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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의 죽음 이집트의 새로운 통치자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이 석관을 이집트로 빼돌려 다시 황금관에 시신을 넣어 알렉산드리아에 안치했다. 그의 죽음의 원인에 대해서는 역사가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다.
독살이라든지, 뇌염이 원인이라는 학자들도 있다.
또는 정복 전쟁에 따른 스트레스 와 해피션의 죽음에 의한 절망감과 고독감으로 폭음을 했다고 한다.
폭음으로 인한 비정상적인 행동은 여러번 기록이 되어 있다.
술에 취해 갑자기 창을 던져 부하 장군을 살해 하는 일이라던지,
해피션의 죽음에 대한 책임으로 주치의를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하는 일 등을 보면 정상적인 사고에서 많이 벗어나 있는 듯 했다.
그의 죽음의 원인을 살펴 보자.
질병 이나 흔히 알려진 대로 말라리아가 아니었을까?
미국 버지니아주 전염병국 국장인 존 마르 박사는 “대왕의 증세는 당시 그 지역에 돌았던 뇌말라리아와 비슷하다”면서 “그러나 뇌말라리아의 경우 혈액과 오줌이 검게 변하는데, 그런 기록이 없다”고 말했다. 마르 박사는 “장티푸스 역시 증상이 비슷하나 붉은 반점이 보였다는 기록이 없다”고 설명했다.
다큐멘터리는 플루타르크가 쓴 ‘흉조’에도 눈길을 돌렸다. 1999년 미국 브롱크스 동물원에서도 까마귀와 맹금류 등이 비슷한 증상으로 죽어갔다.
원인은 웨스트 나일 바이러스.
그러나 이 바이러스가 사람, 특히 젊은 사람에게 치명적인 일은 드물다.
그러면 독살 가능성은 어떤가. 대왕은 적이 많았다.
술 취한 채 말싸움을 벌이다 부왕의 오랜 친구를 창으로 찔러 죽였다.
그리고 해피션 을 살리지 못한 의사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기도 했다.
고대인이 주로 사용하던 비소나 독미나리 같은 독약을 사용할 경우 대왕이 죽기 전 보였던 증세와 맞지 않는다.
뉴질랜드 국립독극물 센터의 에로 수 박사는 "크리스마스 로즈" 라 불리우는 유럽산 미나리아재빗과 식물인 헬르보어(Hellebore) 를 지칭한다.
BC 1100 년경 부터 헬르보어 즙은 서양 고대문명 지역에서 변비치료제로 사용되었다.
미량의 헬르보어는 약이 되지만 한 수픈 이상의 헬르보어 즙은 치명적인 독이 된다.
혈압을 떨어 드리고 고열을 일으키며 서서히 사람을 죽인다.
대왕의 원정 동안 마케도니아 통치를 맡았던 안티파테르 장군 일가를 독살범으로 지목한다.
대왕의 분노를 사 바빌론으로 소환 당한 안티파테르 의 아들 이올라스 는 공교롭게도 대왕의 음식담당 집사였다.
이올라스가 만취한 대왕의 술에 헬르보어 를 타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고 후에 왕비(록사네) 모후(올림피아) 왕자(유복자-알렉산더 4세)를 살해한 카산더는 이올라스의 형이었다. 기원전 323년 6월 9일 늦은 저녁 알렉산더의 병세가 악화 되자 장군들이 밤새 그의 침상을 지켰다. 마지막으로 장군들이 알렉산더를 둘러 싸며 누구에게 왕위를 물려 줄것이지를 묻자, 알렉산더는 가뿐 숨을 내쉬며 대답 했다. 알렉산더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 했다. 가장 강한 자에게 물려 줄 것이다. 다음날 아침 알렉산더는 영원히 눈을 감았다. 그의 절친한 친구 해피션 이 죽은 지 8개월만이었다.
알렉산더의 장례와 시신의 행방 역사가 풀르다크 그가 죽기전 하늘에서 까마귀들이 서로 쪼며 싸우다가 그의 발 앞에 떨어졌다고 흉조를 기록했다.
그는 위대한 전사일지는 몰라도 결코 유능한 행정가는 못 되었다. 알렉산더가 정복전쟁을 치루다 세상을 떠났다. 알렉산더의 사인은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병명은 정확히 알수 없어도 병으로 죽은 것은 분명하다. <삿갓구름 님이 시리아에서 몸소 직접 촬영해 오신 사진>
알렉산더는 그의 영적인 아버지 제우스가 있는 이집트 아몬 신전에 묻히고 싶다고 했지만 마케도니아 인들은 위대한 지도자의 시신을 고향에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시신은 고향인 그리스를 향했지만 고향에 이르지 못하고 결국 알렉산더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묻혔다. 알렉산더의 시신을 석관에 넣어 그리스로 옮기는 동안,
기원전 45년 줄리어스 시저가 알렉산더 의 묘지를 방문 했으며, 심지어 AD 3세기 경까지 로마 황제 및 많은 사람들이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하여 알렉산더의 석관을 볼수 있었다.
그러나 AD 5세기가 지나면서 더 이상 알렉산더 대왕의 묘지에 관한 기사 및 자료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15세기에 들어서 오스만 터키제국이 강성해 지면서 이 지역에 더 이상 역사적 자료는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지금 현재까지 알렉산더 대왕의 묘지는 알수 없다.
그러나 프톨레미 왕조의 클레오파트라 유품들이 알렉산드리아 근처 바닷가에서 발견 되는 것을 볼 때,
알렉산더 대왕은 자연에 의해 알렉산드리아 근처 지하 또는 바다 어디엔가 매장 되었으리라고 역사학자들은 추측 한다.
알렉산더 사후의 제국 알렉산더는 세계 정복이라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그의 친구들은 마케도니아, 시리아, 이집트로 국가를 나눠 각각 통치했다. 이들은 알렉산더의 이념과 통치방식에 따라 그리스인들은 계속 이주하여 그리스식의 도시는 융성하였고 알렉산더의 정책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왕위 후계자가 지명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휘하 장군들에 의한 권력투쟁은 혼란스러웠다. 알렉산더의 친구이자 부하였던 장군들은 필리포스 2세의 약간 얼빠진 서자인 필리포스 3세 아리다이오스와, 록사네 에게서 태어난 알렉산더의 유복자 알렉산더 4세를 공동 왕으로 지명하고, 자신들끼리 여러 차례의 담합을 거쳐 사트라프 직(사트라프는 페르시아 제국 주(州) 총독의 칭호)을 나누어 가졌다. 알렉산더가 죽고 나자 제국은 하나로 유지되기가 어려웠다. 아리다이오스는 BC 317년에, 그리고 알렉산드로스 4세는 BC 310년에 살해 당했다. 속주들은 독립적인 왕국이 되었으며 BC 306년 안티고노스를 필두로 장군들이 왕의 칭호를 사용했다.
알렉산더 사망 직후 그의 휘하 사령관들은 곧바로 정치적�군사적 갈등에 휘말리게 되는데 이로 인해 헬레니즘 세계의 왕국들이 탄생하게 된다. 그 당시 중국의 정세 알렉산더 대왕이 인도의 간다라 지방을 넘어 중국까지 가지 못하고 죽은 것에 대하여 여러 학설이 분분하다.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를 침공하던 시기에 중국은 어떤 상황이었을까
그때 중국은 춘추 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기원전 770년 - 기원전 221년) 였다. "춘추시대" 란 주 나라의 여러 제후국들이 주 왕실을 존중하고 각자의 세력을 다투던 시기이며, 이 시기 동안 세력이 강한 제후 중에 주왕실의 이름으로 천하를 호령한 다섯 개의 제후국을 춘추오패라고 부른다. "전국시대" 란 주 왕실에 대한 충성마저 약화되기 시작한 시기로, 진, 한, 제, 위, 조, 연이라는 전국 육웅이 차례로 왕을 칭하고 오로지 천하 통일을 위해 질주하였다. 춘추전국시대 이후 진(秦) (기원전 221년 - 기원전 207년) 나라가 천하를 통일한다.
전국시대 의 7웅 중 진(秦)나라가 주 왕실 및 다른 6국을 멸하고 중국을 통일하며, 진 시황제라 칭 했다. 진시황제라면 만리장성을 쌓았고 엄청난 카리스마로 중국을 통일했던 황제이다.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 를 접수 할 때 중국은 7 나라로 분열되어 서로 왕이라 칭하며 영토보존하기에 급급하던 시대 였다.
페르시아를 점령한 알렉산더가 여세를 몰아 중국까지 쳐 들어 갔다면 어찌 되었을까?
그러나 세계의 지붕이라는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과연 중국을 침공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에필로그 그와 관련된 경이적인 무용담은 고대세계전역에서 인기 높은 민담이 되었고 심지어 알렉산더가 밟아 보지 못한 땅인 아프리카에까지 그 이야기가 전파되었다. 전사 영웅으로서 알렉산더가 누린 전설적인 인기는 그가 후대에 남긴 가장 지속적인 유산이다.
알렉산더의 위대함은 바로 그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에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의 업적은 동양과 서양의 화합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알렉산더가 동양을 지배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방식이 민주주의는 아니었다. 그 자신도 신이 되고 싶었던 만큼 그리스를 외면하면서까지 이전 동양의 왕들보다 더 강한 권력을 바탕으로 전제군주제를 시행했던 것이다. 그의 동방원정의 정복지에는 아직도 상처가 남아 있다. 그의 정략결혼 정책과 그리스인들의 이주로 인한 혼혈 후손들의 서글픔은 이러한 부작용을 보여 준다. 또한 알렉산더 대왕 후대에 꽃 피웠던 헬레니즘의 경제력의 원천이 페르시아로부터 약탈한 거대한 황금으로부터 나왔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약탈과 살육을 통한 강압적인 일원화는 동양, 서양 서로에 거부감을 낳았다. 알렉산더가 전 세계를 하나로 만든다며 머물렀던 그 페르시아 제국의 옛 영토인 이라크에 약 2300년이 지난 지금, 수십만명의 미국 군인 들이 주둔하고 있고, 그리고 혈맹국이라는 우리나라의 젊은이들까지 가 있다. 낙선을 한 케리 전 대통령 후보 측의 이라크 파병을 반대한 어느 참모는 한때 부시 진영을 비꼬으면서 "지가 무슨 알렉산더 대왕 이라고?" 라고 말했었다 한다. 알렉산더 대왕이 정복전쟁에 나섰던 12년 동안, 알렉산더 대왕은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된 4만 대군을 이끌고 3만 3천 키로미터에 달하는 광활한 지역을 누볐다. 알렉산더 대왕이 12년 동안 전쟁을 치루며 정복한 광활한 제국은 그의 사후 결국 스무명 이상의 통치자들에 의해 분활 됬다. 알렉산더는 죽었지만 그의 존재는 영원하다. 알렉산더 대왕은 살아 있는 동안 단 한순간도 두려움을 가져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신의 아들이었던 신의 아들이 아니었던, 그는 자신의 위대함을 확신 했고, 우리도 그 점에는 동의한다. 그는 영원히 알렉산더 대왕으로 남을 것이다.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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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흥미로운 블로그 원문보기 글쓴이: 황금의 초생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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