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으로 여산군(礪山郡) 경계까지 10리, 북으로 여산군 경계까지 19리, 남으로 전주부(全州府) 경계까지 17리, 서쪽으로 함열현(咸悅縣) 경계까지 22리, 서울로부터 4백 68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마한국(馬韓國)이다. 후조선(後朝鮮)의 임금 기준(箕準)은 기자의 41대 손인데, 위만(衛滿)의 난을 피하여 바다에 떠서 남으로 내려가, 한지(韓地)에 가서 나라를 세우고 마한(馬韓)이라 하였다. 백제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이 이곳을 병합하고, 이후부터 금마저(金馬渚)라 불렀다. 신라의 신문왕(神文王)이 금마군(金馬郡)으로 고치고, 고려조에 와서 전주(全州)에 부속시켰다. 충혜왕(忠惠王) 뒤 5년에 원(元) 나라 순제(順帝)의 황후 기씨(寄氏)의 외향(外鄕)이라 하여, 승격시켜 익주(益州)라 하였는데, 본조 태종(太宗) 13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군으로 만들었다. 【관원】 군수ㆍ훈도(訓導) 각 1인. 【군명】 금마(金馬)ㆍ익주(益州). 【풍속】 생민이 후박하다. 박초(朴礎)의 시에, “생민이 후박하니 마한(馬韓)의 풍속이다.” 하였다. 【성씨】본군 김(金)ㆍ한(韓)ㆍ송(宋)ㆍ이(李)ㆍ황(黃)ㆍ임(林)ㆍ구(仇). 흑석(黑石) 이ㆍ구ㆍ김. 【산천】 건자산(乾子山) 군(郡)의 북쪽 1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도순산(都順山) 속칭 시다산(施茶山)이라 하는데, 군의 동쪽 5리에 있다. 당산(唐山) 군의 서쪽 10리에 있다. 산에는 밤이 산출되는데 1년에 세 번 열린다. 그러나 딴 곳에 옮겨 심으면 나지 않는다. 용화산(龍華山) 군의 북쪽 8리에 있는데, 일명 미륵산(彌勒山)이라고도 한다. 장군봉(將軍峯) 용화산 남쪽에 있다. 바위 위에 구멍이 있는데 기름 몇 십 말을 담을 수가 있어 속칭 등잔암(燈盞巖)이라 한다. 춘포(春浦) 군의 남쪽 15리에 있다. 용화산(龍華山)에서 나와 전주의 신창진(新倉津)으로 들어간다. 왕궁정(王宮井) 군의 남쪽 5리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옛날 궁궐터이다.”라고 한다. 마룡지(馬龍池) 오금사(五金寺) 남쪽 백여 보(步) 되는 자리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서동대왕(薯童大王)의 어머니가 축실(築室)하였던 곳이다.” 한다. 상시연(上矢淵) 군의 서쪽 17리에 있다. 【토산】 대[竹]ㆍ붕어[鯽魚]ㆍ생강[薑]. 【누정】 청심루(淸心樓) 객관(客館)의 동쪽에 있다. 송을개(宋乙開)의 기문에, “금마군(金馬郡)은 옛날 무강왕(武康王)이 칭왕(稱王)한 땅이다. 산천은 그 옛날과 같고 탑과 묘(廟)가 완연하니, 천년이 지난 오늘에도 웅장한 풍도가 장열하였음을 짐작할 만하도다. 국조(國朝)에 와서 병자년에 무진(茂珍) 노상군(盧相君)이 이 고을을 지켰는데, 처음으로 누각을 객관 동쪽에 세웠다. 오랜 세월에 기울고 헐었는데, 무진년 봄에 밀양(密陽) 손후(孫侯)가 군수로 와서, 노는 사람을 불러 모으고 재목을 마련하고 기와를 구워 새로 단장을 하였다. 단청(丹靑)을 칠하고 2개월 만에 완성을 보았다. 생각하니, 어진 수령 손후여, 관에서 이 역사를 하는데 백성이 모르고, 위에서 가진 마음 아래에서 서로 도와, 재력이 관청에서 나오지 않아도 일하는 사람이 배부르며, 역사는 대중이 하지 않고도 공사가 완성되니, 이 도리를 미루어 모든 일을 펴 나가면, 무슨 일인들 인(仁)에 어긋나리요.” 하였다. 【학교】 향교(鄕校) 군의 동쪽 5리에 있다. 【사원】 흑석원(黑石院) 흑석 부곡에 있다. 【불우】 미륵사(彌勒寺) 용화산(龍華山)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무강왕(武康王)이 인심을 얻어 마한국을 세우고, 하루는 선화부인(善花夫人)과 함께 사자사(獅子寺)에 가고자 산 아래 큰 못가에 이르렀는데, 세 미륵불이 못 속에서 나왔다. 부인이 임금께 아뢰어 이곳에 절을 짓기를 원하였다. 임금이 허락하고 지명법사(知命法師)에게 가서 못을 메울 방술을 물었더니, 법사가 신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으로 못을 메워 이에 불전을 창건하고 또 세 미륵상을 만들었다. 신라 진평왕(眞平王)이 백공(百工)을 보내어 도왔는데, 석탑(石塔)이 매우 커서 높이가 여러 길이나 되어 동방의 석탑 중에 가장 큰 것이다.” 하였다. ○ 권근(權近)의 시에, “창 밖 청산을 깎아 만든 것 같은데, 근심이 있을 때 눈을 들어 바라보니 더욱 분명하구나. 가을 바람이 날로 두건과 지팡이에 불어오니, 높은 산에 올라 서울을 바라볼까 하노라.” 하였다. 사자암 용화산 위에 있다. 두 바위가 벽처럼 솟아 있는데 내려다보면 땅이 보이지 않는다. 돌길이 갈퀴처럼 걸려 있는데, 부여잡고 올라가면 바로 지명법사가 거주하는 곳이다. 사원사(上院寺) 용화산에 있다. 오금사(五金寺) 보덕성(報德城) 남쪽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서동(薯童)이 어머니를 지성으로 섬겼는데, 마를 캐던 땅에서 갑자기 오금(五金)을 얻었다. 뒤에 그는 임금이 되어 그 땅에 절을 짓고 오금사라 하였다.” 하였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군의 서쪽 1리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ㆍ여단(厲壇) 모두 군의 북쪽 1리에 있다. 【고적】 쌍릉(雙陵) 오금사(五金寺) 봉우리의 서쪽 수백 보 되는 곳에 있다. 《고려사》에는 후조선(後朝鮮) 무강왕(武康王) 및 비(妃)의 능이라 하였다. 속칭 말통대왕릉(末通大王陵)이라 한다. 일설에 백제 무왕(武王)의 어릴 때 이름이 서동(薯童)인데, 말통(末通)은 즉 서동(薯童)이 변한 것이라고 한다. 금마산(金馬山) 견훤(甄萱)의 말에, “옛날에 마한(馬韓)이 먼저 일어나 대대로 발흥하였고, 진한과 변한이 뒤이어 일어났다. 이에 백제가 금마산에 개국한 지 6백여 년이 된다.” 하였다. ○ 이제 생각하건대, 온조(溫祚)가 마한을 병합한 뒤 그 땅을 금마저(金馬渚)라 부르고, 금마산(金馬山)이라 부르지는 아니했다. 또 금마군은 백제의 서울이 된 일은 없다. 견훤의 말의 근거를 알 수가 없다. 기준성(箕準城) 용화산(龍華山) 위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기준(箕準)이 쌓은 것이기 때문에 그 이름을 땄다고 한다. 석축 둘레는 3천 9백 자이고 높이는 8자이다. 시내와 우물이 있다. 보덕성(報德城) 군의 서쪽 1리에 있는데 유지(瀢址)가 남아 있을 뿐이다. 고구려가 당 나라에 망한 뒤, 대형(大兄) 검모잠(劍牟岑)은 고구려의 부흥을 도모하여 잔민을 모아 패강(浿江 대동강)에 이르러 당 나라의 관리를 죽이고 신라로 향하였다. 서해(西海)의 사야도(史冶島)에 이르러 종실(宗室) 안승(安勝)을 만나 그를 받들고, 한성(漢城)에 와서 임금으로 삼고 소형(小兄) 다식(多式) 등을 신라에 보내어 고하기를, “우리의 선왕 장왕(臧王)께서 실도(失道)하여 나라를 잃었으나, 이제 신 등이 나라의 귀족인 안승을 맞아 군(君)으로 삼았으니, 원컨대 신라의 울타리가 되고자 하나이다.” 하였다. 신라의 문무왕(文武王)은 안승을 금마저(金馬渚)에 거주하게 하고, 보덕왕(報德王)을 봉했으며 형의 딸을 처로 삼게 하였다. 그 뒤 신문왕(神文王)은 안승을 소판(蘇判)으로 삼았다. 그의 족자(族子) 대문(大文)이 금마저에 머물러 있었는데 모반했다가 죽임을 당하고, 나머지 무리가 관리들을 죽이고 보덕성에 근거로 또 반역하였으나, 임금은 장사(將士)를 보내어 토벌하여 죽이고 그 사람들은 남쪽의 주와 군에 옮기게 하고, 그곳을 금마군(金馬郡)으로 삼았다. 흑석부곡(黑石部曲) 군의 남쪽 15리에 있다. 석장동(石檣洞) 군의 서쪽 10리에 있다. 산기슭에 고사(古寺)의 유지(遺址)가 있고, 돌 돛대가 높이 세워 있는데, 높이가 두 길이나 된다. 속칭 그 마을을 석장동이라 한다. 전대(前代)에 주와 현에 혹 동(銅)이나 돌로 돛대의 모양을 만들어, 지기(地氣)를 누른 것이 곳곳에 있는데, 지금도 그 중에 하나이다. 사교원(蛇橋院) 군의 서쪽 19리에 있는데, 지금은 폐하고 없다. 【명환】본조 진의귀(陳義貴) 정치를 잘하여 명망이 있었다. 노귀상(盧龜祥) 송사(訟事)를 처리하는 데에 과단성이 있었다. 최덕지(崔德之) 행실은 검소하고 절약하며 일처리는 자상하고 분명하였다. 【인물】고려 이주(李湊) 고종(高宗)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은 한림학사승지까지 지냈다. 성품이 온순하며 문장을 잘 지었고 글씨를 잘 썼다. 평생 동안 살림을 몰랐으니, 집안에는 저축이란 조금도 없었다. 이행검(李行儉) 이주의 아들인데 충렬왕(忠烈王) 때 과거에 급제하였다. 전법랑(典法郞) 벼슬을 지냈으며 정화원주(貞和院主)가 평민을 노예로 삼았다. 그 평민이 고소를 하니, 동료가 권세가의 압력을 받고 법을 굽히려 하였지만 이행검이 한사코 불가함을 주장하였다. 마침 병에 걸려 휴가중이었는데 동료들은 다행으로 여기고 일을 처결해 버렸다. 어떤 사람이 꿈을 꾸니 날카로운 칼이 하늘에서 내려와 형부(刑部)의 관리들을 죽이는 것을 보았다. 얼마 되지 않아서 형부의 관리들은 모두 폭사하거나 병사하였는데 유독 이행검만이 무고하였다. 벼슬은 국자전주(國子典酒)까지 지냈다. 이공수(李公遂) 이행검의 손자인데, 감찰규정(監察糾正)으로서 과시(科試)에 수석으로 뽑히었다. 공민왕(恭愍王) 때 익산부원군(益山府院君)에 봉작되었다. 원 나라는 임금을 폐위시키고 덕흥군(德興君)을 세웠는데, 이공수가 사신으로 원 나라에 들어가 서경(西京)에 이르러서, 태조(太祖)의 원묘(原廟 정묘(正廟) 이외에 다시 세운 묘)에 배알하고 맹세하여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다시 복위하지 않으면, 신은 죽어도 다시 돌아가지 아니하겠습니다.” 하였다. 영도첨의(領都僉議)에 제수받고, 추충수의동덕찬화공신(推忠守義同德贊化功臣)의 호를 받았다. 별장을 덕수현(德水縣)에 마련하고 자칭 남촌선생(南村先生)이라 하였고, 공민왕묘(恭愍王廟)에 배향되었다. 【유우】본조 권근(權近) 귀양살면서 《입학도설(入學圖說)》을 지었다. 【열녀】본조 구씨(仇氏) 조민(曹敏)의 처인데 나이 15세에 조씨 가문에 시집갔다가 일찍 과부가 되었는데, 다시 개가하지 않기를 맹세하고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남편의 모습을 그려 벽에 걸고 의복을 늘어놓고 밤마다 애통하였으며 조석으로 상식을 올렸다. 출입할 때에는 반드시 고(告)하였고, 시식(時食)을 반드시 바쳤다. 채소와 국을 먹지 아니하였고, 좋은 옷을 입지 아니하였으며, 소복(素服)으로 일생을 마쳤다. 성종(成宗) 2년에 임금에게 알려져 쌀을 주고 정문을 세웠다. 오씨(吳氏) 지삼근(池三近)의 처인데 남편이 죽고 3년간 묘막 생활을 하였는데, 직접 조석으로 상식을 올리며 슬피 곡(哭)하니 듣는 자가 탄복하였다. 【제영】 기랑자복경무성(箕郞雌伏竟無成) 성임(成任)의 시에, “기랑(箕郞)은 움츠리고 끝내 성취 없었네. 강한 것이 약한 것을 병합함은 이치에 분명한 일. 당시 휘하의 장사 생각해보니, 그 몇 사람이 고개 돌려 서경(西京)을 생각했으랴.” 하였다. 상마사야춘(桑麻四野春) 권근(權近)의 시에, 전쟁을 하던 곳 천년 뒤 오늘, 사방에는 뽕과 삼이 봄을 맞았네.” 하였다. 마한문물구성공(馬韓文物久成空) 송을개(宋乙開)의 시에, “완부(完府)의 판도가 통일이 되니, 마한의 문물이 오래토록 공허하네.” 하였다. 백년무어련금마(百年無語憐金馬)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남호(南湖)는 희고 흰데, 익산(益山)은 푸르구나. 지난 일은 희미한 한 자리의 꿈. 백제(百濟)의 유허(遺墟)에는 고목이 공적하고, 기준(箕準)의 옛 궁터엔 석양이 비꼈구나. 백년이나 말이 없으니 가련하다 금마(金馬)여, 만고에 다정(多情)하여 석양(石羊)을 기억하네. 백발되어 원유(遠遊)하니 강개가 많고, 등림(登臨)하니 신상(神傷)하지 않는 곳이 없구나.”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본래는 백제의 금마지(金馬只)인데, 무강왕(武康王) 때에 성을 쌓고, 별도(別都)를 두어 금마저(金馬渚)라 칭했다. 【방면】 군내(郡內) 동쪽으로 끝이 3리이다. 제석(帝釋) 동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5리이다. 춘포(春浦) 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두촌(豆村)ㆍ두천(豆川)ㆍ지석(支石) 모두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사제(蛇梯) 서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0리이다. 율촌(栗村) 서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25리이다. 구문천(九文川) 서북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5리이다. 미륵(彌勒) 북쪽으로 처음이 7리, 끝이 20리이다. ○ 흑석부곡(黑石部曲) 남쪽으로 15리이다. 【교량】 상한교(上漢橋)ㆍ하한교(下漢橋) 모두 남천(南川)에 있다. 입석교(立石橋) 춘포(春浦)와 김제(金提) 길에 있다. 면천교(綿川橋) 서쪽으로 함열(咸悅)과 통하는 길에 있다. 【토산】 닥종이[楮]ㆍ게[蟹]ㆍ뱅어[白魚]ㆍ삼률(三栗). 【사원】 화산서원(華山書院) 효종 갑오년에 세웠고 현종 임인년에 사액(賜額)하였다. 김장생(金長生)ㆍ송시열 모두 문묘 편에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