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론의 결론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3:19-20).
본문은 죄론의 결론(結論)이면서, 21절부터 말씀할 복음에 대한 서론(序論)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론에서 복음으로 넘어오는 교량(橋梁)역할을 해주고 있습니다.
사도는 1:18절로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죄론을 말씀했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말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은 마치 치료하기 위해서 진찰부터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19절 말씀을 보면 의사 앞에 서 있는 환자의 모습이 아니라, 재판 석에 끌려온 어느 피고인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 사람이 앞에서 말씀한 “이방인이든, 도덕주의자이든, 아니면 유대인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그에 대한 논고(論告)가 시작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① “우리가 알거니와 율법이 말하는 바는”(19상) 하고, 율법이 말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 율법은 마치 논고하는 검사(檢事)와도 같습니다. 그의 죄상을 낱낱이 진술한 후에, 법조문에 의해서 추상같은 구형을 합니다. 재판장은 피고에게 묻습니다. “그대는 할 말이 있는가?” 이에 대해 성경은 무엇이라 말씀하고 있습니까?
② “모든 입을 막고”(19중), 즉 유구무언(有口無言)이라는 것입니다.
㉠ 이방인이든, 도덕주의자이든, 유대인이든, 모든 입이 그 앞에서는 열리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 다른 곳에서는 “그대는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왔느냐” 하는 질문에, “유구무언이거늘”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못하고 선고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함이라”(19하)의 뜻입니다. 형제는 이 사람에게 어떤 선고가 내려질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③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20) 합니다.
㉠ 율법이 있는 유대인은 말할 것도 없고,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도 마음에 새겨진 양심이 율법이 되어 그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사형에 해당한다” (1:32), 즉 죄 값은 사망인 것입니다.
㉡ 여기서 중요한 점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점을 놓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20절에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 하고 말씀하는데, 누가 보기에 그렇다는 것입니까? “그의 앞에서”, 곧 하나님 앞에서입니다. 사람 앞에서가 아닙니다. 19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인본주의에 뿌리 깊이 박혀 있어서, “내가 이 정도면 그래도 괜찮은 편인데”,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아닙니다.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입니다.
④ 그래서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하고 말씀합니다.
㉠ 여기에는 세 가지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첫째는 율법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하는 율법의 역할입니다. 그것은 죄를 깨닫게 해줍니다.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죄인 줄을 모르게 됩니다.
㉯ 둘째는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것은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못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사람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하는 일을 못합니다.
㉰ 그러면 셋째로 율법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의롭게 해주실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일을 해줍니다. 이를 몽학성생(갈 3:24)이라고 말씀합니다. 율법은 거울과 같습니다. 율법을 통해서 죄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거울은 더러움을 씻어주지는 못하듯이, 율법은 의롭다함을 주지를 못합니다.
㉡ 그런데 성경을 상고하다 보면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알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분명히 잘못하고 있는데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 3:17) 하십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 4:6), 즉 알지 못해서 멸망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알기만 하면 해결책은 하나님이 마련해주셨는데 말입니다.
⑤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다는 점은, 율법을 주신 시내산 현장에서 이미 명명백백하게 드러난 사실입니다.
㉠ 그들은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遵行)하리이다”(출 24:3, 7) 하고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돌비는 그 현장에서 깨어지고(출 32:19) 말았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씀해주고 있는가? 자력구원의 불가능성입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 하였느니라”(10:3) 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몰랐다는 것은, 결국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몰랐다는 말입니다.
㉡ 구약성경이 어찌하여 이토록 분량(分量)이 많은 줄 아십니까? 두 가지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 첫째는 “나를 증거함이라” 하신,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고,
㉯ 둘째는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한,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를 깨닫기만 하면 구원에 이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다니, 구약성경의 분량이 너무 적기 때문이란 말인가?
㉢ 그러므로 율법의 한계는 로마서 7:24절까지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고, “누가, 누가” 하고, 구원자 그리스도를 찾게 하는 데까지입니다. “누가 나를, 누가 나를…” 하고 비명을 지를 때에 주님은 구원의 손을 뻗히시는 것입니다.
⑥ 형제여, 이제까지의 죄론을 통하여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철저하게 깨달으셨습니까?
㉠ 사도는 인간의 연약과, 전적 무능에 대해서 7장에 가서 더욱 철저하게 파헤칠 것입니다.
㉮ 율법의 속박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진리가 자유케 하심을 모릅니다.
㉯ 율법의 정죄를 받아 보지 못한 사람은, 의롭다하심의 감격을 모릅니다.
㉰ 율법으로 인하여 만신창이가 되어보지 못한 사람은, 치료의 광선을 발하는 복음의 기쁨을 모릅니다.
㉡ 그래서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율법을 먼저 주셨습니다. 복음을 전하기에 앞서 죄론을 먼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사형선고를 받으시겠습니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의”를 받으시겠습니까? 이것이 “죄론과, 복음의 연결고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