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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련정을 지나 창경궁 담장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담장 가까이에 커다란 뽕나무가 서 있습니다. 천연기념물 제471호로 지정된 창덕궁 뽕나무입니다. 나무의 높이가 12m, 사람 가슴 높이의 줄기 둘레는 72.5cm입니다. 수령은 약 400년 내외로 추정됩니다.
조선시대에는 누에를 쳐서 명주를 짜는 일을 아주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왕실에서도 잠실을 만들어 왕비가 손수 누에를 쳤습니다. 창덕궁 후원에도 누에를 치기 위하여 뽕나무를 많이 심었습니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당시 경복궁에 3590주, 창덕궁 안에 1000여 주의 뽕나무가 있었다고 합니다. 나무 박사 박상진 교수에 의하면 현재 창덕궁에는 당시의 1/10인 100여 주의 뽕나무가 자라고 있다고 합니다.
↑뽕나무에서 시선을 돌려 길 쪽으로 향하면 한반도처럼 생긴 연못이 있고, 물가에 앉아 두 발을 담그고 있는 듯한 모습의 정자가 보입니다. 부채 모양으로 생겼다고 선자정(扇子亭)이라고도 불리고, 뱃놀이를 구경하는 정자라고 관람정이라고도 합니다. 지금은 공식적으로 관람정으로 소개가 됩니다.
↑과거에는 이 연못을 반도지라고 부른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정자 이름을 따서 관람지라고 부릅니다. 반도는 곧 한반도를 의미하는데 일제는 이 반도라는 말을 좋지 않은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에 반도와 반도인이라는 말은 조선과 조선인들은 멸시하는 말이었습니다. 반도(半島)라는 말 자체가 나쁜 말은 아니지만 일본인들은 '섬나라도 아니고 대륙도 아닌 뚜렷한 정체성이 없는 조선인'이라는 뜻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식민사관을 다른 말로 반도사관이라고 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동궐지를 보면 관람지가 하나의 연못이 아니고 두 개의 방지(方池-네모난 연못)과 하나의 원지(圓池-둥근 연못)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20세기에 와서 연못을 확장하였으리라 추정을 합니다. 그러면 연못을 확장한 주체가 누구인지 쉽게 짐작이 갑니다.
고종 당시는 주로 경복궁과 경운궁(후에 덕수궁)이 정궁으로 사용되어 창덕궁은 거의 방치된 상태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07년 순종이 이곳으로 이어하면서 대대적으로 보수 작업을 하게 되는데 그 때 후원과 창경궁 등이 심하게 훼손이 됩니다.
↑1908년에 발간된 동궐도형입니다. 여기를 보면 관람정, 존덕정, 폄우사, 승재정 등의 건물이 현 위치대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관람지를 보면 전혀 한반도를 닮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지금의 관람지는1908년 이후에 변형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습니다. 그래서 일제가 일부러 거꾸로 된 한반도의 모양으로 연못의 형태를 바꾸었느니 하는 이야기가 나오게 됩니다.
↑일제가 교묘한 방법으로 우리 문화재를 왜곡하고 망실시켰다는 것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 중에서 특히 궁궐을 훼손시키고 왕실의 상징을 파괴하는 공작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 중에서도 창경궁이 심하여 나중에는 시민들에게 휴식처를 제공한다는 명목으로 동물원, 식물원을 만들고 창경궁 전체를 벚꽃으로 뒤덮어 놓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창경궁의 대춘당지도 실은 궁궐에서 농사를 짓는 내농포였는데 1909년 일제가 이를 파서 연못으로 만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일제는 1907년 순종이 이어한 후 1908부터 2년간 창덕궁을 대대적으로 보수하면서 실은 교묘하게 훼손시켰습니다.
↑맞은편 승재정에서 본 관람정. 람(纜)은 배의 닻줄을 말합니다. 관람(觀纜)은 배의 닻줄을 본다는 말이니 관람정은 '뱃놀이를 구경하는 정자'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이 되어 반도지에서 뱃놀이를 하며 의기양양하였을 수도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임금만이 출입하던 궁궐의 후원에 한반도처럼 생긴 연못 위에 배을 띄우고 물놀이를 즐긴다는 것은 조선을 식민지화 하는데 성공한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는 감격스러운 이벤트였을 것입니다.
↑존덕정에서 본 관람정과 관람지. 관람지로 흘러드는 물은 존덕정이 있는 반월지에 물이 가득차면 넘어오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이 물은 지하로 흘러 춘당지로 흘러들고 여기서 옥류천에서 흘러오는 물과 만나서 옥천을 이뤄 창경궁 명전전 앞을 지나가는 명당수가 됩니다. 그래서 창경궁의 금천인 옥천은 지금도 맑은 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존덕정 입구의 홍예석교. 석교에 이름은 없습니다. 그러나 홍예로 이루어진 수문이며 다리를 건너면 바로 마주하는 좌대며 괴석 받침 등은 이 구역이 범상치 않는 곳임을 알려 줍니다.
↑존덕정 앞의 괴석 받침대. 석함이라고 합니다. 모란문양과 매듭문양 구름문양이 아주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습니다.
돌의 맛─그것도 낙목한천(落木寒天)의 이끼 마른 수석(瘦石)의 묘경(妙境)을 모르고서는 동양의 진수를 얻었달 수가 없다. 옛 사람들의 마당 귀에 작은 바위를 옮겨다 놓고 물을 주어 이끼를 앉히는 거라든다, 흰 화선지 위에 붓을 들어 아주 생략되고 추상된 기골이 늠연(凜然)한 한 덩어리의 물체를 그려 놓고 이름하여 석수도(石壽圖)라고 바라보고 좋아하던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흐뭇해진다. 무미한 속에서 최상의 미를 맛보고, 적연부동(寂然不動)한 가운데서 뇌성벽력(雷聲霹靂)을 듣기도 하고, 눈 감고 줄 없는 거문고를 타는 마음이 모두 이 돌의 미학에 통해 있기 때문이다. - 조지훈 돌의 미학
자연 속의 기암괴석을 정원으로 들이는 것은 오래된 조경 방법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보기 좋은 것이어서 괴석을 세우는 것은 아닙니다. 조선의 임금들은 말없이 수 많은 세월을 묵묵히 견뎌온 괴석을 바라보면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로 삼았을 것입니다.
↑존덕정. 겹지붕이 눈에 띕니다. 위층의 기둥을 안에 세우고 아래층의 기둥으로 바깥을 둘러 퇴칸을 만들어 마루를 놓았습니다. 두 기의 초석은 물 속에 세웠습니다.
↑존덕정의 천장에는 청룡과 황룡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 아래 편액이 정조의 어필입니다. '만천명월주인옹자서'라는 글인데 정조는 이 글에서 자신의 호를 '만천명월주인옹'이라고 지은 내력을 성리학적으로 자세히 밝하고 있습니다.
태극은 만물을 생성하는 근원이지만 스스로가 만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항시 변치않는 태극으로 있다. 시내에 비친 수천 수만의 달은 각기 시내의 모습에 따라 다른 모양으로 드러나지만 하늘에 떠 있는 달은 오직 하나 변함없는 달이다. 그렇듯이 백성들이 제 각각 다른 용모와 재능과 성품을 지니고 있어 임금의 덕이 서로 다르게 나타나지만 임금은 하늘의 달과 같이 변치 않는 존재이다. 이 명월이 태극이고 태극은 곧 나이다. 그래서 내 스스로 만천명월주인옹이라 호를 붙인다.
제대로 요약하였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폄우사. 이름이 독특하고 어렵습니다. '폄우'는 '어리석은 사람에게 침을 놓다'는 뜻으로 어리석음을 경계하는 말입니다. '사'는 높은 대 위에 있는 정자를 말합니다. 효명세자가 여기서 독서를 하였다 합니다. 효명세자 이전에도 여기는 왕자들이 책을 읽고 공부하던 곳이라고 전해져 옵니다.
↑승재정. 폄우사 옆에 있는 정자입니다. 사모지붕에 한칸 짜리 정자지만 아름답고 단정한 건물입니다. 동궐도에는 없는 것으로 보아 고종이나 순종 때 지어진 건물이라 생각됩니다. 동궐도에는 이 자리에 'ㄱ'자 모양의 세 칸짜리 초가로 나오는데 당호는 없습니다.
↑승재정은 '경치가 좋은 곳에 있는 정자'라는 뜻입니다. 승재정과 유사한 정자가 연경당 농수정입니다. 이 정자를 지을 때 아마 농수정을 본떠서 지었으리라 추정합니다.
↑승재정에서 본 연경당 농수정. 담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건물 아랫부분을 볼 수 없지만 언뜻 보아도 상당히 닮은 꼴입니다. 심지어는 창호까지 같습니다. 단지 승재정은 단청을 입혔고 농수정은 민낯 그대로란 점이 다릅니다.
↑옥류천으로 가면서 내려다 본 존덕정과 폄우사. 여기도 원래 정자 앞에 네모난 연못과 그 위에 반원의 연못으로 분리되어 있었는데 나중에 하나의 연못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역시 1908년 창덕궁을 개수하면서 개조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올라가는 길. 여기서 다음 답사지인 취규정까지는 제법 거리가 멉니다. 그런데 길이 아주 넓게 닦여 있습니다. 동궐도에는 이렇게 크고 넓은 길이 없습니다. 이 길을 넓힌 것은 군사정권 시절이라고 합니다. 특히 5공화국 시절에는 공중기습공격에 대비한 거대한 철탑을 옥루천 주변에 세운 일이 있습니다. 지금은 철거되고 없습니다.
↑존덕정에서 옥류천으로 올라가는 길에 청심정이 있습니다. 숙종 때 이전 정자터에 다시 지어 올렸다고 합니다. 정자 앞쪽으로 돌로만든 연못과 물속으로 막 들어가려는 거북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편액은 없어졌지만 숙종과 정조, 순조의 시가 남아 있습니다. 주로 밤에 정자에 올라 달구경을 하면서 읊은 시입니다. 하늘에 달이 높이 뜨면 돌로 만든 연지(蓮池)인 빙옥지에도 달을 비쳤을 것입니다.
↑빙옥지와 돌거북. 이 석연지(石蓮池)에 물을 가득 채우고 정자에서 내려다 보면 달이 비칩니다.
↑거북의 등 위에는 어필 '빙옥지'라는 글씨가 보입니다. 어필이라고 하니까 임금이 직접 쓴 글씨인데 어느 임금의 글씨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아마 숙종의 글씨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거북의 모습도 후원의 조각치고는 소박한 편에 속합니다.
↑고개 마루에 오르면 취규정이 있습니다. 여기서 잠시 숨을 돌립니다. 해설에 의하면 취규정에서 모여 책을 읽었다고 하는 데 그런 기능보다는 옥류천이나 능허정으로 갈 때 잠시 쉬어가는 곳이 아니었었겠는가 하는 것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취규는 '별 주위로 모여든다'는 뜻입니다. 규(奎)는 별을 뜻하지만 단순한 별이 아니라 28수의 하나로 문운(文運)을 담당하는 별입니다. 그래서 규는 별이라는 뜻보다는 글이나 문장을 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임금의 시문이나 조칙을 규한(奎翰) 혹은 규장(奎章)이라고 합니다. 규장각이라고 하면 임금의 시문이나 글씨 등을 보관하는 곳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힘이 드는 사람들은 옥류천으로 가지 않고 바로 연경당 쪽으로 내려갈 수 있습니다.
↑취규정에서 조금 더 올라와서 오른쪽 아래 내리막길로 내려오면 옥루천 영역에 들어섭니다. 제일 처음 마주하는 건물이 취한정입니다. 취한정과 취규정은 쌍둥이 건물이라고 할 수 있을만큼 구조가 같습니다.
취한정은 창취능한(蒼翠凌寒)에서 온 말로 '푸른 나무들이 추위를 업신여기다' 라는 뜻입니다. 창건 연대는 명확하지 않지만 숙종이 남긴 시를 보아 그 이전에 세워진 것이라 추측합니다.
취한정 편액과 주련.
滿院松聲夜聽濤(만원송성야청도)
집안 가득 솔바람 소리는 밤에 파도 소리 듣는 듯.
九天露湛金盤重(구천로담금반중)
구천의 이슬이 짙어 금반(金盤)이 무겁구나.
취한정에 앉으면 정자 가득 솔바람 소리가 고요한 밤에 바다의 파도 소리를 듣는 듯하고, 이슬이 짙게 내려서 이슬을 받는 쟁반이 무겁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옥류천 주변에는 소나무가 적고 활엽수가 많지만 동궐도가 그려진 당시에만 해도 이 후원에는 소나무가 주종을 이루었습니다. 취한정의 주련으로 미루어 보면 과거에는 여기에 소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루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제 취한정을 나서면 저기 숲길 사이로 초가 정자가 보이고 그 앞으로 커다란 바위가 보입니다. 바로 소요암입니다. 소요암 앞에는 소요정이 있습니다. 숲에 가려 기둥과 지붕이 설핏 보입니다.
↑소요정. 인조때 지은 정자입니다. 소요정 앞으로 옥류천이 흐르고 있습니다. '소요'는 장자에 나오는 말로써 '세상에 걸림이 없이 이리저리 노니는 것'으로 장자가 추구한 절대 자유의 경지를 표현한 말입니다. 조선의 임금들은 여기 소요정에서만은 모든 국사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되어 신선이나 도인처럼 자유롭게 노닐고 싶었을 것입니다.
↑소요정의 원래 이름은 탄서정(歎逝亭)입니다. 공자가 물소리를 듣고 세월이 너무 빨리 가는 것을 탄식하였다는 고사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소요정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탄서정에서 소요정으로. 그 울림이 아주 묘합니다. '세월이 빠름을 탄식하여도 소용이 없다. 유유자적하면서 마음의 평온을 얻어라. 그것이 최상의 삶의 방식이다.' 이렇게 귓전에 속삭이는 듯합니다.
↑옥류천입니다. 옥류천은 소요암이란 커다란 바위를 깍고 파서 만든 인공의 물길입니다. 바위를 깎아서 물이 폭포처럼 떨어지게 하였습니다.
↑여기가 인조가 팠다는 어정입니다. 물이 달고 시원하여 후원의 여러 샘 중에 단연 으뜸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흘러나오는 물이 소요암의 곡수구(曲水溝)를 돌아서 폭포로 떨어집니다. 이 내가 창덕궁 후원의 골짜기를 흘러 창경궁의 금천이 됩니다.
↑옥류천 곡수구. 어정에서 발원되는 물이 바위를 감돌아 아래 폭포로 떨어지도록 홈을 팠습니다. 여기에 술잔을 띄어놓고 연회를 벌이는 것을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이라고 하였습니다. 휘돌아 가는 물길 위에 술잔을 띄워놓고 자신 앞에 술잔이 멈추면 시를 지어 노래하는 놀이입니다.
유상곡수연은 중국 동진 사람 왕희지가 쓴 난정기서(蘭亭記序)에 처음 등장합니다. 월나라 왕 구천이 난을 심었던 자리에 정자를 지어 난정이라 일컬었는데 여기에 문사 42인이 모여 유상곡수를 만들어 술을 마시면서 시문을 짓는 놀이를 하였습니다. 그것을 한 곳에 묶은 책이 난정기인데 당시 명필인 왕희지가 서문을 써서 더욱 유명하여졌습니다. 이후로 유상곡수연은 풍류를 즐기는 문인들 사이에 유행하는 놀이가 되었습니다. 왕실에서는 후원에 유상곡수를 만들어 신하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시문을 지으면서 군신간의 우의를 다졌습니다. 신라시대 경주 남산의 포석정도 유상곡수의 하나입니다.
↑소요암의 어필. 아래쪽에 인조가 직접 쓴 옥류천이란 글씨가 보입니다. 위쪽의 오언절구는 숙종의 시입니다. 소요암 위는 유상곡수 아래는 폭포입니다. 숙종은 옥류천의 폭포가 중국 여산의 폭포보다 못하지 않고, 정조는 옥류천의 시회가 난정의 유상곡수연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중국의 여산폭포는 옛부터 중국 시인들이 좋아하는 시제입니다. 그 중에서 이백이 노래한 망여산폭포(望廬山瀑布)는 인구에 회자되는 싯구입니다.
日照香爐生紫煙 일조향로생자연
遙看瀑布掛長川 요간폭포괘장천
飛流直下三千尺 비류직하삼천척
疑是銀河落九天 의시은하낙구천
햇빛 비친 향로봉에 자주빛 안개 일고
멀리 보이는 폭포는 긴 강물을 걸어 놓은 듯
날아 흘러 떨어지기가 삼천 척이나 되니
은하가 마치 구천에서 떨어지는 듯
숙종도 이백의 여산폭포를 빌어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깁니다.
飛流三百尺, 비류삼백척
飜成萬壑雷. 번성만학뢰
↑여기서 폭포소리가 우레처럼 들릴 리가 있겠느냐, 삼백척은 커녕 삼삽척도 안되겠다 등등의 감상도 있을 수 있지만, 숙종은 옥류천 폭포를 보면서 이백의 여산 폭포를 떠올렸고, 정조는 소요암 곡수구를 보고 왕희지의 유상곡수연을 상상하였습니다.
궁궐에 태어나서 궁궐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임금으로서는 직접 가 볼 수가 없었으니 책을 통하거나 그림을 통하여 상상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어정 쪽에서 바라본 소요암의 뒷모습입니다. 그 앞으로 소요정이 보입니다. 소용정 사모지붕의 장식인 절병통이 아주 아름답습니다. 절병통이란 정자의 지붕 위에 항아리를 여러 개 엎어놓은 듯한 장식물을 말합니다.
↑소요암 뒤에 있는 청의정. 후원 아니 궁궐 유일의 초가지붕입니다. 여기는 지금 벼논이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청의정 역시 임진왜란의 전화를 그대로 지니치지는 못하였으리라 생각됩니다. 인조 때 다시 지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전에도 이 터에는 정자가 있었으리라 추정합니다.
기록에 연지를 만들고 그 안에 섬을 조성하여 정자를 세웠다고 했으니 처음부터 벼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언제부터 여기서 벼농사를 지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여기서 난 볏집으로 지붕을 이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동궐도에도 초가 지붕으로 그려져 있으니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벼를 재배하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청의정(淸漪亭)의 청의는 주자의 시에서 빌려 왔습니다. 맑은 잔물결이라는 뜻입니다.
↑청의정도 자세히 살피면 천원지방의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연지(벼논)와 정자의 대와 기둥은 네모의 형태를 취하지만 지붕은 둥근 모습입니다.
↑청의정 옆 산기슭에 철축이 만개하였습니다.
↑청의정 옆을 살짝 돌아가면 태극정이 있습니다. 이곳 정자 이름을 왜 태극정으로 지었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조선 시대의 성리학은 퇴계와 율곡을 거치면서 비로서 생활 속에 자리잡게 됩니다. 태극이니 음양이니 하는 말들은 성리학에서 우주와 인간을 설명하는 아주 중요한 개념이 됩니다. 태극은 시초요 원류여서 모든 것의 근본이 됩니다. 이 옥류천 발원지는 인조가 직접 발견하여 팠다는 샘 즉 어정입니다. 여기서부터 옥류천이 시작된다고 정자의 이름을 태극정으로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태극정을 지은 임금도 인조입니다. 이 옥류천 일대의 정자나 건축물 거의 대부분이 인조 때 고쳐짓거나 새로 지은 건물입니다. 아마도 그 전에도 정자들이 있었겠지만 임진왜란 때 훼손이 되었고, 또 광해군 때는 불탄 창덕궁을 재건하고 경희궁을 새로이 짓느라고 후원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을 것입니다. 광해군의 뒤를 이른 인조는 이 옥류천 일대의 경관을 새로이 조성하고 정비하였습니다.
↑태극전 돌아 나가면 행랑채처럼 생긴 건물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농산정인데 편액도 없습니다. 여기서는 임금이나 왕족들이 놀이를 할 때 주로 음식을 준비하거나 아니면 상궁이나 내관, 선전관들이 대기하고 있던 곳이 아니었나 하고 생각합니다.
↑되돌아 나가는 길. 소요암 뒤로 아이들이 보입니다.
↑경협이와 민서가 다정하게 같이 바위에 걸터앉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