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춘대능선길과 진관사계곡을 다녀와서!
움직임이 있든 없든 생명체가 성장하고 살아가는데 있어선
강과 산은 절대적인 요소이지요. 물과 산은 자연이 살아숨쉬는
생리라면 움직이는 생명체가 조작해서 만들어내는 위험한
성질을 지닌 물리는 기계적인 요소이지요. 사람이 생존
하는데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물이고 산은 온 갖 생물이
생장하여 꽃을 피우고 지니고 있는 생수가 흘러 강을 이루니
한강은 서울시민의 젖줄이란 말처럼 세계의 유수(有數)한
도시들은 강이 중심을 흘러갑니다. 우리의 한반도는 사계절이
뚜렷해서 계절에 따라 강과 산이 그 풍경을 달리하기도 하지요.
흐르는 강이 꽁꽁얼어 하얀 눈이 쌓이기도 하고 산은 기암괴석
(奇巖怪石)이 대자연의 웅장함을 돋보이게하고 사계절의
풍경을 달리하니 봄에는 옥같이 고운 풀에 핀, 구슬같이
아름다운 꽃 즉 기화요초(琪花瑤草)가 절경을 이루고
여름엔 거목(巨木)들의 푸르름과 새들이 노래하고
춤추는 조무락(鳥舞樂)의 계절이다가 가을엔 비단실로
수를 놓은 것 같은 금수강산(錦繡江山)을 이루니
풍악(楓嶽)의 계절이요. 겨울엔 봄을 기다리는 헐벗은
나목(裸木)들의 산에 천변만화(千變萬化)의 기상이변
(氣像異變)으로 북풍한설(北風寒雪) 휘몰어쳐 설산을
이룬 풍경은 말로는 형언(形言)하기 어려운 설경의
계절이지요. 이와같이 우리가 한반도 강산의 자연은
우리가 보호하고 가꾸고 사랑해야 합니다. 이렇듯
오늘 리딩을 맡은 대장님의 강산애(江山愛)란 nick
name에 큰 의미를 부여(附與)하게 됩니다.
2016년7월31일 일요일 금년도 7월을 마지막 보내는 오늘 인터넷 카페
5060아름다운 세상 산행동호인들이 서울둘레길 7구간 장미공원에서
탕춘대능선길을 지나 진관사로 이어지는 산행을 하기위해 오전
10:20에 불광역으로 가니 보지 못하면 그립고 보고싶은 님들을 만나
얼싸안은 반가움으로 인사를 나누니 그동안 적조했던 마음이 풀리고
오늘 하루도 즐겁고 행복한 멋진 하루가 눈앞에 펼쳐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도보행 5분 거리인 산행 들머리가 있는 장미공원에서 참석인원 점검을 하니
36명 마지막 가는 7월에 대한 아쉬움 때문인지 찌는 듯한 삼복더위도 아랑곳
하지 않은 회원수 대비 성황을 이룬 참석이었습니다.가다쉼을 반복하면서
탕춘대지킴터와 가파른 비봉을 넘어 진관사 계곡에 이르니 내린 비의
량이 많지 않았는데도 유량이 풍부해서 계곡이 시작된 곳에서부터 진관사
바로 위까지 피서객들이 몰려 물놀이를 즐기는 진풍경이 계곡을 수놓은
모습들이었습니다. 하산을 마무리하는 계곡에서 한 시간 정도 물놀이를
즐기다가 식당차로 삼각산입구 내에 있는 식당에서 뒷풀이를 하고 집에
오니 저녁 7:40분이 지난 시간이었고 자고 새면 생업이 있는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기에 집에 온 즉시 PC앞에 앉아 후기를 쓰고 사진을 편집
해서 게시물을 완성하여 카페에 올리고나니 네시간 사십분동안
시간싸움을 한 00:20분이네요...이제 사워를 하고 자야겠습니다.....
※이 게시물은 PC용으로 작성하였으니 가능하시면 음악도 들을 수 있는 컴퓨터로 보시기 바랍니다.
서울둘레길7구간(장미공원)
(7구간) 옛성길:탕춘대 성암문 입구에서
북한산생태공원 상단까지 2.7㎞ 거리이며,
약 1시간 40분이 소요된다. 둘레길 중 유일하게
성문을 통과하는 구간이며, 보현봉·문수봉·비봉·
향로봉·족두리봉 등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대가 있다.
탕춘대(蕩春臺)
탕춘대는 서울시 종로구 신영동(新營洞)에 있던 돈대
이름으로, 연산군(燕山君) 11년(1505)에 창의문(彰義門)
밖 경치 좋은 곳에 돈대를 쌓고 탕춘대(蕩春臺)라
하였다가 영조 30년(1754)에 연융대로 고쳤다.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조 12년 병인(1506) 1월 27일
(정미)에 의하면 “왕이 장의문(藏義門) 밖 조지서
(造紙署) 터에 이궁(籬宮)을 지으려다가 시작하지
않고, 먼저 탕춘대(蕩春臺)를 봉우리 위에 세웠다.
또 봉우리 밑에 좌우로 흐르는 물을 가로질러
돌기둥[石柱]을 세워 황각(黃閣)을 세우고 언덕을
따라 장랑(長廊)을 연하여 짓고 모두 청기와를
이으니, 고운 색채가 빛났다. 여러 신하들에게
과시(誇示)하고자 하여 놀고 구경하기를
명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영조 23년 경리청(經理廳 조선시대 북한산성
(北漢山城)을 관리(管理)하던 관청)을 혁파하고
총융청(1624년(인조 2) 서울의 외곽인 경기(京畿)
일대의 경비를 위해 서울 사직동(社稷洞) 북쪽에
설치하였던 조선시대의 군영(軍營))을 탕춘대(蕩春臺)
로 옮기고 이름을 연융대(鍊戎臺)로 바꿨다.
출처:문화원형백과
비봉(碑峰)
북한산 비봉능선의 향로봉과 사모바위 사이에 있는
봉우리로서 높이는 해발 560m이다. 명칭은 이 봉우리
정상에 신라 진흥왕순수비가 세워진 데서 유래하였는데,
원래의 순수비는 훼손을 막기 위하여 1972년 국립
중앙박물관으로 이전하여 보관하고 있다. 순수비가
있던 자리는 1972년 사적 제228호로 지정되었고,
2006년 복제비가 세워졌다. 비봉탐방지원센터에서
금선사를 거쳐 비봉까지는 2㎞ 거리에
약 1시간 20분이 소요된다.
(두산백과)
진관사(津寬寺)
북한산(삼각산) 서쪽 기슭에 있는 조계종 소속
고려시대의 고찰로, 불암사, 삼막사, 보개산 심원사와
함께 조선시대에는 한양 근교의 4대 사찰 중 하나였다.
진관사가 창건된 배경은 고려 현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진관조사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지은 절이라고 전해진다. 고려 목종(제7대)이 아들이 없자
태조의 아들 욱(대량원군)을 세자로 책봉했는데 경종
(제5대)의 대비였던 천추태후가 욱을 살해하려고 했다.
욱은 진관조사의 도움으로 진관사에 숨어 목숨을
건졌고 욱은 목종에 이어 현종으로 등극하여
1011년에 진관사를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에는 국가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수륙재
(水陸齋)가 열리는 근본 도량으로 춘추로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수륙재란 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를 달래며 위로하기 위해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의식으로, 이곳에서 조상의 명복을 빌고,
나랏일로 죽었어도 제사조차 받지 못하는
굶주린 영혼을 위해 재를 올렸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64년
이후 복원되었다. 진관사 법전으로는 대웅전, 명부전,
홍제루, 동정각(動靜閣), 나한전, 독성전, 칠성각,
나가원(那迦院), 객실 등의 건물이 있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안에
석가모니 불상과 미륵보살상, 제화갈라보살상을
모셨고, 비로자나 후불탱화와 석가모니 후불탱화,
노사나 후불탱화를 봉안하였다. 명부전은 정면 3칸
,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지장보살과
도명존자상, 시왕상, 동자상 등이 있으며 지장
보살상 뒤편에 지장 후불탱화가 있다. 명부전
옆의 독성전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독성상과 독성탱화, 산신탱화를 모셨다.
진관사에서 북한산 정상방향인 동쪽으로 이어진
계곡을 진관사계곡이라고 부르는데 암반이 잘 발달
되어 있다. 암반은 경사가 급하고 작은 폭포들이
계곡을 따라 이어진다. 진관사계곡을 따라 산길을
오르면 북한산 사모바위와 비봉에 이르게 되고
이어 향로봉과 승가봉이 가까이 있다. 주변은 북한산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도봉산, 북한산성, 도선사,
문수사, 망월사, 승가사, 천축사, 화계사, 서오릉, 정릉
진흥왕순수비유지 등의 관광지가 있다. 교통은
구파발역에서 진관사입구까지 버스가 운행된다.
출처:두산백과
꽃과 나비
방주연:작사
김부해:작곡
방주연 노래
모진바람 불어오고 휘몰아쳐도
그대는나를 지켜주는 태양의 사나이
가진것이 없다지만 순정은있어
너와나는 나와너는 꽃과나비지
눈보라가 몰아쳐도 비가내려도
그대는나를 지켜주는 태양의 사나이
모든것이 싫어져도 당신은좋아
너와나는 나와너는 꽃과나비지.
2016-08-01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