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사집 제3권 / 묘갈(墓碣)
사재감 정(司宰監正) 박공(朴公)의 묘갈명
박씨(朴氏)는 나주(羅州)에서 나와 현성(縣姓)이 되었다. 그 처음에 상충(尙衷)은 고려에 벼슬하여 직제학(直提學)이 되었고, 그의 아들 은(訔)은 우리 태종(太宗)을 섬기어 좌의정으로 졸관하였다. 그 후 규(葵), 병문(秉文)이 면면히 이어오면서 대대로 훌륭한 인물이 있었다.
병문의 아들 임종(林宗)은 상주 목사(尙州牧使)를 지내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목사가 조년(兆年)을 낳았는데, 조년은 이조 정랑으로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정랑은 소(紹)를 낳았는데, 소는 사간원 사간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덕은 높고 지위는 낮았는데, 중종조(中宗朝)에 명망이 높았고, 사암(思庵) 박순(朴淳)이 묘명(墓銘)을 썼다. 소가 남양 홍씨(南陽洪氏)의 딸에게 장가들어 5남을 낳았는데, 공이 맏아들이다.
공의 휘는 응천(應川)이고 자는 혼중(渾仲)이다. 계묘년에 상상(上庠)에 올라 천거로 왕자 사부(王子師傅)가 되었다. 그 후로 태인 현감(泰仁縣監), 형조ㆍ호조의 정랑, 봉산(鳳山)ㆍ고양(高陽) 등의 군수, 대구(大丘)ㆍ이천(利川)ㆍ수원(水原) 등의 부사, 광주(廣州)ㆍ양주(楊州) 등의 목사, 군자감 판관, 군기시 첨정, 한성부 서윤, 예빈시 부정, 사재감 정등을 역임하였다.
공의 아우 응순(應順)이 의인왕후(懿仁王后)를 낳아서 우리 선묘(宣廟)의 배필이 되었는데, 선묘의 초정(初政)에는 당시의 뛰어난 선비들이 모여들어서 초사(初仕)의 제수도 반드시 신중하게 하였다. 그래서 공은 모두 덕으로 선발된 것이요 오로지 은택으로 된 것이 아니었으므로, 사대부들이 경사라고 일컬었다.
처음에 의정이 작고하고 나서는 집이 더욱 쇠퇴해졌는데, 공이 집을 잘 경영하여 모친에게 색양(色養)을 충실히 하고, 여러 아우들을 옳은 방도로 훈계하여 우뚝하게 마치 성인(成人)과 같았으므로, 내외종(內外從)들이 그를 본받았다.
자람에 미쳐 관직을 수행함에 있어서는 스스로 드러내는 것을 일삼지 않고 명예를 구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순수한 마음을 숭상하고 그 예리함을 억제하여 힘써 영원한 규범으로 삼았다. 그리고 모든 설시(設施)에 있어서는, 마치 우물에는 반드시 난간이 있어서 물이 바로 나가지 못하듯이 한계를 엄격히 하였고, 일마다 청렴함이 몸에 배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부모처럼 우러러 사모하여 문명(文明)한 사람이든 미개(未開)한 사람이든 모두가 그 미덕에 변화되었다.
또 아무리 바쁜 곳에 있을 때라도 책상 위에는 안독(案牘)이 머물러 있지 않았고 관청 마당에는 송사(訟事)가 정체되지 않았는데, 성음과 안색을 크게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실제 행위가 항상 그 명성보다 높았다. 그래서 뒤에 공을 이어 고을을 다스리는 자들은 모두가 공의 법칙을 준행하였다.
그리고 공은 항상 말하기를, “백성들의 고혈을 탈취해서 어버이를 후히 봉양하는 것은 효도가 아니다.”고 하였다. 무인년에는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공의 나이는 보드라운 밥을 먹어야 할 때가 되었으나,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면서 예에 지나치게 슬퍼하여 몸이 수척해지므로, 보는 이들이 눈물을 흘렸다. 신사년에 복을 마치고 그해 9월에 작고하여 양주(楊州)의 금곡(金谷)에 장사지냈다.
공의 전취(前娶)는 신씨(愼氏)의 딸인데 아들이 없다. 후취(後娶)는 별좌(別坐) 김희려(金希呂)의 딸인데, 덕성(德性)이 지극히 순진하여 부의(婦儀)와 모도(母道)가 모두 본받을 만하였다. 공보다 30년 뒤에 나이 92세로 작고하였다. 6남 2녀를 낳았다. 아들 동현(東賢)은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으로 졸관했는데 옛 쟁신(諍臣)의 풍도가 있었다.
동호(東豪)는 사옹원 참봉이고, 동로(東老)는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가 되었으며, 동준(東俊)은 의빈부 도사(儀賓府都事)이고, 동민(東民)은 예빈시 참봉(禮賓寺參奉)이며, 동선(東善)은 문과에 급제하여 안동 부사(安東府使)가 되었는데, 일찍이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되어 공을 좌찬성으로 추은(推恩)하였다. 큰딸은 배천 군수(白川郡守) 임태(任兌)에게 시집갔고, 그 다음은 사인(士人) 안경남(安慶男)에게 시집갔다.
동현의 1남 돈(焞)은 일찍 죽었고, 딸 한 사람은 민대수(閔大脩)에게 시집갔다. 동호는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 엽(燁)은 문과에 급제하여 의주 부윤(義州府尹)이 되었고, 큰딸은 사인 송기(宋墍)에게 시집갔고, 그 다음은 최복신(崔復新)에게 시집갔다.
동로의 두 딸은 일찍 죽었다. 동준은 5남 4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경(熲), 찬(燦), 섬(燂), 형(烱), 영(煐)이고, 큰딸은 사인 이정영(李挺英)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현감 이원량(李元樑)에게 시집갔으며, 다음은 사인 이시상(李時尙)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이성(李珹)에게 시집갔다.
동민은 3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운(煇), 환(煥), 병(炳)이고, 딸은 생원 이언눌(李言訥)에게 시집갔다. 동선은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정(炡)이고, 딸은 사인 정사무(鄭思武)에게 시집갔다. 동현과 동로는 모두 아들이 없어서 병(炳)과 찬(燦)을 각각 후사로 삼았다.
공은 천품이 엄숙하고 의연하여 멀리 바라보면 엄격하였으나 곁에 나아가 보면 온화하여, 곡진하게 잘 타일러서 힘써 그 마음을 다해 사람을 성취(成就)하도록 면려하였다. 그리고 규문(閨門)의 안도 마치 조정처럼 엄숙하였다. 공의 아우 반성공(潘城公)은 품계는 숭록(崇祿)이 되고 지위는 부원군(府院君)을 겸하여 임금이 장인이라 부르는 터라, 존귀함이 서로 견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반성공이 일찍이 손과 마주 앉아 있으면서 공을 보고 미처 일어나지 못하자, 공이 천천히 말하기를, “군(君)이 장자(長者)에게 실례를 하면 무엇을 자제(子弟)들에게 보여 주겠는가.”하니, 반성공이 자기가 불민(不敏)한 탓이라고 사과를 하고서야 노염을 풀었으니, 그 내행(內行)의 엄숙하기가 대부분 이와 같았다.
성색(聲色)과 재리(財利)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성품이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자제들의 의복이 호사스러우면 매양 이르기를, “선비는 의당 해진 옷 입기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것으로 마음을 삼아야 한다. 왕가(王家)와 인친(姻親)을 맺음으로부터 복을 어깨에 가득 메었으니, 대신(大臣)의 신분으로서 항상 경계하고 겸손해야 한다.”하였다.
그리고 일찍이 자제들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우리 가문에도 훌륭한 선비가 많으니, 너희들은 굳이 외교(外交)를 넓게 할 필요가 없다. 외교를 넓게 하다 보면 효란(淆亂)하고 거짓된 것만 생기고, 돈후하고 순박함이 없어질 것이니, 우리 집안의 신중하고 성실한 가풍을 잃을까 염려된다.”하였다.
또 항상 말하기를, “사람이 치지(致知)를 하지 못하면 덕(德)을 증진시킬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금곡(金谷)에서 복상(服喪)할 적에 항상 방 하나에 자제들을 모아 놓고 어려운 문제를 베풀어 의심나는 것을 질정하면서 밤새도록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그리하여 의관(衣冠)과 예악(禮樂)이 모두 그 문정(門庭)에 있었다.
또 일을 당해서는 결단을 잘 내리기도 하였다. 혹 긴요한 일을 만났을 경우에는 뭇사람이 모두 주시(注視)하면서 공의 한 마디 말을 기다려 전격적으로 해결할 수가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누구나 빈 몸으로 가서 소득을 가지고 돌아오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 큰 것이 이러하니, 그 작은 일은 유추하여 알 수 있겠다.
나는 항상 한스럽게 여기는 것이 있다. 향거(鄕擧)의 길이 폐해지고 갑을과(甲乙科)의 제도가 세워짐으로써 선비들이 이것을 등용문(登龍門)의 등급으로 삼고 있으니, 불행히 낙제를 하고 나면 비록 여러 낮은 직위에서 능력을 발휘한다 하더라도 다만 한 가지 기예(技藝)를 활용할 뿐이요 은택을 널리 베풀 길은 영원히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공의 덕과 재능으로 가령 날개를 달고 풍운(風雲)을 탔더라면 공업(功業)의 성대하기가 어찌 주목(州牧)이 되는 데에 그치고 말았겠는가. 그러나 여러 주목을 역임한 근로가 아니었다면 사람들에게 미치는 은택이 반드시 지금처럼 끝없이 두루 넓게 입혀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늘이 공에게 부여한 것이 어느 것이 중하고 어느 것이 경하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한다.
이미 부여는 후히 하고 쓰기를 박하게 하니 / 旣厚賦而薄用
그래서 많이 쌓아 두고 적게 베풀었도다 / 故多蓄以小施
쓰기를 융통성이 없게 함으로 말미암아 / 由其用之礥而
이때문에 베푼 것이 한쪽에 그치었네 / 是以施也偏而
가정에서 자제들을 교훈시킨 것은 / 訓之於家庭兮
일가 친척들의 본보기가 되었고 / 宗黨人之式也
나가서 주군을 다스릴 적에는 / 試之於州郡兮
정사가 공평하고 송사가 그치었네 / 政平而訟息也
바른 법도를 높이 게시해 놓으매 / 準繩高懸兮
사람이 절로 그 법도를 우러렀도다 / 物自仰其墨也
공이 돌아갈 곳이 있으니 / 公歸有所兮
금곡의 언덕 무성하고 빛나도다 / 金谷蔚以煥也
내가 공의 덕을 명하여 / 我銘公德兮
후인이 깎아 버리지 말도록 경계하노라 / 戒後者之剷也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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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司宰監正朴公墓碣銘
朴出羅州爲顯姓。其始尙衷。仕高麗。爲直提學。子訔。事我太宗。卒官左議政。曰葵曰秉文。承繼綿綿。聯世有人。秉文之子林宗。尙州牧使贈吏曹判書。生兆年。吏曹正郞贈左贊成。生紹。司諫院司諫贈領議政。德隆位細。有名中宗朝。朴思庵淳銘其墓。娶南陽洪氏女。生五男。公於序最長。諱應川。字渾仲。癸卯。陞上庠。薦爲王子師傅。歷職泰仁縣監,刑戶曹正郞,鳳山高陽等郡守,大丘利川水原等府使,廣州楊州等牧使,軍資判官,軍器僉正,漢城庶尹,禮賓副正,司宰監正。公之弟應順。篤生㦤仁。媲我宣廟。宣廟初政。時髦允集。一命之除。必在難愼。公卛以德選。不專爲恩澤。搢紳稱慶。初議政捐館。家益旁落 。公能經紀其家。色養不乏。訓諸弟以方。嶷然若成人。中表則之。及長莅職。不事表襮。不求聲譽。專上純心。挫厥鏩鏩。務爲永遠之䂓。凡所張施。井必有幹。故水不直衍。事事貫棘。故民父母詹。楚夏移情。雖在劇地。案不停牘。庭無淹訟。不大聲色而事常出名上。後繼公爲理者。率遵公法。常曰。刻民以厚親者。非孝也。戊寅。丁內憂。公年當異粻。廬墓三年。越禮爲毁 。見者落淚。辛巳服闋。以其年九月卒。葬在楊州金谷。公先娶愼氏女。無子。後娶別坐金希呂女。德性純至。婦儀母道。俱可爲則。後公三十年。年九十二而卒。生六男二女。男東賢。文科。卒官司諫。有古諍臣風。東豪。司饔參奉。東老。文科承文院正字。東俊。儀賓都事。東民。禮賓參奉。東善。文科安東府使。甞錄原從功臣。推恩公左贊成。女長白川郡守任兌。次士人安慶男。東賢一男焞夭。女一人。閔大脩。東豪生一男燁。文科爲義州府尹。二女。長士人宋墍。次崔復新。東老二女夭。東俊生五子。曰熲曰燦曰燂曰炯曰煐。四女。長士人李挺英。次縣監李元樑。次士人李時尙。次李珹。東民生三男。曰煇曰煥曰炳。女生貟李言訥。東善生一男。曰炡。女士人鄭思武。東賢,東老皆無男子子。以炳及燦後之。公天資嚴毅。望之截然。卽之溫如。淳淳善誘。務盡其情。勉人成就。閨門之內。如朝廷然。弟潘城公。階爲崇祿。位兼府院。王曰舅氏。尊莫與肩。而甞對客見公 。未及起。公徐曰。君失禮於長者。何以示子弟。潘城謝不敏乃解。其內行莊肅。多類此。至於聲色財利。洒如也。性不喜芬華 。子弟服靡則輒曰。士當以不恥弊袍爲心。自託親天家。何福滿肩。小盛 臣臣。甞戒子弟曰。吾門多佳士。汝曹不必廣外交。外交廣則淆僞生而敦樸散。恐失吾家愿愨之風。常曰。人不致知。無以進德。故其受制於金谷。恒聚子弟於一室。設難質疑。竟夕不怠。衣冠禮樂。盡在門庭。又能臨事善斷。或遇肯綮。衆咸睽睽。待公一言而能霆擊滅斧。人無不虛往而實歸者。其大如此 。其細可類推也。余常恨鄕擧之道廢。而甲乙之科立。士以是爲龍門之級。不幸而點額。則雖或振鬐於庶品。秪足爲一藝之效。永無博施之路。以公之德之才。使得揷羽翮騰風雲。則功業之盛。豈止作州牧終己也。然非歷典之勤。則恩澤之及人。未必如今之周流普博無涯也。然則天之賦與於公者。孰重而孰輕也。銘曰。
旣厚賦而薄用。故多蓄以小施。由其用之礥而。是以施也偏而。訓之於家庭兮。宗黨人之式也。試之於州郡兮。政平而訟息也。
準繩高懸兮。物自仰其墨也。公歸有所兮。金谷蔚以煥也。我銘公德兮。戒後者之剷也。<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