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7.04. 토 복되신 동정마리아 신심 미사
♣ 최상훈 티모테오 주임신부님 강론 말씀 ♣
오늘은 매월 첫 토요일, 아시다시피 첫 토요일 성모신심미사 입니다.
이 미사 때는 성모님의 전구를 청하면서 여러분이 지닌 고민, 애환, 여러분의 필요를 성모님을 통해서 전구해 주시기를 바라면서 이 미사에 오십니다.
그래서 오늘 미사 예물도 꽤 많지 않습니까? 그렇죠? 네 우리는 염원을 담아서
오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계시는 여러분의 바램, 여러분의 원의가 성모님을 통해서 주님께 가납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는 그 모든 바램들이 꼭 이루어지기를 저도 미사를 통해서 기원하고 축원드립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조금 의아하다고 생각이 안 드십니까?
족보에 대해서 나오는데 아니 최씨 집안 개인 족보도 모르는데 예수님의 족보를 이렇게 길게 하는 걸 보면 좀 의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조금 묵상해 봤습니다.
왜 마태오 복음 사가는 예수님의 족보를 이렇게 자세하게 열거했을까? 도대체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첫 번째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참 하느님이고 참 사람임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하느님이 잠시 인간의 모습을 본 따서 오신 것이 아니라 진짜 정확하게 인간, 우리의 인간 구조와 똑같은 인간으로 오셨다는 것을 증명하고 증거하기 위해서 마태오 복음 사가는 예수님의 족보를 이렇게 크게 열거한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육체적 인간 조건을 가진 예수님, 우리와 똑같은 살을 가진 예수님, 우리와 똑같이 고민하시고 고뇌하시는 인간 예수를 강조하기 위해서 마태오 복음 사가는 예수님의 족보를 이렇게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초창기 교회부터 놀라운 것은 이 문제에 대해서 이단이 생겨났어요.
대표적으로 아리우스파라는 이단은 가면설을 주장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늘에 계신데 하늘이 잠시 가면을 쓰고 우리에게 오신것이다 라는 이 설을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는 바로 단죄했죠. 바로 단죄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교회가 주장하는 참된 진리는 이겁니다.
하느님은 참 하느님이시고 동시에 참된 인간이시다.
이 두 가지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 라는 것을 교회는 줄기차게 2천 년이 넘는 역사 속에서 한 번도 어김없이 선포하고 있다.
아마 그것은 오늘 마태오 복음 사가를 통해서 예수님의 족보를 보면 분명히 그것을 알라는 뜻으로 이렇게 적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족보.
두 번째, 생각을 했습니다. 왜 이렇게 족보를 열거 했을까요?
족보. 인간은 수많은 관계, 네트워크 속에서 완성된다는 뜻일 겁니다.
‘나’라는 존재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인간의 인간이라는 존재, 수많은 관계 네트워크 속에서 완성되고 성장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시지만 예수님께서는 성가정에 태어나셨고 그 가정 관계 속에서 그리고 조상들로부터 내려오는 그 혈연 아니면 그 정신, 하느님의 뜻 이것을 이어받았다는 것, 수많은 관계 그 속에서 인간이 성장하고 완성해 간다는 것.
아마도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장황하게 예수님의 족보를 열거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강조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홀로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제가 강조드리지만 한자는 상형 문자라고 합니다. 상형 문자는 뭡니까?
상황과 모양을 따서 만든 문자입니다.
우리 한글은 뭡니까? 소리 문자입니다. 우리 한글은 그러니까 그 말 자체에는 뜻이 없어요.
그런데 중국의 한자는 그 모양을 따라서 만든 겁니다.
예를 들면 가장 정확한 것은 ‘인간’ 할 때 인(人)은 ‘사람 인’ 자입니다.
‘사람 인’ 자는 어떻게 돼 있죠? 우리 어린이 중에서 ‘사람 인’자 어떻게 쓰죠?
‘사람 인’자는 이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사람 인’ 자 그러니까 인간의 존재 양식은 함께 더불어 혼자는 있을 수 없는 존재예요.
그게 인간이라는 거예요. 인간은 이렇게 고립된 존재로 존재할 수 없는 게 인간입니다.
고립된 혼자만의 존재로는 나는 다 필요 없어 하는 것처럼 ‘독야청청’ 내 혼자 살거야 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오늘로서 그 생각을 고쳐먹어야 합니다.
인간은 절대로 고립된 섬이 아닌 연결고리를 달고 관계적 인간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수용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제가 늘 강조드리지만 관계심리학의 최고봉인 미국의 그 유명한 하버드대학의 가드너 박사는 인간의 지능을 8가지로 구분했습니다.
제일 먼저 뭐예요? IQ, 이해 지능, 물리 수학 지능, 언어 지능, 신체 운동 지능, 공간 지능 ... 마지막으론 가드너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지능은 네트워크 지능이라고. Network Quotient입니다.
네트웍 쿼션트, 관계적 존재예요.
인간이 관계를 하지 못하면 인간으로서 존재의 의미가 없는 거예요.
아니, 나는 인간이 아니라는 거예요. 네트웍 지수 ‘공존 지수’라고 합니다.
‘공감 지수’ 고무적인 일이에요.
우리나라의 대기업들이 직원을 뽑을 때 IQ, 옛날에는 불과 10년 20년 전만 하더라도 무조건 공부잘하면 삼성, LG에서 뽑았어요.
공부만 잘하면 됐어요. 그 시험만 패스하면 되는 거예요.
그러나 지금은 절대로 그렇게해서 합격할 수 없어요.
그 아이가 사는 NQ, 사회적 관계성을 분명히 보는 거예요.
여러 가지 합격 후 한 인간을 보는 데 가장 중요한 거 어떻게 공감하고 공존하느냐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사이코패스는 그 회사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겁니다. 사이코패스.
제가 극단적으로 표현했지만 관계를 못하는 사람, 네트워크 쿼션트가 없는 사람은 회사에 들어갈 수가 없는 거예요.
우리는 어떤 인간이냐가 중요합니다. 여러분, 여러분 스스로에게 물어 보세요.
내 자녀는 다양성이 있는지 내 자녀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그 네트웍 지수가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셔야 돼요.
아니다면은 고민하셔야 돼요.
고립된 딸이야 고립된 성도의 딸이야. 그것은 위험신호예요.
이 문제는 부모의 문제라고 생각이 들어요. 부모가 그 공감 능력과 공존 지수를 함의하고 있다면 그 자녀들은 자연스럽게 그것을 터득하고 배우게 되죠.
오늘은 강의입니다. 강의 오늘은 토요일이라 제가 마음의 여유가 있고 그래서 한 말씀 더 드립니다.
요즘 스포츠계가 떠들썩합니다. 그것은 홍명보 때문입니다. 축구도 축구지만 더 큰 일이 있습니다.
상아탑, 학교 체육에서 배재고 사건이 터졌습니다.
슬픈 우리 교육의 현실은 상대방이 가장 아프고, 가장 슬프고 그 슬픔을 이용해서 희화와 조롱을 합니다. 더욱이 이것은 가장 신선한 교육 현장입니다. 거기서 벌어진 일이에요.
교육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 입이다.
저는 혼자 생각했을 때 문제는 그 학생들 보다도 지도자 ,어른들의 문제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우리 어른들이 함께하고 더불어 살고 공감과 공존의 문제를 가르치지 않은 거예요.
저는 잊지 못하는 사건이 있었다. 세월호 사건이 터졌고요.
한번 여러분 상상해 보세요. 그 자기 자식 내 목숨보다 귀한 그 자식 수백 명이 물에 빠져 수장됐어요.
그 부모는 애들의 진상을 규명하고 모여서 단식을 단행했어요. 그 단식하는 부모 앞에 일부의 청년들이 가서 피자를 시키고 통닭을 시켜서 그것을 뜯어먹는 퍼포먼스를 했어요.
자식의 죽음 그 어머니의 슬픔, 그 가족의 슬픔에 대한 손톱 만큼의 공감과 느낌이 없는거죠.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가 어떤 자녀로 자라나기를 바라십니까?
단 한 방에 주식 부자가 되는 그런 아들요? 단 한 방에 재벌이 되는 꿈을 꾸세요?
내 자녀가 악착같이 해서 이것도 문제예요. 명문대에 가려고
여러분 우리나라 통계를 얘기할게요.
우리나라 최고 학벌은 서울대 법대 서울대 의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겨요. 왜냐하면 강남에 그 족집게 과외, 그 학원, 그 선생 거기를 통과하면 거의 붙어요.
이게 무슨말이냐? 한 과목당 오백만원, 천만원 이래요. 한 과목당 천마원.
우리 애가 못나서 서울대 법대에 못 가는 게 아니라 그 재력이 없는 거예요.
놀라지 마세요.
서울대 법대 서울대 의대 합격률을 분석해 보니까 강남의 특목고가 46%, 이건 한국 사회의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우리 사회는 극단적인 사회가 되는 거예요.
제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강남에 어떤 아이가 있는데 학교 선생님이 TV로 북한 어린이들이 굶는 모습을 보여줬대요.
그 제비 같은 애들이 땅에 떨어진 것 줏어먹고 정말 배가 고파서 그러는데 강남 학교에서 이렇게 얘기했대요.
어린이들이 이상해요. 밥이 없으면 햄버거 먹으면 되지 쟤네들 왜 저래요? 라고 말하더라고요.
햄버거 먹으면 되지 왜 저럽니까? 라고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 아이들이 법관이 되고 검사가 돼요.
얼마 전에 사건을 기억하시죠?
시내버스 기사가 손님들이 내는 그 통에서 120원을 꺼내서 커피를 빼먹었어요.
징역 1년 2개월을 때렸어요.
이권을 챙겨 50억을 먹은 사람은 무죄입니다.
50억을 받아먹은 사람은 집행유예에 처해졌어요. 이런 판결이 가능한 거예요.
우리 사회가 공감 부재예요. 시내버스 기사가 120원을 가져다가
커피를 빼 먹었다고 횡령으로 징역 1년 2개월을 때렸어요.
저는 결론으로 그런 느낌을 받아요. 부모도 부모지만 결론은 이겁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는 것, 느껴보는 것.
그런 체험에 있는 사람은 절대 그렇게 할 수 없는 거죠.
예수님의 사랑을 한 번이라도 체험한 사람은 그런 일들을 저지를 수가 없는 거죠.
제가 잘 아는 친구인데 그 신부가 쓴 글을 본 적이 있어요.
한 자매가 있는데 어릴 때 자기를 낳자마자 엄마도 돌아가셨고요.
아버지도 일찍 돌아가셨어요. 할머니 손에서 컸는데 그때부터 어느 날 알았죠.
그런데 할머니 때문에 어릴 때 세례를 받은 거예요. 그리고 한 번도 성당에 나가지 않았죠.
그 자매는 중3부터 담배를 피웠어요. 그리고 폭력 서클에 가담했습니다.
그게 20대 30대 였고 그야말로 상상도 못할 온몸에 문신을 한 그렇게 험하게 큰 자매님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옆집의 반장이 반모임 하는데 함께 하자고 초대를 하는 거예요.
뭔지도 모르고 반모임에 갔대요. 그런데 그날 복음이 5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 였대요.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일으키신 예수님께서는 자기 말을 들으려고 그 모인 군중을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라는 대목에서 놀라운 체험을 해요.
누군가가 자기 머리를 쓰다듬는 거예요. 누구인지, 누군가가 자기 머리를 쓰다듬는 거예요.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이 대목에서 자기라고 생각했어요. 그 가엾은 사람이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때 가엾은 마음이 들어요. 그런데 누군가가 진짜 자기 머리를 쓰다듬는 체험을 한 거예요.
그리고 그 자매는 곧바로 울음이 터졌대요. 그런데 놀라운 건 그 울음이 그치질 않는 거예요.
집에 돌아와서 그 자매의 말에 의하면 일주일 내내 울었다고 베개가 흥건할 정도로 울었대요.
예수님을 만나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다 거짓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만나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면 다 거짓이에요.
오늘 제가 너무 길게 말씀을 드렸는데 꼭 드리고 싶은 말은 오늘 예수님의 족보를 통해서 그런 생각이 들어요. 우리는 내 혼자가 아니고 고립된 섬이 아니라 관계와 공존과 공감을 통해서 성장할 거고요. 더욱이 예수님의 사랑을 만나게 될 겁니다.
그렇게 살아가야 될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배재고 학생들을 처벌하자고 저는 주장하지 않겠습니다.
그들도 피해자예요. 풀어줘야죠. 풀어줘야죠.
그러나 어른들은 철저히 반성해야 되겠죠.
교육 현장에 그렇게 나오잖아요.
그 잘못은 어른들 내가 이것까지 말 안할려고 했는데 그 학교가 무슨 학교인지 아세요?
목사님들이 운영하는 학교에요. 가장 인성 교육을 시켜야 할 학교입니다.
부끄럽고 부끄러워요.
아멘.
** 주임신부님의 강론 말씀과 조금 다르게 표현되었을 수 있습니다. 양지하시고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