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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20일 주일설교
제목: 유사교회를 경계하라.
출25:31-40, 계1:20
I. 들어가는 말
드디어 오늘 세 분 장로님들께서 안수를 받으시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교회로서는 기쁨의 축제인 것이지요. 왜 장로가 세워지는 일이 이렇게 의미가 있는 일이겠습니까? 딤전3:15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안수를 받아 세움을 받는 사람들은 진리의 기둥과 터를 지키는 역할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역할이 왜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까? 이 땅에 진리의 기둥을 뿌리 채 뽑아내려는 세력이 점점 강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도 sbs TV ‘그것이 알고 싶다’라는 프로에서 교회와 관련된 추접스러운 사건이 고발되었더군요. 가난한 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고, 영력이 뛰어나서 병도 잘 고치는 목사로 TV에서 소개한 목사의 이면을 봤더니 다 거짓말이더라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그 목사는 영력이 뛰어난 목사 덕 좀 보자고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던 사람들의 재산을 가로채서 어디론가 도망가 버렸습니다. 잘 살자 보자고, 질병 없이 건강하게 살아보자고 그 목사를 추종했는데, 오히려 패가망신 당하고 만 것입니다.
왜 그렇게 속아 넘어갑니까? 진짜 교회와 짝퉁 교회가 구별이 안 가서 그런 거예요. 매장에 짝퉁과 진품을 같이 놓고 팔면 어느 것이 더 잘 팔리겠습니까? 짝퉁이 훨씬 잘 팔립니다. 왜지요? 모양은 똑같은데, 값이 비교가 안 될 만큼 저렴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명품과 짝퉁을 구별할 줄 아는 사람은 비싼 값을 치르고라도 명품을 사겠죠. 그러나 그런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이 현실이잖아요.
영적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를 지키며 살아가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런데, oo 교회라 이름 붙이고, 십자가 더 화려하게 내 걸고 있지만, 진리를 슬쩍 빼 놓고 병 고침, 축복기도, 예언, 등을 강조하면서 사람들을 끌어 모으면 순식간에 부흥합니다. 엄청나게 몰려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걸 보면서 진짜 교회들이 슬그머니 그 수법들을 하나 둘 씩 흉내 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꿩 잡는 게 매다’라는 거죠. ‘설교를 해도 들을 사람이 있어야 할 거 아니냐?’는 논리도 성행합니다. 나중에는 ‘이왕이면 더 많은 사람들이 들으면 더 좋잖아?’로 정당화 됩니다. 그러니까 일반 성도들이 진짜와 짝퉁을 구별할 수 없게 된 거예요.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렘5:1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리라.”
왜, 한 사람입니까? 多多益善,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 아닙니까? 하나님은 아시는 거예요. 우리 인간이 진리를 지키며 살기도 힘들지만, 진리를 찾고자 하는 마음을 갖기도 힘든 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만 찾아내면, 이스라엘이, 유다가 지은 그 엄청난 죄를 다 덮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못 찾게 되자 하나님의 아들이 오신 거잖아요.
이와 마찬가지로 어느 한 교회가 진리의 말씀 위에 바로 서게 되면, 그 교회로 인해서 많은 생명이 사는 것입니다. 크든 작든, 진짜 교회의 모습을 가진 교회가 세워지게 되면, 누군가는 진짜와 짝퉁을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을 같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세움을 받은 장로님들이 생명을 받쳐서 지켜나가야 할 진짜 교회는 어떤 교회이겠습니까? 즉, 진짜 교회의 조건이 무엇이어야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II. 교회는 빛이다.
하나님은 애굽으로부터 해방된 이스라엘이 시내 산에 도착했을 때, 모세에게 성막을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성막 안에는 성소와 지성소가 있었습니다. 왜 이것을 지으라고 하셨을까요? 출25:22만 봅니다.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애굽에서 해방된 이스라엘은 정서적으로나 체계적으로 아직도 노예근성을 벗어나지 못해서 무기력합니다. 그들이 목적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함께 계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나주시는 성막을 짓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 성막 안에는 여러 가지 물건들이 있었습니다. 모두가 교회와 관련된 것들입니다. 아직 영적으로 미숙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장차 세워질 교회가 어떠한 것인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 시청각 자료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죠. 그 중에서 오늘 본문은 등잔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등잔대는 신약성경에서 명백하게 교회를 비유한 것임을 가르쳐 줍니다. 계1:20.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등잔대나 촛대라고 이름이 바뀌었지만, 그 숫자와 모양은 동일합니다. 계시록에도 일곱 촛대이고, 본문 32절을 보면, 가운데 하나, 그리고 좌우에 각각 세 개씩 해서 모두 일곱 개의 등잔이 제시되고 있지요. 등잔이나 촛대나 그것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그것은 빛을 비추는 기능입니다. 왜 교회를 등잔대에 비유합니까? 마5:14을 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지 못할 것이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타락한 세상은 영적으로 어둡고, 빛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먼저 받고 알게 된 자들은 그 말씀의 빛을 세상에 비추어 어둠에서 길을 찾는 사람들에게 빛의 역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게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어 교회를 세우게 하신 이유가 되는 것이지요.
교회의 역사를 보면, 교회가 이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면 찬란하게 빛이 납니다. 그런데, 주후 4세기부터 종교개혁 때까지 무려 1천년간 암흑기를 겪은 적도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교회가 진리를 버리고 짝퉁의 흉내를 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으로부터 496년 전, 즉 주후 1517년에 마티 루터가 교회의 진리를 찾아내어 95개조로 요약해서 반박문을 비텐베르그 대학의 성당에 붙이면서 작은 불꽃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하게 될 때까지 그야말로 세상은 암흑천지였던 것입니다.
그 불꽃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 지 아직 500년도 안 지났습니다. 이 작은 불꽃이 불씨가 되어 한국으로 옮겨 붙은 지 150년이 채 되지 않은 지금, 한반도의 북쪽 반쪽은 완전한 어둠에 싸여 있고, 그곳을 밝혀야할 책임이 있는 남한의 교회들은 사명 감당을 위해 불꽃을 활활 피우기는커녕 점점 꺼져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않는지 걱정해야 될 지경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출27:20-21에서 아론의 아들들, 즉 성소를 출입하는 제사장들에게 등불이 항상 꺼지지 않도록 하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예수님께서 자기의 몸을 바쳐 성전의 휘장을 찢으심으로 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이 제사장이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만인제사장 설이라고 하죠. 그렇다면, 등잔의 불을 밝혀야 되는 역할은 바로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인 것입니다.
장로님들은 딤전3:15의 말씀에 의하면 등잔불이 꺼지지 않도록, 즉 진리의 기둥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켜야 하는 선봉장 역할을 맡게 되는 것입니다. 마5:16을 보겠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세워지는 장로님들이 이 역할, 빛을 비추는 역할을 생명을 바쳐 감당하신다면, 장로님들이 안수를 받고 세워지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에는 기뻐하고 축하해야할 만큼 큰 축복이 되겠지요.
II. 빛을 비추는 교회의 조건
그러면 어떻게 해야 진리의 기둥이 무너지지 않고, 불꽃이 꺼지지 않도록 지켜낼 수가 있겠습니까?
1. 하나된 교회(31) “그 밑판과 줄기와 진과 꽃받침과 꽃을 한 덩이로 연결하고”
등은 일곱 개의 등잔으로 되어 있지만, 그 모두는 밑판서부터 각각의 등잔까지 한 덩이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38절은 “불 집게와 불 똥 그릇도 순금으로 만들지니” 이 두 구절은 교회의 성격을 가장 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엡4:4-6를 보지요.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오.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한 몸임을 강조하면서도 왜 일곱 개를 만드셨을까요? 39절 말씀에서 보듯이 순금 한 달란트면, 대략 50kg 쯤 됩니다. 그 양이 얼마나 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냥 하나의 거대한 등잔대를 만들면 더 멋있고, 웅장하지 않을까요?
여러분은 회초리의 우화를 알고 계실 것입니다. 서로 쌈박질만 하는 아들 셋을 가진 아버지가 임종하게 되었습니다. 아들들이 걱정이 되어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회초리를 몇 개씩 준비해 오라고 하죠. 그리고 아들들에게 하나씩 꺾어 보라고 합니다. 아주 쉽게 꺾였습니다. 그 다음에는 세 개를 묶어서 꺾어 보라고 했습니다. 아무도 성공하지 못하죠. 그렇습니다. 큰 것 하나보다는 오히려 작은 것 여러 개가 더 강하다는 것입니다. 하나가 꺼지면 다른 하나가 불꽃을 옮겨 주어 다시 살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등잔을 보면, 맨 아래에서 올라오는 좌우 두 줄기의 등잔대는 길이가 깁니다. 금도 더 많이 들어가겠죠. 가장 안쪽의 짧은 두 등잔대는 가장 초라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 몸입니다. 서로 멸시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관계일 뿐만 아니라, 맘에 안 든다고 해서 떼어 놀 수도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7이라는 숫자는 완전함을 의미합니다. 즉, 계시록에서 일곱 촛대로 비유되는 일곱 교회는 세상의 모든 교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교회들은 모두 같은 뿌리에서 나온 한 몸이라는 뜻입니다. 누군가 이것을 부정하는 순간, 그 사람이나 교회는 짝퉁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등잔에 불을 켜다보면, 불똥이 남습니다. 누군가는 그것을 치워야 되겠지요. 그 허접한 일을 감당하는 불 똥 그릇도 순금입니다. 불집게도 순금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무엇을 하든지, 그가 어떤 사람이든지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에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는 말입니다.
초대교회는 국가와 민족이 달랐어도 서로가 하나라는 것을 인식했다. 고전16:1-4를 보면, 갈라디아 교회, 고린도 교회가 연보를 하여 가난한 예루살렘 교회를 도운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교회는 민족이 같고, 같은 나라 안에 있으면서도 서로 하나 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오늘날 한국교회가 세상의 어둠을 밝히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가장 큰 이유는 서로 하나 되지 못한 것 때문이라고 본다. 예수 믿는 자들의 평생 기도제목이다.
우리가 꺼지지 않기 위해서 다른 지체들과 하나 됨을 유지해야 합니다. 나 혼자 비추는 빛보다 둘이, 셋이 비추는 빛은 더 멀리, 더 환하게 비출 수가 있습니다. 장로님들은 이제 교회 안의 문제 뿐 아니라, 교회 밖의 일도 신경 쓰게 되실 것입니다. 우선 한국노회에 정회원이 되십니다. 그리고 아시아 선교협의회에 대표로 참석도 하셔야 합니다.
일을 하다보면, 싫은 사람도 만나고, 경우가 없는 경우도 겪게 됩니다. 어쩌다 만나는 사이이다 보니, 서로 오해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그러나, 교회의 정체성을 기억한다면, 어떻게 해서든 하나 됨이 훼손되지 않도록 지켜내는 일에 앞장을 서야 할 것입니다.
2.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교회(31, 36) “순금으로 등잔대를 쳐 만들되”
등잔대는 금을 녹여서 틀에 부어 만들어서는 아니 되었습니다. 39절 말씀처럼 순금 한 달란트, 약 50kg의 금 덩어리 하나를 망치로 두들겨서 모양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고난을 통과하여 세워지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교회가 세상에서 진리를 지키고자 하면,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예 수님은 요15:20에서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박해를 받으셨습니까? 눅5:30을 보면,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고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들, 즉 권력자들 편에서 서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은 당대의 대세들을 외면한 것입니까? 그들이 진리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교회가 힘이 생겼는데, 왜 지지리 궁상을 떨어야 하느냐고 반문하기도 합니다. 해답은 고후4:7에 있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일은 세상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세상적인 힘인 돈과 권력, 그리고 세상 지식으로 일을 하려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함께 하시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진리 때문에 고난 당하거나, 손해를 본다고 해서 죽지는 않습니다. 고전10:13을 보지요.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즉, 진리 때문에 겪는 고난이나, 손해는 훈련이라는 것입니다. 전쟁 때는 싸우다 죽기도 합니다. 그러나 전쟁을 대비해서 훈련을 하는 동안에는 아무리 힘들어도 죽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심한 훈련을 시킵니까? ‘훈련에서 땀 한 방울이 실전에서는 피 한 방울’이라고 합니다. 실전에서 죽지 않으려면 훈련 때, 죽을 때까지 훈련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장로님들에게는 막중한 사명이 주어집니다. ‘진리 편에 설 것이냐, 아니면 실리 편에 설 것이냐’ 호세아 4:7을 보면, “그들은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그들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실리 편에 서서 많은 이득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그것은 악행이었습니다. 그래서 망했습니다.
성소에 켜 있었던 등잔불은 제사장이 움직일 때마다 불꽃이 일렁였습니다. 부주의해서 크게 움직이면 옷이 펄럭이는 동작에 7개의 불꽃 중 하나는 꺼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교회일을 하다보면,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일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것은 교회가 살아있기 때문에 당하는 당연한 일이지요. 박물관에 전시된 등잔대는 몇십 년이 지나도 항상 그대로입니다. 낡지도 않고, 부서지지도 않고, 때가 타지도 않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가 살아 있는 교회라면 많은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때마다, 세 분 장로님들께서 세상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 앞에서의 진리를 지키시는 선봉장들이 되어 주시면, 교회와 모든 성도가 바른 길을 가는 자의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3. 성령의 공급이 끊이지 않는 교회(27:20)
성소 안에 비치된 기구들 중에서 그 기능이 어느 때나 살아 있어야 하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떡상이다. 12덩이의 떡은 항상 진열되어 있어야 했습니다. 또 하나가 바로, 등잔이지요. 27:20하 제사장들은 “끊이지 않게 등불을 켜되” 꺼지지 않게 돌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공급해야 했습니다.
성경에서 기름은 성령의 역사를 비유하고 있지요. 주님은 눅11:13에서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간절하게 성령의 임재를 원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아낌없이 부어주실 것입니다. 등잔의 불이 꺼지는 것은 기름이 다 닳았기 때문인 것처럼, 교회가 세상에 빛을 비추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성령께서 공급하시는 영적 생명이 고갈되었기 때문입니다.
왜 교회에 성령의 역사가 끊어지는 것입니까? 교회가 더 이상 간절하게 성령의 임재를 원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죠?
첫째는, 가진 게 많아지다 보니 더 이상 하나님께 의지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순수한 감람기름을 얻는 것이 쉽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엉터리 기름을 사용할 수도 있었겠죠. 사람은 한 번 편한 방법에 길들여지면, 복잡하고 번거로운 일은 안 하게 됩니다. 손쉽게 구할 기름이 있는데, 그것으로도 불은 얼마든지 밝힐 수 있는데 뭐 하러 비효율적으로 순수한 감람유만 찾아야 합니까?
가진 게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교회 일도 돈이 필요합니다. 세상 재물로 엄청나게 화려한 교회를 지으면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굳이 성령님께서 간섭하실 일이 없다고 생각되는 거죠. 로버트 슐러 목사가 세운 미국의 수정교회는 1만개의 유리로 외부를 장식한 멋진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2010년에 부도가 나서 결국 로마 카톨릭에서 가져가 버렸습니다. 그 슐러 목사를 추종하는 분이 강남의 대형 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는데 슐러 목사 흉내를 내면서 곤혹을 치루고 있습니다. 세상적인 방법으로 빛을 내려고 할 때, 하나님이 손을 떼십니다.
둘째는, 하나님께 얻을 게 없다보니, 하나님의 간섭이 귀찮아 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본능적으로 싫어하는 것들을 명령하셨습니다. 진실하게 행하라. 낮아져라. 겸손하라. 원수를 사랑하라. 가난한 자, 과부와 고아들, 그리고 나그네와 같은 소외된 자를 돌보라. 선교하라. 전도하라 등등, 하나같이 귀를 막고 싶은 것들뿐입니다. 필요하다면 박사학위도 적당히 받고, 필요하다면, 슬그머니 세상권력과 뒷구멍 거래도 마다하지 않게 되겠지요.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의 개입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종교적 특권은 로마 황제가 보장해 주었고, 성전을 중심으로 하나님 이름만 팔아도 엄청난 부와 명예가 확보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순수한 하나님 말씀에 불순물을 섞는 것입니다. 소위 ‘장로들의 전통’이라는 것입니다.
왜 순수한 감람 기름이어야 했을까요? 돼지기름처럼 손쉽게 얻어지는 것을 사용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순수한 감람기름을 얻자면 감람열매를 쥐어짜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거르고 또 걸러서 불순물을 다 빼낸 다음에 얻어지는 것이죠. 이것은 애통하는 기도를 말하는 것이죠. 성령님으로부터 영적 생명을 끊임없이 공급받으려면,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주 작은 죄라도 회개해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진리의 불꽃을 활활 피워내는 장로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IV. app. & conclusion
본문 마지막 절 40절을 읽습니다.
“너는 삼가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양식대로 할지니라”
교회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구성되어야 하며,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움직여야 합니다. 모든 교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에서 무릅을 꿇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가 됩니다. 빛은 어두운 곳에 있어야 더 가치가 있습니다. 소외된 자, 박해받는 자들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 편에서 세상과 맞서 싸우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총 칼 들고 싸우라는 것이 아니지요. 주님의 무한한 사랑을 가지고 악의와 증오와 저주가 판을 치는 세상을 감싸 안으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쉬지 말고 기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령의 공급이 끊기면, 세상 것으로 더러운 불을 피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 순간 교회는 짝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양식이 항상 공급되는 제일 컴벌랜드 장로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