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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경기한국수필가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이경선
▲ 김동리·손소희 부부 photo 김평우 |
동리(東里) 김시종(金始鍾)은 현대 한국 문단을 이끌어 온 걸출한 문인이다. 그는 토속적인 한국 고유의 가치를 지키는 민족문학으로 인본주의의 틀을 다져온 우리 문학의 대부로 평가받는다. “지난 50년간 우리 문학에서의 대부는 김동리였다는 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그다지 없을 것이다.… 좌·우라는 개념으로 말하자면 김동리는 대표적 우익이었고 스스로도 그렇게 자처하곤 했지만, 그는 그 이전에 더 깊이 ‘문학의 본령’에 가장 투철했던 사람이 아니었을까.”(소설가 이호철)
김동리는 대부라는 이름에 걸맞게 자신의 본분인 소설도 최상급으로 써낼 뿐 아니라 후진 양성에도 힘을 쏟았다.
동리는 그의 아호이자 필명이다. 형인 김범부가 지어 주었는데, ‘해가 돋는 곳, 동쪽 마을에 살기로 한다. 그저 햇빛이 좋다’고 김동리 스스로 뜻풀이했다. 김동리는 1913년 경북 경주시 성건동 186번지에서 1913년 11월24일(음력) 김임수(金壬守)와 허임순(許任順) 사이의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김동리의 부친 김임수는 제물 장사를 하여 집안을 일으켰다. 당시 제사에 쓰는 모든 물건, 즉 제수 과일이나 명태 등의 장사는 썩 잘되었다. 그러나 부친은 여기저기 물건을 해 나르면서 점점 주색을 가까이 하게 된다. 술로 세월을 보내게 되고, 김동리마저 어린 나이(세 살)에 술찌끼에 맛을 들여 술 취한 모습이 동네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이에 참을 수 없게 된 모친은 교회에 나갔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술만 안 잡수신다면 좋겠다는 뜻에서 교회에 나가시게 되었고, 할아버지는 당신의 유일한 낙인 술을 자시지 말라 하니 집안이 뭐가 되겠습니까.”(조카 김윤홍씨)
김동리가 이후 쭉 기독교 계통의 학교를 다니게 된 것도 모친의 영향 때문이었다. 김동리는 모친의 입교와 부친의 술주정에서 비롯된 잦은 분란과 무관심으로 점철된 어두운 가정환경 속에서 자라야 했다. 그러나 김동리에게 모성의 그리움을 동반한 기독교의 영향은 그의 형 범부의 정신적 영향력과 함께 성격 형성에 중대한 일면을 차지하게 된다.
김범부는 생활에 대해서는 무관심했으나 어릴 때부터 상당히 조숙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미 조국을 생각했으며, 독립운동에도 참여했다. 범부(凡父)는 ‘모든 사람의 아버지가 되실 분이라고 해서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다’는 것이다. 본명은 김정설(金鼎卨)이다.
“범부 선생이 열세 살 되던 해 우리나라가 일제에 강제 합방이 되었지요. 나라가 망하고 나서 처음 닥치는 추석이 되었을 때 범부는 좋은 것 없고, 송편은 만들어도 먹고 싶지 않고 울고만 싶더랍니다. 그래서 열여섯 살에는 외동면 치술령산 굴 속에 들어가 동지를 10여명 모아서 독립운동한다고 늘 구상도 하고 나름대로 독립운동을 했습니다.”(범부의 큰딸 옥영씨, ‘김동리 삶과 문학 ’ 김정숙)
이후 범부는 백산상회 도움으로 일본으로 유학가는데, 백산상회는 백산 안희제 등이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기 위해 1914년 부산에 세운 회사이다. 범부는 워낙 타고난 신동이라 한번 읽은 책은 거의 다 기억했다. 범부가 일본 교토제대에 다닐 때 학장이 주역을 강의했다. 그런데 범부가 그 시간에 참석하지 않자 학장이 불러서 ‘왜 강의 시간에 오지 않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범부는 들을 것이 하나도 없다고 대답했다. 학장은 그럼 강의를 한번 해 보라고 했다. 그래서 범부는 그 시간 내내 강의를 했다고 한다. 어렸을 때 공부했던 주역을 기억해낸 것이다.
범부는 1915년 일본에 건너가 도요(東洋)대학에서 동양철학을 전공하고, 이어 서양철학을 연구하기 위하여 도쿄 외국어학교에서 영어와 독일어를 수학한다. 그후 도쿄대학 교토대학에서 청강생으로 동서양의 철학을 비교연구하고 귀국하여, 8·15광복까지 산사를 역방하면서 불교철학 연구에 몰두한다. 1950년 2대 국회의원 선거 때 동래에서 당선되고, 후에 계림대학에서 동방사상연구소를 세워 동양철학 한학을 강의한다. 김동리는 큰형 범부를 스승으로 생각했으며 어려서부터 마을에서 소문난 신동이었던 범부를 절대적 존경의 대상으로 생각해 늘 무릎을 꿇고 가르침을 받았다.
김동리는 1920년에 경주 제일교회 소속의 계남소학교에 입학한다. 모친이 독실한 신자였으므로 그도 충실한 여름성경학교 학생이었다.
김동리는 1926년 대구의 계성중학교에 입학한다. 그는 중학을 마치면 의학전문학교로 진학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계성학교가 전문학교 응시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2학년을 마치자 서울의 경신학교 보결시험을 쳤다.
“그때 경신학교에는 안재학 선생이 교무주임으로 계셨는데, 공초 오상순 선생이 이분과 친분이 있다고 해서 공초 선생이 날 데리고 학교로 갔다. 안재학 선생은 공초 선생과는 일본 경도 학창시절부터 잘 아는 사이였다고 한다. 공초 선생은 백씨와 친구였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공초 선생은 서울서 그 이튿날 문상을 오셔서 뵌 적이 있었다.”(‘나를 찾아서’)
경신학교 시절 김동리는 선생님의 추천으로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비롯하여 ‘레미제라블’ ‘아라비안나이트’ ‘마테를링크 선집’ 그리고 ‘세계문호와 그 창작’이라는 서양인 평론집 등을 읽는다. 김동리가 경신 4학년 때 당시 형 범부가 중외일보 고문이어서, 여기자로 있던 김말봉이 그에게 글을 써보라고 하여 ‘고독’ ‘방랑’ ‘기러기’ 등 수필을 발표한다. 그 무렵 그는 진학 학자금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부산으로 범부를 찾아 간다.
“형님은 학자로, 사상가로, 지사로, 경상도 일대에서는 모든 뜻있는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었지만… 돈은 본래 없었으므로 그만한 일 한 가지도 뜻대로 되어지지 않았다. 몇 분 친구들에게 부탁해 보았으나 결과는 실패였다. 나는 그대로 형님 댁의 식객이 되고 말았다. 그때 형님 댁 골방에는 철학 서적이 한 400~500권 쌓여 있었고, 문학 책도 더러 눈에 띄었기 때문에 나는 그 벽장 속같이 어두운 골방에 틀어박혀서 나한테는 힘에 겨운 플라톤과 괴테 따위를 뒤적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나를 찾아서’)
1934년 겨울 1935년도 조선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화랑의 후예’가 당선된다. 김동인이 ‘경쟁자 없이 단연 수위에 올리지 않을 수가 없는 호조 소설이었다’고 선후감을 썼다. “잘못하면 야비한 자극에 흐르기 쉬운 재료를 무게 있게 말미까지 끌고 나간 표현적 기술이라든가, 전 작품을 장식하는 위트며 유머 등도 적당히 끼어서, 범수(凡手)가 아니라는 것을 역력히 증명하였다”고 호평했다.
“이 소설은 ‘조선의 심벌=황 진사=화랑의 후예’를 작품의 전개과정에서 밝혀 나가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즉 이 모든 것이 하나라는 동질성을 확인해 가는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일제 치하에서 옛 명성과 명분만 남긴 채 피폐해져 가고 쇠잔해 가는 민족정신과 조국의 운명을 조선의 심벌인 황 진사를 통해 보여 주는 작품이다.”(‘김동리 삶과 문학’)
이후 김동리는 ‘산화’ ‘바위’ ‘무녀도’ ‘황토기’ ‘등신불’ 등 주옥 같은 단편을 발표한다. 또 ‘작가생활 35년 만에 처음으로 작품을 가지게 되었다’고 스스로 말한 ‘사반의 십자가’ 등의 장편들은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하며 현대의 고전이 됐다.
“‘사반의 십자가’는 유년시절 이후부터 교회나 학교에서 받은 서양적 영향에 대한 객관적 비판이 담겨 있다.… ‘사반의 십자가’에서 이스라엘(동양)은 우리나라를, 로마제국(서양)은 일본제국을 상징한다. 해방이 되었다고 해서 ‘지배-억압’의 구조가 일순간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해방이 된 이후까지 계속적으로 억압의 상태에 준하는 식민지 통치의 정신적 후유증을 김동리는 기독교 문화(성경과 예수)와 동양 문화(점술 혹은 샤먼과 사반)와의 창조적 지향을 통해 보여준다.”(‘김동리 삶과 문학’)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산화’가 당선됨으로써 3대 민간 신문의 신춘문예를 모두 통과하는 기록을 남긴다. 그는 1934년에 이미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백로’로 입선했다.
1937년 경남 사천군 원전에 광명학원이 설립되어 강사로 취임한 김동리는 낮수업이 끝나면 야학을 열어 동네 사람들의 문맹퇴치 운동에 심혈을 쏟는다. 야학에서 하는 일이란 아직 우리말을 모르는 어린이나 어른들에게 우리말을 깨우쳐 주는 것이었다. 우리말을 가르치지 못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글을 깨우치려고 힘썼다.
김동리는 당시 하숙집 딸 김월계와 친해져서 1938년 3월 25일 진주 옥봉 본당 원전 공소에서 혼배성사로 가톨릭식 결혼식을 올린다. 뒤이어 열린 일반 결혼식에서 들러리를 섰던 범부의 딸이며 광명학원 제자였던 김소영이 말한다.
“숙모님은 그 마을에서 유일한 인텔리 여성이었기 때문에 그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삼촌이 광명학원 대 교정에서 결혼식을 올렸는데 그때 주례 선생이 만해 한용운 선생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김동리 삶과 문학’)
1942년 광명학원이 일제 당국에 의해 폐쇄되며, 형 범부가 구속되고 가택수색을 당하자 김동리는 절필을 한다. 사천에서 광복을 맞은 김동리는 사천청년회 회장으로 선출된다. 상경한 김동리는 이듬해 조선공산당 계열의 문학가동맹에 대항하여 서정주·박두진·조지훈·박목월·최태응 등과 청년문학가협회를 결성하고 초대회장에 선출된다. 이어 공산계의 계급주의 민족문학론에 대항하여 인간주의 민족문학론을 제창하며, 본격 문학이란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다. 1948년 민국일보 편집국장에 취임해 김동석·김병규 등의 좌익 문학평론가들과 논쟁을 벌인다.
“그는 평생 동안 일관하고 단호하고 씩씩했다. 1940년대 초의 마지막 일제 암흑기에는 초야에 숨었다가 8·15광복이 되자 청년문학가협회를 이끌며 처음부터 뚜렷한 기치를 들고 등장, 일약 당시 우익 문화 진영의 맹장으로 활동을 시작한다. 그러한 그의 출발은, 좌우 대립에서 6·25를 거쳐 남북분단과 지난 50년 동안의 극렬한 대치상황으로 이어지는 동안 자연스럽게 남쪽 문단의 대부로 그를 끌어 올린다.”(이호철 ‘광복50년 한국을 바꾼 100인’)
김동리는 1948년 겨울, 서울 명동에 전숙희와 함께 ‘마돈나다방’을 차린 손소희와 로맨스를 벌인다. 손소희는 광복 후 만주에서 귀국하여 소설을 쓰려 했다. 소설 작법 지도를 바라는 손소희를 한무숙이 김동리에게 가 보라고 소개한다. 그 당시 다방은 인텔리 여성, 즉 신여성이 경영하는 수준 높은 문화공간으로 지금의 다방과는 의미가 달랐다. 이때 손소희는 다방의 주인으로서 카운터를 보고 있었다. 얼굴이 모나리자처럼 생겼다고 해서 인기가 있었다.
“그 당시 손소희의 남편은 한성일보 편집국장 심영택이었는데, 인간의 기본적 속성을 억누르기보다는 해방시킨다는 인간중심적 사고를 가지고 있던 김동리로서는 손소희와의 사랑을 전혀 불륜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사랑을 위해서는 목숨을 바쳐도 좋다고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김동리와 손소희와의 사랑의 감정은 억눌러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키워나간 것이 ‘김동리가 생각하고 있던 휴머니즘 정신에 가까운 것’이었다고 서정주는 회상한다. 그러나 김동리는 이 일로 인해 형 범부로부터 심한 꾸지람을 듣기도 했으며, 봉변도 많이 당했다고 한다.”(‘김동리 삶과 문학’)
김동리는 문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인과 같이 사는 것을 숨막히는 생활로 느꼈고, 결국 1966년 이혼한다. 두 번째 부인 손소희는 문학 제자로서 김동리가 문학가로 성공의 길을 걷게 하는 지원자가 된다. 문단 활동의 측면에서 김동리의 서라벌예술대학 교수 활동이나 월간지 한국문학의 창간 및 운영을 도와 주었을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 청담동 땅을 사고 집을 짓는 등 집안의 살림을 도맡아서 처리하였다. 김동리가 문인협회 이사장, 서라벌예술대학장, 예술원 회장을 역임하고 잡지사를 경영하는 등 적극적인 사회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손소희의 내조 덕이었다.
하지만 김동리는 1966년경부터 또 다른 안식처를 찾고 있었다. 자신에게 순종하며 오직 자신만을 쳐다보고 자신의 모든 것이 되어 줄 소녀의 존재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곧 작가 서영은이며, 그녀는 김동리가 선택한 최후의 부인이 된다. 서영은의 존재는 김동리로 하여금 여성 탐색을 끝내도록 하지만, 이때 문단의 지위나 명성으로 보아 엄청난 파문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러나 부인 손소희는 뛰어난 인내와 결단으로 그들의 사랑을 용서하고 덮어 준다.
“손 선생은 나를 포용했던 것이다. 그 포용을 통해 손 선생도 나도 새로 태어났다. 드디어 우리는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됨으로써 서로를 등질 수밖에 없는 그 숙명적 덫을 찢고,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된 두 여자로서 우리만이 아는 아픔을 공유하게 되었다. 그런데도 내 마음은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서영은 수필집 ‘한 남자를 사랑했네’)
손소희는 1917년 함북 어랑면에서 태어나 함흥 영생여학교를 졸업하고 1937년 일본 니혼대학에 유학갔으나 신병으로 중퇴한다. 1934년부터 4년간 만선일보 기자로 있으면서 문필생활을 시작한다. 1949년 전숙희·조경희와 함께 월간지 혜성을 펴내고 주간을 맡으며, 한국여류문인협회장 펜클럽한국본부 부위원장 등을 지내다 1987년 별세한다. ‘이라기’ ‘회심’ 등의 작품집에 장편으로 ‘남풍’ ‘태양의 계곡’ ‘계절풍’ 등을 남겼다.
순수문학과 신인간주의 문학사상으로 문학인생을 다져온 김동리는 1995년 6월 17일 서울 청담동 자택에서 별세하며, 경기도 광주군 오포리 가족묘지에 안장된다. 김동리는 5남1녀를 남겼다. 장남 재홍(69·연세대 졸업)씨는 중앙일보 기자였으며, 아동문학작가다. 차남 평우(66·서울대 법대 졸업)씨는 법관으로 7년 일했고 대한변협 회장을 지냈다. 3남 양우(65·경희대 졸업)씨는 동부그룹 임원을 지냈으며, 4남 치홍(63·고려대 법대 졸업)씨는 외무고시에 합격하고 외교관으로 근무했으며, 5남 기홍(별세·외국어대 졸업)씨는 삼성자동차 상무를 지냈다. 김동리의 딸 복실(56·중앙대 졸업)씨는 계원여중 교사로 일했다.
“선친께서는 생전에 외국 구경도 거의 안 하셨지요. 어디나 다 산이 있고 물이 있는데 무엇을 더 볼 것이 있느냐는 것이지요. 김동리문학상을 13회째 시상했고, 손소희문학상도 따로 있지요. 모친의 문학활동은 생전에는 부친에 가려져온 셈이지요. 백부님(범부)께서는 통일 후의 남북을 아우르는 사상을 연구하셨고… 이분들 기념사업을 제대로 하는 것이 쉽지는 않겠으나 자부심을 가지고 힘써야지요.”(차남 평우씨)
내가 본 김동리 김정숙 경남대 교수 나는 1979년 김동리 선생님을 중앙대학교에서 사제지간으로 만나 아예 ‘김동리 연구’를 학위논문으로 택한 인연으로까지 발전했다. 따라서 생전에 김동리 선생님을 여러 차례 만날 수 있었다. 그분은 문학 대인답게 무슨 질문에 대해서든지 스스럼없이 답변해 주어서 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셨다. 주견을 뚜렷이 하시면서도 인품은 부드러우셔서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분 생전에 ‘지금은 민족적인 문제가 절실하지 않으므로 집착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질문에 “지금이 그때(일제강점기)와 같이 그렇게 절실하게 모든 사람에게 민족을 생각하게 하는 그런 현실은 아니지만, 지금이라고 민족적일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다”라고 대답하셨다. 그의 문학의 뿌리는 ‘자연과 민족과 신에 얽힌 샤머니즘이라고 하는 나무’라고 대답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