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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고도 전주를 품다
무덥고 지루하든 여름의 견디기 힘든 날들도 계절의 순리 앞에선 어쩔 수 없나 보다
가을의 초입인 2014년 9월 19일 약 40여명의 수원 문화원 회원들이 문화 역사 탐방
일정으로 전주를 선택하여 향토 사학자이신 염상균 교수님의 인술 하에 08:00
수원을 출발하여 전주로 향했다
전주는 신라 경덕왕 16년(757년)부터 천년 고도로써 호남지방의 중심지이며
판소리의 본고장이며 조선 왕조의 발상지이자 전주 한지의 발원지이다
따라서 전주는 옛부터 한지의 발달로 많은 묵객들의 출현과 함께 그에 어울리는
판소리 문화의 발달이 전주를 문화 역사의 도시로 만들어 졌다고 생각된다
설레임과 함께 11;00경 전주에 도착하여 첫번째 답사가 전주 객사이다
객사는 객관이라고 하며 고려 초기부터 전국 각지에 지어 졌으며 왕명을 받아 공무를
수행하며 전국을 다니는 벼슬아치들의 임시 숙소로 사용되는 집들을 말하며
여기서 간단한 정무를 보았으며 간혹 사신들의 숙소로도 사용하였다고 한다
염교수의 설명을 경청하는 우리 회원들
전주 객사는 보물 제583호인 진남루인 주관과 양측날개인 동익현괴 서익현으로 되어
있으며 양 익현의 크기는 전면 5칸 측면 3칸이며 조선시대에는 주관에 왕을 상징하는
전페를 모시고 초하루 보름에 대궐을 향하여 예를 올렸다고 한다
특히 전주 객사에는 이 객사를 관리하는 아전들이 거처하는 수직사가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는 것이 특이 하였다
일제시대에 유적를 없애버리는 식민정책에 따라 무수한 객사가 없어 졌으며
남아 있는 것도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여 변형되어 현재 9개 정도의 객사만 남이
있다고 한다
각 지방에 남아 있는 객사를 그 지방 여행시 한번 둘러보면서 옛 선조들의 정감을
느껴 보는 것도 좋은 양식이 될 것 같다
강릉 객사 임영관 강릉 객사문(삼문중 외문 )
전주 객사의 주관 건물 장대석에는 힘찬 기풍의 초서쳬인 풍패지관이라는
편액이 붙어있다
이 편액은 글자 한자가 1M가 넘는 편액으로 우리 나라에서 제일 큰 편액 글자이며
이 편액에 얽힌 이야기도 흥미를 돋구는 것 같았다
풍패는 한고조 유방이 태여난 곳으로 풍패지관이라함은 한나라의 발원지로 추앙받는
고장이라는 뜻이므로 전주 이씨인 이성계가 태여난 전주는 한나라의 발원지인
풍패처럼 전주가 이씨조선의 발원지로 추앙받는 고장이라는 뜻이라 한다
나주 객사 금성관 무창객사 송사지관
또한 이 편액은 을미년 1595년 중국에서 장원 급제한 한림원 학사이며 당대 최고의
문장가인 중국인 주지번이 조선에 정사신으로 왔을때 쓴 편액으로 역사적 의이가
깊은 전주 객사의 이름이다
제주객사 정의현 울산 객사 학성관
주지번과의 인연
1593년 정철 송강을 정사, 표옹 송영구 선생을 부사로 북경에 사신으로 갔을 때
추운 겨울날 사신들의 숙소에 불을 지피는 중국 청년이 중얼 중얼거리며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고 그 읊조리는 소리를 들어 보니 난해한 장자의 남화경을 외우고
있어 표옹이 이 청년을 불러 사연을 물어 본즉 청년은 중국 먼 시골 청년으로 과거
시험을 보러 와서 낙방하하고 여비 마져 떨어져 이렇게 일을 하면서 공부하여
다사 과거 시험을 보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표옹은 과거시험의 전체적인 격식을 알려주고 여비와 책을 모두 청년에게 주고
귀국하였는데 그 청년이 2년후 과거시험에 장원 급제한 주지번이었다고 하며
그가 중국 사신으로 조선에 오게 동기가 부여 되어 조선은 물론 표웅선생도 찾아뵙고
그 고마움을 잊지 않고 망모당이란 편액을 선물할 정도로 항상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며 사후에 영혼도 편안하시라고 음택도 만들어 드렸다는
옛 이야기가 재미 있었다
통영세병관 여수 진남관
역마이야기
객사 다음으로 조금 적은 규모의 지방 숙소로써는 역이라는 하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역은 말을 교환해 주고 숙식도 제공해 주는 곳으로 역마라고도 했다
동작나루를 건너서 첫번째 만나는 역은 과천역이고 한강나루를 건너서 첫번째 닿는
역은 양재역이었다
이 양재역 근처의 마을이 '역말'로, 한자로는 '역촌(驛村)'이라고 했다.
이 마을에선 말에게 죽을 먹이는 집이 많아서 길손들은 이 곳을 주로 '말죽거리'라고
불렀다.
옛 지도를 보면 '마죽거리(馬竹巨里)' 또는 '마죽거(馬竹巨)'라는 표기가 나오며
지금의 역말, 역곡, 역촌, 역삼 등도 옛날의 역에서 나온 이름으로 남아있는 것 같았다
안성객사 백선관 낙성 객사
다음으로 간이 숙소는 원이었다
지금도 남아있는 원은 조치원 이태원 홍제원 사리원 등등 아직까지 그 이름이 남아 있다
원은 제일 격이 낮은 숙소로써 장거리 이동시 하루를 묵게되는 여인숙과 비슷한 것으로
말도 함께 관리해 줌으로써 역원이라고도 했다고 한다
이 역원은 일반 백성들도 길을 가다가 숙소로 이용할수 있었다 하며 이조시대에
들어와서는 주막으로 이름이 바퀴어 서민들의 지방 숙소로 이욜되었다고 한다
어느듯 점심 시간이 되어 효자동으로 이동 식당에 도착 했는데 전주 비빕밥 집이
아니고 닭갈비 집이다
전주 하면 비빕밥으로 전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는데 전주의 비빕밥이 맛이 없어졌다고
전주에서 전주 비빕밥을 찾는 사람이 줄어 든다고 하니 정말 문제이다
유명세에 편승되어 너도 나도 비빕밥 장사를 하고 있으니 제대로 맛을 간직할 수가
없어진 것은 당년한 사실이다
춘천의 닭 갈비가 맛이 없는것 처럼 전주의 비빕밥도 맛이 없다고 하며
전주의 닭갈비가 요즈음 뜨는 매뉴란다
그래서 우리도 전주의 맛집 고수 닭갈비 집을 찾아 간 것 같았다
그냥 닭갈비 일 것이라고 기대도 하지 않고 식탁에 앉았다
푸짐한 양배추에다 여러 양념을 버물린 닭갈비를 불판에 올려 놓고 닭갈비가 익어
갈수록 맛갈스런 냄새와 구수한 향기가 입맛을 돋구고 있었다
한 숱가락 입에 넣고 나니 그 상큼한 맛과 맵지 않은 소스의 어울림이 조화를 이룬
구수한 닭갈비의 진미를 느낄 수 가 있었다
술 안주로도 적당한 볶음이 손색이 없어 보인다
조금 먹고나니 다시금 야채와 소스를 추가하여고 한판을 익힌 후 반을 자른 불판위에
치즈 가루를 덤북 놓아 치즈가 녹을때 까지 기다 렸다가 닭갈비 무침과
치츠가 퓨존의 맛으로 닥아 오는 식감은 그리 나쁘지가 않았고
스파 케티처럼 치즈를 숯가락에 감아 같이 먹는 재미도 신세대에게는 퓨젼의 맛을
느끼게 하는 것 같았다
역시 춘천의 닭갈비 보다 흘씬 맛이 있고 남도의 새로운 맛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는것 같았다
지역의 특성 먹거리는 항상 끝임없이 연구하고 노력해야 하는데도 전주비빕밥은
이렇게 쌓아 올린 명성을 몇십년을 지키지도 못한다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다행히 우리 수원의 대표 먹거리인 수원의 왕갈비는 심재덕시장때부터 심혈을 기울려
세계화의 전략으로 수원 대표 먹거리로 정착되면서 부터 아직까지 수원의 왕갈비
맛을 어느곳에서도 따라 올 수 없는 것은 우리 수원이 정말 자랑 스럽웠다
맛있는 점심을 먹고 다음으로 찾은 곳이 풍남문이다
전주의 4대문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남문격인 풍남문은 고려 공양왕때(1387년)건립
하여 여러번 수모를 격었고 정조때 화재로 소실된 문을 영조 44년(1768년)에 다시
복원하면서 붙여진 이름이 풍남문이다
규모는 1층이 앞면 3칸 옆면 3칸이며 2층이 앞면 3칸 옆면 1칸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보물 308호로 지정된 풍남문은 서울 국보 1호 숭례문에 못지 않는 남도 전주
사람들의 자랑이다
그래서 이름도 풍패지향의 풍자와 남쪽에 있는 문이라 하여 풍남문이라고
할 정도였다
철옹성 같은 전주성도 1894년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 농민군에 함락되어 풍남문 앞에
진을 친 관군이 일주일 동안 치열한 전투에도 전주성을 공략하지 못한 관군은 결국
동학군이 제시한 페정개혁안을 수용하는 조건으로 농민군을 해산시킨 곳으로도 유명하다
풍남문은 전주시의 한 복판에 있으며 여기서부터 전부가 관광지였다
경기전 한옥마을 정동성당 사고등 많은 역사의 유적들이 이곳에 모두 모여 있었다
전동 성당
1791년 진산에서 윤지충이 모친상을 당하여 외종형 권상연과 상의 하여 교회의
가르침대로 패제 분주(제사를 페하고 신주를 불 살라버림) 사건이 일어나자
유고사상에 위배된다 하여 정조는 이들을 풍맘문 앞에서 참수하여 풍남문에
효시하도록 하고 9일만에 시신을 거두도록 허락 하였다
12월 겨울 철인데도 흐르는 피가 응고되지 않아 순교자의 피로 많은 기적이 일어났다고
하며 이게 바로 우리나라 교회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 였다
순교자의 자리에 성당을 세우는 천주교의 습관대로 윤지충과 권상현이 순교한
풍남문앞에 순교한지 100년 만에 본당의 터전을 마련하고 전교를 시작하였고
남문 성곽에서 순교장면을 지켜보든 그 성곽의 돌을 추춧돌로 사용하여 1908년
성전 건축을 시작하여 1914년 외관공사를 마치고 이후에도 공사를 계속하여
23년만인 1931년에 정동성당의 축성식을 가지게 된것이다
이 성당이 바로 최초의 순교터에 새워진 성당으로 그의의가 크다 할 수 있다
건축양식은 르네상스식 건축을 바탕으로 로마네스크양식을 가미한 건물로써
종탑부에 12개의 창을 만들고 8각형의 창을 낸 좌우의 계단 돔은 그 아름다움이
이태리의 르네상스 건축물로 착각할 정도로 아름답고 서구적이었다
특히 창에 새겨진 스텐드그라스는 야간에는 외부에서도 그 화려함을 감상할 수 있다고 한다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바우로) 과 권상현(야고보)의 동상
성당을 나와 전주한옥마을 쪽으로 가다보면 경기전이 나온다
1410년(태종 10) 어용전(御容殿)이라는 이름으로 완산,계림,평양 등 3곳에 건물을
지어 태조의 영정을 봉안했고 세종24년(1442년)에는 그 소재지마다 이름을 달리하여
전주는 경기전, 경주는 집경전, 평양은 영종전이라 했다.
경기전은 전주에 있던 어용전을 가리키는데 선조 31년(1598) 정유재란 때 불에 타버린 것을
광해군 6년(1614)에 고쳐 지었고 지금 이곳에 모신 태조의 영정(초상화)은 세종 24년
(1442)에 그린 것을 고종 9년(1872)에 고쳐 그린 것이 란다
경기전 정문에는 광해6년 1614년에 세운 하마비가 엄숙하게 자리잡고 있는데
태조의 영정이 모셔진 이곳 부터는
누구라도 여기서부터는 말에서 내려야 하며 (지차개하마)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잡인무득입)의 하마비가 역사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었다
정문을 통과하면 홍살문이 있고 삼문을 지나면 경기전 정전이 나오는데
이곳에 태조의 어진을 보관하고 있으며 신도와 어도를 따라서 어진에 도착한다
마침 수리중이라 내부는 볼수 없었어나 여기에 보관된 태조의 어진은 필사본이고
원본은 박물관에 보관하였다고 한다
양옆에 가지런히 놓인 철 구조물은 드므라하고 물을 담아 놓는 그릇이며 화재시
소화를 위하여 준비하여 만든 것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때 다른곳의 어전은 모두 소실되었으며 이곳도 경기전은 소실되었으나
어전은 사초와 함께 묘향산 보현사(普賢寺)에 옮기어 보존할 수 있었다.
어진을 옮길때에는 어가에 어진을 모셔 왕의 행차와 같이 격식을 갇추어
이동하였다고 한다
전주사고
경기전 정전을 나오면 바로 동쪽에 전주사고가 있는데
고려 시대부터 춘추관 예문관을 두어 사관이 날마다 시정을 사실대로 기록하였으며
비록 왕이라도 그 사초를 볼 수 없게 만들어 보관토록 하였다
조선 왕조 실록은 춘추관 충주 전주 성주의 4곳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임진왜란으로 춘추관과 충주 성주 사고는 전쟁 중 불에 타버렸는데
전라감사 이광은 실록을 내장산으로 옮기기로 하고 전주의 선비인 안의와
손홍록에게 부탁하여 사재를 털어 전주 사고의 실록과 기타 책들 \64궤짝을 말에
싣고 정읍 내장산 은봉암(隱峯庵)으로 옮기고 어진은 조금 더 깊은 곳에 있는
내장산 용굴암으로 옮겼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후 하나 남은 전주 사고의 실록을 5부로 만들어 서울의 춘추관과
강화도 마니산 경상도 봉화의 태백산 평안도 영변의 묘향산 강원도 평창의
오대산 사고에 보관하다가 현재는 규장각과 기록원에 보관중이라고 한다
임진 왜란당시 전주사고의 실록마져 소실되었다면 조선왕도의 5백년 역사가
사라졌을지 모르기에 안의,손흥목 선비의 노력에 감사할 따름이다
어전 박물관
전주사고 뒷편에 어전 박물관을 짓고 태조 어진을 포함해 6개의 어전을 전시 하고
어진을 옮길때 사용하든 유물들을 함께 전시 함으로 써 어진을 얼마나 중요하게
다루 었는가를 보여 주고 있었다
제1전시실에는 1872년 (고종9년)에 모사한 태조 어진이 모셔져 있고 왕실의 위엄을
더하기 위하여 어진 뒷편에 일월오봉도의 평풍이 놓여져 있었다
제2전시실에는 역대 왕의 어진이 전시되어 있는데
세종 어진은 전해오는 원본이 없어 2001년 김기창 화백이 고증을 통하여
추정하여 그린 영정을 표준화 하여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영조 어진은 1744년 영조 51세때 모사한 어진으로 70도 정도의 방향에서 본
영정은 그 성격이 가장 잘 나타난다고 한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7일만에
죽게 한 비정한 아버지의 상처럼 차겁고 날카로운 성격이 영정으로 나타나 있었다
정조 어진도 전해지지 않고 있어 1989년 이길범 화백이 추정하여 그린 영정을
공식 어진으로 삼고 있다고 한다
사도세자의 아들로 아버지와 어머님께 효도는 물론 새로운 문물을 새우고져
규장각을 만들고 탕평책을 쓰는등 신세대의 마인드를 가진 성군이었기에
어진에서도 그런 풍미가 만연하다
사도세자의 증손자로써 강화에서 야인생활을하다가 왕위에 오른 군주로써 강화도령
이라는 별명을 가진 왕으로써 순수하고 어진 성격때문에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바로잡지 못하고 일찍 병사한 군주로써 1861년 만든 율복 차림의 특이한 어진으로
1954년 부산보관당시 화재로 인하여 어진 오른쪽 1/3이 소실되었는데 소실된 부분을
추사하여 그린 어진이다
불에 탄 어진 진본은 현재 국립박물관에 보관중이란다
고종의 어진은 2001년 권오창화백이 사진을 보고 모사한 어진으로 다른 어진과
달리 황제의 복장인 황룡포를 입고 있는 모습이다
고종은 1897년 국호를 대한 제국이라하고 황제의 나라라고 선포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으로 1907년 페위되고 1919년 승하하자 일본인의 독살설이
유포되면서 3.1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한다
황제의 장복차림으로 한 철종의 어진도 2001년 권오창화백이 사진을 모사한
어진이다 1907년 고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나 1910년 일제에 의하여
조선왕조가 몰락하면서 이왕이라는 수모를 격어야 했든 이씨조선의 마지막
임금이었다
이럴게 6분의 어진을 보관하고 있으며 자료실에는 어진을 옮길때 역사적인
행열을 모사한 전시실이 있었다
신연은 어진을 옮길때나 봉안할때 어진을 보관하여 운반하든 가마로써 10명의 마부가
메고 다녔다고 하며 1872년 나무로 만든 신연은 지붕이 호리병 모양의 정자를 하고
있으며 가마채의 끝 분에 용머리 모양을 달았다고 한다
가교는 조선 왕조 고관대작들이 이용하든 가마 형태로 어진 봉안 책임자가
행렬과 함께 타고 가든 가마이다 1872년 나무로 만들어 사용한 것이란다
향정은 향로와 향합을 싣고 가는 조그마한 가마로 향정자라고도 한다.
1872년 태조 어진을 옮길 때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4면이 개방되어 있으며 지붕 아래에는 공포를 장식하였고 재질은 나무로 만들었다
이 처럼 어진의 이동은 임금님의 행차와 같이 격식을 갖추어 이동하였으며
돌아 가신 영정이기 대문에 향을 피우는 향정이 필수로 따라가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을 나오니 바로 전주의 한옥마을이 펼쳐진다
한옥 마을 전경을 구경하려면 오목대에서 내려다 보는 것이 제일 이해가 쉽다고 하여
우린 동산의 산길을 따라 올라가니 오른쪽에 한옥의 지붕들이 즐비하게 늘어져있는
한옥촌이 보인다
오목대
고려 말 삼도 순찰사였던 이성계는 경상도 서북지방에서 왜구를 토벌하고
귀경하는 도중 자기의 고향 전주에 둘러 승전을 자축하는 연회를 열렸던 곳이다.
이때 부터 야망을 가진 이성계는 고향에서 부터 지지기반을 만들기 위하여 금의
한양하는 길에도 이곳을 둘러 많은 향연을 베풀며 화합을 다짐했다고 한다
우리들도 조금은 피로하여 오목관 바닥에 앉아 그때의 향연의 의미를 생각하며
피로를 잠시 풀었다
1907년 일제는 도로 개설 명목으로 서문을 철거하고 1911년에는 남문을 제외한 동문과
모든 성곽을 허물어 버렸다 서문밖에 살든 일본인들이 서문 근처에 일본인 촌을 만들자
자리를 빼앗긴 민초들은 1930년대 부터 동문으로 모여 한옥을 지어 거주하게 된 것이
한옥마을의 기초가 된다고 한다
현재 700여채 한옥이 있지만 실제 거주하는 사람은 10% 정도이고 남어지는 샾이나
민박집으로 활용하고 있어 슬로우 시티의 면목이 없어지는 것 같아 아쉬웠다
한옥촌 중에도 전주 제지의 맥을 이어가는 한지 제작소를 칮이가 지금도 장인들이
한지의 우수한 기술을 구술땀으로 지키고 있는 모습이 정말 아름답고 자랑스러웠다
사후 육체나 영혼을 정성스럽게 모시는 우리의 관념에 따라 최고의 예우로 생각하는
우리 한지로 만든 수의가 60-100만원 정도라니 그렇게 바싸지는 않은 것 같았다
천년고도 전주는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우리 조상들의 숨소리를 귀기우려야 하는데
우린 시간이 없어 팥빙수 한 그릇으로 피로를 풀고 오늘의 역사 담방을 마쳐야 했다
2014년 9월 19일 전주 문화 역사 탐방을 마치고
권 준 부