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안셀무스(Anselmus, 또는 안셀모)는 1033년 겨울 이탈리아 북부 아오스타(Aosta)의 한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15살 되던 해에 수도원에 입회하려고 했으나 정치가가 되기를 바라는 부친의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1056년 어머니가 사망한 후 그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클뤼니 수도원과 프랑스 동부 부르고뉴(Bourgogne) 지방의 유명한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러던 중 1059년에 위대한 스승 란프랑쿠스(Lanfrancus Cantuariensis, 1005~1089년)의 명성을 듣고 그가 원장으로 있는 노르망디(Normandie) 지방 베크(Bec)의 베네딕토회 수도원 학교에 들어갔다. 란프랑쿠스 수도원장은 당시 지나치게 논리학을 강조하던 변증론자들을 논쟁으로 물리쳐 명성을 얻었고 훗날 캔터베리의 대주교가 되었다. 여기서 성 안셀무스는 란프랑쿠스의 제자이자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1060년 아버지마저 사망하자 성 안셀무스는 정식으로 수도회에 입회하여 수도승이 되었다. 그는 수도원의 엄격한 수련을 받는 동시에 문법과 논리학 등을 공부하고 다양한 학자들의 저서를 섭렵하며 학문에 정진하였다.
1067년 란프랑쿠스의 후계자로 수도원 학교의 교장이 된 성 안셀무스는 제자인 동료 수도자들을 위해 많은 작품을 저술했고, 윤리 교육과 종교 교육에 힘씀으로써 베크 수도원 학교를 명문 학교로 발전시켰다. 1078년 수도원 원장이 된 그의 박학다식함과 성덕에 대한 소문을 듣고 수많은 젊은이가 베크 수도원으로 몰려들자 그들을 한곳에서 교육할 수 없어 프랑스와 영국 여러 곳에 수도원을 건립하였다. 이를 통해 프랑스의 경계를 넘어 영국에까지 명성을 떨친 성 안셀무스는 란프랑쿠스가 선종한 뒤 영국 왕 윌리엄 2세(William II Rufus)에 의해 1093년 캔터베리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성 안셀무스는 적지 않은 분쟁에 휩싸였다. 그는 성직자를 직접 임명하는 등 교회 직무에 간섭하는 영국 국왕에게 강력히 반발하고 교황의 권위를 위해 투쟁하였다. 또한 그는 세속화된 성직자들의 개혁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국왕은 물론 다른 많은 주교로부터도 배척을 받게 되었다. 성 안셀무스는 국왕 윌리엄 2세와 격렬한 논쟁을 전개했으나 결국 1097년 영국 성직 서임권 논쟁의 여파로 영국을 떠나 로마로 망명길에 올랐다. 하지만 망명 중에도 그는 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아 여러 곳을 방문하면서 다양한 업무를 수행하였다. 1098년 교황 복자 우르바누스 2세(Urbanus II, 7월 29일)의 요청으로 성 안셀무스는 바리(Bari) 공의회에 참석하여 성령을 두고 벌인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필리오퀘(filioque) 논쟁’을 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100년에 영국 왕 윌리엄 2세가 사망하자 성 안셀무스는 영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는 1102년에 런던의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에서 회의를 개최해 교황 성 그레고리우스 7세(Gregorius VII, 5월 25일)가 활발히 추진한 교회 개혁을 영국 교회에서도 시행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성직자들의 생활을 쇄신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영국의 노예무역을 극렬히 비난하며 반대 결의안을 도출했다. 하지만 또다시 윌리엄 2세의 후계자인 헨리 1세(Henry I)에게 충성 서약을 하지 않아 1103년에 다시 로마로 두 번째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그 후 그는 영국 왕과 교황과 한자리에서 협상을 벌여 왕에게 충성 서약은 하되 왕으로부터 서임을 받지 않는다는 합의를 끌어냈다. 1106년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영국 국왕으로부터 교회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성직자들의 생활을 수도원 생활에 기초한 방향으로 쇄신하고자 노력하였다.
성 안셀무스는 여러 현실적인 문제와 건강의 악화에도 불구하고 학문 연구 또한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당대에 이미 위대한 신학자로 인정받았고, 스콜라학의 체계를 확립해 ‘스콜라학의 아버지’란 칭호를 얻게 했다. 그는 신앙과 이성이 조화를 이룰 수 있으며, 아리스토텔레스파의 변증법에서 이용하는 이성주의를 신학에 성공적으로 도입시킨 첫 번째 인물이었다. 즉 이성보다는 신앙에 우선성을 두고 신앙과 이성의 두 가지 지식의 원천을 진리 추구에서 조화시키려 노력했던 신학자였다. 그는 완전한 존재에 대한 인간의 개념에서부터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한 “독어록”(獨語錄, Monologion)의 저자이다. 이 사상은 후대의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 데카르트(Descartes) 그리고 헤겔(Hegel)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성 안셀무스의 “왜 하느님은 사람이 되셨는가?”(Cur Deus Homo)는 중세의 강생에 관한 신학 논문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대작이다. 그의 저서 중에는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De Fide Trinitatis), “동정녀 잉태론”(De Conceptu Virginali), “진리론”(De Veritate) 그리고 400여 통의 편지와 기도 및 묵상에 관한 책들이 많이 있다.
성 안셀무스는 1109년 4월 21일 성주간 수요일에 캔터베리에서 선종했고, 그의 유해는 캔터베리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그에 대한 시성 절차는 1163년 캔터베리의 대주교인 성 토마스 베케트(Thomas Becket, 12월 29일)에 의해 제기되어 그가 순교한 1170년 전에 공식적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있지만 공식적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일반적으로 그의 시성은 1494년 또는 1497년에 교황 알렉산데르 6세(Alexander VI)가 승인한 것으로 보고 있다. 확실한 것은 그가 1720년에 교황 클레멘스 11세(Clemens XI)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는 것이다. 단테(Dante)가 그의 작품 “신곡”(神曲)의 천국 편에서 태양권 안에 있는 빛과 힘의 영들 가운데 성 안셀무스를 언급할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컸다. 교황 성 비오 10세(Pius X, 8월 21일)도 1909년 4월 21일 성 안셀무스 선종 800주년을 기념해 반포한 회칙 “Communium Rerum”을 통해 그의 업적과 저서에 대해 칭송하였다. 교회 미술에서 성 안셀무스는 주교 복장을 하고 자신의 저서를 들고 있거나 교회의 영적 독립을 표현하는 의미에서 배를 든 모습으로 종종 표현된다.♧ 굿뉴스에서 따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