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표가 있는 가을
이용희
봉의산 오솔길이다.
오르막 능선은 매일 걸어도 숨이 차다. 묵묵히 땅을 바라보고 걷는다. 몇 달 동안의 산행으로 발걸음이 이제는 조금 편안해졌다. 그렇지만 목표 지점에 먼저 시선이 꽂히는 것은 아직 힘이 든다는 내 몸의 표현이다. 그럴 때면 더더욱 발아래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목적지가 멀리 보이면 더욱 힘들어지는 날이 있었다. 가야 할 곳은 아직도 멀었는데 앞에는 산도 물도 벼랑도 구비 길도 모두 장애물이었다. 그뿐이 아니다. 가파른 고개를 할딱이며 오르기에는 자신이 없을 때다. 그 때면 그냥 발 아래를 보고 걷기로 한다. 지금 이 시간이 지나면, 지금 이 순간이 지나가면 다른 장면이 연출된다는 것은 진리이다. 그리고 그 다음 장면은 나의 꿈이 이루어지는 기쁨의 시간이다.
머물고 싶어도 머물 수 없는 것은 평탄한 신작로이거나 가파른 오르막길이거나 꼭 같다는 것을 알기에 먼 곳을 보며 굳이 실망할 필요는 없다. 그러다가 어쩌면 주저앉고 싶어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경전처럼, ‘오늘의 좋은 말’처럼 힘든 오늘을 견디지 않으면 평탄한 내일은 없다고 되 뇌일 뿐이다. 발만을 응시하며 걸어야 하는 시간 속에서 헤어나 숨을 고르고 허리를 폈을 때 내가 원하던 그 곳쯤에 와 서있다면 그 순간이 곧 행복이다.
고개를 떨구고 걸어야 하는 오르막에서 ‘툭’ 하는 단음절이 높다. 나뭇잎을 흔들고 땅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는 어디론가 굴러간다. 무엇인지 생각할 사이도 없이 두리번두리번 찾는다.
도토리다. 작은 총알처럼 끝이 뾰족하고 날카롭다. 그렇게나 무덥던 여름이 가을과 바턴을 주고받는 때쯤인 것을 느끼게 해 주는 도토리의 명쾌한 울림이다. 아니, 벌써 그 때가 되었는지도 모르고 살아왔기에 더욱 시원하다. 따다닥 소리에 이어 떼구르르 발 앞으로 구르는 도토리 한 알이다.
반들반들하고 길쭉한 그 모양이 재롱도토리임에 틀림없다. 도토리 중에서도 일찍 여물어서 떨어지는 그 재롱도토리는 묵을 쑤어도 맛이 좋다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다. 냉큼 허리를 꺾는다. 손 안에 넣고 동글동글 굴려 혹시라도 묻었을지 모르는 흙을 턴다. 손안에 굴리며 이곳저곳을 돌아본다. 여기도 저기도 도토리다. 간 밤 바람에 떨어져 뒹굴었나보다. 몇 알 주워 주머니에 넣는다.
오솔길에서 주운 도토리는 주머니에 가득 차오른다. 이걸 어떻게 하지? 생각지도 않았던 여유의 돈이 생겼을 때처럼 마음이 부산해진다. 이 도토리로 음식을 만들어 먹는 방법은 익히 안다. 예전 근무하던 곳이 산골인지라 많이도 보아왔고 또 나도 해 보았던 일들이다.
주워 온 도토리는 우선 껍질을 벗겨 놓아야 벌레가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시멘트 바닥에 깔아 놓고 벽돌로 살살 문질러 가며 껍질을 벗기던 생각이 난다. 그 다음은 믹서에 갈아서 거른다. 그리고 그 물을 가라 앉혀야 도토리 전분이 가라 앉아 먹거리를 만들 재료가 된다. 그것을 묵을 쑤어 먹거나 부침개를 만들기도 하지만 양이 많아 한 번에 먹을 수 없을 때는 말려서 가루로 만들기도 한다.
그 과정이 머리에 스쳐지나간다. 이제는 오랫동안 가지고 놀지 않았던 장난감을 발견한 듯 반갑다. 그렇지만 껍질을 벗겨야 할 생각을 하니 귀찮다. 이제 이것을 가지고 놀기에는 너무 시들하고 재미가 없다. 어른들이 새총을 가지고 고무줄을 당기며 논다면 얼마나 식상할까?
그렇게 평지 길로 나서고 이제 구르는 도토리는 없는데 앞에서 도토리가 담긴 비닐 봉투를 들고 오는 사람이 보인다.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한 줌을 꺼내며 그 사람을 세운다. 낯선 사람의 도토리 봉투에 바지 주머니를 탈탈 털고 웃는다. 가볍다.
몸도 마음도 모두 비웠는데 저만치 산자락 끝에서 어머니와 아들인 듯한 두 사람이 연신 허리를 굽히고 줍는 모습이 보인다. 분명 도토리다. 참 재미있어 보이는 그들을 지나 산으로 오르고 나의 반경을 돌아 내려온다. 그런데 욕심으로 채워진 유혹은 그곳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어슬렁어슬렁 두 모자가 줍던 곳으로 다가가보니 역시 도토리 밭이다. 아까 모두 주워갔겠지만 내가 산을 돌아오는 사이에 떨어진 도토리는 또 여기저기에 뒹군다.
다행히 비웠던 바지 양 주머니에 가득 채우고 도토리는 끝났다. 내려가다가 누구인가를 만나면 아까처럼 다 쏟아 드려야지. 그렇지만 도토리 봉투를 든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두 다리가 몹시 무겁다. 바지 양쪽에 가득 찬 도토리의 무게다. 내일부터는 도토리가 눈에 띄지 말았으면 싶다. 하지만 가을이 끝나는 날까지 분명 동글동글 구르는 그 유혹의 물체는 나의 양 손을 쉬게 하지 않을 것 같다. 가을 하늘에서 춤추는 구름 덩이들이 마음을 채웠다 비웠다 한다.
그래, 이 가을이 주는 선물이다. 떨어진 도토리를 만나면 쉬엄쉬엄 걸으라는 쉼표들이라고 가볍게 허리를 꺾어야 할 것 같아.
2018.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