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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수에서 진산(鎭山) 중요시 여기는 것은 종법宗法주의의 소산… ‘태조산→중조산→소조산(진산)→소조산(주산/부모산)→혈처’
⊙ 중국에서는 풍수 소품으로서 “첫째가 옥, 둘째가 수정(一玉二水晶)”
⊙ 서양에서는 자수정은 숙취 해소, 오팔은 시력, 토파즈는 불면증 치료에 좋다고 믿어
김두규
1960년생. 한국외국어대 독일어과 졸업, 독일 뮌스터대 독문학·중국학·사회학 박사 / 전라북도 도시계획심의위원, 신행정수도건설추진위원회 자문위원,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추진위원회 자문위원,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역임. 현 우석대 교양학부 교수 / 《조선풍수학인의 생애와 논쟁》 《우리 풍수 이야기》《풍수학사전》 《풍수강의》 《조선풍수, 일본을 논하다》 《국운풍수》 등 출간
보석산업의 발달과 소비는 풍수 및 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1975년 박정희 대통령은 익산(이리)에 보석가공단지를 만들게 하였다. 외국의 보석 원석(原石)을 수입하여 가공 후 수출하여 외화벌이를 하자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박 대통령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당시 매달 개최되는 ‘수출진흥확대회의’에서 ‘벨기에는 작은 박스 하나에 다이아몬드를 넣어 1억 달러를 수출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고무신·김·광물 등을 다 수출해도 1억 달러가 안 된다’는 상공부 관계자의 보고를 받고서였다.”(강승기 한국다아아몬드거래소 대표)
여기서 언급되는 ‘벨기에’는 벨기에의 작은 도시 앙베르(Anvers; 영어 Antwerp)를 의미한다. 앙베르는 지금까지 500년 넘게 세계 최대 다이아몬드 거래 중심지로 자리 잡고 있다. 앙베르에서 보석 원석이 생산되는 것도 아니었는데, 이렇게 보석의 메카가 된 것은 사연이 있다. 1477년 앙베르 시장은 다음과 같은 법령을 발표한다. “누구든지 다이아몬드·루비·에메랄드·사파이어 등의 모조품을 거래해서는 안 되며 또한 그것을 저당 잡히거나 양도할 수 없다.”
‘짝퉁’ 보석의 창궐을 막고 진품 보석으로 앙베르의 명성을 키워 나가기 위해서였다. 앙베르는 보석 원석의 산지(産地)가 아니었다. 원석 산지는 유럽이 아닌 아프리카·아시아·아메리카였다. 앙베르는 보석 가공과 유통 및 수출에 관한 한 유럽의 중심지가 됨과 동시에 유럽 경제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상인들이 이 도시에 들어와 자리 잡기 시작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익산(이리)에 보석단지를 세우게 한 1차적 목적은 ‘한국의 앙베르’로 만들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박 대통령 서거 이후 유야무야되어 지금까지 익산의 보석단지는 근근이 연명하고 있다. 이후 한국 보석 가공의 85%가 서울 종로의 보석거리에서 이루어지며, 아시아에서는 태국이 보석의 집산과 유통의 메카가 되었다. 익산 보석단지가 활성화하지 못한 데에는 “순수하게 보석을 수입·가공·수출하는 업자들 이외에 제3의 불순세력이 보석 사업에 끼어들면서 위협을 느낀 보석업자들이 떠나게 된 것도 하나의 요인”이라고 김수정 학예연구사(익산보석박물관)는 말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익산을 ‘한국의 앙베르’로 만들고자 하였던 구상은 천재적 발상이었다. 금년 2월 초 최수규 중소벤처기업부 차관이 익산보석단지에 들러 관심을 보였지만, 박정희 대통령처럼 세계보석가공의 메카로서 이곳을 키울 정도의 관심이 아니라 ‘일자리 안정자금 현장 홍보와 신청을 독려’하는 차원이었다. 아쉬운 부분이다.
보석에는 수많은 종류가 있지만, 금·은·옥·자수정 말고는 우리 민족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듯 보인다. 그럴까?
보석 산업은 그 나라 풍수관에 따라 좌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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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에 깊은 조예를 갖고 있는 오윤선 호림박물관장은 말한다. “개성 여인들이 보석에 대해 깊은 이해와 안목을 갖고 있다.”
왜 한양 여인이 아닌 개성 여인일까? 도읍지를 개성으로 했던 고려는 국제무역 국가였다. 또 원(元)나라 공주들이 고려왕실로 시집을 오면서 공주뿐만 아니라 수행원들이 가져온 사치스러운 문물들 가운데 보석이 빠질 리 없었다. 고려가 망한 지 몇 백 년이 지났지만 그 후예들에게 보석문화가 희미하게나마 전승된 까닭이다.
더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 고려와 조선의 풍수관의 현격한 차이 때문이다. 고려와 조선은 공인 풍수서적이 각각 9개 풍수고전을 활용한 점은 같았으나 그 책 내용은 전혀 달랐다(2017년 《월간조선》 7월호 〈계급독재와 조선의 풍수〉에 소개). 이렇게 풍수고시 과목이 달랐던 것은 국교(불교vs유교)·사회경제체제·정치상황이 달랐기 때문이다. 불교가 국교(國敎)였던 고려에서는 절과 부처상(금동불)을 치장하기 위한 화려한 보석들이 많이 요구되었던 반면, 유교를 국교로 하던 조선에서는 사치행위를 금하여, 겨우 기생들이나 보석을 공개적으로 패용할 정도였다.
고려왕조에서는 산보다는 물을 중시하는 ‘주수(主水)’ 관념이 강하였다. “고려 창업 주축 인물인 왕건·복지겸·왕규·홍유·윤신달 등이 서해로 이어지는 주요 강들(예성강·임진강·한강·영산강)과 중국과의 해상 무역항들의 거점세력”(윤명철 동국대 교수·역사학)이었던 것과도 관련이 있다. 건국 주체가 해상세력이었던 고려 전성기 때는 중국뿐만 아니라 멀리 아라비아와 무역교류를 하여 문자 그대로 국제 해상국가였다. 당연히 휘황찬란한 보석들과 장신구들이 고려의 여인들에게 파고들었다. 고려의 수도 개경은 번화한 국제도시였음을 충분히 짐작게 한다.
반면에 조선은 국초부터 명(明)나라 ‘조공품 금·은[金銀貢]’을 피하기 위하여 “금은은 본국의 생산품이 아니니 진상품 중 금은을 토산물로 대체해 줄 것”을 반복적으로 명나라에 요구한다(태종·세종·성종). 이러한 과정에서 금은의 채굴과 유통이 억제된다. “이로 인해 귀금속의 제련·가공기술이 후퇴하였고, 장신구 공예 발달에 커다란 장애 요소가 되었으며, 그 이전부터 내려오던 목걸이·귀걸이·팔찌 패용 습관은 사라졌다.”(김수정, 익산보석박물관 학예사연구사)
우리 민족의 보석과의 깊은 관계는 중국에서조차 잘 알려진 사실이다. 《삼국지》 〈위서(魏書)〉에 ‘옥구슬을 재물과 보화로 삼았다(以瓔珠爲財寶)’는 대목이 있다. 실제로 4세기 이전의 고분에서 곡옥·다면옥·관옥·환옥·소옥 등 다양한 형태의 옥(玉)과 유리·수정·마노·호박·비취 등 보석이 삼한시대 고분에서 출토되었다. (이송란: 《신라 금속공예 연구》)
종법주의와 풍수
전북 익산귀금속보석공업단지. 박정희 대통령이 만들었다. |
보석이 우리 민족에게서 사라진 것은 명나라에 금은을 진상하지 않으려는 정책도 한몫하지만, 더 본질적인 이유가 있었다. 조선왕조는 본질적으로 농경사회와 유교를 바탕으로 통치되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제 계급은 공업과 상업의 발전을 차단하였고, 유가의 잘못된 종법(宗法)주의가 인간과 사회에뿐만 아니라 자연체계에도 강제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산을 중시하는 ‘진산(鎭山)관념’이다.
고려의 지리를 다룬 《고려사》 〈지리지〉에는 진산 개념이 없었다. ‘진산’이 표기된 곳은 딱 두 군데이다. 고려의 왕도 개경의 송악산과 제주의 한라산이다. 그 이외에는 진산을 소개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전혀 엉뚱한 현상이 벌어지는데, 모든 고을에 진산이 설정되고 신성시된다. 16세기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소개된 조선의 행정구역 320여 개 고을 가운데에서 250개 이상의 고을이 ‘진산’을 갖고 있는 것으로 기록된다. 왜 유독 조선왕조에서만 각 고을의 진산 개념이 크게 부각된 것일까?
풍수지리를 수용한 점에서는 고려나 조선이 모두 같았지만, 고려는 통치과정에서 풍수지리의 진산을 활용할 필요가 없었고, 조선은 진산을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었다.
종족 내에서 적장자(嫡長子)가 대종(大宗)이 되어 종가(宗家)를 형성하고 문중을 대표하는 종법제도는 임금을 정점으로 수직적 봉건 지배질서를 가능케 하였다. 임금→제후→사대부→백성의 신분관계와 시조→중시조-할아버지→아버지→나로 이어지는 혈연관계나 태조산→중조산→소조산(진산)→소조산(주산/부모산)→혈처로 이어지는 구조가 같다. 유교를 국가 이데올로기로 활용한 조선으로서는 나라에는 임금이 있고 집안에는 종손이 있듯, 그가 사는 고을에는 진산(주산)이 있어 다른 주변의 산을 지배해야 한다는 관념은 당연한 것이었다. 심지어 고려에서 개경의 송악산과 더불어 유일한 진산 자격을 갖던 제주의 한라산은 백두산의 말단에 편입된다. 이렇게 산을 중시하는 조선은 위계적·폐쇄적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공식적으로 조선은 바다활동을 금하고 섬을 비우는 ‘해금공도(海禁空島)’ 정책을 펼친다. 바다 건너에서 보석이 들어올 수도 없었고, 상업을 무시하고 농업만 중시하던 조선에서 보석은 자취를 감출 수밖에 없었다.
‘산을 중시[主山]할 것인가 물을 중시[主水]할 것인가’에 따라 그 나라의 운명이 달라진다. 물은 재물을 주관하고[水主財], 산은 인물을 주관한다[山主人]는 풍수격언에서 보면 당연 고려와 고려의 여인들이 더 풍성한 부와 보석의 혜택을 누렸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보석 산업이 발달하지 못했던 역사적 원인(遠因)이 이와 같았다. 또 한 번의 기회, 즉 박정희 대통령의 ‘익산(이리)보석단지’ 프로젝트가 제대로 이행되지 못한 것 역시 아쉬운 일이다.
보석과 풍수
자수정과 백수정. 수정은 가정을 복되게 하고 재물을 번성케 한다고 한다. |
보석과 풍수는 어떤 관련이 있는가? 조선왕조 풍수학 고시과목 《탁옥부》는 보석과 길지와의 상관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성하게 숲이 이루어졌으면 그 아래에 금은보화[金寶]가 있고, 땅에서 많은 구름이 서리와 눈처럼 솟아오르면 그 아래에 보석과 옥[珠玉]이 있다(森森而林, 下有金寶. 地多霧起如霜雪, 下有珠玉).”
그런데 《탁옥부》의 다음 문장이 의미심장하다. “터가 감추고 있는 것 중에서 어떤 것이 좋은가? 구슬과 옥(珠玉)이 최고이며 … 옛 도장·칼·그릇 등이 묻힌 땅은 오품의 벼슬을 배출한다(基之所藏何物乃祥. 珠玉爲上 … 古印劒器五品官方).”
마지막 문장 ‘옛날 명품이 묻힌 땅도 좋다’인데, 그곳이 한때 흥성하였다가 망하여 매몰된 곳일 수도 있고, 그러한 명품이 그 땅과 매매와 유통과 같은 인연을 맺은 곳일 수도 있다. 비록 보석의 원산지가 아닐지라도 그 땅이 명품들과 인연을 맺었다면 좋은 땅이라는 논리다. 풍수에서 말하는 비보(裨補)풍수이다. 좋은 명품들을 들여다 놓으면 그곳이 길지(吉地)가 된다는 주장이다.
보석과 풍수와의 상관관계를 좀 더 구체적으로 밝힌 조선조 풍수학 고시과목이 《장서(금낭경)》이다. 풍수에서 좋은 기가 뭉친 곳을 혈(穴)이라고 한다. 혈을 중심으로 사방의 산이 감싸고 그 사이에 물이 흐른다. 이러한 땅을 흔히 길지라고 한다. 길지에는 여러 특징들이 구비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혈토(穴土)이다. 《장서(금낭경)》는 〈혈토는 고우면서도 단단해야 하고, 윤기가 흐르되 질지 않아야 하고, 지방을 자른 듯, 옥을 간 듯해야 하고 다섯 빛깔을 갖춰야 한다〉고 하였다. 이 문장에 대해 중국 《사고전서(四庫全書)》에 수록된《장서(금낭경)》 주석본은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덧붙인다.
〈오행(五行)의 기(氣)가 땅속으로 다니면서 금(金)의 기가 응결한 것은 흰색이고, 목(木)의 기가 응결한 것은 푸른색이며, 화(火)의 기는 빨간색이고, 토(土)의 기는 노란색이 되는데, 이 넷은 모두 좋은 빛깔이다. … 오행상 노란색은 토색(土色)이므로, 또한 순전히 노란색만으로 된 흙도 길하다. 토산에 맺힌 석혈(石穴)에서는 금과 옥 같은 것, 상아 같은 흙, 용뇌(龍腦)·산호(珊瑚)·호박(琥珀)·마노(瑪瑙)·거거(車渠)·주사(朱砂)·자분화(紫粉花)·세석고(細石膏)·수정·운모(雲母)·우여량(禹餘糧)·석중황(石中黃)·자수정(紫水晶) 같은 것, 돌 속에 사슬 같은 무늬가 있는 것, 빈랑(檳榔) 무늬가 있는 것, 오색을 갖춘 것 등으로, 이들은 모두 사각사각하면서 부드럽게 윤이 나서 돌 같으면서 돌이 아닌 혈토(穴土)들이다. 석산(石山)에 맺힌 토혈(土穴)에서는 용간(龍肝)·봉수(鳳髓)·성혈(猩血)·해고(蟹膏)·산옥(散玉)·적금(滴金)·사인(絲紉)·누취(縷翠)·유금황(柳金黃)·추다갈(秋茶褐) 등과 같은 것이 있다.”
보석에 잠재된 힘
이러한 언술은 당시 풍수사들이 땅의 기에 따라 다른 보석이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조선왕조에서 보석을 애써 외면한 까닭에 보석문화가 발달하지 못한 반면, 중국·일본·인도·유럽에서는 보석과 풍수는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그 문화가 발전된다.
중국에서는 풍수 소품으로서 “첫째가 옥, 둘째가 수정(一玉二水晶)”이라고 말한다. 옥은 장식용뿐만 아니라 귀신퇴치·진정작용·질병치료·미용 등에 효과가 있다고 믿어 “사람이 옥을 기르고, 옥이 사람을 기른다(人養玉,玉養人)”거나 “몸에 옥을 두면 재앙도 복으로 바뀐다(身上有玉,化禍爲福)”는 격언이 생겨난다. 수정은 복된 집[福宅]을 만들어 주고 재물을 번성케 한다[旺財]고 믿어져 다양한 종류의 수정들(자수정·홍수정·녹수정·황수정)이 활용된다.
중국뿐만 아니라 최근 서양에서도 풍수 차원의 보석 활용이 생활화되고 있다. 미국의 건축·인테리어 디자이너 소린 밸브스가 최근 출간한 《영혼의 공간(soulspace)》(2011)은 집안을 번창할 수 있게 하려면 자수정이나 석영 원석 같은 것을 집 안에 놓아 두라고 권한다.
왜 그럴까? 독일인 실내건축가 바바라 아르츠뮐러가 쓴 풍수서 《영혼의 거울로서 우리 집》(2015)이 이를 설명하고 있다. 〈보석들은 땅 속 깊은 곳에서 생겨난다. 그것들이 지표면으로 나와 빛에 쪼이면 비로소 그 보석들이 갖고 있는 강력한 힘들이 발산되기 시작한다. … 인간들은 질병치료와 장식으로 보석들을 활용하고자 한 시도들은 옳은 행동이었다. 왜냐하면 보석들 속에 잠재된 힘들이 실제로 인간에게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일본의 가호우 세이주(華寶世珠)는 자신의 저서 《다이아몬드 풍수》(2017)에서 “다이아몬드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돌로서 연애·사업·금전·미용·건강운을 향상시켜 준다”면서 결혼반지로 선물 받은 다이아몬드를 장롱 깊숙한 곳에 처박아 두지 말고 적극 패용하여 개인과 가족 그리고 온 나라가 함께 행복하자고 역설한다. 이슬람권인 아랍의 민간 의술에서도 “완전한 돌인 다이아몬드가 육체와 마음의 모든 질병을 치료한다”고 말한다. 동서고금과 종교의 차이를 초월하여 보석이 갖는 힘을 인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보석으로 질병치유
보석치유론을 주장한 힐데가르트 수녀. |
보석 패용이 인간의 운명을 향상시켜 준다는 관념뿐만 아니라 그것이 질병치료에 효과가 있다는 속설(俗說)은 동서양의 오랜 전통이다. 중세 독일에 힐데가르트 폰 빙엔(1098~1179)이라고 하는 수녀가 있었다. 신학·의학·음악 등 다방면에 박학다식하였던 그녀는 공식적으로 성인품(聖人品)에 들지는 못했지만 지금도 독일에서는 성녀(聖女)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그녀가 남긴 글 가운데 〈보석을 이용한 질병치료(Steinheilkunde)〉는 지금까지도 주요 고전이 되고 있다. 그런데 그녀의 ‘보석치료’론은 그 출발점이 신학에서 시작하지만 풍수에서 말하는 동기감응과 흡사하다. 그녀는 말한다.
“하느님은 보석이 갖는 빛과 힘들을 헛되이 버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땅 위에서 보석들이 치료의 목적으로 봉사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보석들은 대개 땅 속 깊은 곳에서 강력한 압력이나 충격에 의해 만들어지는데, 이때 보석들은 특정한 진동(Schwingung)을 얻게 되며, 이러한 특정 진동은 다시금 다른 사물(사람)에게 전이될 수 있다는 것이 그녀의 지론이다. 보석의 에너지 파장이 피부와의 접촉을 통해 패용자의 에너지 흐름에 작용하여, 보석마다 갖는 특정한 에너지가 인간의 질병치료에 이용 가능하다는 것이다. 단순히 육체 질병뿐만 아니라 정신 또는 영혼의 상태에도 효능을 끼친다고 하였다. 힐데가르트의 이러한 지론은 현대 독일의 대체요법(자연치유를 주장하는 이론)을 주장하는 슈바이카르트(J. Schweikart)에 의해 수정·보완되어 지금도 소개되고 있다. 이 둘의 주장 가운데 대표적인 것 몇 가지를 비교하여 소개하면 표1)과 같다.
힐데가르트의 보석치유론 말고도 전통적으로 유럽에서는 보석의 신비력에 대해 다양한 견해들이 전해진다. 예컨대 자수정을 몸에 지니고 있으면 아무리 술을 많이 마셔도 취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신을 맑고 편안하게 해 준다는 속설이 있었다. 자수정으로 만든 와인 잔이 유행하거나 귀중한 선물로 주고받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자수정에 관한 한 우리나라도 세계적인 산지이다. 설악산과 속리산 등 백두대간 줄기를 따라 여러 군데 자수정 광맥이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설악산에 케이블카를 설치하여 관광객을 유치하는 것보다 설악산 자체가 품고 있는 자수정으로 인해 분출되는 땅기운이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더 좋은 기운을 줄 것이다. 케이블카를 설치하면서 환경을 파괴하는 것보다 설악산 자체를 활용하는 것이 장기적 국운에 도움을 준다. 풍수가 끊임없이 환경파괴를 반대하고 그 보존과 활용을 주장하는 것은 이와 같은 까닭에서이다.
오팔(opal)은 시력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그것을 패용하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아이 스톤(eye stone·눈의 돌)’이란 별명이 생겨났다. 대도(大盜)들이 ‘거사’를 감행할 때 오팔을 패용하였다. 토파즈(topaz)도 오팔과 비슷한 힘을 준다고 믿어졌다. 또 위급상황에서 토파즈를 지니면 투명인간이 될 뿐만 아니라 더 강한 힘을 준다는 속설이 있어서 군인·기사들이 좋아했다. 물론 가난한 군인들이 패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귀족 출신들의 고급장교나 기사들이 패용하였다. 더 나아가 독이 든 음식물을 갖다 대면 음식물이 변색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토파즈는 불면증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하여 잠 못 이루는 귀부인들이 즐겨 패용하였다.
‘보석의 여왕’으로 불리는 진주는 위장·심장병 등에 좋다고 알려졌다. 그러한 까닭에 청나라의 마지막 권력자 서태후(1835-1908)는 진주를 갈아서 갓 출산한 산모의 젖과 함께 상복하였다. 그 덕분인지 70이 넘은 나이에도 그녀의 피부는 40대 여인과 같았다고 한다. 호박의 경우 간질·중풍·후두염을 예방해 준다는 속설이 있다. 중풍을 두려워하는 유럽의 노귀족들이 선호하였을 것이다. 우리의 한복 마고자·조끼 단추에 호박이 사용되는 것도 이와 유사한 관념이다.
한국의 보석 수용과 풍수
전북 익산에 있는 보석박물관. |
한국의 보석시장이나 풍수시장을 보면 매우 유사하다는 생각이다. 풍수의 경우, 조선왕조의 풍수 패러다임을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부동산업자 시절 풍수를 자신의 사업에 적극 수용하여 크게 성공한 것과 같은 방식의 공격적인 확장 응용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2018년 1월호 《월간조선》에 소개). 한국의 보석시장도 마찬가지이다. 늘 ‘사치품목’과 ‘밀수’라는 부정적 단어와 연계되어 있다.
보석산업이 미래 한국 발전의 견인차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하는 강승기 대표는 말한다.
“보석산업은 미래 성장산업이 될 수 있다. 도심산업이면서도 친환경적이며 무한한 부가가치 창출이 가능하며 그 미래 시장은 국내가 아닌 인도와 중국이라는 큰 시장이 될 수 있다.”
한류를 더욱더 고급화할 수 있는 것이 보석산업이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에서도 보석을 사치품이라는 편견을 버리고 새로운 접근을 해야 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추진하였던 것처럼 다시 한번 원석을 수입하여 이를 가공 후 중국과 인도라는 큰 시장을 공략한다면 아직도 승산이 있다. 정확한 통계가 잡히지 않으나 현재 우리나라 보석시장은 20조~40조원으로 추정된다. 이를 양성화하면 국가 세수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보석시장의 활성화가 절로 된다. 한국인들의 보석 디자인 및 세공 솜씨는 세계적인데 이를 사장시키고 있는 것은 안타깝다. 대통령 부인과 사회지도층 여성들의 보석 패용을 단순히 사치품으로 비난하지 말고, 새로운 패션 창출이라고 적극 권장하는 풍토가 되어야 진정 우리나라가 세계 부국이 될 수 있다.
풍수 고전 《의룡경》은 〈한 나라의 흥망성쇠에는 진실로 때가 있으며, 산천 또한 땅기운을 모으는데도 때가 있다(盛衰長短固有時. 亦是山川積氣圍)〉고 말한다. 땅에도 흥망성쇠가 있다는 주장인데, 그러한 〈산천을 마름질하는 것은 사람에게 있다(山川之裁成在人)〉는 것이 또 다른 풍수서 《발미론》의 주장이다. 이를 간결하게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곳에 꿀을 발라 놓으면 벌들이 모여들지만, 변(便)을 발라 놓으면 파리가 꼬이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