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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사랑은 이제 그만.
민주시민교육전공 20204704 오성훈
한반도는 미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의 역학 관계 속에서 분단을 끝내고 평화체제 구축으로 통일시대를 열어야 하는 숙명에 놓여 있다.
그간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해방 후 한반도를 나누어 남쪽에서 군정을 펼쳤으며, 6.25한국전쟁에 발 빠르게 참여했다. 미국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헐벗고 굶주린 배를 채워야 할 한국민들은 미국을 혈맹으로 생각하며 명나라, 청나라에 사대를 했던 것처럼 미국을 주인으로 생각했다.
일본은 태평양 전쟁 패전 후 미국의 냉전 전략에 따라 살아남았고 한국전쟁을 지렛대 삼아 성장했다. 식민지 지배에 대한 아무런 반성도 없이 헌법 개정을 통해 침략야욕을 불태우고 있다. 일본은 동남아시아 침략에 대해 진정한 사죄를 하기는커녕 역사를 조작하며 주변국의 민족감정을 끝없이 자극해 대고 있다.
중국은 등사오평의 흑묘백묘론을 기점으로 개혁개방정책을 가속화하여 유일하게 미국과 겨룰 수 있는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 한국내 샤드 배치 과정에서 보여준 중국의 강경한 외교정책은 국제질서 속에 한국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큰 과제를 안겨주었다.
한국은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 BTS를 비롯한 K-Pop은 한국을 문화선진국의 위치에 올려 놓았다. 그리고 코로나 19 위기에서 전 세계의 새로운 표준을 만들고 있다. 이제 대한민국은 미국의 경제적 원조, 군사적 지원이 없어도 자력으로 성장할 수 있는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식민지 시대 노예의 삶, 민족 분단 시대 불구의 삶을 살았던 대한민국의 전쟁 세대, 분단 세대는 여전히 노예와 불구의 삶을 떨쳐내지 못하고 ‘혈맹’인 미국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며 미국의 51번째 주가 되길 희망하고 있는 듯하다. 일명 태극기 부대라 일컬어지는 전생 세대들의 집회에서 등장하는 성조기와 일장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13강은 지금의 한미관계, 한일관계 그리고 한중관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여기서는 한미 관계와 한일관계를 다룬다. 외교 관계?(혈맹/주한미군/전작권). 왜 일본은 사과하지 않을까?(과거사/청구권/한일협정)이다.
1. 한미 관계는 외교 관계?_혈맹/주한미군/전작권
미국, 외국이 아닌 '혈맹'
1950년 9월, 인천 상륙작전 후 서울을 탈환한 다음 맥아더와 이승만은 중앙청에서 함께 기도했다. 이 장면에 감격한 어떤 목사는 미국 사람과 한국 사람은 한 아버지의 아들이요 한 형제인 고로 형제가 난을 당할 때 형제가 구원한다고 말했다. 그 이후부터 한국과 미국은 '피로 맺은 형제(혈맹)'가 됐다. 작가 김동리도 6.25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한미 관계는 피로써 맺은 관계가 됐다고 읊었다. 남의 나라에서 와서 4만여 명의 군인을 희생시켰고 막대한 무상 원조를 제공했으니 미국은 한국인들에게 갚을 길 없는 은혜를 베푼 나라가 맞다. 특히 1949년 미군이 철수하자 '사형 집행을 당한' 상태로 패닉에 빠졌던 한국의 집권층에게 미국은 6.25이후 돌아와서 나라를 구해주고 목숨도 살려준 '구세주'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8.15직후 미군을 통해 미국이라는 나라를 접한 조선인들에게 그들은 앞선 일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호적이고 우수한 문맹국이었다. 이승만은 이미 구한말 청년 시절에 러시아에 대해서는 반감을, 미국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감정을 가졌다. 1917년 러시아의 공산화를 확인한 뒤 이런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그는 미국에서 오래 생활하면서 미국식 민주주의를 몸에 익혔다. 이승만은 냉전 초기에 반공반소의 입장에 서서 '자유세계'라는 말을 자주 했던 트루먼의 생각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그것은 미국식 자유주의를 온 세상에 확산시켜서 '공산주의라는 콜레라를 막고' 세계 인류를 평화와 번영으로 인도한다는 종교적 확신과 같았다. 한국은 전쟁 초기에 [대전협정]을 맺어서 미국에게 작전권도 넘기고 치외법권까지 행사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가 일방적으로 미 정부의 정책을 따른 것은 아니다. 미군이 38선을 넘자 그것을 북진 통일로 마무리하자고 강력하게 요구했다. 1951년 초 이후 미국 정부는 전쟁을 질질 끌면서 애매한 태도로 임했다. 결국 이 일로 맥아더는 트루먼 대통령과 충돌하다 해임됐다. 이승만 입장에서 남한 정권을 수립한 미국이 적당히 체면만 세우고 휴전하려는 태도를 납득할 수 없었다. 그것은 남한을 북한의 위협 속에 그대로 두는 무책임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이 일본, 필리핀 등과는 안보조약을 체결하고 한국과는 체결하지 않는 상황에 항의했으며, 휴전협정 직후 한국에 온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에게 "우리 민족 전체의 생명과 희망이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달려 있다"고 간청했다. 미국은 결사적으로 휴전을 반대하는 이승만을 달래기 위해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수락했다. 이승만은 벼랑 끝 전술을 써서 미국의 '큰 양보', 즉 주한 미군 주둔을 얻어낸 셈이다.
1953년 10월 1일 맺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제4조에서 대한민국은 미국에게 "육해공군을 한반도와 주변에 배치할 권리"를 주었고, 미국은 그 "권리"를 갖게 됐다. 이로써 미군의 주둔과 관련된 모든 사안에서 한국은 그 권리를 인정해주는 수세적인 입장에 서게 됐다. 제6조에 따라 "본 조약은 무기한으로 유효하다." 즉 이 조약은 한국의 안보 불안에 대한 미국 측의 응답으로 체결된 것이기 때문에, 한반도에 전쟁이 발생 할 경우 미군 장성인 유엔군 사령관이 작전지휘권을 갖고, 그것은 무기한으로 유효하다. 동시에 미군은 언제든지 한국의 동의 없이 군대를 철수시킬 권리도 있다.
휴전 후 인천광역시의 자유공원에 맥아더 동상이 세워졌다. 지옥의 문턱까지 갔다가 살아난 한국인은 그를 국가의 은인으로 생각해서 동상까지 세웠다. 하지만, 전쟁 이전에 맥아더는 남한의 전략적 가치를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 않았고, 미군 철수를 주장하기도 했으며 한국을 특별히 배려한 적도 없다. 이후 박정희는 맥아더를 '우리 한국인의 가슴속에 아로새겨진 영원한 벗'으로 칭송했다. '혈맹'은 미국이 아닌 오직 한국의 입장을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외국군이 작전지휘권을 갖고 있는 주권국가?
미국의 6.25전쟁 참전은 이후 한국의 대통령, 정치 지도자나 군부가 미국에게 말 못할 굴욕을 당해도 그냥 감내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맥아더는 중국의 역습을 예상하지 못해 38선 이북으로 너무 깊숙이 북진했다가 급히 후퇴하는 과정에서 큰 전력 손실을 입었다. 1951년 초부터 미국은 이미 휴전을 검토하고 있었지만, 이승만은 "압록강 두만강에 태극기를 꽂자"며 북진 통일과 휴전 반대를 외치면서 항의했다. 1953년 7월 27일의 휴전협정에 한국은 당사자로 참가하지 못했고, 그 과정이나 내용 역시 한국의 동의를 거치지 않은 채 미국/북한/중국 사이에서 결정되었다.
미군은 한국 대통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계속 철군을 단행했다. 한국전쟁 중 33만 명에 달한던 주한미군 병력은 곧 8만 명 수준으로 줄었다. 70년 동서 데탕트와 더불어 한국 주둔 명분이 약해지자 미국은 완전한 철군을 추진했다. 70년 7사단 철수와 지미 카터 대통령의 지상군 전투병력 철수 계획에는 주한미군을 크게 감축하려는 내용이 있었으나 미 군부와 의회의 반발로 6,000명 정도만 감군되었고 이후로는 3~4만 명 내외의 병력을 유지했다.
주한미군에는 다른 나라에 없는 카투사 제도가 있다. 한국 땅에서 미군에게 배속된 한국인 병사이다. 미군에 배속된 한국군(Korean Augmentation Troops to the United States Army')이다. 1970년대 들어 동서 데탕트로 안보 위기를 느낀 박정희 정부는 미국에게 한미연합사령부 설치를 요구했다. 한미연합사령부는 과거 이승만 정권기의 [한미상호방위조약]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안보 불안을 덜어주기 위한 미국의 '후의'로 사령관은 미국인 대장이, 부사령관은 한국인 대장이 맡게 됐다.
1976년, 카터 미 대통령은 대선 유세 기간 동안 한국에 700기의 핵무기가 배치되어 있으며 대통령이 되면 모두 철수시킬 것이라 공약했다. 그때까지 한국인들은 핵무기가 한반도에 배치됐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1994년 미국은 북한이 핵 사찰을 거부할 경우 선제공격을 할 것이라고 결정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는데, 미국은 한국 정부와는 어떤 상의도 하지 않았다. 전 대통령인 카터의 방북으로 갈등이 극적으로 봉합되기는 했지만, 이러한 작전 체계에서는 한국 정부가 자신의 운명을 좌우할 전쟁의 들러리로 전락할 우려가 크다.
전쟁이 끝나고 긴 세월이 흘러도 한국군의 작전권은 여전히 미군이 쥐고 있다. 그레고리 헨더슨 미군정 민간인 요원은 작전지휘권 문제는 세계적으로 유일하며 경악할 만한 일이라고 했다. "미군 사령관이 미군은 물론, 한때 주둔했었고 앞으로 다시 주둔할 수도 있는 국제군, 북한의 위협에 대처하는 모든 한국군을 지휘한다. 한미연합사령관으로서 미군 사령관은 오직 미군 참모총장의 명령만 따를 뿐이며 한국 정부의 명령을 받지 않는다.“
물론 한국 정부는 대한민국 국군의 지휘권은 여전히 대한민국 대통령이 보유하며, '북한에 대한 전시 작전통제권'만 한미연합사령관에게 위임한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군은 주로 북한과의 전투를 대비해서 조직되고 운영될 뿐만 아니라 평시의 임무는 사실상 없으므로 국군의 실질적인 군사 작전은 한국 대통령 권한 밖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9년 소련의 사회주의가 무너지면서 미군이 한반도에 주둔해야 할 명분이 약해졌다. 호전적인 북한이 건재하기는 했지만 군사적으로 북한이 미국의 맞수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 이제 미국은 동아시아 전체, 특히 중국을 잠재적인 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한국군의 요청으로 미군은 계속 주둔했고, 그렇게 요청한 이상 한국은 주둔비를 더 많이 낼 수밖에 없었다.
이제 경제 대국이 된 한국이 군사력도 북한에 비해 월등하지만 미군은 북한이 감히 도발을 하지 못하게 하는 인계철선 역할을 하기 때문에 한반도에 계속 주둔해야 한다는 보수 세력의 주장이 그대로 통용됐다. 주한미군의 병력은 3만여 명에 불과하지만, 그들이 가진 각종 군사 정보와 첨단 무기는 그 이상의 중요성이 있다는 것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제4조에 따라 대한민국에 주둔하는 미군의 지위와 한국 정부가 그들에게 제공하는 시설 및 구역에 관한 사항을 규정해놓는 협정이 바로 SOFA(Status of Forces Agreement), 즉 [한미주둔군위위협정]이다. 한국전쟁 이후 주한미군에 의한 범죄가 한국인들의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 만들었다. 1962년 미군에 의한 총격 린치 사건을 계기로 한미행정협정을 체결해야 한다는 데모가 일어나기도 했다. 1966년 "미군의 공무 중범죄에 대해 한국은 1차 재판권을 갖는다."는 내용의 [한미주둔군지휘협정]이 체결됐고,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협정에는 "미군이 한국에 재판권 포기를 요청하면 이를 호의적으로 고려하고 재판권 행사가 중요하다고 결정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국의 일차적 권리를 포기한다."는 내용이 있어서 한국이 실제로 미군 범죄를 재판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이후 한국의 요구로 불평등한 조항들이 다소 없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SOFA는 한미 관계의 불평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상징적인 협약으로 남아 있다.
1990년까지 한국에서 벌어진 미군 범죄에 대해 한국이 재판권을 행사한 경우는 1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했다. 결국 한국은 미군에게 치외법권 지대였다. 2000년대 들어서 한국의 재판권 행사는 7%, 2003년에는 31%로 높아졌다. 경기도 화성 매향리 등의 미군 사격장, 전국 여러 미군 주둔지 인근에서 발생한 강간 살인 사건 등 인권침해, 소음, 환경오염 등에 의해 한국인들이 입은 심각한 피해는 거의 구제를 받지 못했고 배상도 받지 못했다. 2002년 미군 장갑차에 깔려 죽은 미선, 효순 두 여중생의 비극은 국민들의 분노를 일으켜 촛불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
한국의 자유당을 모태로 하는 세력과 군부는 북한의 핵 개발과 기습 공격, 대량 살상 무기 소지 등을 이유로 한국은 스스로 안보를 책임질 수 없다며 주한미군에 계속 의존하려 한다. 한국이 미국에게 보호를 요청하는 한, 모든 일에서 미국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다. 1905년부터 1941년 진주만 공격 이전까지 그러했듯이, 최근 들어 미국은 다시 일본의 재무장을 지지하고 있다. 남북한 간에 군사적 충돌이 일어나면 청일전쟁 때 그랬듯이 이제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일본의 '자국의 안보'를 이유로 다시 한반도에 들어올 가능성이 있다. 그와 같은 위기에 처한다면 한국은 일본과 한편이 되어 북한과 싸워야 할까?
주한미국이 전시작전권을 계속 갖고 있기 때문에 한국군은 독자적인 안보체계 구축이나 전투력 향상을 위한 노력과 의지가 약하고, 군 운영에 대한 책임감도 별도 없다. 만성적인 군 비리와 군 내 구타 사망 사건 등도 한국군이 스스로 국방의 철학과 이념, 군대 운영의 방향과 목적을 갖지 못한 데서 온 것은 아닐까?
세계 10위 경제 대국, 북한의 30배 이상의 국방비 지출하는 나라에서, 국가를 건설한 지 70여 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는 것은 한국이 주권국가라는 통념을 의심하게 하고, 독립국가로서의 위신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한미군의 존재 이유
6.25한국전쟁 이전, 일본에서 맥아더-이승만 면담 자리 "캘리포니아를 보호하듯이 한국을 '보호'하겠다." 6.25한국전쟁시, 트루먼 "우리는 우리 자신의 국가안보와 생존을 위하여 한국에서 싸우고 있다."
맥아더는 자신의 조국인 미국을 위해 싸웠다. 압록강까지 진격한 것도 한반도의 통일을 위해서가 아니라 미국의 국익, 전쟁 승리로 이끌려는 군인 입장이었다. 미국은 한국전쟁 직전인 1948년 철군, 1960년대 이후 중국과 관계 개선을 위해 한국에서 미군을 빼내려 할 때도 자국의 정책 노선과 국가이익에 따라 움직였다. 이런 미국의 행동은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을 극도의 불안과 패닉 상태에 빠트렸다.
미국은 구한말 이래 동아시아 전략 구상에서 한국만을 특별히 고려한 적이 없고 언제나 일본 등 이웃 나라에 포함된 지역으로 간주했다. 러일전쟁 후 '가쓰라테프트조약'에서 일본의 조선 병합을 묵인했고, 8.15직후 일본을 민주화시킬 계획은 있었지만 한국에 대한 일관된 정책은 없었다. 일본은 1951년까지 점령했으나 남한은 47년부터 철군 계획을 세웠다.
미국은 같은 서구 문화권이자 소련과 맞닿아 있는 유럽, 아시아 중에서는 일본의 경제 부흥에 신경 썼다. 미국은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견지한 자유주의적 반공주의에 기초한 전쟁 개입 노선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의 새로운 패권주의를 달리 표현한 것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미국 정치권 내부에서 전통적으로 존재해온 불간섭주의(고립주의)우파와 일부 좌파의 반대를 넘어서는 정치노선이었다.
자유주의적 반공주의가 집약된 것이 애치슨 [국가안보회의보고서 68 NSC68]이다. 냉전 정책에 관한 가장 중요한 문서 중 하나로 공산 세력 확대의 봉쇄에 높은 우선순위 부여했다. 6.25전쟁의 발발은 바로 NCS68 전략의 시험대였다. 최소 비용으로 최대의 안보와 수익을 얻는 자본주의 이윤 논리가 그대로 적용되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비용이란 인명 손실과 전비 지출이었고 수익은 일차적으로는 자원 및 시장확보를 의미하고 항구적으로 정치적 지배권 행사였다.
2차 세계 대전 후 처음으로 6.25한국전쟁에 지상군을 투입했다. 이는 이후 미국이 자기 영토 밖의 분쟁에 개입하여 기지를 건설하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이 6.25한국전쟁에 참전한 이유는 북한의 침략을 그냥 둘 경우 자기가 만든 나라가 위기에 처해도 방치한다는 신호를 전 세계에 주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참전하지 않으면 세계 반공전선에서 미국의 위신이 흔들릴 수 있었다.
미국은 신속하게 6.25 한국전쟁에 개입했고, 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요구를 못 이기는 척 조약을 체결한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후 소련과의 대결은 상호 멸망의 가능성이 있는 핵 대치였기 때문에 전면전은 피하고 소련과 접경 지대에 있는 주변의 작은 국가의 분재에 개입하는 방식의 전략을 폈다.
맥아더는 미국의 정계나 군부에서 유럽보다는 아시아가 미국의 이익에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던 아시아주의자였다. 아시아 중에서도 일본과 타이완을 미국의 직접적 이해가 걸린 지역으로 봤고, 한반도는 그냥 '주요 이익 지역' 정도로 간주하여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맥아더는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매우 보수적인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8.15이후 일본에 머무르는 동안 일본 천황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기 위해 미 해군장관과 논의할 정도였다. 일본에 대해서도 이렇게 생각한 맥아더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조선인들과 이승만의 대한민국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맥아더의 정보참모 찰스 윌로우비는 북한군을 무표정한 얼굴을 한 반인간(half-men)으로 표현했고, 맥아더의 후임 리지웨이 장군은 한국인을 '야만 상태의 피조물(creatures in their natural state)이라고 묘사했다. 당시 미군은 코리안 일반을 어린아이, 원시인, 다람쥐, 훈련된 원숭이 등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입만 열국 '국(gook-야만인)'이라는 경멸적 단어를 한국인들에게 사용했다.
이승만 대통령이나 한국인들은 미국을 혈맹 관계라 말했지만, 미국의 대통령이나 최고위 지위관 중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영어권 학자들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동아시아 몇 나라의 관계를 '보호자와 피보호자(Patron-Client)'관계로 말한다.
냉엄한 국제정치에서 자선이나 이타주의는 있을 수 없다. 자본주의의 종주국 미국은 조건과 대가 없이는 단 1달러도 쓰지 않는 나라다. '해방'이 공짜가 아니듯이 침략을 당해서 무너지기 직전의 나라를 구해준 것도 절대로 공짜가 아니며, 그 빚을 이자까지 몇 배, 몇 십 배 갚아야 할 수도 있다. 임진왜란 후 조선이 '나라를 다시 세워준 은혜'를 갚는다며 망해가는 명나라에게 온갖 조공을 바치고 성가진 요구를 들어주느라 나라 재정이 파탄난 일이 연상된다.
새로운 천하 질서의 수립
한반도 역사에서 정치 세력 간의 대립을 보면 고려(친원파 vs 친명파), 조선(명나라 사대 vs 청나라 사대), 구한말(친청, 친러, 친일, 친미), 해방 후(친미 vs 친소), 한국전쟁 후 남한(친미vs 반미)이 있다. 특히 근대 이후 한국 사회는 미국에 대한 태도를 기준으로 갈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한말 이승만, 해방 이후 장택상, 조병옥 등 미국 유학파는 영토 욕심이 없는 미국을 믿어도 좋다고 보았지만 유길준[중립론, 1885]은 “미국은 우리의 위급함을 반드시 구해주는 우방으로 믿을 바 못 된다.”고 보았다. 유길준은 미국 유학 후 개화 역설했지만 윤치호와 달리 일제의 병합을 강력 반대했다. 유길준과 달리 개화파 지식인들과 그 후예들은 조선의 전통을 부끄러워하며 버려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개화파는 대부분 일제 때는 일본을, 8.15 이후에는 미국을 따라가는 것이 문명화라 생각했다.
일제 패망 이후 냉전이 시작되자 동아시아에서는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적과 나의 이분법적 구도로 이해되었다. 미국을 맹주로 하는 자본주의 진영은 곧 '문명'이고, 소련이 지도하는 공산주의 진영은 '야만'이었다. 이승만 정권 이후 지금까지의 한국 현대사는 사실상 미국 문화를 무비판적으로 수입해온 과정이었다.
미국식 자유 바람, 전쟁으로 인한 전통적 속박의 해체는 도시의 '욕망'을 폭발시켰다. 정비석의 소설 [자유부인]은 권력욕, 물욕, 성욕의 추구를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행동으로 인정했다. 정비석이 내세운 주인공 오선영에게 자유는 민주주의인 동시에 욕망의 추구였다. 한국인이 받아들인 미국 문화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8.15이후 미국이 천하제일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지자 예전에 중국을 바라보던 것처럼 미국을 바라보게 됐고, 중국 대신 미국에 사대하는 쪽으로 온 신경을 집중했다. 한국인들의 전통적인 '천하'관이 새로운 천하관으로 변해 국익을 제대로 따지지도 못한 채 일방적으로 미국을 추종하게 되었다.
리영희 교수는 스칼라피노 교수의 한마디 진단이 '신앙'처럼 숭상되고 있는 것이 한국의 언론기관, 정부, 지식인 사회의 실정이라 꼬집었다. 경제력이 커지고 민주화를 이룬 뒤에도 어떤 문제가 생기면 그 해법을 미국의 석학에게 묻고 그들의 논평을 매우 비중 있게 인용 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외국 유학은 곧 미국 유학이며, 언론에서 언급하는 외국도 주로 미국이다. 미국 유학을 해야 서울 주요 대학의 교수가 될 수 있고, 영어로 논문을 써야 인정을 받는다.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의 사회과학 분야 교수 633명 중 국내 학위자는 30명에 불과하다. 한국 정도의 경제 규모를 가진 나라들 가운데 이 정도로 문화와 학문의 사대주의에 빠진 나라는 찾기 어렵다. 문화와 학문의 사대주의는 언어의 사대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한국에서 영어는 출세를 위한 필수요소가 됐다. 영어를 배우는 목적은 단순히 세계어를 배우자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표준을 따르겠다는 말이다. 한국인에게 미국 유학 경력이나 영어 실력은 국제용이 아니라 국내용인 경우가 더 많다. 한국에서 영어는 곧 계급이다. 한국인은 영어 잘하는 사람을 부러워하고 못하면 열등감을 느낀다. 백인을 만나면 응당 미국인으로 생각하고 영어를 꺼낸다.
도전받는 '신화'
한국사회에서 '주한미군 철수' 구호는 정치적으로 여전히 금기다. 한국에서 반미는 곧 '용공'이었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공개적으로 미국을 비판할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미군 주둔 기지촌에서 미군에 의한 강간, 폭력 사건이 지속 발생하고, 양공주의 비애를 다룬 소설이 꾸준히 출간되면서 미국의 부정적 측면 부각되기 시작했다. 이 때 나온 소설은 남정현 [분지](미군 상사의 현지처 노릇을 하는 여동생의 도움으로 미제 물건을 팔던 청년 주인공), 천승세 [황구의 비명], 신상웅[분노의 일기], 전광용[꺼삐딴리], 조해일[아메리카] 등이 있다.
미국은 한국의 독재 정권을 일관되게 지지했고, 한국의 대통령들도 반공노선을 확고하게 하는 한 미국이 자신을 지지할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가진 미국은 80년 광주에 계엄군이 투입되어 시위대를 학살할 때도 신군부를 제지하지 않았다. 이후 그런 사실이 국민들에게 알려지면서 반미 의식이 고조되는 가장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당시 리처드 워커 전 주한 미국 대사는 “미국의 관심사는 북한의 동태 파악이었으며, 한국군의 이동에는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고 변명하며 진압에 투입된 특전사는 한미연합사의 작전지휘권 밖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제임스 릴리 대사 역시 연합사의 목적은 대북 관계이며, 5.18이 국제 문제와는 연관이 없으므로 미국이 학살을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비난은 비현실적이라고 말했다. 한국인은 이 사건을 통해서 미국이 자신의 이익에만 부합하면 독재 정권이라도 옹호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미국은 더 이상 대한민국의 민주화와 통일의 후원자가 아니라 방해 세력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86년에는 미국문화원 방화가 일어났다. 87년 민주화 운동 이후에는 주한 미군 반대, 즉 미군철수/감축운동, 기지반환운동, SOFA 개정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미국의 세계 전략이 철저하게 자국의 이익만을 위한 것이며 특히 동아시아에서 미국은 개화기 이래 대체로 일본을 편들면서 한국을 희생양으로 삼아왔다는 판단을 하기 시작했다.
국가 간의 힘이 극도로 불평등한 국제관계에서 약소국은 강대국에게 과도하게 집착할 수도 있고, 원망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강대국, 특히 세계를 움직이는 패권국은 바둑판의 돌을 움직이듯이 한 나라에 대한 정책을 결정하기 때문에 사실상 어떤 국가나 민족에 대해서도 특별히 적대적이거나 우호적이지 않다. 반면 약소국 사람들은 패권국가에 과도하게 매달리거나 격렬하게 증오를 표시하기도 한다. 집권 세력은 자신의 입지를 유지하는데 강대국의 지원이 필요하고, 집권층을 비판하는 입장에서는 그러한 외세 의존적인 태도가 못마땅하기 때문이다.
2. 왜 일본은 사과하지 않을까?_과거사/청구권/한일협정
독도는 누구의 땅일까?
국제법적으로 따져보면 독도의 영유권은 논란거리가 될 수 있다. 한일 독도 분재의 원인 제공자는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동아시아 질서를 만든 미국이었고, 역대 대한민국 정부도 그 책임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1949년, 일본의 국제사회 복귀 수준 논의를 위한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 준비된다. 영토 반환 문제에서 한국과 관련된 독도 반환 문제는 없었다. 주일 정치고문인 윌리암 시볼드의 역할로 49년 12월 삼부조정위원회 초안에는 독도가 일본령이었다. 51년 8월 딘 러스크 미 국무부 극동 담당 차관보가 독도는 일본 영토라는 내용이 담긴 서한을 양유찬 주미 한국대사에게 보낸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이토록 중요한 문제에 대해 미국에 공식적으로 항의하지 않았다. 결국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그렇게 조인된다. 제2조 a항은 "일본은 한국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비롯한 한국에 대한 일체의 권리와 소유권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고 명시된 채 52년 4월 29일 발효된다. 일본이 반환하기로 한 구식민지 영토 중에서 독도는 빠진 상태였다.
이후 독도 영유권 논란에서 미국은 과거 독도 문제에서 자신들이 일본의 손을 들어준 사실과 한국 정부가 그것에 항의하지 않았던 사실 등을 공개하지 않음으로써 한국 정부가 곤란에 빠지지 않게 배려해주었다. 한미 간에 무슨 뒷논의가 있었는지는 아직까지 알려진 바 없다. 박정희는 한일 정상화 과정에서 독도가 걸림돌이 되자 "한일 수교 협상에서 암초로 작용하는 독도를 폭파해 없애 버리고 싶다" 또 김종필은 독도의 관리를 제 3국에 맡기자고 제안한다.
역대 한국의 대통령들은 국민들을 향해서는 독도가 한국 땅이라고 큰소리를 치고, 심지어 이명박 대통령처럼 독도로 날아가는 쇼를 벌리기까지 했지만 실제로는 미국과 일본을 포함한 국제사회에 독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알리고 설득하는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이지는 않았다.
한국과 일본간 간의 독도, 일본과 러시아 간의 북방 섬들, 중국과 일본 간의 센카쿠 열도가 분쟁 지역으로 남게 된 데는 다분히 미국의 의도가 개입된 것으로 보인다. 일본 외교간 마고사키 우케르는 영국이 식민지에서 철수할 때 언제나 독립국들 사이에 분쟁의 씨앗을 남겨두던 수법과 같은 것이라 지적했다. 영국은 인도에서 철수하면서 카슈미르를 분쟁 지역으로 남겨 인도/파키스탄간 분쟁의 씨앗을 뿌려놓았다.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는 일본에게 식민지 지배의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태평양 전쟁의 책임을 물은 다음, 다시는 외국을 침략할 수 없는 평화국가로 만들어 국제 사회에 복귀시키는 것이었다. 일본은 물론 영국도 패전국 일본의 영토였다는 이유로 한국의 참가를 강력하게 거부했다. 한국정부는 주영공사 윤치창을 통해 영국을 설득하였으나 실패했다. 미국의 대일강화조약 특사는 일본 측에 한국의 참가를 예고했으나 요시다 시게루 총리는 한국이 연합국 지위를 얻게 될 경우 대부분 '좌익'인 재일조선인들로 인해서 일본에 큰 혼란이 올 것이라며 반대했다. 결국, 당사자인 한국의 의견은 무시한 채 이후의 한일 관계를 좌우할 중요한 내용이 결정되었다. 1948년 이후 남한 내부에서 갈등이 심화되고, 50년 6.25이후 남북한 간에 전쟁이 벌어지고 있을 때, 일본은 이후 연합국이 자기들에게 물을 배상 요구 등에 대비해서 철저하게 준비한 결과였다.
46년 6월, 조선상공회의소가 대일배상요구청원서를 미군정에 제출한다. 남조선 과도정부도 대일배상요구조건조사위원회를 만들었다. 48년 1월에는 다섯 가지 대일 배상 요구 항목을 결정해서 제출했다. 정부수립 이후, 대일배상청구위원회를 결성하여 대일 배상 요구액 24억 7,676만 달러 확정했다. 그러나 이후 전쟁의 포화 속에 묻히고 말았다. 6.25한국전쟁으로 서로 죽기 살기로 싸우는 바람에 대일 과거사 정리 문제에 관해 자기 발등을 찍은 셈이 됐다.
미국은 대소 방어를 위해 서둘러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 진행했다. 일본에 대한 징벌적인 조치를 취하려던 계획을 수정해서 일본을 '방공 십자군'으로 격상시키고 '자유'진영의 주요 파트너로 활용하는 쪽으로 전략 수정을 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통해 일본의 전쟁범죄를 단죄하기는 커녕 일본을 다시 살리려 했다. 미국은 민주주의 국가 간의 우호와 협력이라고 보면서 일본의 경제 회복과 자립을 최우선 순위에 두었다. 결국 이 회담을 통해 일본이 한국 등 주변 국가를 침략/지배한 일을 사과하거나 배상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졌다. 미국의 일본 편애를 우려한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의 팽창주의를 경계해야 한다고 경고했지만 북한의 침략으로 국가 존망의 기로에 놓여 미국의 거의 절대적인 지원을 받던 남한이 일본을 동아시아 자본주의의 보루로 만드려는 미국의 전략에 제동을 걸고, 일본의 과거 잘못에 대해 따지는 것은 가망 없는 일이었다.
1950년 2월 16일, 이승만 대통령은 도쿄 도착 성명에서 "성장하는 공산주의 팽창으로부터 일어나는 공통의 위험은 한국과 일본을 단결시켜야 하며, 과거의 적대는 망각되고 현재의 제 곤란이 해결되어야 한다. 반공이 가장 중요하다. 이를 위해 필요하면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적극 수용하겠다." 고 말했다. 또한 이승만은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지지한다고 밝혔고, 51년 1월 26일에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갖는다고 말했다. "공산주의라는 공적을 향해 한일이 단결하자."는 이승만의 성명은 일본 중심의 동북아시아 반공전선을 구축하려던 미국이 하고 싶었던 말을 대신한 것으로 이후 독도 문제나 식민지 배상 문제에서 한국의 입지를 결정적으로 악화시켰다.
남북한이 분단도 모자라 전쟁까지 벌이면서 결국 일본은 국제관계에서도,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6.25한국 전쟁은 일본 부활의 가장 중요한 계기였다. 우리는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우기는 일본에 분개하기 이전에, 패전국 일본 위에 군림하면서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틀을 짠 미국, 그리고 8.15이후 일제 잔재 청산을 유보하고 내전으로 돌입했던 우리 민족의 어리석음을 되돌아봐야 한다.
또다시, 공짜 점심은 없다.
신생국인 대한민국이 일본 등 이웃 나라에 위엄을 갖추고 발언권을 가지려면 무엇보다 내부의 식민지 유산을 청산하고, 특히 부일 협력 세력을 엄하게 처벌해 국가의 기본이 되는 정의를 수립했어야 했다. 그래야 일본에게 사과나 피해 배상을 요구할 수 있는 명분이 서고, 이후 관계를 회복해서 '좋은 이웃'으로 지낼 수 있기 때문이다.
6.25한국전쟁은 동아시아의 반공전선 구축 필요성, 즉 미국이 애초에 원했던 대로 일본과 한국을 다시 결속시킬 필요성을 환기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은 미국의 입장을 거스르면서 일본에 과거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과나 배상을 요구하기 어려웠다. 샌프란스시코 강화조약으로 과거 일본의 식민지였다가 일본의 항복으로 해방이 아닌 '분리'의 과정을 일차적으로 거친 나라들, 즉 일본제국이 주권을 '포기'한 지역에 대해서 일본은 어떤 배상도 할 의무도 없게 됐다. 일본의 배상은 필리핀, 베트남 등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과 맞서 싸운 공적이 인정되는 '연합국'에만 해당되는 것이므로, 연합국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에 초청받지 못한 한국과 타이완은 해당 사항이 없었다. 따지고 보면 미국이나 영국도 식민지를 경영한 제국주의 진영이었기 때문에, 일본에 식민통치의 책임을 지라고 말할 처지는 아니었다.
한국이 일본에게 배상을 요구하려면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과 강압성을 국제사회에 입증했어야 했다. 하지만 국제질서는 여전히 일본과 한편인 구제국주의 국가들이 좌우하고 있었기 때문에 설사 한국이 철저하게 준비를 했다고 해도 그 목소리는 전달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남북한 단독정부 수립, 한국전쟁,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은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에 따라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반공전선의 첨병인 한국 정부가 독자적으로 일본과 교섭할 여지는 아주 좁았다. 과거 제국주의였던 서방 국가들은 물론 한국인은 물론 구식민지 사람들이 갖고 있었던 민족적 분노나 굴욕감, 과거 식민통치에 대한 사과와 배상 요구를 이해할 수 없었다.
강화조약이 체결되면서 재일조선인들은 졸지에 일본에 불법 체류하는 신세가 되었다. 일본이 국민 총동원 시기의 피징용자들에 대한 [원호법]을 제정했을 때도 조선인은 일본 국적을 박탈당했기 때문에 보상에서 제외되었다. 조선인 출신 일본군과 군속들은 전선에서는 연합군에 잡혀 전범으로 처벌당하고, 일본 본토에서는 비국민으로 버려졌다.
일본은 미국이 확실히 자기편이라는 확신이 생기자 더 이상 조선지배에 대한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구보다 간이치로 한일협상단 수석대표는 53년, 10월 제3차 한일회담 재산 및 청구권 위원회에서 "일본은 조선에서 36년간 철도를 부설하고 항만을 건설했다." 면서 일제의 지배가 한국인에게 이익이었다고 말했다. "만약 한국이 피해 보상을 요구한다면 일본은 한국에 남겨놓은 온 자산의 반환을 요구하겠다."는 망언까지 쏟아냈다.
1957년 한일회담이 재개되었다. 일본은 8.15이후 조선 땅에 두고 온 30~40억 달러의 재산 반환 요구했으며 자민당 보수파나 대다수 정치가와 지식인들은 일본의 조선 병합이 도덕적으로는 문제가 있을 수 있으나 불법은 아니었다는 입장을 확고하게 취하고 있었다. 반면 이승만 정부는 강제 동원자들의 임금, 약탈해간 금과 문화재 등 총 80억 달러를 배상 요구했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는 강제병합의 불법성은 물론 징용, 징병으로 끌려간 사람들이 어떤 피해를 입었고, 몇 사람이 끌려가서 어느 정도의 임금을 받지 못했는지 등에 대한 자료를 준비하지 못했고, 또 그것을 근거로 협상을 진행할 능력도 갖추지 못했다. 이승만 정부가 이미 출발부터 독립운동가들을 배제하고, 자유당과 각료 거의 전원을 일제에 협력했던 사람들로 채운 상황에서 일본에 대해 위엄이나 외교력을 발휘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무책임한 한국 정부
61년 5.16군사쿠테다 후 한일 교섭 급물살을 탔다. 미국의 린든 존슨 대통령이 박정희에게 한일국교 정상화를 압박했고 야당 지도자 윤보선에게 미국의 입장이 전달되었다. 쿠테타로 집권했기 때문에 정통성이 취약했던 박정희 군사정권은 경제개발을 통해 민심을 얻고자 했다. 경제개발 할 자본이 필요했기에 결국 김종필-오히라 비밀 접촉을 통해 '청구권 지급'에 합의를 한다. 3억 달러 무상차관, 2억 달러 유상차관, 1억 달러 상업차관이 그것이었다. 이는 이후 한국인 피해자 개개인이 일본 정부나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해서 배상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완전히 막는 결과로 작동했다.
박정희 정권은 자신들의 정치적 필요와 국민들의 잘살고자 하는 열망에 편승하여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을 받아들였다. 당시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은 한국을 일본의 경제 성장을 위한 배우지, 하청기지로 편입하려는 것이었다. 한국 정부는 한일 관계에서 미래에 제기될 수도 있는 많은 미청산 과제를 깊이 검토할 여유도 없이 당장의 경제 개발 자금 확보에 목을 매달았다.
65년 6월 22일 마침내 한일협정이 체결되었다.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 관계에 관한 조약과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 해결과 경제 협력에 관한 협정 체결이었다. 일본은 5억 달러를 경제 개발 지원금 혹은 독립 축하금으로 인식했다. 한국은 청구권 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해석했다. 실제 5억 달러는 일본이 조선을 지배한 과거사를 일단락 짓는 의미였다.
청구권 자금이 제2~3차 경제개발계획에 유효적절하게 사용되는 등 경제발전에 기여(포항종합제철 성공)했지만 졸속 한일국교 정상화로 일제 식민지 체제하에서 한국인들이 입은 피해에 대한 보상은 한국 정부의 몫으로 남게 되었다. 재일동포의 법적 지위, 조선인 원폭 피해자, 사할린 동포 문제 등이 계속 제기되었으나 역대 한국 정권은 문제 해결에 매우 소극적이었고 회피로 일관했다.
87년 민주화 투쟁으로 군사정권 몰락, 89년 소련 동구 사회주의 붕괴되면서 국제적으로 냉전이 종식되자 한국에서는 대일 과거사 문제 제기와 함께 일본의 사과와 배상 요구가 커졌다. 93년 8월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이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에 대한 일본군의 책임 인정했고,
95년 8월 15일 무라야마 도미이치 수상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 아시아 사람들에게 손해와 고통을 주었다는 담화 발표까지 이끌어 냈다. 그러나 일본은 이후 태도를 바꾼다. 일제 말 전시 상황에서 위안소를 설치하고 강제로 조선인 여성을 위안부로 동원한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 민간업자가 이들의 동원에 개입한 점을 강조하며 국가 차원의 책임을 부인하고 나섰다. 65년 한일협정으로 이 문제가 일단락됐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한국 정부는 일본 정치가들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발언들, 한국인에 대한 무시 폄하 발언들, 그리고 과거사에 대한 부인을 제대로 비판하기보다는 3.1절이나 8.15 때 연례행사처럼 엄포를 놓는 정도로 그쳤다.
위안부 할머니와 강제 동원 피해자 가족들은 한일협정 때 받은 돈으로 경제가 발전했는데 강제 동원 희생자를 기리는 추모 시설이나 이들이 겪은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시설 마련에 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요구했다. 2004년 노무현 정부가 강제동원위원회 등 대일 과거사 청산을 위한 여러 개의 정부기구를 구성했고, 정부 차원의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강제 동원자들에 대한 보상을 실시하는 등 약간의 진전이 있었다.
일본은 식민지 지배 등 과거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전혀 최책감을 느끼지 않으며 과거사에 대한 사과와 배상을 거부하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물론 피해자인 한국조차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을 주장하지 않는 상황에서 일본으로서는 당연한 태도일 것이다.
일본의 친한파는 누구인가?
한일국교 정상화 이후 한일 간의 경제 교류는 일본 제국주의 전범, 극우 세력과 한국인 파트너가 새롭게 유착하는 과정이다. 한일회담 한국측 담당은 일제강점기 경찰로 부역하면서 징용자들의 저항을 밀고한 김동조였다. 그는 초대 주일 한국대사로 부임한 이후 일본 정치가들에게 뇌물을 제공했다. 친한파로 알려진 기시 노부스케나 수상, 사사카와 료이치 일반진흥회 회장은 전범들이었다. 이러한 전범들이 전후 친미, 반공 인사로 변신한 뒤 한일 국교 정상화의 막후에서 실력 행사했다. 사사카와는 한국 학자들의 연구를 지원하는 재단을 설립했다. 95년 송자 연세대 총장은 한일수교 30주년 기념 한일협력기금 75억 달러를 받아 아시아연구기금이란 이름으로 교수들의 연구활동을 지원했다.
일본 경제계의 실력자 세지마 류조는 65년 한일회담, 83년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의 방한 등 한일 외교사의 중요한 고비 때마다 막후에서 활약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만주군으로 참전했던 그는 박정희의 직속 상관이었다. 박정희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바로 류조였다. 그는 한국의 식민지화를 당연한 조치였다고 주장하며 태평양전쟁을 자위전쟁으로 규정했다. 이후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군사정권에 두루 실력을 행사했으며 일본 상공회의소 특별고문 등의 직함을 달고 청와대를 무려 15번이나 방문했다.
일본의 친한파 인사들 대부분은 과거 일제의 주변 국가 침략을 정당화하는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을 후원하거나 그 일원으로 적극 활동한 극우 인사들이다. 일본의 전쟁범죄 세력은 60년대 이후 한/미/일을 연결하는 반공 연맹의 주역이자 친한파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한국인을 가장 멸시한 사람들이었다.
일본 우익 정치 지도자들은 식민지 지배가 한국의 발전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는 망언을 계속 토해낸다. 1945년 일본의 항복이 조선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고 보며, 중국에 대해서는 약간의 죄의식이 있지만, 한국에 대해서는 거의 그런 생각이 없다. 그들은 문선명이 67년 세계반공연맹, 68년 국제승공연합 창설할 때, 반공이라는 끈으로 모두 발기인에 참여했다.
2005년 CIA 극비문서에 의하면 사사카와, 극우세력의 거두 고다마 요시오, 요미우리신문 사장 쇼리키 마쓰타로, 기시 노부스케 전 수상 등이 북한과 중국에 대한 정보수집과 일본공산당에 대한 감시/견제 활동을 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1948년 도조 히데키가 처형된 다음 날 모두 불기소 처분으로 석방되어 미국의 반공 정책에 협력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반공 연대를 위해 재일조선인, 조선인 강제 동원자, 위안부 여성들, 원폭 피해자 등 일제 식민지 지배의 피해자들의 문제가 묻히고 말았다. 특히, 재일조선인을 국적 없는 난민으로 만든 것은 남북한의 분단이고 이승만 정부였지만, 박정희/전두환 정부는 그들에게 대한민국에 충성할 것을 요구하고 다른 한편으로 공산주의가 합법화된 나라인 일본에 살았고 북한과 내왕을 했다는 이유로 사찰/감시를 하거나 때로 간첩으로 몰았다.
한일 관계에 대해 역대 대통령들은 일본 수상들의 망언이나 과거사 부인에 대해 공격적인 성명을 내기는 했으나, 그것은 한국 국민들의 상처와 민족주의 정서를 정치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제스처에 가까운 것이었다. 대일 과거사를 덮어두는 정책을 택한 것은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의 틀을 거역할 수 없었고, 또 그럴 의지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1951년 이후의 대일 협상에서 한국 정부가 식민지배에 대한 피해 보상을 일본에 공식적으로 요구한 적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한일 관계는 언제나 국내용과 대외용이 따로 존재했다. 일본과의 과거사 정리 문제는 미국의 의중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한국 입장에선 처음부터 이룰 수 없는 과제였는지 모른다.
한일 우호의 주역인 기시 등 일본의 지도자들은 과거 일본 제국주의를 앞세워서 아시아를 침략했던 사람들이며, 그들과 친했던 한국인들은 박정희 등 대한민국의 최고 권력자들이었다. 대일 과거사 문제가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채 남은 이유는 일차적으로 미국의 정책과 반성 없는 일본 탓이지만 역대 한국 대통령과 정치가들이 자초한 부분도 있다.
일본은 강제병합 100년을 2년 앞둔 2008년 부터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작업을 진행중이다. 당시 이명박 정부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한국의 자본주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뉴라이트 지식인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하거나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8.15를 건국절로 바꾸고 교과서를 개편하려 했다. 또 2015년, 아베가 패전 70주년 담화에서 "전쟁 속에서 명예에 깊은 상처를 입은 여성들이 있다.", "힘에 의한 곤궁의 타개를 시도했다."며 애둘러 표현하며 위안부 문제와 조선과 중국을 침략했다는 점을 피해가려 했다. 이에 당시 박근혜 정부는 "사죄와 반성을 근간으로 한 역대 내각의 입장이 앞으로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국제사회에 분명하게 밝힌 점을 주목한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군국주의 침략전쟁에 대한 진정한 사과를 하라"고 촉구했고 일본 언론도 비판하는 아베의 담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한국 대통령의 광복절 발언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