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가 심고 손자가 혜택 보는 게 임업
그는 임업을 ‘3세대 산업’이라고 했다. 할아버지가 심고 아버지가 가꿔 자식이 혜택을 보는 산업이다. 우리의 임업은 이제 2세대인데, 자식 세대가 누릴 혜택을 우리가 보겠다고 나서면 안 된다는 것이다. 90~100년을 주기로 순환하는 임업의 유장한 호흡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있다. 능내로 임도를 따라가면 1964년 식재한 잣나무림이 나온다. 나무를 얼마나 조밀하게 심는 것이 바람직한지 알아보기 위한 시험림이다. 2001년 3천 본을 심는 게 가장 낫다는 중간 결론이 나왔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47년째 지켜보고 있다. 광릉 숲은 ‘숲의 바다’이지만 그 바다엔 길이 나 있다. 광릉 숲은 65개의 임반으로 나뉘고 각 임반은 또 여러 개의 소반으로 나뉜다. 임반은 모두 13개 노선 45㎞의 임도를 통해 접근하도록 돼 있다. 광릉 숲의 관리 지도를 보면 마치 동네 부동산 소개업소의 지번 도를 보는 것 같다. 수백 년 동안 손 대지 않은 천연 활엽수림과, 그것을 둘러싸고 전국 평균의 약 4배인 ㏊당 255㎥의 목재가 축적돼 있는 인공림은 광릉 숲의 두 얼굴이다.
광릉 숲 시련의 역사
유네스코생물권보전지역 현황도. 붉은 부분이 소리봉과 죽엽산을 중심으로 한 천연활엽수림
세조는 1468년 자신의 능이 들어설 자리를 능림으로 정한 뒤 능 주변과 진입로에 소나무, 전나무, 잣나무를 심고 능원과 산직을 두어 관리했다. 광릉에 당시의 나무가 살아남은 것은 없다. 현재 가장 오래된 활엽수는 졸참나무로 수령 200년 직경 113㎝이다. 침엽수 가운데는 전나무가 직경 120㎝, 수고 41m로 가장 크다. 광릉 숲을 가로지르는 지방도로 383호선 길가에 있는 전나무도 직경 70~90㎝의 거목이다.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의 시기는 광릉 숲의 최대 시련기였다. 풀 뿌리까지 캐 땔감으로 쓰던 시절이었고 도벌이 횡행했다. 임업연구원(현 산림과학원)이 2003년 펴낸 [광릉시험림 90년사]를 보면, 1965년 광릉출장소의 주 임무는 도벌꾼으로부터 나무를 지키는 일이었고, 초막을 짓거나 잠복 근무를 하면서 지켰는데도 역부족이었다. 심지어 도벌꾼과 폭력배가 임업시헙장 안에 쳐들어와 난
동을 부리는 일도 있었다. 1930년대까지 천연림이 90%를 차지하던 광릉 숲은 1960~70년대 솔잎혹파리가 창궐하면서 소나무가 대부분 고사해 그 자리에 리기다소나무, 잣나무, 낙엽송을 심었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뒤엔 인근 군부대가 숲 115㏊를 군사시설 터로 내놓으라고 해 빼앗기기도 했다. 민주화 이후에는 휴양지로 숲을 이용하고 개발하려는 욕구가 새로운 위협으로 떠올랐다. 1989년 시험림 일부가 산림욕장으로 개방됐고 수목원, 산림박물관, 야생동물원이 개장됐다. 관람객이 몰리면서 광릉 숲 주변에 식당, 노래방, 놀이동산, 술집 등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섰다. 마침내 1997년 광릉 숲 보전 종합대책에 따라 산림욕장과 동물원이 폐쇄되고 수목원의 예약제와 관람 인원 제한 조처가 시행됐다. 국립수목원은 1999년 광릉 숲의 절반 면적을 관할하면서 독립했고, 나머지 숲은 현재 국립산림과학원 산림생산기술연구소가 관리하고 있다.
광릉에서 처음 알려진 식물들
‘광릉’이란 접두어를 가진 식물과 광릉에서 처음 발견돼 학계에 보고된 식물이 10종에 이른다. ‘광릉’으로 시작하는 식물로는 광릉요강꽃을 비롯해 광릉골무꽃, 광릉물푸레나무, 광릉제비꽃, 광릉개고사리 등이 있다. 광릉에서 처음 발견돼 학계에 보고됐기 때문이다. 이 식물의 고향이 광릉이라고 할 수 있다. 광릉이란 이름이 붙지는 않지만 광릉에서 처음 발견된 식물도 적지 않다. 노랑앉은부채, 개싹눈바꽃, 털음나무, 흰진달래, 털사시나무 등이 그런 예이다. 이들 식물은 나중에 광릉 이외의 장소에서도 자생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병천 국립수목원 식물보전복원연구실 박사는 이처럼 적지 않은 식물이 광릉에서 처음 학계에 알려진 이유에 대해 “우리나라 식물의 약 30%를 기재한 일본 식물학자인 나카이가 광릉 시험림에서 촉탁 연구원으로 근무하면서 조사를 하러 다닌 결과”라고 설명했다.
출처:(길숲섬)
2024-04-22 작성자 청해명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