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달맞이 삼사순례 행사 (5)
글/김창송
1976년도에 와서 법왕은 간신히 35에이커 되는 습지의 가장자리에 고지를 선정하고 다가올 미래에 그 큰 습지를 호수로 만들 준비를 하였다. 동시에 나는 그를 위하여 그 땅 근처에 있는 집을 한 채 사들여 그들이 묵을 수 있는 임시장소로 삼았다.
이 장소는 나중에 와서 인준스님이 잘 개수하여 정사(精舍)로 쓰게 되었다. 아무튼 1976년 12월에는 법왕과 그를 시위하는 몇몇 링포체 및 수행원들도 이미 그 집에 거주하고 있었다. 거실도 상당히 화려하게 장식되었고 집 외부에도 티벳의 기치들이 곳곳에 펄럭이며 밀종 도량의 품격과 분위기를 유감없이 잘 나타내주고 있었다. 내가 법왕을 알현하려고 그 집에 당도하자 그들은 뿔나팔을 불어대며 융숭히 환영하였다.
그러나 심상치 않은 사건이 계속 발생하여 연이 구족하지 않았음을 은연중 내비치고 있었다. 내가 막 응접실에 도착하여 법왕을 향하여 절을 할 때 벽에 걸려 있던 그의 사진이 갑자기 떨어져버리지 않는가. 수종하는 이들은 크게 낯빛이 변하였다. 나중에 우리가 서명을 할 때 측근의 링포체는 법왕이 항상 쓰는 만년필을 그에게 올렸다. 법왕이 서명을 시작하자 이 무슨 변괴인가. 만년필 안에 잉크가 없지 않은가. 이래서 또 한바탕 법석을 치며 얼른 다른 만년필을 가져와서야 서명을 마칠 수 있었다.
1977년 5월에 법왕은 그 선정된 장소에서 사흘에 거쳐 정지(淨地) 의식을 치루었다. 마지막 날에는 약 300여명의 내빈이 참석하였는데, 그중에는 그곳 카운티(County)의 수장도 참석하였다. 내 기억에는 진건민(陳健民) 거사는 오로지 이 일을 위하여 샌프란시스코에서 달려왔었다.
의식은 큰 텐트내에서 거행되었는데, 식순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도중에 갑자가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빗소리에 더하여 바람소리, 방울소리, 북소리, 뿔나팔소리가 한꺼번에 뒤범벅이 되어버렸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나중 몇 년간 장엄사에서 거행된 몇차례의 대법회에서는 언제고 날씨가 쾌청했던 걸로 알고 있다. 이렇게 비교해보면 실로 어떤 불가사의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믿건대 법왕께서는 그의 법덕과 경험으로 이 땅에 대한 연이 구족하지 못한 사실을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알고 계셨을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정지의식이 끝난 후 그들은 즉각 다른 지역을 열심히 찾기 시작하였다.
과연 몇 개월 후 법왕께서는 뉴욕의 우드스탁(Woodstock)에서 방이 사오십개 달린 호텔건물을 찾았다고 나에게 말씀하셨다. 그 호텔 주인이 나이가 많아 아주 좋은 가격으로 팔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호텔은 산언덕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지세가 아주 괜찮았다. 게다가 대지가 커서 나중에 확장해서 쓸 수도 있게 되어 있었다.
법왕은 내게 그 호텔과 주변의 대지를 구입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겠는지 물었다. 그는 이곳의 삼백 몇 에이커 나가는 땅은 포기하기를 원하였다. 그곳에는 이미 기존의 집이 있었기에 즉각 도량을 열어 신도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이 완비되어 있었다. 나는 그의 견해에 완전히 동의하며 그의 뜻에 따르기로 하였다.
<계속>
2001년 7월 13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