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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스크랩 영국의 스튜어트(Stuart)왕조(5) - 청교도혁명(3)
임광자 추천 0 조회 142 08.05.09 08:3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영국의 스튜어트(Stuart) 왕조(5) - 청교도 혁명(3)

 

(8) 영국에서의 공화정, 코먼웰스(Commonwealth)의 성립

 

영국 의사당국왕의 처형으로 혁명은 다시 가속도를붙이기 시작했다.

 

그해 3월 독립파가 독점하고 있던 잔부의회에서는 왕정과 귀족원(상원)의 폐지를 선언했다.

 

국왕이란 국민들에게 부담만 될 뿐, 자유, 안전, 공공이익에 대해서는 오히려 방해가 되며, 군주의 둘러리에 불과한 귀족원(상원) 역시 백해무익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그리고 올리브.크롬웰은 1649년 5월19일 영국을 "공화국인 동시에 자유국(Commonwealth and Free state)"이라 선언함으로써 의회가 주권을 행사하는 공화정(Commonwealth)을 선언했다. 이런 영국의 태도에 이웃이 그냥 있을리는 없다.

 

왕자는(후일 찰스 2세) 네덜란드로 망명해서 스코틀랜드 및 아일랜드의 지지를 얻고 재기를 노리고 있었으며, 국내의 왕당파 세력들 역시 왕자와 연결해서 비밀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위협적인 것은 아일랜드였고, 이를 정복하고자 했을 때, 수평파의 사병들이 아일랜드 원정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유는 독립파의 독재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크롬웰의 독립파에서는 존 릴번을 비롯한 이들 수평파의 지도자들을 모조리 체포하여 군법회의에 회부, 총살형에 처했다. 이래서 수평파는 그 수명을 다하고 말았다.

 

이제 남은 것은 독립파 하나, 이에 약삭빠른 런던의 대상인들은 공화정 성립을 축하하는 축제를 베풀고, 크롬웰에게는 황금을 바쳤다(1649.6) 이래서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영국역사에서 전무 후무한 공화정, 코먼웰스가 성립되었다(1649~ 53). 동시에 청교도 혁명의 의의는 상실되었으며 영국 민주주의는 새로운 독재자에 의해서 위기를 맞게 되었다.

 

공화정 성립의 축제를 마친 크롬웰은 그의 군대를 지휘해서 아일랜드에 원정, 더블린(Dublin) 북쪽의 드로에다(Drogheda)와 남쪽의 웩스퍼드(Wexford)등을 삽시간에 유린하고, 시민들을 무차별 학살하였으며, 승려들을 보는대로 잡아죽였다. 이래서 아일랜드는 크롬웰과 그의 영국을 영원히 저주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1650년 5월 네덜란드에 있던 왕자(찰스 2세)가 스코틀랜드와 결탁, 수상쩍은 징후가 나타나자 크롬웰은 아일랜드를 부하에게 맡기고 귀국하였다.

 

찰스 왕자는 그가 계획했던대로 스코틀랜드로 가서 병력을 모아 1651년 9월 잉글랜드에 침입했으나, 우스터(Worcester)에서 크롬웰 군에게 대패하였고 ,왕자는 변장해서 프랑스로 탈주하였다. 이 사건 이후 스코틀랜드는 영국에 순종했다. 이렇게 해서 영국에 대한 직접적인 외세는 모두 제거되었다.

 

(9) 호국경 크롬웰의 군사독재

 

아일랜드이제 남은 것은 이른바 잔부의회(殘部議會/ Lump Parliament), 크롬웰의 개혁에는 관심이 없었고, 자기들의 권력 유지에만 집착, 혁명 초기에는 크롬웰의 세력 기반이기도 했던 이 잔부의회가 이제는 커다란 짐이 되고 있었다.

 

크롬웰이 스코틀랜드에 원정 중에 잔부의회에서는 일부상인들과 야합해서 항해조례를 심의하다가 네덜란드와 전쟁을 초래하였다.

 

이렇게 되자 이번에는 네덜란드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해군을 증강하여야 하고, 군비부담을 줄이기 위해서 육군을 감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에 육군측에서 반발하였고, 의회와 육군이 정면으로 대결하게 되었다.

 

입장이 난처해진 크롬웰은 양측의 타협을 모색했으나, 의견 차이를 좁힐 수는 없었고, 관망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었다. 육군측에서는 크롬웰의 확실한 태도를 요구하며,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추방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결국 크롬웰은 결단을 내렸다. 말 많은 의회보다는 힘있는 군대와 손을 잡고, 1653년 4월, 크롬웰은 무력으로 의회를 해산해 버렸다.

 

이래서 1640년 11월, 찰스 1세에 의해서 소집되었던 이른바 장기의회는 이제까지 겨우 명맥을 유지하다가 13년 만에 문을 닫았고, 코먼웰스(공화정)도 무너졌다. 그리고 무력에 의한 폭력이 지배하는 살벌한 세상으로 변해 갔다.

 

그러나 크롬웰과 그의 군대가 무력과 폭력만을 쓸수는 없었다. 그것은 제 5왕국파(Fifth Monarchy Men)라고 부르는 신비주의적인 청교도집단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이 광신적인 청교도 집단은 "지상에서는 4개의 왕국이 혁명에 의해서 멸망하고, 신이 직접 지배하는 제 5의 왕국이 도래한다"고 믿고, 그 준비의 단계로 부패와 타락으로 전락한 잔부의회를 공격하고, 쿠데타를 이미 모의하고 있었다.

 

결국 크롬웰은 "신의 영광을 이 지상에...."라는그의 종교적인 열정과, 현실적으로 힘을 가진 군대와 이 광신적인 청교도들과 손을잡고, 잔부의회를 해산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의회없이 국정을 수행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만들에 낸 것이 이른바 지명의회(指名議會 / Little Nominated Parliament), 각 주(州)의 독립파 교회 및 군의 장교 회의가 인정하는 성자(聖者)라고 불리는 사람들, 이를테면 신앙이 두텁고, 신을 두려워 하며, 탐욕을 싫어하는 사람들을 추천으로 뽑아 의회를 구성하였다.

 

성자와 칼(군대)이 만나 세상을 다스리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사회가 크게 발전되었고 잡다한 직종이 망라된 사회체제를 특정 정치집단이 독점하겠다는 발상은 그 자체가 독재 이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만 극명하게보여 주었을 뿐, 그들이 이상적으로 구성했다는 지명의회도 구성된지 반년을 채 못넘기고 해산되고 말았다(53. 12).

 

그것은 지명의회를 구성한 사람들의 사회적인 신분이 낮은데다가 수평파의 잔존세력이 많았고, 이들은 당연히 그전에 수평파에서 추진했다가 실패한 사회개혁을 다시 추진코자 하였다. 그러자 다시 군대가 반발하였고, 이에겁을 먹은 지명의회가 자진해서 해산한 것이다.

 

서부 런던지명의회가 해산된 후, 군 장교회의 대표들은1653년 12월, 런던 시민 앞에서 통치장전(通治章典 / Instrument of Government)을 발표하고, 그들의 총사령관 올리브 크롬웰을 호국경(護國卿 / Lord Protector)의 자리에 앉힌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영국 역사상 최초의 성문(成文)헌법이라고 말하는 통치장전은 호국경을 사실상 독재자로 군림케 했다. 이래서 영국은 군대와 이들에 의해서 추대된 호국경이 지배하는 독재체제로 들어가게 되었다.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고, 자유를 얻기 위해 혁명이라는수단을 통해서 국왕을 처형하고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지만, 돌아온 것은 독재라는 함정이었다. 여기에 수평파와 왕당파의 잔존세력이 시민들의 불만을 등에 업고 준동할 기미를 보이자, 크롬웰의 독재정은 이를 탄압해야 되는 강경책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독재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군대의 힘으로 더 지독한 독재를 해야 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크롬웰 정권은 1656년 전국을 11개의 군관구(軍管區)로 나누고, 각 군관구에는 군대를 배치하고, 군정관의 지휘에 따라 행정을 수행하게 하였다. 무력에 의해서 정권은 유지되고 있었지만, 다시 불거진 문제는 돈이었다. 오랜 내우외환(內憂外患)을 치루면서 발생한 재정 수요(需要)를, 그들의 반대세력인 왕실과 국교회, 왕당파 등의 사유재산을 몰수, 처분하여 그럭저럭 메꾸어 왔으나이것도 바닥이 나고 말았다.

 

이래서 같은 해 의회를 다시 소집하고 재정난 타개를 위한 의론(議論)을 했지만, 문제가 쉽게 풀리지 못하였고, 1657년 1월에는 크롬웰 암살미수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당황한 것은 오히려 의회였다. 그가 죽은후 나타날 혼란이 두려웠던 것이다.

 

영국의회는 그에게 왕관을 씌워주고, 일반적인 영국법, 즉 코먼 로(Common Law / 普通法)에 의한 왕정 복고가 훨씬 마음 편하다는 것을 감지하고,"겸허한 청원과 권고 / Humble Petition and Advice /謙虛 - 請願 - 勸告)라는 이름의 헌법을 1657년 3월에 가결하고, 크롬웰에게 왕위에 오를 것을 권고하였다.

 

웨스트민스트 사원 내부그러나 당사자인 크롬웰이 이를 거부하였다. 골치 아픈 코먼 로의 지배를 받는 것 보다는 지금의 독재가 훨씬마음 편했던 것인지,

 

아니면 공화정 말기의 로마제국에서 왕위에 오르려다가 암살당한 카이사르의 전철이 두렵게 느껴졌는지 그 이유는 본인이 입을 다물고 있는 이상알 길이 없었다.

 

같은 해 6월에는 의회가 개헌을 통하여 그에게 후계자 지명권을 인정하였고 의회는 다시 상, 하 양원제를 채택하는 의안을 가결하였으나, 크롬웰은 의회를 해산해 버리고, 군대의 주요 지휘관들을 불러 충성을 서약하게 하여, 독재자로서의 위치와 면모를 다시 확인하였다.

 

그러나 인명은 재천, 1658년 9월, 폭풍우가 런던을 강타한 가운데 그에게 닥친 독감(毒感)은 59세의 그의 생명을 빼앗아 갔다. 7주 되 국장(國葬)이 거행되었고, 그의 유해는 웨스트 민스트 사원(Westminster Abbey)에 안장(安葬)되었다.

 

올리브 크롬웰의 3남 리차드 크롬웰(Richard Cromwell/ 1626 ~ 1712)이 뒤를 이어 호국경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의회와 군대가 대립하고, 군대 내에서 분열이 일어나는 등 사태가 심각해 지자 1659년 5월, 스스로 호국경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크롬웰家의 영국지배는 끝났다.

 

절대권력이 무너지고, 힘의 공백이 나타나자 이번에는 군사 독재자 램버트(John Lambert / 1619 ~ 1684)가 의회를 해산하고 리차드 크롬웰을 타도한 공적을 앞세워 군사독재를 계속하려 하였다.

 

그러자 국내에선 보수적인 장로파가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였고, 올리브 크롬웰에 의해서 스코틀랜드 파견군 사령관으로 있었던 멍크(GeorgeMonck / 1st Duke of Albemarle / 1608 ~ 1670.1.3)가 의회의 자유를 부활 시키겠다면서 군사 정권에 반기를 들고 런던으로 향했다.

 

1660년 2월, 런던으로 들어온 멍크의 군대는 램버트일파를 추방하여 독립파는 졸지에 몰락하고, 세상은 멍크와 그를 지지하는 장로파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들은 네덜란드에 망명 중인 찰스 2세와 밀통하고 왕정복고를 서둘렀다. 그렇다면 청교도 혁명은 여기서 실패로 막을 내렸는가? 그 파장은 다음장으로 이어진다.

 

 

The Sun is Burning / Simon & Garfunkel

다음 이야기 - 루이 14세와 프랑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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