 아직 한창인 나이 푸르름을 거세당한 버드나무 둥치 켜켜의 나이테 위에 명퇴한 중년들이 모여들어 삼삼오오 바둑을 둔다 서로 아무 말 하지 않는 가슴속에 파랗게 반짝이는 황벽나무 이파리가 수런수런 수심 띤 그늘을 드리우고 갈 곳 없는 바람은 왁자하게 푸른 물결 위에서나 밀물져 보는 저물녘 쌍고동 울어울어 연락선 떠나듯이 조기 퇴직한 사내들의 청춘도 솜사탕 장수 유행가처럼 떠나가고 한 켠에선 화투패 돌아가는 소리 지장을 그만 두고부터 머리칼 속에 부쩍 허연꽃눈이 생긴 황과장은 지나가는 연인들만 봐도 눈물난다 이 도시 어디에 早老를 독촉하는 톱날이 있는가 결제서류 챙기듯 들여다 본 밑둥만 남은 나이테는 그의 나이와 같은 마흔 다섯 개다
운암지 수련잎은 초록 접시
아직 덜 헹군 접시들이 와그르르 물 속에 담겨 있다 식기세척기도 없는 부엌 저 접시 다 설겆고 출근하면 지각일테고 놔 두고 나가면 불량 며느리 낙인 찍히겠다 밤낮이 뒤바뀐 아이는 밤새 보채고 출산휴가 동안 내 몫까지 일 한 직장 선배는 인상이 좋지 않다 오, 내 생의 억압인 부엌이여, 접시여 그저 착하게만 키웠으니 어여쁘게 봐 주시고... 친정 어머니 날 시집이란 연못에 뿌려놓고 가신 뒤로 너무 많은 접시가 날 물 속에 빠뜨렸지 수련잎처럼 浮葉性인 주부라는 이름 내 삶 위에 떠서 심연을 가렸지 내게도 필 수 있는 꽃이 있다고 수련 봉오리 붓을 들고 허공에다 써 보지만 너는 아줌마잖아 아줌마잖아
햇볕도 바람도 조절 안되는 물이 내 꿈을 내리 누른다 쉽게 폄하되는 억울한 이름 아줌마
잠이 모자란 꿈 아무데서나 졸다 깨어보니 아직도 못 헹군 접시 위에 몇 방울 식구들이 담겨 있다
비, 토끼풀꽃
야산기슭으로 진군해 온다 유월의 빗소리엔 하얗게 눈 뜨고 죽은 군화소리가 들어있어 붉은 꽃 발가락마다 축축한 무덤 하나씩 동여매고 내게로 건너오는 빗소리 빗방울 흐드러진 산야에 수많은 토끼풀꽃 피워낸다 토끼풀꽃 가만 보면 누군가의 눈물 맺힌 뼈 같애 조그만 주먹밥 방울방울 흩어놓고 땅 위로 뛰쳐나온 유서 같애 그 겨울 백두산까지 끌려갔던 소년병 아버지 부상의 아픈 눈썹 뼈 자국 늬 아부지 겁이 많아서 바람 속 수선화처럼 떨었단다 말도 마라 말도 마라 총알은 함박눈으로 쏟아지지 거대한 괴물처럼 어둠은 덮쳐오지, 꽁꽁 언 참호를 야전 삽 하나로 소리 안 내고 파라는 명령 꽃 피는 마을로 돌아가 죽음을 벗고 싶은 푸른 이름들 이 산하의 토끼풀만큼 쓰러져 갔어... 뭐라고 웅얼웅얼 못 다한 말 빗소리에 가려 듣기지 않네 우우 세계로 뻗어가는 거대한 물소리 들릴 뿐 토끼풀 헝클어진 서해해전 들릴 뿐
빗방울 왈츠
빗방울, 빗방울, 빗방울 뛰어내려 승용차 앞 유리에 맺힌다 맺힌다는 것은 무언가 가슴에 걸려 있다는 것 흐르지 못하고 가슴에 맺히는 것은 여러 번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선이 되게 한다, 작은 새의 서러운 눈알 같은 빗방울, 빗방울은 빗물의 눈동자 수 천개의 물빛 눈동자로 차 안을 들여다 본다 차창에 바짝 붙어 내 눈을 들여다 본다 우는 듯 웃는 듯 비 맞으며 들여다 본다 내 눈 속에 무엇이 맺혀있길래 저리 집요한가 천 갈래 만 갈래 튕겨나가 죽으면서 들여다 본다 봐라, 눈물 그렁한 눈동자 말고는 가진 것도 없는 게 눈 한 번 안 깜박이고 집착하는 관심의 중심을 오매불망 글썽이는 빗방울의 침묵을 빗방울에게도 잘 못 운전해 온 生이 있는가 가지 말아야할 곳을 기웃거린 후회가 있는가 수 천개의 물빛 눈동자가 하늘에서 떨어진다
러시아 삽화
초라한 침대 목단꽃 이불 위에서 하얀 눈이 내린 그녀의 알몸이 카메라 플래쉬를 받았다 놀라 얼른 얼굴만 가리는 춥고 기인 밤하늘 감출 틈 없이 황망히 드러난 하체는 검은 렌즈 속으로 들어가 차가운 수치심으로 뒤척거렸다 황급히 얼굴 가린 다섯개 손가락 틈새로 하바로스크 대학 일 학년 창백한 뺨을 가진 강의 노트가 하얗게 질린 국가가 되어 세계를 내다 보았다 붉게 취해 출렁거리는 카메라 관광객들은 수시로 바다를 건너오고 화대 만큼 지불 받지 못한 옥망 번쩍번쩍 번갈아 담을 때 창문 너머 자작나무 가장자리 붕괴된 몇 개의 별이 떨어지고 벽지 속의 키 큰 나무들 복도에 잠복한 어둠처럼 말이 없었다 이윽고 뿔뿔이 부서진 달이 그녀의 알몸 위로 떠올라 방황하는 한 마리 어린 순록의 발자국을 헤아리는 밤이 길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