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절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어려운 말씀입니다. 히6장4절 이하의 말씀과 연관이 됩니다. 복습해 봅시다.
히6:4-8 “한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왜 땅이 비를 받아 채소를 내지 못하느냐 하면 ‘한번 비췸을 얻고’ 그 뿐입니다.
그러나 빛은 항상 비쳐야 됩니다.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은사는 받아야 되지요.
성령에 참예하고 바로 ‘에피’ 성령이죠. 안에(앤)가 아니라 위에 임하신 성령입니다.
존재의 영이 아니라 사역의 영일뿐입니다. 예를 들면 사울에게도 여호와 신이 임했고,
세례요한에게도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만 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돌이킬 수 없습니다.
왜 그러느냐? 그 심령의 밭이 가시와 엉겅퀴가 난 밭으로 그대로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13장에 있는 세 가지 밭입니다. 길가 밭, 돌 짝밭, 가시덤불 밭입니다.
이들 밭에는 비를 아무리 내려줘도 그 비를 받아서 밭가는 자들에게 합당한 채소를
내지 못하는 밭이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결과는 저주함에 가깝고 돌이킬 수
없다는 겁니다. 좋은 땅은 결코 자연인의 마음이 아닙니다. 거듭난 자의 새 땅입니다.
짐짓이라는 말은 신학적으로 고범죄라 표현합니다.
요일3장6절에서 10절입니다. 6절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어디에 거하는 자입니까? 그 안에 거하는 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역할 수 없다는 겁니다.
7절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8절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9절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10절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11절 “우리는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12절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가인도 사실 모태신앙입니다. 그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결과는 뭐가 안 바뀌었냐? 그 아우를 죽일 만한 죄의 본성이 바뀌지 않았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이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비췸도 받고 은혜도 받았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이 잘못하면 이를 박박 갈 수도 있습니다. 아까워서 용서가 안 됩니다.
그것이 바로 의를 행치 않는 것이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 스스로 하려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와 사랑이
자연스럽게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안 된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잘 못 됐다는 겁니까? 처음이 잘못됐다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을 따라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거듭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면 그리스도께서 의와 거룩과 영광으로 타나나시고
빛과 생명과 사랑으로 역사하시므로 그 씨가 30, 60, 100배로 결실하게 됩니다.
택한 자와 택함 받지 못한 자의 차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등입니다. 그러나 말세에 기롱하는 자가 있습니다.
왜 말씀으로 그를 불사르기 위하여 참으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모르고 방자하게 굽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의를 얻어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죄가 싫어지고 남을 미워하는 것이
싫고 또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 자신이 괴롭기 때문에 금방 용서를 하고 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기 위해 애쓰고 몸부림치라고 가르치는 걸 보면
어린신자 같으면 기특하기라도 하지만 수십 년 목회를 한 사람의 모습이니 참 딱합니다.
얼마 전에 평생을 부흥사들과 함께 전국을 돌아다니며 찬양집회를 한 목사 한 분이
신장투석을 오랫동안 하면서 파김치가 되어 저와 만난 다음에 꾸준히 말씀을 나누었는데
그 부군 장로는 빨리 로마서를 받아들여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하고 고백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구원을 붙잡고 가는 곳 마다 아담 쪽이냐 그리스도 쪽이냐
삼팔선을 그어 놓고 죄와 의, 사망과 생명을 전하다가 주님 품에 안기셨습니다.
그러나 이 신장투석을 하는 목사는 자신이 한 일을 계속 자랑하느라 수십 수백 번을
반복하며 우려먹습니다. 제가 그 분의 지금 스코어는 불못이라고 말해 줬습니다.
그 근거는 여전히 욕심이 그를 지배하고 있는 것과 만일 사망 아래에 있지 않다면
왜 연약과 질병이 와서 신음하며 혈관이 보기에 흉할 만큼 처절한 고생을 할까 하는
판단에서입니다. 만일 그 찬양이 성령의 감동에 의해 진리를 따라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닿는다면 그 병이 오지도 않을 뿐 아니라 설령 병이 왔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생명의 능력에 의해 치료가 됩니다. 지금 사망을 안고 있으니
당장 죽으면 불못이지요. 그분은 악보를 보지 않고도 피아노를 자유자재로 치고
찬송과 복음성가 심지어 영어노래까지 거침없이 우렁찬 목소리로 시원하게 불렀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건 음악일 뿐 결코 찬양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조 아무개 가수가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와 내 평생에 가는 길을 부른다고 그게 찬양일까요?
남 아무개 가수가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하고 멋지게 부르면 찬양이 됩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을 따르지 않고 또 주님께 나아가는 길을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정상급 가수의 실력으로 부르는 그 찬송이 찬양일 수는 없지요.
제가 미움을 받더라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을 별 볼일 없는
것처럼 여기며 드러내 놓고 십자가의 원수 노릇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돌이켜야지요.
결국 그 분은 제가 아침마다 보내는 로마서강해를 꼬박꼬박 보는 가운데서 그 날도
투석을 하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안타까운 일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수고한 것에 대한 자부심을 내 세우다가 병원, 요양원 등에서
주의 오래 참으심과 긍휼하심을 따라 단독면담을 하면서 밀린 숙제를 하고 있는지...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삼복 더위에 건강하십시요 .
고맙습니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주님의
손에 붙잡혀 잘 이겨 나아가고 있습니다. 건강 유념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