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가 끝난 들판이 동토로 변하는 것은 삽시간이다. 명년에 찾아올 봄의 파종 시기도 삽시간이고 보면 그 삽시간 틈새에 가을갈이를 해놓는 것은 좋다. 좋다는 걸 뉘가 모르는가, 소를 빌리는게 문제였다. 아무튼 용이는 소를 빌렸고 가을갈이를 하고 있었다. 나뭇잎을 다 털어낸 발둑의 고목이 엷어진 햇살을 엉거주춤 받고 있다. 쇠꼬리가 흔들릴 때마다 쟁기는 앞으로 쑥쑥 빠져가고 검게 기름진 흙이 이쪽저쪽으로 갈라지며서 흩어진다. 밭둑을 넘어 발 끝을 넘어 밭을 밟고서 "이랴! 이랴!" 소가 되돌아오면은 쟁기도 방향을 돌려 오던 길을 되돌아가는데 이러기를 몇 차례인가. 밭둑에 밋밋이 서 있는 고목 한 그루갈이 용의 모습도 그러하다. 밋밋이하고 물기 빠진, 나무는 동면으로 들어 갔을 테지만 용이의 끝없이 되풀이되는 움직임만 같으다. 가끔 야트막한 둑길을 길손이 지나가고 멀리 쟁기질하는 농부가 한둘 눈에 띄기도 한다. 밭 이 끝에서 저 끝으로 저 끝에서 이 끝으로 되풀이되는 쟁기질, 회뿌연 해는 중천에서 기울고 밭둑길을 밟고 멀리서 임이네가 점심을 이고 온다. 쟁기질을 하는 용이와 점심을 이고 오는 임이네의 거리는 가까워지지만. "점심 가지고 왔소." 용이는 말이 없고 거들떠보지 않는다. 발 끝까지 소를 몰고 간 뒤 소에서 쟁기를 풀고 둑 밑에 박아놓은 말뚝에 소를 맨다. 밭둑으로 올라온 용이는 마른풀을 내려다보며 펄쩍 주저앉는다. 통 속에서 주전자를 꺼내어 술부터 한잔 마시고 다음 조와 콩을 섞은 밥을 먹기 시작한다. 그때까지 장석처럼 서 있던 임이네가 "우떤 사람이 집에 와서 기다리고 있소." "와." "이녁 만나러 왔다 카드마." "그라믄 같이 오지." 아무말 안 한다. 손님은 내버려두고 슬며시 나왔을 거시 틀림없다. "어디서 왔는고?" "용정서 왔다요.": 대답하면서 눈을 흘긴다. "손 왔다는 얘기라도 함께 인심 좋아졌구마." "흥." "그 손님 임자 아들네미가 보낸 사람은 아니든가?" 밥그릇만 내려다보고 밥을 먹으며 묻는다. "뭐라꼬요? 홍이 말이오!" "에미 보고 접다는 전갈이나 아니든가?" "그저, 용정서 사람 왔다는 말마 하믄 붙었던 입도 떨어지고 안하던 농담도 하고 흥!" "..." "그놈이 내 새끼든가? 그년 새끼 다 됐지. 오금 겉은 남으 자식, 생나무 가르듯 빼앗더니, 하늘이 무심하까. 벌받아 벵이 났지." "공부시키지 말고 데리고 오지. 나무나 해 나르게, 그라믄 주머니 돈 몇 닢이 불어나겄지. 못 그래서 분하기야 분할 기구마." "그렇소! 그래요! 내가 낳은 자식 볶아묵든 지져묵든 누가 말할기요!" 용이는 밥을 씹으며 먼 들판으로 눈을 던진다. 도시 마음이라곤 한 오래기도 없는 눈이다. 숟가락을 놓고 숭늉을 마신다. 임이네는 술주전자와 술잔 그리고 고추장 보시기 하나를 남겨놓곤 빈 그릇을 통 속에 챙겨넣는다. "봐라." 밥통을 이고 일어서며 "머 또 할말 있소?" "내가 일하다 들어갈 수 없고 소를 놀릴 수도 없인게 용정서 왔다는 사람 이리 오라고 하지." "답답은 사램이 우물 판다 캅디다. 내가 멋 땜에 그런 심부름 할기요. 흥! 궁둥이가 덜석덜석하겄소." "하모 궁둥이가 와 덜석덜석 안 할 기고. 죽었다믄 재산 정리하러 쫓아갈 기고, 아니믄 누가 아나? 죽기 전에 벌어놓은 돈 주라꼬 날오라 카는지." "누구 비양치는 거요! 그까짓 앵이곱은 돈 조금도 안 반갑소!"용이 담배를 붙여문다. 그리고 부지런히 돌아가는 임이네 뒷모습을 바라본다. 임이네가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길에 괴나리 봇짐을 겨드랑이에 낀 사내 하나가 우줄우줄 걸어온다. 안면이 전혀 없는 사내다. 땟국이 조르르 흐르는 초라한 사내다. "여보시오."용이 눈을 들어 본다. "댁이 이용이란 사람이오?" "그렇소." 사내는 비스듬한 밭둑길을 뛰다시피 내려온다. "세상에 그런 인심이 어디 있담?" "..." "진작 가르쳐주었으면, 갈길이 바쁜 사람인데," 불평을 늘어놓는다. 용정서 왔다는 것만으로도 눈꼴이 사나웠을 임이네, 초라한 몰골의 나그네를 무던히 박대했을 것은 뻔한 일이다. 용이는 묵묵히 지켜보고 있을 따름이다. "거, 형씨 마누라요?" "그렇소." "방망이 좀 안겨야겠습니다." 대답이 없자 나그네는 부르튼다. 꽤나 고지식하게 생긴 얼굴이다. "하여간에 부탁받은 일이나 치루고 가야지. 다름이 아니라 편지 한 장을 받아왔소." 사내는 허리춤에서 편지 한 장을 꺼내며 "꼭 이용이라는 사람한테 전해야지 다른 사람은 주지 말라 하기에, 여 있소." 용이는 편질 받는다. 받았을 뿐 들여다보지도 않는다. 사내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그랬었는지 묻지도 않는데 편질 받아온 경위를 설명한다. 역두에 중학생이 하나 나와 퉁포슬 가는 사람을 찾더라는 것이다. 나그네는 내가 간다 했더니 편지 전해주면은 마차삯을 내겠노라, 그래 선뜻 전하마 하고 받아온 거시라 했다. "자세히 가르쳐주어서 집 찾는 데 힘이 들진 않았으나 아까 그 여인네가 그 중학생의 계모는 아니오?" "생모요." "헌데 어찌 편지는 형씨한테 전해야 한다고 당부 당부 했을까?" 그 말 대꾸는 아니 하고 "술 한잔 드시겄소?" "주시면 고맙지요." 몹시 시장하고 갈증이 난 듯 용이 부어준 술 한잔을 사내는 들이켰다. 얼마 후 갈길이 바쁘다며서 사내는 떠났다. 소는 마른풀을 뜯고 있었다. 용이 얼굴에 소름이 돋아난다. 천천히 편지 피봉을 찢는다. 홍이 편지가 들어 있었다. 먼저 인사말 몇 마디 적고, 편지 받으시는 대로 곧 용정에 오시기를 소자는 바라고 있습니다. 오시리라 믿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병환은 날로 나빠져서 언제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는 일이옵니다. 만일 이번에도 아버지께서 아니 오시면은 소자 대단히 당돌하오나 아버지를 다시는 뵈옵지 않을 것을 결심하였사옵니다. 재차 엎드려 비옵니다. 용이는 담배 한 대를 더 태우고 나서 천천히 일어섰다. 소를 몰고 아까처럼 발 끝에서, 저 끝으로 다시 이 끝으로 끝없는 반복을 되풀이할 뿐 철새가 무리지어 날아가는 하늘 한번 올려다보지 않는다. 소 임자에게 소를 돌려주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사방은 어둑어둑했다. 영팔이 마당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자 오나." "음." "밭은 다 갈았나?" "음." "용정에서 사람이 왔다면?" "음." "무신 좋잖은 기별이라도 있었나?" "머, 별일 아니다." "그런데 와 일부러," "일부러 보낸 기이 아니고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이라." "그런가?" "밥은 묵었나?" "묵었지." "방에 들어가자." 호롱불을 켜놓고 두 사내는 우두커니 서로 마주본다. "니 용정에 한분 가보지. 가을갈이도 했고 했이니," 불안스럽게 쳐다본다. 실상 영판은 월선이 아프다는 것은 알지만 위중한 사정까지는 모르고 있었다. "곧 산에 갈 긴데..." "아직 얼매간의 시일은 안 있나." "..." "한분 갔다오지." "산판일 끝나믄 갈 긴데 머." 임이네가 저녁상을 들고 와서 메치듯 내려놓는다. "아지마씨." 영팔의 노한 눈이 임이네를 쳐다본다. "와요? 무신 할말 있소?" "질기 그러다가 뜨거운 꼴 한분 볼 기요." "아이고 무서바라. 이가네 집구석에서 쫓기나믄 이 일을 우짜노? 당장 바가지를 들고 사도거리에 나갈 긴데, 흥!" "내 겉으믄 그만," "그만? 우짤 기요? 가랑이를 찢어부릴라요?" 번번이 있는 일이다. 그럴 때마다 당하는 것은 영팔이었다. 그것을 알면서 영팔은 못 참는다. "흥, 무시 할 일이 없어서 남의 제집까지 챙길라 카는고? 앵이곱고 더러바서 할 일이 없이믄 햇빛에 나가서 흰머리나 뽑을 일이지." 방문을 탁 닫고 나간다. "어이구 가심이야." 가슴을 치는 것은 용이 아닌 영팔이다. 임이네의 횡포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용이는 남의 일을 구경하는 구경꾼으로 뒷전에 물러나 있었으니 그것을 바라보는 영팔이 견디질 못하는 것이다. 그는 "목에서 이런 게 올라온다!" 하며 주먹을 밀어올리곤 했었다. 사실 주위에서 보기엔 용의 무관심은 뱀꼬리처럼 차갑고 무자비한 것이었다. 해서 영팔이는 용아,니 심장은 쇳덩이로 됐느냐, 하고 물었으나 줏대없는 사내라고 나무라진 않았다. 그러나 그런 면에선 우두한 임이네다. 설령 우둔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개의할 임이네는 아니었지만, 방자하기로는 천성이라 치고 날마다 느는 것은 신경질이었다. 왜 신경질이 느는가. 그것은 조하고 불안하기 때문이다. 월선의 죽음을 기다리는 심정에서도 그러했고, 만일 그가 죽고 나면 얼마나 될지 모르는 재산은 과연 어찌 될 것인가, 공노인이 차지할 것인가 아니면 홍이 몫으로 떨어질 것인가. 홍이 앞으로 떨어진다면 그것이 순조롭게 자기 손으로 굴러들어올 수 있을까? 도시 월선의 재산은 얼마나 되며, 이미 자기 모르게 처리된 것이나 아닐까? 홍이아배하고 무슨 암약이 있는 것이나 아닐까? 용정촌 동정에 대해서는 극도로 예민해진 임이네다. 가능하다며 그곳으로 가서 월선의 주변을 맴도는 것이 가자 상책일 것이데 꿈쩍않고 용이 뻗치고 있는 것도 미워서 견딜 수 없고 시시로 신경질이 발동하게 되는 것은 순전히 재물과 관련이 있다. 졸갑스런 귀신이 물밥도 못 얻어먹는다는 옛말처럼 임이네 신경질은 또 졸갑 그것이기도 했다. "용이 니도 참말이제 팔자 사나운 놈이다. 우짜다가 저런 계집을 만나서, 삼신도 눈이 어둡다." 영팔이 한숨 섞인 말을 했다. 홍이가 나지 않았으며 저런 악종계집을 짊어졌을 리 없었을 것이란 뜻이요, 월선에게 기출이 있었다면 하는 뜻이기도 했다. 영팔은 이십 년이 가까운 옛일을 생각한다. 월선이가 달아났을 때의 일을. 그때 용이는 앓았었다. 앓고 일어난 용이는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일을 했었다. 마누라 옷가지 빨아준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러나 강청댁은 자파한 사람처럼 암담한 성질로 변했던 것을 영팔이는 알고 있었다. 용이 얼마나 무서운 사내인가를, 부부관계를 갖지 않았던 것을 영팔은 알고 있다. 말없이 밥을 먹고 있는 용이를 바라본다. 주름지고 여윈 것도 그렇지만 사람이 바스라진 것만 같다. 영팔은 이십 년 전의 용이 얼굴을 생각해보려 했으나 그때 얼굴을 기억해낼 수가 없다. '나는 그래도 아들이 삼형제, 이자 다 안 컸나? 판술에미도 나 없이믄 죽을 줄 알고, 고생이다 고생이다 함서도 자식 가장밖에는 모리는데, 어디 세상에 임이네 같을라고. 도척이도 저러지는 않았을기다. 클 때는 용이가 우리 또래에선 젤 잘살 줄 알았다. 농사꾼 되기 아까분 인물이라 안 했나. 우짜다가 인연이 잘못돼가지고 저꼴이 됐노. 계집이 사나아를 잘못 만내도 골벵이지마는 남자가 계집을 잘못 안내도 일생이 허사라.' "이봐라." 용이 쳐다본다. "니 그만 홍이하고 월선이를 데리고 그만." "..." "그마 소리도 매도 없이 가부리라." "..." "그렇기 하믄 월선이 벵도 나을지 모르지. 니도 사람답게 한분 살아보고,"미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머라꼬요?" 임이네가 방문을 박차고 들어선다. 행여 용정의 얘기나 하지 않을까 싶어서 엿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 한 말 한분 더 해보소!" "하라 카믄 못 할까봐요!" 증오에 차서 임이넬 노려본다. "멋이 어찌고 어째? 홍이하고 그년하고 소리도 매도 없이 가부리라?" "그랬이니 우떻단 말이오." "내하고 무신 철천지 원수가 져서 그러노오! 니 할애빌 잡아묵었나! 니 에미를 잡아묵었나!" 막 나온다 "아니 이 계집이," 그러다가 영팔은 악이 오르는 모양이다. 용이 숟가락을 놓고 밥상을 밀어낸다. "으응? 세상 좋구나! 과연 좋구나. 죽으라믄 죽는 시늉을 내도 멋할 긴데 사람을 밟아? 야 세사 좋고 돈 좋구나! 이 좋은 세상에 돈에 둥때난 계집은 거 누구 딸맨치로 화냥질을 하는 기다!" 영팔이 과거사를 건드려 말하기는 처음이다. 임이네 기가 꺾인 듯 했으나 다음 순간 "오오냐! 돈 내놔라 이놈아! 너 먼지 붙어묵을란다!" 밥그릇이 날았다. 임이네 어깻죽지에 맞아 방바닥에 떨어지면서 그릇은 깨어지고 남아 있던 수수밥알이 사방에 흩어진다. "아이고오! 분하고 원통하고오!" 다리를 쭉 벌리고 앉아 통곡이다. 용이는 일어서 나가고 영팔이도 할 수 없이 피할 수밖에 없다. 이런 소동이 벌어진 지 사흘이 지났을까? 첫새벽에 임이 남정네 허서방이 입에 거품을 물고 달려왔다. 용이는 겨울 땔감을 보태기 위해 마른풀을 메려고 지게와 낫을 챙겨들고 있었다. "자, 장인!" "아침부터 왜 이러나." "다, 다, 달아났습매다." "뭐가?" "구, 구야에미가 다, 다, 달아났습매다!" "뭐라구?" "옷으 챙게가지고." 하다가 마당에 펄쩍 주저앉는다. "이 일으 어쩝매까! 어이구 이 일으 어쩌믄 좋지비?" "아침부터 무신 일인고? 어디 초상이 났나?" 부엌에서 들었을 터인데 임이네는 딴청이다. "장모! 내 말으 들어주시기요. 구, 구야네 장모보고서리 어디 간다 말하지 않았슴둥?" "어디 가다니?" "다, 달아났소꼬망! 옷으 챙게가지고 다, 달아났다 말이! 장모! 말으 해주소꼬망! 어디에 가다 했습매까!" "아닌밤중에 홍도깨라더니 무시 소린고, 내사 통 못 알아듣겄네." "어이구 이 일으 어쩌지비? 간나이 새끼는 누가 키운답매? 어이구우," "차라리 잘됐네. 질잖은 일이라믄 일찌감치 조짐이 나는 기이 낫다." 우두커니 서 있던 용이 내뱉은 말이다. "앙이 됩매다! 그년을 찾아야 합매다! 장모 그년으 간 곳으 가르쳐주옵께나. 딸으 가 곳으 모를 리 있겠슴둥? 어망이한테는 한마디 하고 가잲앴겠음? 가르쳐줍세." "이거 참말로 학을 떼겄네. 임자가 간수 못한 년을 낸들 우짤 기든고? 알면서 와 안 가르쳐줄꼬? 허 참, 별의별 일이 다 있고나. 그년 땜에 내가 당하는 거를 생각하믄 이가 뼈가 갈린다. 하기사 화냥질을 하드 사당질을 하드 그년 꼴 눈앞에 아 보는 편이," 허서방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면은 좋습매다! 장모가 우리 구야르 맡아주시기요! 그거를 달고서리 그년으 찾아다닐 수는 없잲이요?" "아이구 맙시사!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일이다. 와 내가 너거들 새끼를 맡노. 그런 소리 두분 다시 했다 봐라! 제년을 키워 시집도낸 것만도 태산 같은데, 자네도 알다시피 여기는 이씨네란 말이다! 이씨네! 어디 그년이 이씨 성이든가?" 임이네는 펄쩍펄쩍 뛴다. 용이는 온다간다 말없이 지게를 지고 나가버렸고허서방은 "좋소! 좋단 말이!" 외치며 달려간다. 한참 후 그는 여섯 살짜리 사내아이 손목을 끌고 왔다. 얼굴에 코와 눈물이 범벅이 된 아이는 연신 소리소리 지르며 울어댔다. 임이네 마당에 뻗치고 서 있었다. "안 된다믄 안 되는 줄 알아라! 이 집이 뉘 집인데 허가네 자손을 받을 기고오!" 고래땅 같은 소릴 지른다. "그년으 여기 딸이라 말이! 찾아달래잲으 것만도 고맙지비!" "뭣이 어째?" "아일 맡으랑이! 사람으 탈으 쓰고서리, 외손자는 자식 앙임둥?" 아이를 밀어내고 밀어들이고 아이는 왕왕거리며 울다간 파아랗게 질리고, 종내 허서방은 아이를 내버려둔 채 임이를 찾는다면서 동네를 뛰쳐나갔다. 농가가 띄엄띄엄 있는 마을에서도 임이는 늘 화제였는데 도망을 쳤다는 말 은 꽤 심심찮은 화젯거리가 되었다. "그 독한 여자가 손주아일 굶겨죽일 게야." "어째 굶기죽인단 말이? 사위네 집에서 양식 퍼가던데? 내 이 눈으로 똑똑히 봤답매. 양식 가지가구서리 간나르 굶겨직여? 그러면은 참말입지 벌받는당이." "벌받는 걸 생각하나?" 임이네 얘기서부터 "자식 두고 가는 년 앞길이 뻔하지 뻔해." "간나새끼느 말할 것도 없지비. 아이애비 눈이 화등자 같아도 샛서방하고 댕기던 거를 생각 앙이 합매?" 어쨌거나 아이가 눈물과 콧물과 땟국이 범벅이 된 얼굴을 하고서 양지바른 곳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것을 마을 사람들은 가끔 보게 되었다. 아이는 어망이 하고 울지는 않았다. 아방이 하고 울었다. 그것은 찍히고 할퀴우고 상처투성이가 될 한 생장의 출발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시간은 간다. 인간사의 격동이 무슨 상관일까. 경천지동이 무슨 상관일까. 시간은 천연스럽게 가는 것이다. 용이와 영팔이 그리고 영팔이 큰아들 판술이는 제철이 되었으므로 보따리 하나씩을 들고 예년과 다름없이 산을 향해 떠났다. 여전히 시간은 무심히 가고 있었다. 능란한 벌목군 용이와 영팔이는, 그러나 이젠 힘이 부치는 노동이다. "이젠 늙었고나. 이 짓도 앞으로 얼매나 해묵을란고?"일을 끝내고 벌목꾼들이 묵는 오두막에 돌아온 영팔은 장작불 앞에 앉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마 올해로 끝장날 것 같구먼. 나이 들며 별 수없는 거야. 제아무리 항우장사라 해도 늙는 것은 못 당하지." 밥솥에 불을 지피던 벌목군 송서방 맞장구에, "그렇슴. 그렁이 고래장을 한단 말이. 제발 제발 올해만 해먹고서리 물러가랑이. 젊은놈도 그래야 벌어먹잲잉요?" "아따 지랄 같은 소리 하네. 아 그럼 너도 젊은 축에 든다 그 말이야?" "오뉴월 하루 해가 무섭다는 말으 앙이 들었슴둥?" "얼매나 아쉬우믄 저런 말을 하까. 그거는 둘짜리 아아들이 나보고 하는 말이고 고래장감으로는 피장파장이라." 영팔의 말이었다. 용이는 곰방대를 물고 잠자코 있었다. 한편에선 옷을 벗고 이를 잡는 사람도 있다. 오두막 하나에 열 명 가까운 일꾼들이 묵는다. 취사는 돌려가며 교대로 했고 나무는 무진장이어서 오두막 안은 훈훈했다. "저녁밥이나 처먹고 나서 이 사냥을 하드 곰 사냥을 하든 할 일이지 피묻은 손톱으로 밥 먹을 거야? 입맛 떨어지게," 정갈한 서울태생 유가가 눈살을 찌푸린다. "가려워서 미치겠는 걸 어떻게 해?" "거 등짝 보니가 떡 쳤으면 좋겠는 걸?" "떡을 치든 굿을 치든 이놈의 이나 싹 쓸어주었음 좋겠네." 방안은 불길과 사람들 입김으로 오히려 후덥지근한 편이다. 밥솥국솥에서 피어오르는 김 때문에도 그러했고, 김과 담배연기는 안개처럼 자욱하다. 사람의 모습, 불빛 그리고 의식까지 혼합이 된 듯 방안은 차츰 몽롱해진다. 용의 얼굴은 더욱더 몽롱하다. "금년 들어 아주 진가가 쭉 빠지는 모양이지?" "뉘기?" "이서방 말이야." "그 사람으 원체 말이 없답매." "그렇지 않어. 술적슬적 하는 말이 여간 익살스럽지가 않았다구." "익살이구 대살이구 우리도 멀잲이요. 담박 저꼴 된당이. 남으 걱정 그만둡세." "허참, 산을 내려갈 적에는 수울찮은 돈을 쥐고 가는데 말이야. 그게 꼭 물을 쥔 것 같단 그 말이야. 언제 빠져나갔는지 빈 손바닥을 들여다보면 기가 차지." "험하게 번 돈으 험하게 쓰기 마련임매." "험하게 벌다니? 도둑질로 벌었단 말이야?" 대답은 서울태생 윤가가 한다. "아따 도둑질이 그리 험한 벌인 줄 아냐? 울타리 넘으면 그만이지. 그건 좀도둑의 경우고 큰도둑이야 푹신한 보료에 앉아 긴 담배대를 물고 에헴! 에헴! 하고 있어도 재물은 저절로 쌓이는 게야. 벌목꾼같이 험한 벌이가 어디 또 있을라고." "험하기론 광부도 그렇지. 그 바닥은 더 험하다구." "그나저나 돈을 쓰게 되는 건 목돈이기 때문인데 간덩이가 커지거든. 몇 달 고생했으니까 한잔, 한잔에 끝이 나야지. 홀애비는 목돈 손에 들고 그냥 갈 수 있어? 여잘 아 찾아갈 수 없는 거야. 그러다보면 돈은 절로 술술, 옛다! 모르겠다 될대로 돼라! 그렇게 되는 게야." "제일 좋은 것은 선금 받고 오는 건데. 그 사람의 마음이 간사하단 말이야. 선금을 받고 하는 일은 어쩐지 공일을 해주는 것 같아서 신명이 아 나거든." "선금 주는 사람은 또 어디 있구." "그러니까 사람이란 본시부텀 도둑 심보라. 그저 그날 벌어서 그날 사는 게 우리 같은 처지에선 제일 좋은 거지. 가족들 입치레는 맘 놓아도 되니까. 그러나 그놈의 날일도 일 년 열두 달 눈비 오는 날 빼고 하면은, 고새이야 타고난 것, 사는 날까지... 젊은시절에는 설마 내가 뭘 한들 남만 못살까 보냐 했었지만," 일꾼들은 둘러앉아 타령이다. 이러 생활의 연속... "어이 배고프다. 밥이나 먹자." 오두막 안에 찬바람이 씽 하고 몰려든다. 등불이 흔들린다. 뿌옇게 서린 공기가 맴을 돈다. 두 사람이 눈을 털고 들어섰다. "영팔이아제!" 소년이 소릴 질렀다. "이기이 누고!" "아제!" "홍아! 니가 우짠 일고? 니 아부지 저기 있다." 홍이는 소매끝을 끌어당겨 눈물을 닦으며 돌부처 모양으로 앉아있는 용이를 거들떠보지 않는다. "누구야?" 누군가가 묻는다. "누구긴? 이서방 아들네미지." "학생이구만." "중학생이구마." 영팔이 자랑스럽게 뽐낸다. "여기까지 머하러 왔노!" 돌부처 모양으로 앉아 있던 용이 입에서 노한 음성이 터져나왔다. "몰라서 그릅니까." 새파랗게 질려서 홍이 대답한다. 눈에는 증오가 이글이글 타고 있다. "죽었나?" "그랬으면 저는 여기 오지 않았을 겁니다." "무신 소릴 하노?" 영팔이 어리둥절해한다. 그러나 홍이는 양보하기로 결심한 듯 잠자코 구석자리에 가서 앉는다. 불안스럽게 용이와 홍의 얼굴을 번갈아보던 영팔이는 일꾼들과 어울려 앉아 있는, 홍이와 동행한 사내를 보고 묻는다. "외팔이 넌 뭐하러 왔노." 벌목하다가 팔이 바스라지 사내는 아랫마을에 사는 이서방이다. "술잔 값이나 벌라고 왔소." "뭐?" "저기 학생이 데려다달라 하기," "그라믄 홍아, 니 판술일 못 만냈다 그 말이가?" "야?" 그러나 외팔이 이서방이 "판술이는 상계마을로 갔소. 우리 동네는 건건이가 떨어져서, 내일 아침에나 올 게요." "판술이가 고생하는구먼." 누군가가 말했다. "젊은니까, 어서 밥이나 먹자." 벌목꾼들은 밥솥을 중심하여 둘러앉는다. 외팔이 이서방도 그들 사이를 비비고 들앉는다. "홍아 니도 오너라." 영팔이 불렀다. "지는 아 먹겠습니다." "허어 빼지 말고 온나." "배 안 고파요." 홍이는 구석자리에서 처박히듯 앉아서 대답한다. "거 이서방 아들 하나 잘 두었군. 아까는 털모자 속이라 모르겠더니 인물이 훤하군." "이서방 아잇적하고 꼭같지." 영팔이 밥을 먹으며 말했다. 외팔이는 얻어먹는 밥이어서 그런지 게걸스럽게 허둥지둥 먹는다. 용이는 모래알 씹듯 밥알을 씹고 있는 것 같다. 그 용이를 영팔이는 곁눈질하며 보곤 한다. 겨울이 아무리 길다 하여도 종일 고된 일을 한 벌목꾼들은 저녁이 끝나고 잠시 잡담을 하다가 아내 잠이 들었다. 모두 다 잠이 들고 산중의 밤은 바람뿐, 눈더미가 무너지는 소리뿐, 그리고 잠들지 못하는 사람은 용이와 홍이다. 홍이는 구석진 벽에 붙어 누웠고 그 옆이 영팔이, 용이 떨어진 저쪽 구석에 누워 있었다. 새벽녘이 가가워서 용변보러 나갔다 온 영팔이 홍이를 흔들었다. "아제." 홍이 나직한 목소리로 불렀다. "이야기 좀 해보라. 나는 무시 영문인고 모르겄다." "정말 모릅니까." "그러세, 머 말고." "옴마 아픈 것도 모른다 말입니까." "알지. 그거사 알지." "알면서 그런 말을 합니까." "여기 산판일 끝나믄 너거 아부지 갈 거 아니가." "산판일이면, 그게 대순가요?" 홍이는 울먹인다. "옴마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산판에서 돈 벌어 팔자 고치겠소! 너무, 너무." 하다 흐느껴 운다. 소리를 죽여 흐느껴 운다. "자세히 얘기 좀 해도라. 그냥 아픈 기이 아니다 그 말가?" "아부지는 알아요. 옴마가 죽을 병이라는 걸, 알면서 아제보고 얘기 안 했는가 부지요." "죽을 병이라고?" 비로소 영팔이는 깨달아지는 것이 있다. 용정에서 사람이 왔다는 얘기도 그렇고 용이의 심상찮은 근래의 태도도 생각킨다. "죽기 전에 하고, 이편에 편지도 보내고 했는데 아부지한테서 아무 소식도 없었소. 저는 두번 다시 아버지를 대면 안 할라 했지만 옴마가 불상해서 또 왔습니다." 영팔이는 코를 잡아당기다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른다. "옴마는 며칠 못 가요. 의사도 그런 말을 했거든요." "세상에 그 미친놈 좀 보게. 그게 온정신인가. 와 그라제? 나보고는 그 런 말 입밖에도 안 냈다. 내가 지난 여름에 갔을 때만 해도 니 옴마는 꿈직이길래 얼굴은 안 좋더라마는... 산판에서 금을 캔 것도 아니겄고 오늘만 내일만 하는 사람한테 그럴 수가 있나. 하여간에 내일 아침 맥당가지를 끌고서라도 가야지." 아직 날이 새려면 멀었다. 홍이 옆에 누웠으나 잠이 올 리가 없다. '알다가도 모릴 일이제. 와 나한테 말을 안 하노 말이다. 우찌 보믄 그런 말 입박에 내기 싫은 심정도 알 성싶기는 하다마는 그 성미에... 그렇지마는 용이는 와 거기 안 가노 말이다. 그기이 이상하지 않나. 남녀간의 저이 떨어졌어도 수천 리 타관에 와가지고 그럴 수는 없일 긴데... 혼자 속으로 앓는 거는 확실하다. 이 몇 달동안 사람이 변한 것도 아지 보니 그 때문인데... 참,' 피리 소리 같은 샛바람 소리가 들려온다. 지쳐버렸는지 홍이는 잠이 든 것 같다. '월선이가 죽어? 월선이가... 허, 월선이가 죽다니 그게 웬말고,' 별안간 뜨거운 것이 목구멍을 차고 올라온다. 눈언저리가 불덩이처럼 뜨겁다. 명주수건에 떡이랑 곶감이랑 약과랑 어미가 사준 제수음식을 들고 마을길을 헤작헤작 걸어가던 어릴 적 월선의 모습이 뚜렷하게 눈감은 망막에 떠오른다. 영팔이는 떡이랑 곶감이랑 그런 제수음식을 싼 명주수건을 쳐다보며 계집애 뒤를 따라갔다. 저절로 침이 넘어가고 나중엔 부아가 치밀었다. '이눔 가시나, 나도 그만 무당새기나 될 거로.' 침 넘어가는 것이 견딜 수 없는 영팔이는 계집애 댕기꼬리를 잡아당겼다. "누가 이카노!" 계집애는 팔짝 뛰며 돌아보았다. "누가 우쨌기?" "와 남으 머리끄댕이를 잡아땡기노?" "내가 안 그랬다. 바램이 그랬일 기다." 다시 헤작헤작 걸어가는데 더욱 심술이 난 영팔이는 댕기꼬리를 좀더 세게 잡아끌었다. "와 이카노?" "누가 우쨌기?" "와 잡아땡기노!" "내가 안 그랬다. 저기 저어기 깐치가 와서 그랬을 기다." "누가 모를까 봐서? 용이오래비한테 일러줄 기다." "일러. 그라믄 누가 겁낼까 봐서? 지 오래비도 아님서," 사십 연도 더 되는 아득한 옛날의 일이다. 술에 취한 월선에미가 쓰러져 죽었던 그곳에서 비탈진 길을 자꾸 올라가며 앙상한 소나무와 오리나무가 몇 그루 있고 그곳에도 또 한참 가면 바로 영팔의 부모 무덤이 있다. 그곳에서 비스듬히 빠져내려간 고세 영팔이형 무덤이 있고 액병 때 죽은 계집아이는 어디 묻었는지 기억조차 할 수 없다. 영팔의 얼굴은 뜨거운 눈물로 젖는다. 월선이 죽을 것이라는 소식은 그간 뜸했던 망향의 설움을 몰고 온 것이다. 동이 텄다. 홍이 소스라치듯 일어나 앉았다. "내려가야지." 영팔의 목소리였다. 희미한 속에 용이도 일어나 앉아 있었다. 곰방대를 물고 있었다. 홍이는 재빨리 외투를 입고 털모자를 깊숙이 내려쓴다. "홍이 니 어젯저녁도 굶었는데 식은밥 한덩이 먹고 갈래?" "싫습니다. 내려가다가 배고프면 사먹지요." "외팔이는 깨울 것 없고, 자아 가자." 나서는데 용이는 옷과 털모자만 썼다뿐이지 보따리는 놔둔 채 나온다. 영팔이는 그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왠지 보따리 안 가져오느냐고 물어볼 수가 없다. '하기야 판술이도 있고 나도...' 산을 내려가면서 "판수리기 오믄은 나도 곧 갈 긴께." 하고 영팔이 말했다. 대꾸가 없다. 얼마를 내려가다가 용이는 우뚝 멈추어 섰다. 홍이를 보는 것도 아니요 영팔이를 보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시선을 허공에 띄우며 "한 이레만 있이믄 여기 일이 끝나는데 일 끝내고 갈 긴께 오늘은 니 혼자 가거라." "뭐라꼬?" 영팔이 뛰듯이 돌아섰다. 홍이는 매서운 눈을 하고 돌아보았다. "오늘은 니 혼자 가거라. 일 끝내놓고 갈 기니," "정신이 있나!" "정시 말짱하다." "사람이 오늘만 내일만 한다 카는데 산판일을 끝내? 이놈아!" 삿대질을 하며 영팔은 고함을 질렀다. 그 말 대답이 없을 뿐만 아니라 용이는 선 자리에서 움직이지를 않는다. "좋습니다! 네 좋습니다. 사판일을 끝내고 오실 필요 없습니다." 번쩍번쩍 빛나는 눈으로 아비를 쏘아본다. 아들의 그 격렬한 눈을, 수천 년을 괴어 있는 호수와 같이 맑았으나 빛이 없는 용이의 눈이 마주본다. 어떤 물체가 와도 그냥 퉁겨버릴 듯 차가운 눈이다. 늙어서 바스라지고 초라한 벌목꾼, 그러나 그 불가사의한 눈은 거대하기조차 하다. 정지한 그 상태가. "좋습니다! 좋아요!" 홍이 달음막질쳐서 뛰어내려간다. "홍아! 홍아!" 영팔이 외치며 뛰어 따라간다. 홍이 손목을 꽉 잡는다. "홍아, 나랑 가자. 아제하고 같이 가자!' 하고는 용이에게로 몸을 돌린다. "이 독사 같은 자석아! 니놈은 사람이 아니다! 그래 니놈은 산판에서 떼돈 벌어라! 오늘은 홍이 땜에 그냥 간다마는 어디 보자! 니놈 사지가 성할 긴가! 내 니놈을 직이부릴 기다." 용이는 길섶에 선바위같이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홍이의 울음소리, 죽인다고 소리소리치는 영팔의 고함, 그러나 목소리도 모습도 사라졌다. 나무 위에 실린 눈이 바람 떠나 날아내리고 일출의 장엄한 광경이 빛과 그늘을 부각하듯... 사방은 태고적 같은 침묵이 쌓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