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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술령 망부석
치술령의 망부석(審述嶺 望夫石) -金 宗 直-
審述嶺頭望日本 粘天鯨海無涯岸
심술령두망일본 점천경해무애안
良人去時但搖手 生歟死歟音耗斷
양인거시단요수 생여사여음모단
口音耗斷長別離 死生寧有相見時
구음모단장별리 사생녕유상견시
呼天便化武昌石 烈氣千年干空碧
호천편화무창석 열기천년간공벽
치술령 고갯마루 일본을 바라보니
하늘에 맞닿은 푸른 바다 가이없네
우리 님 떠나실 제 손을 흔드시더니
살았는가. 죽었는가. 소식도 끊겨
소식이 끊기고 길이 헤어졌으나
죽든 살든 언젠가는 서로 볼 날 있으리라.
하늘 향해 울부짖다 망부석이 되었으니
매운 기운 천년토록 허공 위에 푸르리라.
이 시는 김종직(金宗直 ; 1431~1492)이 신라의 박제상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여 지은 시다.
예림서원에는 김종직이 쓴 《이준록(彛尊錄)》과 《점필재집》의 목판이 보관되어 있다.
절개 굳은 아내가 외지에 나간 남편을 고개나 산마루에서 기다리다가 만나지 못하고 죽어 돌이 되었다는
설화.
망부석(望夫石)의 유래설화로, 아내가 죽어서 돌이 된 것이 아니라 自然石(자연석)인 돌에서 기다려 그 돌
에 망부석(望夫石)이라는 이름이 붙은 경우의 설화도 이와 같다.
망부석(望夫石)의 대표적인 설화는 신라시대 박제상(朴堤上, 또는 金堤上)의 아내가 치술령(審述嶺)에서
죽어 망부석(望夫石)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출전>{삼국사기} 권45, {삼국유사} 권1 '내물왕 김제상', {문헌비고}, {동국통감}, {일본서기} 등에
각각 실려 있으나 내용은 조금씩 다르다.
박제상(朴堤上 서기363-419)이야기
박제상(朴堤上)은 방아타령으로 유명한 백결선생(百結先生/?~?) 박문량(朴文良)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박제상(朴堤上)은 시조왕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증손인 파사왕의 현손(5세손) 물품의 맏아들이다.
본관은 영해(寧 海)이며 호는 관설당이다. 박제상(朴堤上)은 내물왕 때 삽량주의 태수로 있었다.
미추왕(味鄒王 261-284)의 동생인 대서지(大西知)의 아들이 내물왕(奈勿王 356-402)이며, 내물왕의 동생이
실성왕(實聖王 402-417)으로, 내물왕의 아들들이 어리므로 강압적으로 왕이 되었는데, 내물왕(奈勿王)의
장자 눌지(訥祗)는 미친 사람처럼 거리를 돌아다녀 실성왕이 도외로 치고, 둘째 복호(卜好)는 고구려에 인
질로 보내고, 셋째 미사흔(未斯欣)은 왜(倭)로 인질로 보내었다.
이에 박제상(朴堤上)이 주축이 되어 신자천(申自天), 배중량(裵仲良) 등과 실성왕의 부당한 처사를 거론하
니 실성왕(實聖王)이 눌지왕(訥祗王 417-458)에게 양위하였다. 눌지왕(訥祗王)이 즉위하여 일본에 억류된
아우를 그리워하며 신하를 보내어 귀환을 여러 차례 요구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했다. 이에 박제상(朴堤上)
이 고구려로 가서 "한 뿌리의 후예로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라는 한마디로 복호를 데려왔다.
그리고 박제상은 다시 미사흔(未斯欣)을 구하기 위해서 왜국으로 떠나 그해 7월에 그곳에 도착, "신라왕이
나의 부모를 죽이고, 나를 해치려 하므로 도망쳐 왔소" 하고 망명한 것으로 가장했다.
왜왕은 그 말을 곧이듣고 장차 신라를 칠 때 미사흔과 그를 앞잡이로 삼으려는 속셈을 품게 되었다.
왜왕으로부터 어느 정도 신임을 받게 되자
그는 자주 미사흔(未斯欣)을 데리고 바다에 나가 뱃놀이를 하면서 탈출할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지척을 분간할 수 없도록 안개가 끼자 그는 바로 이때다 하고 미사흔을 몰래 신라로 떠나보냈다. 박제상의
활약으로 두 아우를 무사히 찾은 눌지왕(訥祗王)은 크게 잔치를 베풀고 노래를 지어 불렀으니 그 노래가 유
명한 <우식곡(憂息曲)>이다. 한편 미사흔(未斯欣)을 떠나 보내고 숙소로 돌아온 박제상(朴堤上)은 감시하는
왜인에게 "왕제는 몸이 피곤해서 주무시고 계시오" 하며 시간을 끌다가 마침내 발각되어 왜왕 앞에 묶여 나
가 문초를 받게 되었다. "나의 신하가 되면 모든 것을 용서하겠다"는 왜왕에게 "나는 계림(鷄林)의 신하이다.
나는 계림의 개나 돼지가 될망정 왜국의 신하는 되지 않을 것이며, 계림의 모진 종아리는 맞을지언정 왜국의
작록은 받지 않을 것이다" 하며 굴복하지 않았다.
발바닥을 벗겨 갈대밭을 끌고 다녀도 "나는 계림(신라)의 신하다" 하며 굴복하지 않고 불에 달군 철판 위로
끌고 다녀도 끝내 굴복하지 아니하자
왜왕은 그를 목도(木島)로 유배시켰다가 마침내 불에 태워 죽이고 말았다. 그러자 부사로 갔던 김철복(金轍復)
이 그의 말을 끌고 가서 의복을 수습하여 매장하고 이 사실을 혈서로 써 말의 입에 물리고 채찍을 쳐 바다로 쫓
고 자결하였다. 말이 신라로 돌아와 궁궐 앞에 이르러 혈서를 토하고 죽으니 왕이 그 혈서를 읽고 크게 슬퍼하
며 대아찬에 추증하고 양산에 비를 세워 충절을 기렸다. 그리고 후세 사람들은 울주군 두동면 만화리에 충렬묘
와 치산서원, 양산에 효충사, 춘추원, 공주에 동계사, 영덕에 운계서원 등을 세워 제향 하였다. 또 일본의 <유방원
사적(流芳院事蹟)>에는 그가 죽던 날 그를 태워 죽인 불길이 하늘로 치솟아 청천벽력으로 화해 왜왕을 기절초풍
케 하였고, 그를 태워 죽인 군졸들은 모두 피를 토하고 죽었으며 그 이듬해 신라를 치려고 바다를 건너가던 군사
들은 풍랑을 만나 몰살당하여 다시는 신라를 칠 엄두를 못 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부인 김씨는 남편이 고구려(高句麗)에서 돌아오자마자 다시 왜국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첫째딸 아기
(阿奇)와 셋째 딸 아경(阿慶)을 데리고 치술령(?述嶺)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마침내 미사흔
(未斯欣)만 돌아오고 남편은 순절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두 딸과 함께 단식, 자진하니 몸은 화해서 망부석(望夫石)
이 되고, 넋은 치술조(?述鳥)로 화하여 목도(木島)까지 날아가 남편의 넋을 맞아 新羅로 돌아왔다고 한다.
어느 날 왕이 있는 전정 마루에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아 구슬픈 소리로 지저귀며 <목도의 넋을 맞아 고국에 돌아
오니 뉘라서 그것을 알리요>라는 뜻의 글자를 쪼아 놓고 날아 가자 왕이 이상히 여겨 뒤쫓아가 보게 하였던 바 치
술암(?述庵) 기슭의 바위 속으로 들어갔다. 왕은 비로소 그 새가 김씨 부인의 넋임을 알고 그 바위를 은을암
(隱乙巖)이라 하고, 그 바위 위에 영신사(靈神祠)를 세워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차녀 아영(阿榮)은 가정을 위하여
굳게 살면서 다섯 살 된 남동생을 기르니 이 남동생이 바로 백결선생(百結先生)이다. 訥祗王(눌지왕)이 듣고 미사
흔(未斯欣)으로 하여금 아영을 아내로 삼게 하고 위로 하였다. 이러한 박제상(朴堤上)의 충절(忠節)에 대해 조선의
세종대왕(世宗大王) 은 ‘신라 천년에 으뜸가는 충신이다’ 하였고, 정조는 ‘그 도덕은 천추에 높고 정충(貞忠)은 만세
에 걸친다.’ 하고 극찬했으며 15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백결선생(百結先生)
백결선생(百結先生/?~?)은 박제상의 아들이다
신라 자비왕(慈悲王) 때 명신(名臣)인 문량(文良)은 제상의 아들로 천성(天性)이 청렴결백하여 항상 가난 속에서
청빈(淸貧)하게 살았으며 거문고를 즐겼고, 의복(衣服)이 남루하여 백군데나 기운 누더기 옷을 입었기 때문에 사람
들이 그를 백결선생(百結先生)이라 불렀다. 이로 인하여 호(號)를 백결(百潔)이라고 하고, 이름을 고쳐 누랑(婁琅)
이라 하였다.478년(자비왕 21) 그가 65세 때 이벌찬의 벼슬에 올라 아첨하는 무리들이 많음을 개탄하여 천재(天災)·
치폐(治弊)·처경(處境)·흥인(興人)·지인(知人)·화인(化人) 등 여섯 장(章)의 상소문(上疎文)을 올리니 이 상소문은
너무도 유명했다.
어느해 섣달 그믐날 사방에서 떡방아 소리가 요란하자 그의 부인이 "남들은 곡식이 풍부하여 떡방아를 찧는데 우리
는 당장 먹을 양식조차 없으니 어찌할꼬"하며 탄식하자 그는 태연하게 "사람에게는 수명이 있고 부귀는 하늘에 매인
것이니 오게 되면 받는 것이요 가게 되면 막을 수 없는 것인데, 부인은 왜 쓸데없는 걱정을 하시오"하며 거문고를 당
겨 방아소리를 구성지게 내어 부인을 위로하였다. 이 방아타령은 우식곡(憂息曲)을 대신하여 서라벌에 온통 퍼져 즐
겨 불렀다고 하며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 거문고로 회포를 푸니 이것을 낙천악(樂天樂)이라 하였다. .
'삼국사기'의 기록과 대조해보면 등장인물의 이름에 차이가 있고, 왕제의 부하 이름이 '삼국유사'에는 보이지만 '
삼국사기'에는 보이지 않는데, 이것은 사실상 부사가 따라간 것을 밝힌 것도 되고, 박제상(朴堤上)이 귀환 활동을
할 때 협조를 얻어 자기 외에 다른 사람이 귀국할 수 있게 설정한 것이기도 하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왕을 설득
하였더니 순순히 왕제를 풀어 주었다고 하여 박제상(朴堤上)의 언변을 중시하였고, '삼국유사'는 야간 탈출을 하
였다고 해서 담력과 지혜를 중시하였다. 두 기록 다 박제상(朴堤上)이 집에 들르지 않고 즉시 일본으로 떠났다고
한다. 이것은 부부나 가정의 정보다 국가가 더 중요하다는 박제상(朴堤上)의 충성심을 드러내면서도 인간적인 고
뇌를 함께 드러낸 대목이다. 그러나 이들 문헌은 박제상(朴堤上)의 사실(史實)을 중심으로 기록된 것이므로 민간
설화 측면에서는 박제상(朴堤上) 부인편을 드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남편이 집을 떠나자 몸부림쳐 울었고(그래
서 망덕사 앞 모래탑을 장사(長沙)라고함), 만류를 뿌리치고 다리를 뻗고 울었고 (그래서 그곳을 벌지지(伐知旨)
라함) 일본에 간 남편을 치술령(((?)審述嶺))에 올라가 그리워하다가 죽어서 치술령((?)審述嶺) 신모가 되었으며,
그 사당이 지금까지 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삼국사기'보다 설화적인 증거를 많이 제시하고 있다. 박제상
(朴堤上)의 아내는 일본에 간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지쳐 죽어서 望夫石이 되었는데, 그곳의 사람들은
아직도 부인의 정렬을 칭송하고 있다고 한다.
다른 구전으로는 박제상(朴堤上)의 아내는 죽어서 '치((?)審)'라는 새가 되고 같이 기다리던 세 딸은 '술(述)'이
라는 새가 되었다고 한다. 또 이들이 떨어져 죽은 치술령((?)審述嶺)고개 밑에는 은을암(隱乙庵)이 있는데 이 암
자는 절벽에 떨어져 죽을 때 새〔乙〕가 되어 숨어서〔隱〕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부인과 딸이 죽어서 새가 된
것은 새에게는 멀리 날아가서 그리운 사람을 만날 수 있도록 날개가 달려 공간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몸이 새라면 바다를 건너가서 남편과 아버지를 만나볼 수 있으련만 ……하고 간절히 바라던 것이 사후에 새
로 변하여 성취되었다. 죽음을 초월하면서 사랑은 면면히 이어지는 것이며, 살아서 바다 건너로 떠날 수 없는 한
을 죽어서 새가 되어 풀고 만난 점에서 한국인의 애정관이 절절히 표출된 것이다. 딸이 아버지를 만나려고 새가
된 것도 죽음을 건너 이어지는 부녀간의 사랑이다. 이때 은을암(隱乙庵)은 박제상(朴堤上)처자를 모시고 기념하
던 당으로 望夫石과 같은 기념물이라 할 수 있다. 치술령산신이나 신모가 된 것은 주민이 박제상 부인을 존경하
는 마음과 신앙심이 강조된 현상이며, 산이이 되었으므로 당연히 당이 지어진 것이다. 이 설화에는 역사적 사건
에 근거한 충성심에 박세상(朴堤上) 자신과 그의 아내와 딸의 인간적인 고뇌를 근거로 한 애정·정렬·효도 등이
복합적인 윤리관이 들어 있다. 구전하는 편이 더 인간적이며 가정적이다
경상북도(慶尙北道) 월성군 외동면의 치술령((?)審述嶺) 아래에 이들 새가 살았다는 은을암(隱乙庵)과 위패를
모신 당(堂)이 있다. 오랜 기념정신은 망부석으로, 죽어서라도 만나겠다는 의지는 새로, 사람들이 부인에 대한
존경심과 신앙심은 산신(山神)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돌로 후에 인공으로 기념비를 세우거나 죽은 장소에 있던 자연석(自然石)을 기념하는 대상물로 삼게 되면,
그 곳 사람들은 망부석(기념비나 자연석)을 대할 때 훌륭한 부인을 대할 때와 같은 경건한 존경심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줄이면 바로 사람이 죽어 망부석이 되었다는 화석(化石)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전라북도(全羅北道) 정읍시 정읍사공원(井邑詞 公園)에 있는 망부석(望夫石)은 아내가 장사를 나간 남편을 기다
리던 곳을 기념한 돌이며 여기에 정읍사 (井邑詞) 노래와 이 노래를 이야기로 꾸민 전설이 있는데, 이것도 오랜
기념정신을 뜻하는 것이다.
경상북도(慶尙北道) 영일군의 망부산(望夫山) 솔개재 전설은 신라 말 경애왕 때 소정승(蘇政丞)이 일본에 사신으로
가 돌아오지 않자 부인이 산에 올라가 기다리다 지쳐 죽어 산 이름이 망부산(望夫山)이 되었으며, 부인을 기념하는
뜻에서 사당인 망부사(望夫祠)를 짓고 같이 기다리던 개와 말의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는 전설의 내용은 치술령((?)
審述嶺) 망부석 전설의 변형이라 하겠다.
다만 망부석(望夫石)이 망부산(亡夫山)으로 규모가 커진 것이 다르다. 고기를 잡으러 갔거나 혹은 중국에 사신으로
간 남편을 기다리다가 아내가 떨어져 죽었다는 서해안의 〈낙화암전설 落花巖傳說〉도 이 망부석설화의 변형으로
보인다.
역사적인 사건을 한 여인이 정절을 통해 고통 속에 소화하고 후세 사람들이 이를 기리는 내용인 망부석 설화는 우
리나라 사람들의 의식을 단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嶺南의 傳說(柳增善, 螢雪出版社, 1971), 韓國口碑文學大系(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0∼1988).
치술령의 망부석 (?)審述嶺 望夫石
울주군(蔚州郡) 두동면 만화리 동쪽에는 경남과 경북의 경계에 765m 높이의 위용을 자랑하는 치술령((?)審述嶺)
이 하늘 높이 솟아 있다. 이 치술령((?)審述嶺) 정상근처에 망부석이 있다.
이 망부석에는 신라 충신 박제상과 그의 부인 김씨에 얽힌 충절과 정절의 이야기가 [三國史記]와 [三國遺事]에
전한다.
울산읍지[1934년]에는 망부석은 치술령((?)審述嶺) 산꼭대기에 있으며, 박제상(朴堤上)이 왜국에서 순국하였다
는 소식을 전해들은 부인 김씨가 슬픔과 원한을 이기지 못하다가, 딸 셋을 데리고 치술령((?)審述嶺)에 올라가서
왜국을 바라보고 통곡하며, 낭군의 뒤를 따라 정절로써 죽으려 하자 딸 셋도 따라 죽으려고 하기에 둘째 딸 아영
에게 이르기를 '너는 살아 남아서 너의 동생 문랑(당시 6세)을 양육하여 아버지의 후대를 잇게 하여라' 하였으며,
큰 딸 아기와 막내 딸 아경은 부인 김씨를 따라 정절사하였다. 죽은 모녀 세 사람의 시신은 곧 돌이 되어 망부석
이 되었다고 하며, 넋은 새가 되어 망부석(望夫石) 남쪽 십여리에 있는 바위틈으로 날아가 숨었는데, 그 바위를
속세에서 전하기를 은을암(隱乙庵)이라고 하였다. 살아남은 아영과 문랑은 마을로 내려 왔는데 나라에서 박제상
(朴堤上)의 충절과 부인 김씨의 정절을 높이 치하, 평가하여 신모사(神母祠)를 세워 제사를 받들었으며, 왜국에
서 돌아온 미사흔과 아영을 결혼 케 하고 많은 포상을 하사하여 생활을 보장하였다. 그리고 박제상(朴堤上)에게
는 대아찬의 벼슬을 추증하였다. 결국 이 망부석은 울주군 두동면 월평리 치술령((?)審述嶺)에서 동해를 바라보
는 망부의 한과 남편을 죽인 왜국을 저주하는 설화가 얽힌 바위인 것이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혼(魂)이 몸을 떠나는 것이라는 믿음에 의거하여 떠난 혼을 불러들여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 내려는 간절한 소망이 의례화(儀禮化)된 것을 고복 의식(皐復儀式) 또는 초혼(招魂)이라 한다. 그 의식은
사람이 죽은 직후, 그가 생시에 입던 저고리를 왼손에 들고 지붕이나 마당에서 북쪽을 향해 죽은 이의 이름을
세 번 부르는 행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초혼은 죽은 이를 소생시키려는 의지를 표현한 '부름의 의
식'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에는 '사랑하던 그 사람'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을 '이름이여'·'그 사람이여'·'부르노라'와 같은 호칭적 진
술을 반복하는 부름의 형식을 통해 고복 의식을 투영시키고 있다. 일반적으로 소월의 시는 임을 떠나보낸 후의
상실감· 비탄감을 체념적·수동적 어조로 분출해 내는 나약함을 지니고 있는 것에 반해, 이 작품은 격정적이고 능
동적 자세를 보여 주고 있다.
임의 갑작스런 죽음을 대하는 시적 자아는 '사랑한다'는 말도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한' 한(恨)을 가슴속에 새겨 넣
고 '붉은 해가 걸린 서산마루'에 올라앉아 '슬피 우는 사슴의 울음 소리'를 들으며 허탈한 모습으로 '그대의 이름
을 부른다.' 임과 나는 결코 이어질 수 없는 '하늘과 땅 사이' 만큼의 절망적 거리로 멀어져 있다는 현실에 체념
하지만, 곧바로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임의 이름을 부르며 임의 죽음을 부정하는
설움의 극한을 보인다. '
돌'은 백제의 가요 '정읍사'나 박제상의 처가 남편을 기다리다 돌이 되었다는 '망부석(望夫石)' 모티프와 관련이
있으며, 임이 죽은 사실을 결코 인정할 수 없다는 의지의 표현이자, 살아 돌아와야 한다는 비원(悲願)을 담은 한
의 응결체인 것이다.
시적 자아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초혼이라는 전통 의식에 맞추어 한 인간의 극한적 슬픔을 말하고 있다.
김소월 초혼(招魂)에서는
'산산히 부서진 / 허공 중에 헤어진 /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을 부르는 슬픔을 표현한 1연에 이어, 미처 고백하지
못한 사랑에 대한 애달픔을 말한 2연, 허무하고 광막한 시적 공간을 제시하며 슬픔의 본질을 드러낸 3·4연, 그리
고 망부석으로 비유된 슬픔을 마지막 5연에서 말하며 임이 떠나간 저 세상으로 간절히 자신의 사랑을 전하고 있
는 것이다.
여기에서 시간적 배경으로 제시된 '해질 무렵'은 밝음과 어둠의 경계선으로 삶의 세계와 죽음의 세계를, '산'으
로 제시된 공간적 배경 또한 땅과 하늘의 경계, 곧 현실의 세계와 영원의 세계를 구분짓는 것으로, 산 자가 죽은
자의 세계로 다가갈 수 없다는 절망적 한계를 인식하게 한다. 이러한 의미 내용을 중심으로 전개된 시적 자아의
심리적 추이 과정을 살펴보면 대략 '충격과 슬픔' → '허무와 좌절' → '미련과 안타까움'으로 말할 수 있다. 죽음
을 바라보는 이러한 비극적 세계관을 통해 시적 자아는 자신도 그 죽음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는 평범한 사실을
새롭게 인식함으로써 마침내 임의 죽음을 긍정하게 되고 허무의 초극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치술신모(審述神母)
일본에 인질로 잡혀 있는 내물왕의 왕자 미사흔(未斯欣)를 구하기 위해 남편이 부인에게는 알리지 않고 떠난
뒤 그 사실을 알고 쫓아갔으나 만나지 못하였다. 이에 망덕사(望德寺) 남쪽 모래 위에 이르러 몸부림치며 통곡
하였는데, 후세 사람들은 그 모래를 장사(長沙)라 하였다. 친척 두 사람이 부인을 부축하여 돌아오려 하자 부인
은 다리를 뻗은 채 앉아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곳을 벌지지(伐知旨:뻗치다의 고유음)라 하였다.
박제상이 계교로 왕자를 탈출, 귀국시켰으나, 그는 그곳에서 순절하였다. 내물왕은 박제상의 아내를 국대부인
에 봉하고 그의 딸은 왕자 미해의 부인을 삼았다. 부인은 남편을 사모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세 딸을 데리
고 치술령((?)審述嶺)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며 통곡하다 죽었다. 부인은 죽어 망부석이 되었다는데, 사람들은
그녀를 치술신모((?)審述神母)라 부르며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
그의 아내가 자녀를 데리고 치술령((?)審述嶺)에 올라가 일본을 바라보며 박제상을 기다리다가 돌이 되었다.
뒤에 사람들은 그녀를 치술령((?)審述嶺)의 신모(神母)로 모시고, 이를 소재로 지은 노래가 '치술령곡'이다.
치술령곡 (?述嶺曲)
신라 때 노래. 내용과 형식은 전하지 않으나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권106에 그 유래가 소개되어 있
다. 눌지왕 때 박제상(朴堤上)이 볼모로 잡혀 있는 왕의 아우 미사흔(未斯欣)을 구하러 왜국에 갔다가 미사흔
은 구해 보냈으나 자신은 잡혀 죽임을 당하였다. 이에 박제상(朴堤上) 부인이 세 딸과 치술령?述嶺(울산 경계
에 있는 재)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고 통곡하다 부인도 죽어 치술령(?述嶺)의 신모(神母, 또는 망부석)가 되었
는데, 뒷날 백성들이 이 노래를 지어 애상(哀傷)하였다고 한다.
제목 : 치술령곡(?述嶺曲))
밤개 포구 백사장에 흩어진 통곡
피 토하는
애끊는 슬픔
두동면 만화리
옻밭마을 가운데 길 지나
계곡 타고 산을 오르니
슬픔에 가위눌린 힘겨운 걸음
걸음걸음이 눈물 자욱
숨은 끊어질 듯
가슴은 미어지니
혹은 설워 흐느끼고
쉬다가도 갑자기 울먹이는
야윈 어깨
굴참나무 골짜기 구비 돌아 오른
치술령 고개
칼바람 불어 얼어붙은 시린 冬天아래
하염없이 지키며 바라보는
잿빛 바다
?치술령곡 민요 (?述嶺曲 民謠)
(중모리; 정관용 글, 김현숙 곡)
밤개 포구에 그대 자취 선연한데 그대 지금 어데로 가고 있나
미친 세월 낯설은 가녀린 비명 천의 하늘은 혼으로 떠도나니
그 혼 이제 노래가 되어 그 붉음으로 꽃을 피우고
노래가 된 그대의 붉은 넋 창공에 높이 솟아 내게 들리니
음 ---- 포구에 세우친 밤 나는 돌이 되리니
지리산 망부석
제목 : 望夫石(망부석)
얼마나 슬프면 숨이 끊어지는가.
치술령 산마루 望夫石(망부석)
세 母女(모녀) 아직도 치술 神母(신모)되어
斜陽(사양)에 서서 바다를 지키고
부인 魂(혼 )수리새 되어 앉았던 곳
두동면 만화리 飛鳥(비조)
國守峰 隱乙巖(국수봉 은을암)
정상에 이르니 치술령 神母碑(신모비)
화강암으로 다듬어져 석양에 빛나는데
반짝이는 돌판 촘촘히
슬픈 이야기를 아로새겨 놓았다.
무심한 잿빛 바다 치술령 굴참나무 숲은
도솔천에 함께 있을 이 사람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망부석(望夫石)-이백(李白)
?佛古容儀 含愁帶曙輝 露如今日淚 苔似昔年衣
방불고용의 함수대서휘 노여금일누 태사석년의
有恨同湘女 無言類楚妃 寂然芳靄內 猶若待夫歸
유한동상녀 무언류초비 적연방애내 유야대부귀
옛 사람의 용모와 차림 같아
새벽빛 띤 채로 수심을 머금었다
이슬은 오늘 아침 눈물 같고
이끼는 지난해의 옷 같도다.
상녀와 같은 원한 있고
초나라 왕비처럼 말이 없도다.
향기와 안개 속에 고요하니
남편을 기다리는 부인네 같아라
望夫石 노래
연기도 소지여기
감겨 올 때면
살아, 못다한 애비 노래로
달빛 밟는 엄니.
저 구천 저 맑은 박
저 망망한 달맞이꽃길,
비바람고개 넘어 쑥고개
아, 엄니 한나절.
은은한 무명 지등 엄니초롱에
살아, 생전의
지애비, 지애비
김종직 (金宗直 ; 1431~1492)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性理學者) ·문신으로서 본관은 선산(善山)이며 자는
계온(季?) ·효관(孝?)이고 호는 점필재(?畢齋)이다. 그리고 시호는 문충(文忠)으로 경남 밀양 출생
이다. 아버지는 성균사예(成均司藝)를 지낸 숙자(叔滋)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密陽朴氏)로 사재
감정(司宰監正) 홍신(弘信)의 딸이다. 김종직의 가문은 고려말 선산의 토성이족(土姓吏族)에서 사족
(士族)으로 성장하였으며, 아버지 대에 이르러 박홍신 가문과 혼인하면서 경제적 기반을 갖추고 중
앙관계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백 (李白 ; 701~762)중국 성당기(盛唐期)의 시인으로서 자는 태백(太白)이며 호는 청련거사(靑蓮
居士)이다. 두보(杜甫)와 함께 ‘이두(李杜)’로 병칭되는 중국 최대의 시인이며, 시선(詩仙)이라 불린다. 1,100여
편의 작품이 현존한다. 그의 생애는 분명하지 못한 점이 많아, 생년을 비롯하여 상당한 부분이 추정에 의존하고
있다. 그의 집안은 간쑤성[甘肅省] 룽시현[짱西縣]에 살았으며, 아버지는 서역(西域)의 호상이었다고 전한다.
출생지는 오늘날의 쓰촨성[四川省]인 촉(蜀)나라의 장밍현[彰明縣] 또는 더 서쪽의 서역으로서, 어린 시절을 촉
나라에서 보냈다
어느 날 늦은 시각에 거리를 거니는데 근처에서 술 익는 냄새가 진동하는지라 자신도 모르게 그 집 담을 넘어 술독
을 열고 술을 퍼먹다가 주인에게 들켰다.
그가 이부랑인 필탁임을 알고 그를 청하여 대청에 오른 다음 둘이서 그 술독을 모두 비웠다 한다. 필탁이 평소 술을
마실 때면 늘 왼손에는 살이 통통이 오른 게다리(蟹?)를 들고 오른손에 술잔을 들었는데 어찌나 맛있게 먹었는지 많
은 사람들이 이를 본보아 독특한 맛에 풍미를 느껴,
右手持酒杯 左手持蟹? 一生足矣
우수지주배 좌수지해오 일생족의
오른손에 술잔이요 왼손에 게다리라,
이만한 일생이면 족하것이 아니겠나!
하는 말이 생겨났고 세월이 흐르면서 수많은 시인들이 이를 인용하였으니 李白이 어찌
이를 그냥 지나치겠는가?
月下獨酌(월하독작) 其四之四 李白
窮愁千萬端 美酒三百杯
궁수천만단 미주삼백배
愁多酒雖少 酒傾愁不來
수다주수소 주경수불래
所以知酒聖 酒?心自開
소이지주성 주감심자개
辭粟臥首陽 屢空飢?回
사속와수양 루공기안회
當代不樂? 虛名安用哉
당대불악음 허명안용재
蟹??金液 糟丘是蓬萊
해오즉금액 조구시봉래
且須?美酒 乘月醉高台
차수음미주 승월취고태
천만가닥 시름에
술은 삼백 잔
시름 많고 술은 적어도
잔 기울이면 근심이 어찌 오겠나.
술이란 마시는 바에 따라
반쯤만 취해도 마음이 열리는것
수양산에 고사리캐던 백이숙제
청렴하기는 안연의 빈창자라
살아생전 마시며 즐기지 못하고
그까짓 헛된 이름 남겨 뭘하나
왼손에 게다리 바른손엔 술병이라
선경이 따로 있나 조구가 바로 봉래산
술이 있거든 마시고 즐기며
달빛타고 고대위에 취하여 보라.
정읍사 공원
정읍(井邑)은 전주(全州)의 속현(屬縣)이다. 이 고을 사람이 행상을 떠나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으므로, 그의 아내
가 산 위에 올라 남편 간 곳을 바라보며 남편이 밤에 해를 입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진흙에 빠짐에 의탁하여 노래
를 불렀다. 세상에 전하기를 등점산(登岾山)에 망부석(望夫石)이 있다고 한다.→ 망부석설화
[井邑詞]라는 노래는 국문으로 표기되어 전하는 백제 유일의 노래이다. 노래는 <악학궤범>에, 배경설화는
<고려사>에 각각 전한다. 본문에 실은 [박제상 설화]는 [정읍사]와 관련된 망부석(望夫石) 설화이다.
<高麗史>에 나와 있는 [井邑詞]에 관한 설화와 시는
정읍은 전주의 속현이다. 정읍 사람이 행상을 나가서 오래 되어도 돌아오지 않으니, 그 아내가 산 위에 있는 돌에
올라가서 바라보았다. 그녀는 남편이 밤길을 가다 해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진흙물의 더러움에 부쳐서 이 노래를
불렀다. 세상에 전하기는 고개에 올라가 남편을 바라본 돌이 있다고 한다.
望夫石의 悲曲 井邑詞
어느 행상의 아내
달하 노피곰 도다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져재 녀러신고요
어긔야 즌 데를 드데욜셰라 .
어긔야 어강됴리
어느이다 노코시라.
어긔야 내 가논 데 졈그랄셰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현대어 풀이 >
달님이시여 높이 높이 돋으시어
멀리멀리 비춰주소서.
시장에 가계시는지요.
위험한 곳을 디딜까 두렵습니다.
어느 곳에나 놓으십시오.
당신 가시는 곳에 저물까 두렵습니다
망부사
여성의 한(恨)이 서려 있는 망부석(望夫石)과 결부되어 있는 정읍사는 우선 2단락으로 구분할 수 있다.
1단락(달님∼비추어 주십시오)은 하늘에 떠 있는 달을 향한 기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달을 부르는 것은 어두운 밤을
환하게 밝혀 주는 기능을 달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남편이 다니는 밤길이 항상 환하기를 기원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2단락(저자∼ 저물까 두렵구나)은 남편이 다니고 있을 현실의 모습이다. 따라서 1단락의 주체는 남편
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이상적인 세계와 현실의 세계로 구분되며, 광활한 곳과 국지적(局地的)인 곳, 밝은 곳과
어두운 곳, 하늘과 땅으로 대립되기도 한다.
달의 광명과 광대함이 남편이 다니는 '저무는 시간'과 '진흙탕을'비추기를 기원하는 화해에서 비롯된다. 즉 달의 이상
적 세계와 남편의 현실적 세계가 일치되기를 도모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현실의 암흑과 비극적 상황은 이상적
상황의 밝음으로 환치(換置)되어 임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하고 있는 것이다.
이 노래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행상 나간 남편을 걱정하는 아내의 순박한 정서를 달에 의탁하여 노래한 것,
여성의 육체를 노래한 남녀 상열의 음란한 노래,
행상 나간 남편이 혹시 화류계에 빠지지나 않을까 우려하는 아내의 심경표현,
<중중실록>에 의하며, 이 노래는 [동동(動動)]과 함께 중종 때 조신들에 의해 남녀간의 음사(淫詞)라 하여 궁중 음악
에서 폐기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소재素材의 상징성象徵性
돌은 神話的으로는 神格化된 인물이 태어나는 生命力을 상징한다. 금와의 출생이 그 예다. 무속에서는 神格化되어
치성의 대상이 되어 있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들이 소원을 간구하는 기자암(祈子巖)은 그런 의미에 남근(男根)적
상징이 보태진 결과이다. 문학에서는 고난을 이기는 의지, 불변, 강력함 등의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다른 작품과의 관련성
이 노래는 삼국속악(三國俗樂)의 하나로 전승되어 고려와 조선을 통하여 무고(舞鼓)와 함께 불리어졌고, 특히 조선
에 와서는 궁중에서 연주되어 악학궤범(樂學軌範)에 채록되었다. 전통적 여인상으로서의 서정적 자아가 등장하는
것으로 고려 속요 가시리, 황진이의 시조, 김소월(金素月)의 진달래꽃에 이어진다. 또 달과의 관련에서는 향가 원
왕생가도 이와 관련이 있다. 한편 박제상 설화와 관련하여, 이를 소재로 지은 노래가 치술령곡이다. 또 볼모로 갔던
왕자를 맞이한 눌지왕(訥祗王)이 축하연에서 손수 지어 불렀다는 우식곡(優息曲)'이 부전 가요로 제목만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