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생각하는 시 모음> 박영희 시인의 '아내의 브래지어' 외
+ 아내의 브래지어
누구나 한번쯤
브래지어 호크 풀어보았겠지
그래, 사랑을 해본 놈이라면
풀었던 호크 채워도 봤겠지
하지만 그녀의 브래지어 빨아본 사람
몇이나 될까, 나 오늘 아침에
아내의 브래지어 빨면서 이런 생각 해보았다
한 남자만을 위해
처지는 가슴을 세우고자 애썼을
아내 생각하자니 왈칵,
눈물이 쏟아져나왔다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일까
남자도 때로는 눈물로 아내의 슬픔을 빠는 것이다
이처럼 아내는 오직 나 하나만을 위해
동굴처럼 웅크리고 산 것을
그 시간 나는 어디에 있었는가
어떤 꿈을 꾸고 있었던가
반성하는 마음으로 나 오늘 아침에
피존 두 방울 떨어뜨렸다
그렇게라도 향기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박영희·시인, 1962-)
+ 아내
아내는 거울 앞에 앉을 때마다
억울하다며 나를 돌아다본다
아무개 집안에 시집 와서
늘은 거라고는 밭고랑 같은 주름살과
하얀 머리카락뿐이라고 한다
아내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는다
모두가 올바르다
나는 그럴 때마다
아내를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다
슬그머니 돌아앉아 신문을 뒤적인다
내 등에는
아내의 눈딱지가 껌처럼
달라붙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안다
잠시 후면
아내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발딱 일어나
종종걸음으로 집안 구석구석을
환하도록 문지르고 닦아
윤을 반짝반짝 내놓을 것이라는 사실을
(윤수천·아동문학가, 1942-)
+ 나의 아내
나에게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봄날 환한 웃음으로 피어난
꽃 같은 아내
꼭 껴안고 자고 나면
나의 씨를 제 몸 속에 키워
자식을 낳아주는 아내
내가 돈을 벌어다 주면
밥을 지어주고
밖에서 일할 때나 술을 마실 때
내 방을 치워놓고 기다리는 아내
또 시를 쓸 때나
소파에서 신문을 보고 있을 때면
살며시 차 한잔을 끓여다주는 아내
나 바람나지 말라고
매일 나의 거울을 닦아주고
늘 서방님을 동경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내 소유의 식민지
명분은 우리 집안의 해
나를 아버지로 할아버지로 만들어주고
내 성씨와 족보를 이어주는 아내
오래 전 밀림 속에 살았다는 한 동물처럼
이제 멸종되어간다는 소식도 들리지만
아직 절대 유용한 19세기의 발명품 같은
오오, 나에게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문정희·시인, 1947-)
+ 아내를 위하여
길가에 떨어진
벌레 한 마리도 함부로 밟지 않습니다.
풀잎 하나도 함부로 밟지 않습니다.
혹시나 이것들을 밟아
죄를 짓게 된다면
죄를 지어 아내에게 해가 미친다면
나는 벌레를 죽이고
또 아내까지 죽이는 죄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말 한마디도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얼굴 표정도 아무렇게나 찌푸리지 않습니다.
혹시나 내가 뱉은 말 한마디로
가슴을 다치거나 아파하는 사람이 있다면
혹시나 내가 짓는 찌푸린 표정으로
언짢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으로 아내에게 어떤 화가 미친다면
나는 다른 사람들을 상하게 하고
또 아내까지 상하게 하는
죄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김종·시인)
+ 처자
주방 옆 화장실에서
아내가 아들을 목욕시킨다
엄마는 젖이 작아 하는 소리가
가만히 들린다
엄마는 젖이 작아
백열등 켜진 욕실에서 아내는
발가벗었을 것이다
물소리가 쏴아 하다 그치고
아내가 이런다 얘, 너 엄마 젖 만져봐
만져도 돼? 그러엄. 그러고 조용하다
아들이 아내의 젖을 만지는 모양이다
곧장 웃음소리가 터진다
아파 이놈아!
그렇게 아프게 만지면 어떡해!
아프게 만지면 어떡해
욕실에 들어가고 싶다
셋이 놀고 싶다
우리가 떠난 먼 훗날에도
아이는 사랑을 기억하겠지
(고형렬·시인, 1954-)
+ 부부
긴 상이 있다
한 아름에 잡히지 않아 같이 들어야 한다
좁은 문이 나타나면
한 사람은 등을 앞으로 하고 걸어야 한다
뒤로 걷는 사람은 앞으로 걷는 사람을 읽으며
걸음을 옮겨야 한다
잠시 허리를 펴거나 굽힐 때
서로 높이를 조절해야 한다
다 온 것 같다고
먼저 탕 하고 상을 내려놓아서는 안 된다
걸음의 속도도 맞추어야 한다
한 발
또 한 발
(함민복·시인, 1962-)
+ 내외
결혼 전 내 여자와 산에 오른 적이 있다
조붓한 산길을 오붓이 오르다가
그녀가 나를 보채기 시작했는데
산길에서 만난 요의(尿意)는
아무래도 남자보다는 여자에게 가혹한 모양이었다
결국 내가 이끄는 대로 산길을 벗어나
숲 속으로 따라 들어왔다
어딘가 자신을 가릴 곳을 찾다가
적당한 바위틈을 찾아 몸을 숨겼다
나를 바위 뒤편에 세워둔 채
거기 있어 이리 오면 안돼
아니 너무 멀리 가지 말고
안돼 딱 거기 서서 누가 오나 봐봐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곳에 서서
그녀가 감추고 싶은 곳을 나는 들여다보고 싶고
그녀는 보여줄 수 없으면서도
아예 멀리 가는 것을 바라지는 않고
그 거리, 1cm도 멀어지거나 가까워지지 않는
그 간극 바위를 사이에 두고
세상의 안팎이 시원하게 내통(內通)하기 적당한 거리
(윤성학·시인, 1971-)
+ 아내와 나 사이
아내는 76이고
나는 80입니다
지금은 아침저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지만 속으로 다투기도 많이 다툰 사이입니다
요즘은 망각을 경쟁하듯 합니다
나는 창문을 열러 갔다가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냉장고 문을 열고서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누구 기억이 일찍 돌아오나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은 서서히 우리 둘을 떠나고
마지막에는 내가 그의 남편인 줄 모르고
그가 내 아내인 줄 모르는 날도 올 것입니다
서로 모르는 사이가
서로 알아가며 살다가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세월
그것을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인생?
철학?
종교?
우린 너무 먼 데서 살았습니다
(이생진·시인, 1929-)
+ 내 늙은 아내
내 늙은 아내는 아침저녁으로
내 담배 재떨이를 부시어다 주는데,
내가
"야 이건 양귀비 얼굴보다 곱네,
양귀비 얼굴엔
분때라도 묻었을 텐데?"
하면,
꼭 대여섯 살 먹은 계집아이처럼
좋아라고 소리쳐 웃는다.
그래 나는 천국이나 극락에 가더라도
그녀와 함께 가 볼 생각이다.
(서정주·시인, 1915-2000, 1988년 作 추정)
+ 철새
우리 혼인생활 30년에
밑줄 그을 만한 뜨거운 사랑 없었지만
하늘 높이 날아오를 만한
기쁨 없었지만
아내여 미운 아내여
다음 생에서 또 만나
하늘을 날아가다가
좀 쉬고 싶으면 날개를 접고
가을 논에 흩어져 있는 햅쌀을
냠냠냠 쪼아먹는
기러기 눈빛을 한
철새나 될까 몰라
아내여 미운 아내여
(오탁번·시인)
+ 아내
아내를 들어올리는데
마른 풀단처럼 가볍다.
두 마리 짐승이 찢고 나와
꿰맨 적이 있고
또 한 마리 수컷인 내가
여기저기 사냥터로 끌고 다녔다
먹이를 구하다
병들고 지친 암사자를 업고
병원을 뛰는데
누가 속을 파먹었는지
헌 가죽부대처럼 가볍다.
(공광규·시인, 1960-)
+ 아내의 발
어젯밤 과음으로
목이 말라
새벽녘 잠 깨어 불을 켜니
연분홍 형광 불빛 아래
홑이불 사이로
삐죽 나온 아내의 발
내 큼지막한 손으로
한 뺨 조금 더 될까
상현달 같은
새끼발가락 발톱
반달 모습의
엄지발가락 발톱
앙증맞은 그 발로
우리 가족의 행복을 위해
밤낮으로 열심히 뛰어다니느라
아내는 얼마나 고단했을까
군데군데 제법 굳은살이 박힌
235밀리 작은 발
그 총총 걸음마다
행운과 복이 깃들이기를....
(정연복)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