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천주교 박해
가. 1785년, 을사추조 적발사건(명례방)
1785년(정조 9) 봄에 형조(刑曹, 秋曹)에서 천주교도들의 비밀 신앙집회를 적발하여 낸 사건이다. 집회 장소를 제공한 김범우의 집이 남부 명례방에 있었기 때문에 ‘명례방 사건’으로도 불린다.
1784년 북경에서 천주교에 입교하고 귀국한 이승훈(李承薰)이 이벽(李檗)ㆍ권일신(權日身) 등은 명례동(明禮洞:서울 명동) 김범우(金範禹)의 집에서 정기적으로 집회를 가졌다. 다음 해 3월, 도박 단속을 위하여 순찰하던 포졸들에게 모임이 적발되었다. 형조판서 김화진(金華鎭)은 양반들은 훈계 석방하고, 중인 출신 김범우만 투옥하였다.
1) 이벽 세례자 요한 순교(1785년)
1785년 집안과 가족의 압박 가운데 순교했다.1785년 명례방 집회 사건(을사추조적발 사건) 이후 가문과 부친으로부터 천주교 신앙을 버릴 것을 강요받았다. 부친은 이벽이 천주교를 버리지 않자 자살하겠다고 협박하였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자, 고향인 포천에 감금되었다. 식음을 전폐하다 1785년 순교하였다. 가장 최초이며 사랑하는 가족들에 의해 사사된 가슴아픈 순교다.(파리 외방전교회 기록들에서는 배교설이 제기되었으나, 이후 교회사 연구가들에 의해 독사毒死로 추정되었다.)
2) 김범우 마태오 순교(1786년)
이것을 계기로 이용서(李龍舒) 등 유생들이 척사상소(斥邪上疏)를 올려 그들을 처벌하도록 여론을 일으켰으나, “성학(聖學:儒學)이 흥하면 사학(邪學)은 자멸할 것”이라고 믿고 있던 정조는 김범우만을 단양(丹場:정민 교수 충청도 단양설 지지)으로 유배시켰다. 김범우는 천주교 집회 장소 제공자로 십여 일간 고문과 옥고를 치른 뒤 최대 3년 형인 유배형을 받고 단양으로 귀양갔다. 유배지에서 고문의 여독으로 1년만인 1786년에 순교했다.
이 사건은 한국천주교회 역사 첫 번째 신자 체포인데다 첫 순교자가 나왔다는 점에서 교회사적 의의가 크다.(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편집).
나.1791,신해박해)진산사건:
1791년 5월~8월(음력)정조 시대 진산에서 윤지충(정약용의 외사촌)과 권상연(윤지충의 외사촌)이 모친상을 당했다. 그들은 당시 북경 교구장의 제사 금지령과 천주교 가르침에 따라 유교식 신주를 세우지 않고 불태우고 제사를 거부하였다. 유교적 효孝 질서를 중시하던 조선 사회는 큰 충격을 받았고 이웃들과 친척들의 고발로 조정에 알려져, 두 사람은 1791년 12월 8일 전주 감영에서 참수 처형 되었다. 진산군은 군에서 현으로 강등되고 서인(노론)이 남인을 공격하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남인은 또 신서파와 공서파로 분열되었다. 조정은 천주교를 국가질서를 위협하는 사학으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여파로 초기 양반층 교인들의 배교가 증가하였다.
다. 1801,신유박해:
정조대왕 사후 노론 벽파 정권이 정적(남인*시파)을 제거하고 정치적 주도권을 잡기 위해 천주교 탄압을 명분으로 이용한 것이다. 조상제사와 신주를 불태우고 만민 평등사상을 주장하는 천주교는 조선 사회의 유교적 질서를 무너뜨린다고 인식되어 지배층의 큰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 순교 300여명, 유배 300여명.
라.1827년 정해박해(순조27년):
신유박해로 살아남은 교인들은 산간벽지로 흩어져 교우촌을 형성하며 살아갔다. 그러나 신유사옥의 지속을 위해 전국에 반포된 ‘척사윤음斥邪綸音’은 천주교 탄압의 법적 실질적 근거가 되어 박해가 끊이지 않았다. 천주교는 정하상등을 중심으로 교회 재건과 성직자 영입 운도을 꾸준이 전개하고 있었다. 그런데 1827년 2월에 시작되어 4개월동안 총 500여면의 신자들이 체포되었다. 시작은 전라남도 곡성 덕실 마을(현 오곡면 승법리) 옹기 가마터 교우촌에서 신입교우와 마을 주민 사이에 사소한 개인적 다툼과 폭행 시비가 빌미가 되어, 곡성 현감에게 천주교 신자들의 존재가 알려지고 고발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경상도와 충청도 일부 서울까지 파급되었다.
전라 감사는 신자들을 바로 처형하지 않고 오랜 기간 옥에 가두고 문초하면서 다수의 배교자를 발생시켰다. 끝까지 신앙을 지킨 이들을 옥중에서 순교하거나 12년 뒤 1839년 기해박해 때 처형되었다. 순교자는 전주에서 이경언, 대구에서 박경화와 김세박이 순교했다.(1828). 1827년에 체포된 김대권, 신태보, 이태권, 이일언, 정태봉등은 전주감영에, 김사건,박사의 이재행등 3명은 대구감영에 갇혀 있다가 1839년 기해박해에 처형 순교했다. 이 때 체되되어 순교한 이들은 2014년 8월 16일에 시복되었다.
마.1839년,기해박해:
1939년 발생한 사건이다. 표면적 원인은 천주교를 사학으로 규정하고 배척한 이유였으나, 내면적으로는 풍향 조씨(벽파)가 안동 김씨(시파)의 세력을 꺾기 위해 정치적으로 이용한 권력투쟁이었다. 부패한 일부 관리들이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한 뒤 재산을 빼앗기 위해 박해를 부추기기도 하였다. 사회적으로는 천주교 신자가 1만 명 정도 급증하여 위기감이 조성되었고, 프랑스 선교사들이 밀입국과 활동으로 서양 세력과 충돌이 형성되었다.
1939년 3월부터 10월까지 8개월간 박해발발, 4월 사학토치령 선포, 순교자 118여 명 이상이 옥사와 병사함(프랑스 외방전교회 소속 앵베르 주교 모방, 샤스탕 신부들 선교사 신부들 처형, 평신도 지도자인 정하상, 유진길, 조신철등 순교함)
바.1846년:병오박해
기해박해 이후 비교적 잠잠해졌다가 발생하였다. 최초의 조선인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외국 사제들을 밀입국로를 개척하다가 체포되었다. 황해도 옹진군 순위도 등산진에서 체포디어 25세의 나이로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 형으로 순교했다. 이때 프랑스 외방 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인 성 앵베르 주교(2대 조선 대목구장)과, 성 모방 신부(김대건과 최양업을 발굴 유학보냄), 성 샤스탕 신부가 홍주(현재 홍성)에서 자수하여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사.1866년 ~ 1873년:병인박해
병인박해는 종교적 충돌을 넘어, 당시 급변하던 국내외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발생했다. 1864년 러시아가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였다. 섭정을 하던 흥선대원군은 천주교인 남종삼의 제안에 따라 프랑스의 힘을 빌려 러시아를 막고자 시도했으나 시기가 어긋나 불발되었다. 그 사이 러시아 위협이 줄어들자 프랑스와 손을 잡을 명분이 사라졌다. 조정의 보수파 대신들이 대원군의 친프랑스 정책 시도를 비판하자, 대원군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 방어를 위해 천주교 탄압(박해령)은 단행했다.
외세 침략에 대한 반작용 박해 격화
박해 초기 프랑스 선교사들이 처형되자 프랑스는 보복으로 1866년 병인양요를 일으켰다. 이에 대한 분노와 보복으로 조선 정부를 천주교인을 ‘외세와 내통하여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무리’로 규정하고 박해를 확대하였다. 이후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 묘 도굴 사건(1868), 신미양요(1871)에 이어 발생하며서 탄압은 극에 달했다.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출신 성직자 12명 중 베르뇌 주교를 비롯한 9명의 프랑스 신부가 처형되었다. 평신도는 8,000-10,000명으로 추산된다.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까지 침입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한강변 잠두봉)절두산에서 신자의 목을 베었다. 충청도 지역 신자들이 잡혀 와 산채로 매장되는 등 비극을 겪었다. 대규모 인원을 빠르게 처형하기 위해 교수형, 참수형외에 밧줄을 목을 매는 처형틀이 고안되었다. 한 번에 수십명을 산채로 매장하는 생매장과 백지사형(얼굴에 물을 뿌리고 백지를 붙여 질식사 시킴)등 극형이 남발되었다.
조선 천주교회 조직은 완전 와해되었고 신자들은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교우촌을 형성했다. 이 박해는 1873년 12월 대원군이 실각하고 고종이 직접 정치를 시작하면서 종결되었다.
조선은 국제정세상 더 이상 쇄국정책을 고수하지 못하고 1882년 미국, 영국과 1883년 독일,1884년 러시아와 이탈리아와 수호조약을 맺었다. 서구 열강중 가장 늦게 프랑스와 1886년 조약을 맺었다. 이유는 프랑스 선교사들에 대한 박해와 적대감 때문이었다. 조약의 핵심중 하나는 천주교 포교의 자유 허용이었다. 조약 본문에는 '프랑스인이 조선 성내에서 종교를 전파할 수 있다'는 명시적 문구 대신 "조선에 와서 학문을 연구하고 가르칠 수 있다(교공·敎工)"라는 표현이 들어갔다.프랑스는 이를 천주교 포교 권리로 해석했고, 조선 정부가 이를 암묵적으로 묵인하면서 사실상 천주교 전파가 합법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