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화
- 류시원
텔레비전을 본다
텔레비전 한 귀퉁이 조그만 창을 내어
수화로 이야기하는 사람을 본다
수화란 어떤 말의 번역이 아니라
미처 할 수 없었던 말의 번역이 아닐까
문득 날개를 치며 솟아오르거나 급선회하는 새들
느닷없이 피어있는 길가의 꽃
급박하게 휘어진 조그만 골목
그리고 미처 다 듣지 못했던 당신의 이야기
그것이 수화인 줄도 몰랐던
조그만 손짓들
지금은 까마득하기만 한,
그러나 여전히 알 수 없는.
희미한 다리
- 류시원
내 육체는, 내 마음은 풀잎과 구름과 염소와 당나귀와 바람과 꽃과 안개와 소의 뿔과… 이런 것들의 살로 된 게 아닐지 그렇지 않고서야 내 마음이 어찌 이토록 그들을 아는 체한단 말인가 새벽거리엔 어제의 슬픔 가득 떠올라 안개 자욱하다 내 마음에도 안개 자욱히 일어난다 그들의 살이 날 자욱히 채워오듯 내 죽으면 내 살들이 그들의 얼마쯤을 채우리라 웅크리다 돌이 되어버린 마음들, 안에서 바깥으로 길을 내고 싶어하는 마음이 오늘 아침, 강을 헤치고 번쩍거리며 떠오른다
왜 동물은 동물이고 식물은 왜 식물인가. 인간은 왜 인간이고 돌멩이는 왜 돌멩이인가. 우리는 모두 별의 자식, 어머니 우주의 한 형제이니 모든 경계는 모조리 지워져야 마땅하리라. 어제 내가 먹은 상추가 내 살이 되고 내일의 내 살은 썩어 배추가 될 것이니, 너와 나는 이제 저 ‘희미한 다리’로 오가야 마땅하리라.
바다로 가는 먼 길 1
- 류시원
구름 몇 남겨두고 태양이 서서히 산을 넘어갑니다 떠 있기엔 너무 두려운 시간입니다 아이스크림이나 추억의 팝송이나 철판구이 대신에 시린 별들의 머리칼에 꽁꽁 묶인 채 떠가야 하는 캄캄한 바다 앞입니다 두려워진 사람들은 서둘러 바다를 씻어내고 팽팽히 부푼 튜브의 꿈들도 빼버리고 팔과 다리와 머리들을 차곡차곡 배낭에 재어 넣습니다 맹물로 씻은 마음들 바다를 여관방같이 닫고 돌아갑니다
물새들이 내려꽂히는 바다, 파도와 신병(新兵)같은 생선들이 푸른 등으로 솟구치는 바다, 두고 간 그림자들이 잠들지도 않고 내내 파도가 되는 바다, 잠들 수 없는 바다
바다를 묻혀가기엔 육지는 너무 가파릅니다 가파른 언덕을 헉헉거리며 오르고 나면 바다는 지나온 모래 발자국 속에 깊이 숨어 버리고 어두워지는 먼 길만 땀 속에 가물거리며 시작되고 있습니다 긴 그림자의 끝에서 누군가 얹혀오는지 난 조금씩 어깨가 기울고 가로수 이파리 사이로 파도치는 소리 들립니다 누군가 마당 건너고 창문 건너와 먼지 가득한 책장 밑까지 달빛으로 넘실댑니다
달빛은 사물들의 몸 속 가파른 길을 하얗게 더듬으며 하늘로 올라갑니다 내 육체에도 찾아와 차오르는 달빛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새어나올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